[창작] 수라기(獸羅記) 46번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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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꾸벅~
(8)
형산을 이루고 있는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인 선라봉의 초입,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때는 여름에 접어든지라 한낮에 내려쬐는 빛살의 열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다 모인 군중들의 눈에 담겨 있는 열망이 훨씬 컸다. 사람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모여서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한곳을 직시하며 기대가 서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군중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거대한 원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탁자의 주변에는 일견해도 십여개를 웃도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위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각종 차와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였고 수저와 호화스러운 접시가 의자 앞마다 정돈되어 곧 있을 연회를 예비하는 듯 보였다..
점심무렵의 시간을 약간 지나쳤지만 군호들의 모습에서는 허기나 기타 식욕등이 보이질 않았고 번뜩이는 시선마다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십의 장정과 여인들이 달라 붙어 자리를 꾸미고 요리를 하면서 몇시진 후에 있을 연회 준비에 전력을 기울여서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일반 서민이라면 시선이 거대한 대탁위의 음식, 요리나 호화스러운 집기에도 머물음직 하지만 이 곳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이 화려하게 차려진 탁자위가 아닌 그 주변 의자였다. 각 의자마다 한 사람씩 단정히 앉아 있었고 군웅들은 선망과 질시, 그리고 욕망등이 뒤엉킨 눈빛으로 그 사람들을 쳐다 보고 있었다
“강호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시는 무림의 군웅 앞에 소생 남궁비, 다섯번째 사화지연이 형산에서 열림을 선언합니다. 사마외도가 창궐하는 어지러운 무림에 불철주야 중원 각지에서 영웅들의 심혈을 기울인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연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서는 초라한 음식이나마 즐기시고 서로간에 친목을 다지며 무림에 악의 무리들이 발붙일 수 없게 심혈을 기울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와아..!!”
“와!!..”
“우와아..”
“소생이 먼저 잔을 청하겠습니다.”
“건배!”
“건배!”
“건배….”
상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포권의 예를 주위에 하면서 사화지연의 개최를 알렸다. 그 사람,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미공자라 할까? 미남의 대명사격인 송옥이나 반안도 저처럼 잘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정히 묶은 짙은 검은 머리를 영웅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원래 하얀 색으로 보이나 무예수련으로 인하여 태양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색의 남자. 계란형의 얼굴에 짙은 검미가 빛을 발하는 양쪽 눈위에 곧게 뻗어 있고 오똑하게 솟아 있는 콧날과 굳게 다물어진 두툼한 입술이 장부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목선을 타고 내려오다 볼록 튀어 나온 목젖이 보이고 그리 벌어지지 않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어깨, 하얀 백삼으로 가려진 체격은 볼 수 없었다. 또한 손에는 희디힌 장갑을 끼고 있어 크고 두툼한 손을 갖고 있었고 남궁비의 얼굴외에 다른 곳의 살갖은 외부에 나타나 있지 않았다. 보통 사내보다 조금 큰 키, 거의 육척에 다다를 만큼의 신장을 한 칠룡 중의 으뜸이요 무림 후지기수 중의 선두라 평함을 받는 제왕지기의 소유자 만검창룡 남궁비, 그였다.
군중들은 남궁비가 일어서서 사화지연을 선포하자 함성으로 그 선언에 답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화지연은 젊은 후지기수를 만나고 촉망받는 무림의 기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무림에 몸을 담은 젊은 남녀들은 하나같이 이 사화지연에 참가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칠룡의 출신 세력 중 칠룡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사화지연의 고고함을 강조하면서 참가 자격을 제한하여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무림의 내노라하는 명문의 자제나 이름 꽤나 날리는 후지기수 들만이 사화지연에 참가할 수 있었기에 이 사화지연에 오지 못하는 이들은 이 사화지연을 갈망과 질투어린 눈길로 보곤 했다.
사람들은 남궁비의 짧고도 명확한 인삿말이 끝나자 주변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말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을 줄곧 중앙의 탁자에 던져 사화지연의 흐름을 파악하려 하였다.
남궁비가 자리에 앉자 그 탁자에 앉아 있는 이 들도 서로서로 잔을 들고는 건배를 하면서 음식을 들었다. 남궁비가 제일 윗쪽에 그 양쪽에는 유가형과 악서령이, 또 그 옆에는 제갈수란과 석영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남궁공자.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선라현에 그 훤앙한 기태가 보이지 않아 소녀 걱정했습니다.”
“제갈 소저의 염려 덕분에 소생은 별 문제 없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현 중원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 됩니다. 민심이 흉흉하고 각지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국경 주변의 외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지요. 어찌 될려는지..”
“그렇지요. 남경의 곽자흥을 비롯하여 여러 반군 세력이 중원의 곳곳에서 원의 실정에 반기를 들고 있지요.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찌될련지요..더군다나 낙양은..”
“자자! 그런 말씀은 그만 접고 오늘은 즐거운 날이지 않습니까? 사화지연 입니다. 기분 좋게 먹고 마십시다.”
제갈수란과 남궁비의 대화가 점점 무게가 있는 쪽으로 기울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주위의 한 건장한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잔을 들고 건배를 청하였다. 그러자 제갈수란과 남궁비도 같이 잔을 들고는 건배를 하였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가만히 앉아 있는 세 사람, 유가형과 악서령, 석영은 다소 안색이 변한채 말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홀짝이고 있었다. 유가형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데 이는 아랫도리에서 전해오는 통증이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고통이 더 심하였다. 정혼자 옆에 앉아 뭇 사람들과 연회를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순결을 잃어 이제 깨끗지 못한 몸이기에 남궁비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인채 맛도 느낄 수 없는 찻물만 입속에 담을 뿐이었다. 이에 반해 석영과 악서령은 비처와 항문에서 전해져 오는 심한 고통에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는 악서령이 더욱 심했다. 작은 손가락하나 들어가기에도 버거운 곳에 거대한 아환의 양물을 가득 담고 허리를 흔들어 대어 그 곳이 온통 찢어 발겨져 걸음을 옮기거나 자리에 앉아 움직일때면 아예 극심한 아픔에 아래가 감각이 없을 정도 였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창백하게 질린 채 의자에 앉아 있지만 악서령의 속마음은 빨리 이 자리가 파하고 들어가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객잔에 들어가서도 쉴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석영은 비처의 작은 열상이 그리 아픈 정도는 아니었고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안색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 역시 뜻밖의 위치에서 퍼져 가는 아픔이 있었다. 허나 이 아픔이 아환의 제령심안으로 인하여 쾌락으로 변질되어 있는 가운데 그 기이한 감정을 참느라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스리지만 절대적인 존재로 인하여 느껴지는 열락은 그녀의 매력적인 얼굴을 붉은 기운이 감돌게 만들어 더더욱 고혹적인 석영의 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고 주변의 젊은 후지기수들은 그런 그녀의 매력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까의 그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남궁비의 무언의 호응을 얻은 듯 자리에 일어선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화지연을 축복하시려 참석해주신 여러 군호제위께 제가 감히 잔을 올립니다. 모든 분들께서는 잔을 들어 제 오회의 사화지연을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와!”
“사화지연!! 영원하라!”
“우아아아!!”
그러자 군웅들은 저마다 잔을 들고 건장한 사내의 선창에 맞추어 술을 들이키고 호기있게 함성을 질러대었다.
“소생 황보두균은 오늘 이렇게 많은 여러분들 앞에서 건배를 청함을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리부리한 호목을 지닌 황보두균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청년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고는 박수를 쳤다. 육척을 훨씬 넘어 남궁비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진 황보두균은 둥그런 원탁에 남궁비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라 곧장 정면에 보이는 남궁비를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남궁비에게 잔을 권하였다.
“헛헛헛!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남궁형은 신태가 더욱 헌앙해진듯 하오이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소제가 보기엔 황보형의 천왕권이 훨씬 무서워진듯 합니다만..얼마 전 잔혈사마를 훈계를 하셨다지요?”
“핫핫! 그 부끄러운 일이 남궁형의 귓전을 더럽히지는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어찌 남궁형의 그 고절한 제왕검에 빗댈수 있겠습니까?”
크게 대소를 터뜨리며 서로간에 칭찬을 해대고 있는 두사람, 그러나 그런 입의 놀림과는 달리 둘의 눈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남궁비는 무심하지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눈으로 입만 웃고 있었고 황보두균 역시 눈은 차가운 안광이 번뜩이지만 겉으로는 영웅의 기개를 떨치려는 듯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오가(五家) 세싸움의 한 단면일까? 팽팽한 긴장감이 커다란 원탁을 맴돌고 있었다.
“남궁형, 소제의 잔을 한잔 받으시오.”
잠자코 앉아서 간단히 요기를 하던 한 젊은 청라장삼의 청년이 남궁비에게 잔을 건네었다. 아마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지 밝은 음성으로 둘 사이를 갈랐다.
“허! 이거 소제가 먼저 수형께 드려야 하는데..감사하오이다. 그동안 곤륜제일룡께서 통 세간에 그 위용을 보이지 않아 소제는 수형이 고심막측한 절예를 터득하시느라 폐관하신줄 알았습니다.”
곤륜제일룡 수가위, 현 칠룡 중 소림의 우성과 화산의 목영근과 더불어 구파 출신의 후지기수. 곤륜 특유의 절묘하고 뛰어난 검예를 일절로 꼽는 곤륜의 속가제자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다소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체격을 지녔다. 속가라 할지라도 곤륜의 미래라 칭하며 곤륜의 본산에서 수련을 닦는지라 평소에는 거의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하였다.
“무슨 말씀을요, 소제는 곤륜에서 잡일만 하느라 바뻐서 미처 밖에 나서지 못한 것이지요. 일신의 재주가 미천한데 어찌 영웅들과 어깨를 견주겠습니까?”
“겸양을 말씀을..수형의 청수신검이 중원에 나올때면 사마외도들이 쥐구멍을 찾기 바쁘고 무수한 소저들이 수형을 뵈려고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오늘 이처럼 수형이 강호에 그 준수한 신태를 드러내었으니 무림이 시끄럽겠소이다. 핫핫하!”
“하하..남궁형이야 말로 소제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소이다. 무림사화 중의 난화를 맞이하실 몸이 어찌 그런 말씀을..소제는 남궁형이 부럽소이다.”
“그런가요? 핫핫하..”
둘이 그렇게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 이를 듣고 있는 유가형의 마음은 편치 못하였다. 이미 몸은 아환에게 더럽혀진 상태..어찌 남궁비와의 관계가 화제에 오를 때 심기가 편할 수 있으랴?
칠룡을 비롯한 남자 후지기수들이 왁자지껄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여인들은 그와 달랐다. 사화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여인들, 무림의 후지기수 중 내노라하는 세도를 지녔거나 얼굴이 반반하고 제법 무예를 익힌 여걸들은 남궁비를 비롯한 칠룡의 모습을 슬쩍 슬쩍 훔쳐 보며 얼굴이 붉어지거나 사화를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총 원탁에 앉아 있는 인물은 여덟, 다섯자리 정도가 공석으로 비어있었다. 칠룡 중의 셋과 무림사화 그리고 또다른 한명의 여인, 악서령과 같이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 그 정확한 용모는 볼 수 없으나 백라의를 입은 채 현현한 광채를 빛내며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됨이 보였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들이 사화에만 시선을 집중하다가 그들과 같이 있는 또 한명의 여인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무림의 후지기수 중의 최고라는 저들과 한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그제서야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듯 그 옆에 앉아 있는 수가위가 깜빡 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 이거 소제가 큰 실례를 범했소이다. 이런..이런..소제가 여러분께 소개를 드린다는 것을 미처 잊었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은 천우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분을 뵙게 되다니..이 곳에 모인 영웅께서는 그야말로 행운이라 생각됩니다. 참! 은소저, 소생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여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수가위의 말을 받았다.
“은소저, 이 분은 칠룡 중의 일인인 만검창룡 남궁비, 이 분은 패왕권 황보두균, 이 소저는 난화성녀….”
기이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를 여인에게 먼저 소개하는 것이 관례라 할지라도 상대는 다름아닌 칠룡, 무림의 최고라 칭함받는 사내들이었다. 게다가 사화 역시 무림의 으뜸이라 칭함을 받는 여걸들이 아닌가? 깜빡했다 할지라도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가위가 아님을 이 곳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가위가 이런 소개순서를 가지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군웅들은 수가위의 말에 남자는 포권을, 사화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칠룡과 사화를 앉아 있는 여인에게 먼저 소개를 한 후 마침내 수가위가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소개를 드리는 이 분은 천궁에서 오신 분입니다.”
“은아려라 합니다.”
천궁!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인들의 안색이 일순 획 변하였다.
천궁(天宮)
신비사세의 으뜸이자 무림을 행보하는 이들에게 있어 전설적인 지역이며 세력으로 신선들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 평가받는 곳. 한번 출현할때마다 강호가 경천동지한다고 일컬어지는 절대의 비세.
누가 무어라 한 사람도 없는데 순식간에 군중들을 뒤덮은 것은 거대한 침묵이었다.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경악한 기색으로 수가위가 소개한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이는 비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찬가지였다. 그 중 한명 만이 기이한 안광을 반짝이며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름아닌 아환이었다.
‘천궁? 천궁이라..천궁..전대 태상후가 설하였지..천궁이라..’
검후의 말로 자신이 천궁의 전대 태상후라 했었다. 그리고 그 밖에…
곧 중인들의 안색이 회복되고 차차 정신을 차리면서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나즈막하다가 이내 그 음파가 커지며 동요가 번져나갔다.
“천궁..그 신비의 세력이..?”
“천궁!”
“신비사세의 출현이다!”
“와!…”
그 이름이 가지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한 천궁의 인물이 강호에 출현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풍파도 개중 몇몇은 짐작하고 있었다. 놀란 기색은 칠룡과 사화도 마찬가지, 그 중 수가위를 제외한 남궁비와 황보두균, 그리고 사화 중의 유가형, 악서령과 제갈수란은 눈을 크게 뜨고 천궁의 여인을 쳐다 보았다.
그들에게도 천궁이란 신비세력의 명호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중원의 대표적인 후지기수라 평함을 받는 이들이라 곧 평정을 되찾았지만 내심 끊임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은소저, 소생 황보두균이 다시금 소저께 인사 드립니다. 전설로만 들었던 천궁의 귀인을 이리 뵙게 되어 불초 소생의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채 허둥대며 인사를 하는 황보두균과는 달리 짧게 응대를 하는 은아려라 하는 여인, 도도한 듯 하나 그 도도함이 오히려 은아려의 배경과 조화를 이루어 특이한 매력을 자아내었다.
다른 한쪽에 앉아 있는 제갈수란은 눈을 빛내며 시선을 은아려에게 고정시킨채 가볍게 입술을 물면서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유가형은 천궁이라는 이름에는 놀랐지만 이내 곧 남궁비에게 눈길을 돌려 복잡한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었다.
“고귀하신 분께서 이 연회에 참석해 주심에 소생 남궁비는 깊으 감사를 드립니다. 과연 신화적인 명성만큼 고절한 경지에 도달하신 듯 보입니다.”
“그런가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의미를 가진 말로 대답을 하는 은아려,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짧게 짧게 말을 끊었다. 상대가 칠룡과 사화라는 최고의 무림 후지기수임에도 조금의 거리낌이 없었고 이는 그 대답을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충분히 오만할 수 있는, 넘치도록 도도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다.
칠룡이 인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처음에 목례를 보낸 것 이외에는 별다른 추가 인사를 하지 않은 사화를 잠시 쳐다 보던 은아려는 이내 눈길을 거두고 담담히 남궁비와 황보두균을 훑어 보았다. 남궁비를 보고는 이채로운 안광을 빛내더니 곧 눈을 돌렸다.
주위의 많은 군웅들도 하나 같이 나서서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원탁에 둘러 앉아 있는 거물들의 이름에 압도 당하여 수군거리며 서로간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나서서 은아려에게 인사를 건넨다면 자신도 나설 모양인지 힐끔 힐끔 주위만 신경쓰며 은아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계속 진행하시지요.”
“예. 그러지요.”
남궁비가 응대를 한 후 중인들을 바라보며 진기를 돋구어 말을 한다.
“오늘 사화지연에 귀인이 오셔서 이 자리를 빛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 영웅께서는 더욱 즐겁게 연회를 즐겨주십시오.”
“와!…”
“와..”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퍼지고 일시 중단되었던 술잔이 다시금 돌기 시작하였다. 웅성거림은 더욱 커지고 사람들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의 전 신경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있음은 불문가지이리라..
“”그런데 팽형과 당형, 화산의 목형이 보이질 않는 구료. 남궁형, 혹시 아시오?”
“글쎄요, 팽형은 얼마 전에 동생의 일 때문에 강서성에 간다고 하여 이번 사화지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기별이 왔긴 하오만 당형이나 목영근 형은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료.”
남궁비가 말을 하면서 슬쩍 눈길을 악서령과 석영에게 보내었다. 목영근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천향매화와 관련이 있는 이요 지금까지 항상 같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라 악서령을 바라보는 것이고 혈장미는 당철의와 혼담이 오고 가고 수차례 같이 행보를 하는 것이 강호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기에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가져 두 여인을 바라 보았다.
“목사형은 급한 일로 화산으로 돌아갔어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 있겠죠.”
두 여자가 짧게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물어 보는 것도 무엇하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는 둘은 더 이상 그에 관하여 언급을 하지 않았다.
몇순배의 술잔이 돌고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즈음 군웅들 사이에서 소리가 터져나왔다.
“호화사! 호화사를 선출하시오!”
“호화사, 호화사를 뽑읍시다. 올 호화사는 누구요?”
“우와! 남궁비!! 남궁비!.”
“황보두균! 패왕권!”
칠룡과 사화, 그리고 천궁의 은아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나름대로는 한가닥하는 무예를 가지고 있고 또 촉각을 원탁에 고정시킨지라 악서령과 석영의 말을 듣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의아함은 사라지고 이어 떠오른 것은 호화사에 선출되는 젊은 후지기수였다. 그 중 제법 이름이 알려지고 한다 하는 이들은 목영근, 팽무, 당철의가 자리에 보이지 않음에 혹시 호화사에 선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긴장한 채 원탁을 바라 보며 호화사를 목청 껏 소리쳤다.
그러한 군중 들의 바람이 와 닿았는지 남궁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군웅들에게 일일히 포권의 예를 취하였다.
“여러분의 열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도 흥겨워 졌고 이제 호화사를 사화께 청하려 합니다. 군웅들께서는 잠시 진정하시고 사화소저들께서 선정하는 호화사를 지켜 보아 주십시오.”
남궁비가 침착하고도 분위기를 가라앉지 않게 예의 그 낭랑한 음성으로 선포를 하며 눈길을 유가형에게 돌렸다.
허나, 중인들의 반응과는 달리 그 시선을 받은 유가형은 결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쿵! 내심 큰 돌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호화사!, 말그대로 꽃을 수호하는 사람이다. 이는 화, 즉 자신을 지키는 다시 말하면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유가형의 생각은 그랬다. 그런 유가형이 어찌 호화사란 말에 안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일, 아환과의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유가형은 호화사란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남궁비를 지목하고 남궁비 역시 호화사로 이 연회를 자신과 함께 즐길 것이지만 이미 순결을 잃은 유가형으로서 태연히 그리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남궁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이는 짓이기에..
머뭇거리는 유가형에게 주위의 시선이 무거운 압박을 가져왔다. 열리지 않는 입,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렇지만..그렇지만..
“전…”
유가형의 입을 가까스로 떼었다. 그러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군웅들의 주의가 한꺼번에 자신에게 모아짐을 느끼고는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한사람을 쳐다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를 쳐다 보다 다시 눈을 돌려 남궁비와 눈을 마주치다 눈을 내리 깔았다.
“소녀는..소녀는 호화사로..호화사로…호화사를…”
사람들의 긴장된 눈길이 강하게 와닿았다. 그를 전신으로 느끼며 유가형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녀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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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연재를 합니다. 길지도 않은 분량이고요.
많은 분들이 연중을 하시거나 연재를 쉬다가 다시 쓰신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변명입니다.)
다음 주 부터는 예정대로 주 2회의 게재를 할 예정입니다.
용량은 약 20000 정도로 하겠습니다.
어느 분께서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 보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좌백님, 임준욱님, 설봉님 등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외에도 재미있게 읽은 글이 참 많습니다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8)
형산을 이루고 있는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인 선라봉의 초입,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때는 여름에 접어든지라 한낮에 내려쬐는 빛살의 열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다 모인 군중들의 눈에 담겨 있는 열망이 훨씬 컸다. 사람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모여서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한곳을 직시하며 기대가 서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군중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거대한 원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탁자의 주변에는 일견해도 십여개를 웃도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위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각종 차와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였고 수저와 호화스러운 접시가 의자 앞마다 정돈되어 곧 있을 연회를 예비하는 듯 보였다..
점심무렵의 시간을 약간 지나쳤지만 군호들의 모습에서는 허기나 기타 식욕등이 보이질 않았고 번뜩이는 시선마다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십의 장정과 여인들이 달라 붙어 자리를 꾸미고 요리를 하면서 몇시진 후에 있을 연회 준비에 전력을 기울여서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일반 서민이라면 시선이 거대한 대탁위의 음식, 요리나 호화스러운 집기에도 머물음직 하지만 이 곳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이 화려하게 차려진 탁자위가 아닌 그 주변 의자였다. 각 의자마다 한 사람씩 단정히 앉아 있었고 군웅들은 선망과 질시, 그리고 욕망등이 뒤엉킨 눈빛으로 그 사람들을 쳐다 보고 있었다
“강호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시는 무림의 군웅 앞에 소생 남궁비, 다섯번째 사화지연이 형산에서 열림을 선언합니다. 사마외도가 창궐하는 어지러운 무림에 불철주야 중원 각지에서 영웅들의 심혈을 기울인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연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서는 초라한 음식이나마 즐기시고 서로간에 친목을 다지며 무림에 악의 무리들이 발붙일 수 없게 심혈을 기울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와아..!!”
“와!!..”
“우와아..”
“소생이 먼저 잔을 청하겠습니다.”
“건배!”
“건배!”
“건배….”
상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포권의 예를 주위에 하면서 사화지연의 개최를 알렸다. 그 사람,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미공자라 할까? 미남의 대명사격인 송옥이나 반안도 저처럼 잘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정히 묶은 짙은 검은 머리를 영웅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원래 하얀 색으로 보이나 무예수련으로 인하여 태양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색의 남자. 계란형의 얼굴에 짙은 검미가 빛을 발하는 양쪽 눈위에 곧게 뻗어 있고 오똑하게 솟아 있는 콧날과 굳게 다물어진 두툼한 입술이 장부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목선을 타고 내려오다 볼록 튀어 나온 목젖이 보이고 그리 벌어지지 않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어깨, 하얀 백삼으로 가려진 체격은 볼 수 없었다. 또한 손에는 희디힌 장갑을 끼고 있어 크고 두툼한 손을 갖고 있었고 남궁비의 얼굴외에 다른 곳의 살갖은 외부에 나타나 있지 않았다. 보통 사내보다 조금 큰 키, 거의 육척에 다다를 만큼의 신장을 한 칠룡 중의 으뜸이요 무림 후지기수 중의 선두라 평함을 받는 제왕지기의 소유자 만검창룡 남궁비, 그였다.
군중들은 남궁비가 일어서서 사화지연을 선포하자 함성으로 그 선언에 답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화지연은 젊은 후지기수를 만나고 촉망받는 무림의 기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무림에 몸을 담은 젊은 남녀들은 하나같이 이 사화지연에 참가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칠룡의 출신 세력 중 칠룡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사화지연의 고고함을 강조하면서 참가 자격을 제한하여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무림의 내노라하는 명문의 자제나 이름 꽤나 날리는 후지기수 들만이 사화지연에 참가할 수 있었기에 이 사화지연에 오지 못하는 이들은 이 사화지연을 갈망과 질투어린 눈길로 보곤 했다.
사람들은 남궁비의 짧고도 명확한 인삿말이 끝나자 주변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말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을 줄곧 중앙의 탁자에 던져 사화지연의 흐름을 파악하려 하였다.
남궁비가 자리에 앉자 그 탁자에 앉아 있는 이 들도 서로서로 잔을 들고는 건배를 하면서 음식을 들었다. 남궁비가 제일 윗쪽에 그 양쪽에는 유가형과 악서령이, 또 그 옆에는 제갈수란과 석영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남궁공자.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선라현에 그 훤앙한 기태가 보이지 않아 소녀 걱정했습니다.”
“제갈 소저의 염려 덕분에 소생은 별 문제 없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현 중원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 됩니다. 민심이 흉흉하고 각지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국경 주변의 외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지요. 어찌 될려는지..”
“그렇지요. 남경의 곽자흥을 비롯하여 여러 반군 세력이 중원의 곳곳에서 원의 실정에 반기를 들고 있지요.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찌될련지요..더군다나 낙양은..”
“자자! 그런 말씀은 그만 접고 오늘은 즐거운 날이지 않습니까? 사화지연 입니다. 기분 좋게 먹고 마십시다.”
제갈수란과 남궁비의 대화가 점점 무게가 있는 쪽으로 기울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주위의 한 건장한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잔을 들고 건배를 청하였다. 그러자 제갈수란과 남궁비도 같이 잔을 들고는 건배를 하였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가만히 앉아 있는 세 사람, 유가형과 악서령, 석영은 다소 안색이 변한채 말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홀짝이고 있었다. 유가형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데 이는 아랫도리에서 전해오는 통증이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고통이 더 심하였다. 정혼자 옆에 앉아 뭇 사람들과 연회를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순결을 잃어 이제 깨끗지 못한 몸이기에 남궁비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인채 맛도 느낄 수 없는 찻물만 입속에 담을 뿐이었다. 이에 반해 석영과 악서령은 비처와 항문에서 전해져 오는 심한 고통에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는 악서령이 더욱 심했다. 작은 손가락하나 들어가기에도 버거운 곳에 거대한 아환의 양물을 가득 담고 허리를 흔들어 대어 그 곳이 온통 찢어 발겨져 걸음을 옮기거나 자리에 앉아 움직일때면 아예 극심한 아픔에 아래가 감각이 없을 정도 였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창백하게 질린 채 의자에 앉아 있지만 악서령의 속마음은 빨리 이 자리가 파하고 들어가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객잔에 들어가서도 쉴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석영은 비처의 작은 열상이 그리 아픈 정도는 아니었고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안색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 역시 뜻밖의 위치에서 퍼져 가는 아픔이 있었다. 허나 이 아픔이 아환의 제령심안으로 인하여 쾌락으로 변질되어 있는 가운데 그 기이한 감정을 참느라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스리지만 절대적인 존재로 인하여 느껴지는 열락은 그녀의 매력적인 얼굴을 붉은 기운이 감돌게 만들어 더더욱 고혹적인 석영의 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고 주변의 젊은 후지기수들은 그런 그녀의 매력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까의 그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남궁비의 무언의 호응을 얻은 듯 자리에 일어선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화지연을 축복하시려 참석해주신 여러 군호제위께 제가 감히 잔을 올립니다. 모든 분들께서는 잔을 들어 제 오회의 사화지연을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와!”
“사화지연!! 영원하라!”
“우아아아!!”
그러자 군웅들은 저마다 잔을 들고 건장한 사내의 선창에 맞추어 술을 들이키고 호기있게 함성을 질러대었다.
“소생 황보두균은 오늘 이렇게 많은 여러분들 앞에서 건배를 청함을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리부리한 호목을 지닌 황보두균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청년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고는 박수를 쳤다. 육척을 훨씬 넘어 남궁비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진 황보두균은 둥그런 원탁에 남궁비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라 곧장 정면에 보이는 남궁비를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남궁비에게 잔을 권하였다.
“헛헛헛!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남궁형은 신태가 더욱 헌앙해진듯 하오이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소제가 보기엔 황보형의 천왕권이 훨씬 무서워진듯 합니다만..얼마 전 잔혈사마를 훈계를 하셨다지요?”
“핫핫! 그 부끄러운 일이 남궁형의 귓전을 더럽히지는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어찌 남궁형의 그 고절한 제왕검에 빗댈수 있겠습니까?”
크게 대소를 터뜨리며 서로간에 칭찬을 해대고 있는 두사람, 그러나 그런 입의 놀림과는 달리 둘의 눈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남궁비는 무심하지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눈으로 입만 웃고 있었고 황보두균 역시 눈은 차가운 안광이 번뜩이지만 겉으로는 영웅의 기개를 떨치려는 듯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오가(五家) 세싸움의 한 단면일까? 팽팽한 긴장감이 커다란 원탁을 맴돌고 있었다.
“남궁형, 소제의 잔을 한잔 받으시오.”
잠자코 앉아서 간단히 요기를 하던 한 젊은 청라장삼의 청년이 남궁비에게 잔을 건네었다. 아마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지 밝은 음성으로 둘 사이를 갈랐다.
“허! 이거 소제가 먼저 수형께 드려야 하는데..감사하오이다. 그동안 곤륜제일룡께서 통 세간에 그 위용을 보이지 않아 소제는 수형이 고심막측한 절예를 터득하시느라 폐관하신줄 알았습니다.”
곤륜제일룡 수가위, 현 칠룡 중 소림의 우성과 화산의 목영근과 더불어 구파 출신의 후지기수. 곤륜 특유의 절묘하고 뛰어난 검예를 일절로 꼽는 곤륜의 속가제자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다소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체격을 지녔다. 속가라 할지라도 곤륜의 미래라 칭하며 곤륜의 본산에서 수련을 닦는지라 평소에는 거의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하였다.
“무슨 말씀을요, 소제는 곤륜에서 잡일만 하느라 바뻐서 미처 밖에 나서지 못한 것이지요. 일신의 재주가 미천한데 어찌 영웅들과 어깨를 견주겠습니까?”
“겸양을 말씀을..수형의 청수신검이 중원에 나올때면 사마외도들이 쥐구멍을 찾기 바쁘고 무수한 소저들이 수형을 뵈려고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오늘 이처럼 수형이 강호에 그 준수한 신태를 드러내었으니 무림이 시끄럽겠소이다. 핫핫하!”
“하하..남궁형이야 말로 소제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소이다. 무림사화 중의 난화를 맞이하실 몸이 어찌 그런 말씀을..소제는 남궁형이 부럽소이다.”
“그런가요? 핫핫하..”
둘이 그렇게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 이를 듣고 있는 유가형의 마음은 편치 못하였다. 이미 몸은 아환에게 더럽혀진 상태..어찌 남궁비와의 관계가 화제에 오를 때 심기가 편할 수 있으랴?
칠룡을 비롯한 남자 후지기수들이 왁자지껄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여인들은 그와 달랐다. 사화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여인들, 무림의 후지기수 중 내노라하는 세도를 지녔거나 얼굴이 반반하고 제법 무예를 익힌 여걸들은 남궁비를 비롯한 칠룡의 모습을 슬쩍 슬쩍 훔쳐 보며 얼굴이 붉어지거나 사화를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총 원탁에 앉아 있는 인물은 여덟, 다섯자리 정도가 공석으로 비어있었다. 칠룡 중의 셋과 무림사화 그리고 또다른 한명의 여인, 악서령과 같이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 그 정확한 용모는 볼 수 없으나 백라의를 입은 채 현현한 광채를 빛내며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됨이 보였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들이 사화에만 시선을 집중하다가 그들과 같이 있는 또 한명의 여인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무림의 후지기수 중의 최고라는 저들과 한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그제서야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듯 그 옆에 앉아 있는 수가위가 깜빡 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 이거 소제가 큰 실례를 범했소이다. 이런..이런..소제가 여러분께 소개를 드린다는 것을 미처 잊었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은 천우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분을 뵙게 되다니..이 곳에 모인 영웅께서는 그야말로 행운이라 생각됩니다. 참! 은소저, 소생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여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수가위의 말을 받았다.
“은소저, 이 분은 칠룡 중의 일인인 만검창룡 남궁비, 이 분은 패왕권 황보두균, 이 소저는 난화성녀….”
기이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를 여인에게 먼저 소개하는 것이 관례라 할지라도 상대는 다름아닌 칠룡, 무림의 최고라 칭함받는 사내들이었다. 게다가 사화 역시 무림의 으뜸이라 칭함을 받는 여걸들이 아닌가? 깜빡했다 할지라도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가위가 아님을 이 곳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가위가 이런 소개순서를 가지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군웅들은 수가위의 말에 남자는 포권을, 사화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칠룡과 사화를 앉아 있는 여인에게 먼저 소개를 한 후 마침내 수가위가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소개를 드리는 이 분은 천궁에서 오신 분입니다.”
“은아려라 합니다.”
천궁!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인들의 안색이 일순 획 변하였다.
천궁(天宮)
신비사세의 으뜸이자 무림을 행보하는 이들에게 있어 전설적인 지역이며 세력으로 신선들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 평가받는 곳. 한번 출현할때마다 강호가 경천동지한다고 일컬어지는 절대의 비세.
누가 무어라 한 사람도 없는데 순식간에 군중들을 뒤덮은 것은 거대한 침묵이었다.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경악한 기색으로 수가위가 소개한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이는 비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찬가지였다. 그 중 한명 만이 기이한 안광을 반짝이며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름아닌 아환이었다.
‘천궁? 천궁이라..천궁..전대 태상후가 설하였지..천궁이라..’
검후의 말로 자신이 천궁의 전대 태상후라 했었다. 그리고 그 밖에…
곧 중인들의 안색이 회복되고 차차 정신을 차리면서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나즈막하다가 이내 그 음파가 커지며 동요가 번져나갔다.
“천궁..그 신비의 세력이..?”
“천궁!”
“신비사세의 출현이다!”
“와!…”
그 이름이 가지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한 천궁의 인물이 강호에 출현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풍파도 개중 몇몇은 짐작하고 있었다. 놀란 기색은 칠룡과 사화도 마찬가지, 그 중 수가위를 제외한 남궁비와 황보두균, 그리고 사화 중의 유가형, 악서령과 제갈수란은 눈을 크게 뜨고 천궁의 여인을 쳐다 보았다.
그들에게도 천궁이란 신비세력의 명호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중원의 대표적인 후지기수라 평함을 받는 이들이라 곧 평정을 되찾았지만 내심 끊임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은소저, 소생 황보두균이 다시금 소저께 인사 드립니다. 전설로만 들었던 천궁의 귀인을 이리 뵙게 되어 불초 소생의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채 허둥대며 인사를 하는 황보두균과는 달리 짧게 응대를 하는 은아려라 하는 여인, 도도한 듯 하나 그 도도함이 오히려 은아려의 배경과 조화를 이루어 특이한 매력을 자아내었다.
다른 한쪽에 앉아 있는 제갈수란은 눈을 빛내며 시선을 은아려에게 고정시킨채 가볍게 입술을 물면서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유가형은 천궁이라는 이름에는 놀랐지만 이내 곧 남궁비에게 눈길을 돌려 복잡한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었다.
“고귀하신 분께서 이 연회에 참석해 주심에 소생 남궁비는 깊으 감사를 드립니다. 과연 신화적인 명성만큼 고절한 경지에 도달하신 듯 보입니다.”
“그런가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의미를 가진 말로 대답을 하는 은아려,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짧게 짧게 말을 끊었다. 상대가 칠룡과 사화라는 최고의 무림 후지기수임에도 조금의 거리낌이 없었고 이는 그 대답을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충분히 오만할 수 있는, 넘치도록 도도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다.
칠룡이 인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처음에 목례를 보낸 것 이외에는 별다른 추가 인사를 하지 않은 사화를 잠시 쳐다 보던 은아려는 이내 눈길을 거두고 담담히 남궁비와 황보두균을 훑어 보았다. 남궁비를 보고는 이채로운 안광을 빛내더니 곧 눈을 돌렸다.
주위의 많은 군웅들도 하나 같이 나서서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원탁에 둘러 앉아 있는 거물들의 이름에 압도 당하여 수군거리며 서로간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나서서 은아려에게 인사를 건넨다면 자신도 나설 모양인지 힐끔 힐끔 주위만 신경쓰며 은아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계속 진행하시지요.”
“예. 그러지요.”
남궁비가 응대를 한 후 중인들을 바라보며 진기를 돋구어 말을 한다.
“오늘 사화지연에 귀인이 오셔서 이 자리를 빛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 영웅께서는 더욱 즐겁게 연회를 즐겨주십시오.”
“와!…”
“와..”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퍼지고 일시 중단되었던 술잔이 다시금 돌기 시작하였다. 웅성거림은 더욱 커지고 사람들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의 전 신경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있음은 불문가지이리라..
“”그런데 팽형과 당형, 화산의 목형이 보이질 않는 구료. 남궁형, 혹시 아시오?”
“글쎄요, 팽형은 얼마 전에 동생의 일 때문에 강서성에 간다고 하여 이번 사화지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기별이 왔긴 하오만 당형이나 목영근 형은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료.”
남궁비가 말을 하면서 슬쩍 눈길을 악서령과 석영에게 보내었다. 목영근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천향매화와 관련이 있는 이요 지금까지 항상 같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라 악서령을 바라보는 것이고 혈장미는 당철의와 혼담이 오고 가고 수차례 같이 행보를 하는 것이 강호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기에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가져 두 여인을 바라 보았다.
“목사형은 급한 일로 화산으로 돌아갔어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 있겠죠.”
두 여자가 짧게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물어 보는 것도 무엇하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는 둘은 더 이상 그에 관하여 언급을 하지 않았다.
몇순배의 술잔이 돌고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즈음 군웅들 사이에서 소리가 터져나왔다.
“호화사! 호화사를 선출하시오!”
“호화사, 호화사를 뽑읍시다. 올 호화사는 누구요?”
“우와! 남궁비!! 남궁비!.”
“황보두균! 패왕권!”
칠룡과 사화, 그리고 천궁의 은아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나름대로는 한가닥하는 무예를 가지고 있고 또 촉각을 원탁에 고정시킨지라 악서령과 석영의 말을 듣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의아함은 사라지고 이어 떠오른 것은 호화사에 선출되는 젊은 후지기수였다. 그 중 제법 이름이 알려지고 한다 하는 이들은 목영근, 팽무, 당철의가 자리에 보이지 않음에 혹시 호화사에 선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긴장한 채 원탁을 바라 보며 호화사를 목청 껏 소리쳤다.
그러한 군중 들의 바람이 와 닿았는지 남궁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군웅들에게 일일히 포권의 예를 취하였다.
“여러분의 열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도 흥겨워 졌고 이제 호화사를 사화께 청하려 합니다. 군웅들께서는 잠시 진정하시고 사화소저들께서 선정하는 호화사를 지켜 보아 주십시오.”
남궁비가 침착하고도 분위기를 가라앉지 않게 예의 그 낭랑한 음성으로 선포를 하며 눈길을 유가형에게 돌렸다.
허나, 중인들의 반응과는 달리 그 시선을 받은 유가형은 결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쿵! 내심 큰 돌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호화사!, 말그대로 꽃을 수호하는 사람이다. 이는 화, 즉 자신을 지키는 다시 말하면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유가형의 생각은 그랬다. 그런 유가형이 어찌 호화사란 말에 안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일, 아환과의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유가형은 호화사란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남궁비를 지목하고 남궁비 역시 호화사로 이 연회를 자신과 함께 즐길 것이지만 이미 순결을 잃은 유가형으로서 태연히 그리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남궁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이는 짓이기에..
머뭇거리는 유가형에게 주위의 시선이 무거운 압박을 가져왔다. 열리지 않는 입,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렇지만..그렇지만..
“전…”
유가형의 입을 가까스로 떼었다. 그러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군웅들의 주의가 한꺼번에 자신에게 모아짐을 느끼고는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한사람을 쳐다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를 쳐다 보다 다시 눈을 돌려 남궁비와 눈을 마주치다 눈을 내리 깔았다.
“소녀는..소녀는 호화사로..호화사로…호화사를…”
사람들의 긴장된 눈길이 강하게 와닿았다. 그를 전신으로 느끼며 유가형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녀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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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연재를 합니다. 길지도 않은 분량이고요.
많은 분들이 연중을 하시거나 연재를 쉬다가 다시 쓰신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변명입니다.)
다음 주 부터는 예정대로 주 2회의 게재를 할 예정입니다.
용량은 약 20000 정도로 하겠습니다.
어느 분께서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 보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좌백님, 임준욱님, 설봉님 등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외에도 재미있게 읽은 글이 참 많습니다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73 비추천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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