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고물쪽에서 석파천은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어! 이상하다. 띵땅, 당신의 이불을 어떻게 내가 덮고 자게 되 었지? 이불에 발이라도 달렸단 말인가?" 정당은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선실에서 나와 그녀는 뱃고물로 서둘러 다가갔다. 석파천은 그녀 의 이불을 들고서 입을 열었다. "띵땅, 정말 이상한 일이잖아? 이 이불이......" 정당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마치 못 보일 것을 들킨듯 황급히 이불을 빼앗아들고는 나직이 호통쳤다. "더 말하지 말아요. 이불에 어째서 발이 생겨요? 또 뭐가 이상하 다는 거예요?" 석파천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이불에 발이 생기는데 어째서 이상하지 않다는 거요? 내 말은 이불에 어떻게 발이 생겼느냐 그 말이오." 정당은 고개를 돌리고는 한곳을 못박힌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마침 늙은 사공이 삿대로 배를 밀어내고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슬쩍 정당을 곁눈질했다. 더욱 부끄러워진 그녀는 그만 얼굴이 홍시처럼 변해서는 뾰루통하니 석파천에게 말 했다. "그래도 쓸데없는 말을 할래요?" 그녀는 왼손으로 석파천의 귀를 잡아당기려고 손을 내밀었다. 석파천은 오른손을 쳐들고 자연스럽게 십팔 초 금나수법 가운데 학상 수(鶴翔手)를 펼쳤다. 정당은 오른손을 빙글 돌리면서 오히려 그의 옆구리를 움켜잡으려고 하였다. 석파천은 왼팔을 비스듬히 해서 그녀의 일 장을 막았다. 동시에 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깻죽지를 움켜잡으려고 했다. 정당은 이불을 배바닥 에 던지며 일 초를 반격했다. 그녀는 석파천의 내공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손 이 될 수 있는 한 그의 손가락이나 손에 부딪치지 않도록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삽시간에 두 사람은 십여 초를 주고 받았다. 정당은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더 손놀림이 빨라졌다. 석파천은 온정 신을 기울여서 한 치의 틈도 없이 막아냈다. 수십 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정당이 용등조(龍騰爪)를 펼쳐 그의 머 리카락을 잡으려 들자 석파천은 이를 간파하고 팔목으로 막았다. 한데 그 손놀림이 너무나 재빨라 정당은 손을 움츠려 들이지 못하고 그만 그의 다섯 손가락에 손목의 혈도를 슬쩍 스치게 되었다. 다음 순간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그녀의 손목으로부터 팔로 스며들었고 또 팔에서부터 허리께로 쭉 뻗어나더니 허리께로부터 다시 발목으로 전해졌다. 정당은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고 그만 몸을 기울이며 쓰러지게 되었 다. 마침 그녀는 배바닥에 던졌던 이불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석파천은 동심이 크게 이는 듯 몸을 구부리더니 이불자락으로 그녀의 몸을 둘둘 말아서 안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나의 귀를 비틀려고 했소? 내 당신을 강물에 던져 고기밥이 되게 할톄요!" 정당은 그와 이불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이렇게 되자 혼신이 저려 왔다. 두렵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당신이 감히!" 석파천은 껄껄 웃으면서 외쳤다. "내가 어째서 감히 못한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녀를 가볍게 내던졌다. 그러나 던지는 곳이 배 바깥쪽이 아니라 선실 안쪽이었다. 정당은 간신히 이불자락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뱃고물 로 나갔다. 석파천은 그녀가 다시 손찌검을 할까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는 두 손을 들어 대항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정당은 웃음지으며 말했다. "이제 장난은 끝났어요! 그 꼬락서니로 자세를 가다듬으니 농사꾼같 지, 무림 고수답지 않네요." 석파천은 안심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본래 무림 고수가 아니지 않소." 정당은 뿌듯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러나 저러나 축하해요! 오라버니가 금나수법을 완전히 익히게 되 어 청출어람(靑出於藍), 사부인 저보다도 뛰어나던데요." 이때 냉랭히 정불삼의 음성이 선실에서 들려왔다. "설산파의 고수 백만검과 싸우려면 아직도 멀었다!" 정당은 흐믓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가 이토록 재빨리 재간을 익히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에 게 일년이나 반년만 배운다면 천하무적이야 될 수 없겠지만 할아버지 의 손녀사위로서 할아버지의 체면을 깎이게 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정불삼은 냉소를 했다. "이 정 셋째가 언제 한번 내뱉은 말을 어긴 적이 있더냐?" 그는 엄숙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첫째, 나는 그가 너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나에게서 무공을 배울 생 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둘째, 열흘 안으로 백만검을 패배시키거나 죽 이지 않는다면 내가 일 장에 쳐죽이겠다고 했다. 이제 열흘까지는 닷 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일년이고 반년이고 시일이 넉넉하게 남아 있느 냔 말이다." 정당은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어젯밤 그녀는 석파천을 죽이려고 해었다. 그러나 오늘은 석파천을 할아버지 손에 죽겠끔 내버려둘 수 없는 심 정이었다. 할아버지가 한 말은 한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어떻게하든 마음을 돌리 수 있도록 그녀는 궁리를 해보았다. 역시 애초에 세웠던 계획대로 금나수법에서 어떤 대책을 강구해 내야겠다고 작정했다. 며칠 동안 정당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외에 십팔 초 금나수법의 또 다른 변화를 석파천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되자 석파천은 자연 며칠 사이에 금나수법을 더없이 익숙하게 펼칠 수 있었으며 강맹한 내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정당과 막상막 하의 대련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여드레 되는 날 아침 정불삼은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정당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 그를 시켜 백만검을 패배시키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백만검은 설산파의 검법에 매우 깊은 조예를 쌓고 있 으나 우리 정씨 집안의 무공에는 견줄 수가 없어요" 그녀는 자기의 할아버지를 힐끔 바라보고 난 이후 다시 말을 이었다. "천 오라버니의 금나수법도 이젠 거의 완벽해졌어요. 맨손으로 백가 의 손에 들린 장검을 뺏앗을 수 있을 거예요. 맨손으로 상대방의 장검 을 빼앗게 된다면 이겼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정불삼은 냉소했다. "너는 매우 수월하게 이야기 하는구나. 그의 변변치 못한 능력으로 기한서북의 손에 들린 장검을 빼앗아? 잠꼬대 같은 소리하지 말아라." 그는 코방귀를 뀌며 다시 말했다. "설사 이 할아버지가 백만검을 상대한다 하더라도 그의 손에 들린 장 검을 빼앗을까 말까한데 그가 장검을 빼앗는다고?" 정당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도 빼앗을 수 없다면 흥, 흥! 할아버지의 무공 또한 형편없 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불삼은 노해 부르짖었다. "별 것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냐?" 정당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할아버지의 무공이 백만검의 장검을 빼앗을까 말 까한 정도라면 그렇게 뛰어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 뿐이에 요." 정불삼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어째서 나의 무공이 형편없다는 것이 냐?" 정당은 계속 꺽이지 않겠다는 듯 반박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린 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스스로 시인하신 말 씀이 아니냐, 그 말이에요." 정불삼은 짜증스럽다는 듯 정색하며 말했다. "아뭏든 열흘 안으로 백만검을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그 백치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정당은 입술을 비쭉하며 대꾸했다. "열흘 안으로 백만검을 패배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열흘 안으로 그 백 가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 오라버니의 잘못이 아니에요." 정불삼은 정당이 계속 우격다짐으로 나오자 짜증스럽다는 듯 얼른 말 을 받았다. "내가 열흘이라고 했으면 반드시 열흘이다. 그를 찾아내고 못 찾아내 고는 상관이 없다. 열흘 안으로 그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그 백치는 내가 죽일 것이다." 정당은 다급해져서 곧 그 말을 받았다. "이제 삼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디 가서 백만검을 찾는단 말이에요?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그만한 이치도 따지지 않겠다는 거에 요?" 정불삼은 웃으며 말했다. "이 정불삼이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라면 정불삼이 될 수 없었을 것이 다. 강호에 가서 알아 보아라. 이 정불삼이 언제 이치를 따지는 인간 인가 말이다." 이튿날, 그러니까 아흐렛 째 되던 날 정불삼은 입가에 한가닥 미소를 띄우고는 석파천을 슬쩍 곁눈질하는가 하면 때로는 정당의 표정을 엿 보곤 하였다. 정당은 할아버지가 열흘째 되는 날 반드시 석파천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의 석파천을 노려보는 눈고리에는 괴 이하게도 삼푼 쯤 무시하는 듯한 빛과 칠푼 쯤의 살기로 채워져 있었 다. 이 무렵, 석파천의 무공을 논할 것 같으면 백만검의 무공에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백만검을 이틀 안으로 이길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상 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사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넓은 강호에서 어떻게 백만검 을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날 오후, 정당과 석파천은 금나수법으로 한번의 대련을 가졌다. 정당이 약간 얼굴이 상기 되어서는 휴, 하니 더운김을 한 번 토해내 고는 말했다. "팔월 날씨인데도 찌는 듯이 덥군요." 석파천의 곁에 앉아 양자강 물결을 따라 헤엄치는 두 마리의 물새를 가리키며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천 오라버니, 저것 좀 보세요. 저 물새들은 아마도 한 쌍의 부부인 가 봐요. 강물 위에서 저렇게 여유만만하게 노닐고 있으니 얼마나 기 쁘겠어요." 그녀는 서글픈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활을 가지 사람이 수컷을 쏴 죽인다면 암컷은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며 가련하겠어요?" 석파천은 아련히 떠오르는 생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나는 옛날 산속에서 사냥을 할 때 새를 쏘아 잡기는 했지만 수컷인 지 암컷인지를 따져보지 못했구료. 이제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까 이 후부터는 암컷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료." 정당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석가는 역시 바보 머저리 같은 데가 있어......' 그녀는 다시 한번 몸을 석파천에게 비스듬히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석파천은 나직이 물었다. "띵땅, 피곤하오? 내가 선실까지 부축해 드리겠소. 낮잠을 한숨 푹 자고 나면 피곤도 가실거요." 정당은 잠에 취한 듯 매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이대로 이렇게 자는 것이 더 좋아요." 석파천은 그녀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 자기의 외쪽 어깨를 그녀 가 기대기 좋도록 편히 하고는 그대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길게, 그리고 고르게 숨을 쉬면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 같 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그의 왼쪽 빰을 슬쩍슬쩍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약간 간질간질하긴 했으나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별안간 가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그의 왼쪽 귀로 흘러 들어왔다. 너무나 나직한 소리인지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이봐요. 천 오라버니, 잘 들어요. 고개를 끄덕여도 안 되고 말을 해 도 안 돼요. 그리고 얼굴에 그 어떠한 표정을 띄워서도 안돼요. 눈을 감는 것이 좋겠어요. 그리고 잠이 든 척하면서 코를 골면서 내 말소리 를 은폐하도록 해봐요. 그러면서 저의 말을 들으세요." 석파천은 크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녀가 잠꼬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곁눈 질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에 덮혀 있던 눈동자가 갑자기 움직였다. 왼쪽 눈이 약간 뜨여지면서 두어 번 그에게 눈을 깜빡이는 것이 아닌 가!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석파천은 즉시 그녀가 남 모르게 할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정불삼에게 알리지 않을 어떤 말이 있는가보다 생각하게되고 하 품을 하고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허참, 피곤하다." 정당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천 오라버니는 역시 백치는 아니야. 즉각 눈치를 알아 차리고는 정 말 그럴싸하게 시치미를 떼는데.'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무공이 낮고 또 백치이기 때문에 손녀사위가 될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열흘의 기한을 정하게 되었는데 내 일이 바로 그 기한이에요. 그는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 틀림없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백만검을 찾아낼 수 없지 않겠어요? 찾아낸다 하더라 도 당신이 백만검을 이길 수는 없을 거예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우리 두 부부가 깊은 산속으로 도망을 쳐서 할아버지 가 찾아내지 못하는 곳에 숨어 사는 거예요." 석파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왜 나를 죽인다는 것일까? 띵땅은 역시 어린애야. 할아 버지가 농담으로 한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다니. 하지만 우리들이 깊 은 산속으로 숨어 할아버지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한다면 정말 재미있 겠다.' 그는 지금까지 그의 어머니와 깊은 산속에서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 며칠간 그가 겪은 일들은 그를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될 수 있 으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세월을 보내고 싶었던 차에 이런 제의를 받자 너무 기뻤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정당과 짝이 되어 함께 간다니 더없이 기뻤 다. 정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도망을 친다면 할아버지가 쫓아올 거예요. 그러니 우리들의 무공으론 도저히 도망을 칠 수 없을 어예요. 오늘 밤 삼경 무렵에 내가 할아버지를 껴안고 할아버지, 천 오라버니를 용서하시고 그를 죽이지 마세요, 하고 부르짖을 터이니 오라버니는 재빨리 선실 안으로 들어오란 말이에요......" 그녀는 매우 진지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른손으로 호조수(虎爪手)를 펼쳐 할아버지의 등뒤 한복판을 움켜 잡고 왼손으로는 옥녀첨침(玉女尖針)으로 뒷쪽 허리께를 움켜 잡으세 요......" "할아버지는 그때 나의 두 팔에 안겨 있을 것이니까 일시 손을 써서 대항하지 못할 거예요. 오라버니의 내력이 매우 강하니 그와 같이 잡 게 된다면 할아버지도 움직일 수 없게 될 거예요." 석파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띵땅은 정말 말썽꾸러기로구나. 아마도 할아버지에게 그와 같은 커 다란 장난을 하는데 도와달라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저러나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을까? 그래도 할 수 없겠지! 그녀가 장 난을 좋아하는데 그녀의 뜻을 따라 행하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정당은 다시 나직이 당부를 했다. "우리 두 사람의 생사와 관계가 있으니 절대 시간적으로 틀림이 없어 야 해요. 왼손으로 나의 등뒤에 있는 영태혈(靈台穴)을 한번 만져봐 요. 거기 바로 호조수로 움켜잡을 곳이에요." 석파천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 정당의 영태혈을 가볍게 어루만져 보았다. 정당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거기예요. 재빨리 손을 써서 혈도를 정확하게 움켜잡아야 해요. 만약 바늘 구멍 만큼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겉잡을 수 없는 사태 가 발생할 거예요."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설명을 해나갔다. "이제 다시 나의 뒷 허리께에 있는 현추혈(玄推穴)을 만져보아요. 옥 녀첨침이라는 일 초를 써서 그곳을 움켜잡되 엄지손가락과 식지 두 손 가락에 힘을 주어야 하며 내력을 그 손가락 끝으로 모아 혈도 안으로 스며들도록 해야 해요." 석파천은 왼손을 천천히 허리께로 내려서는 두 손가락으로 그녀의 현 추혈을 가볍게 한번 건드렸다. 이때 물론 그로서는 전혀 기운을 쓰지 않았으나 정당은 처녀의 몸인 지라 특히 간지러움을 잘 탔다. 석파천이 그녀를 간지러움 태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그녀는 그만 킥, 하는 웃음을 흘리게 되었다. "쓸데없는 장난하지 말아요!" 석파천은 그 순간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정당은 재빨리 손을 뻗쳐 그의 겨드랑 밑을 간지럽혔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히히덕거리며 장난을 피우는 동안 그만 자는 척 하던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날 황혼 무렵이었다. 늙은 사공은 배를 조그만 고을 옆에 세워두고 고을로 들어가 술과 찬 거리를 사오게 되었다. 정당은 석파천에게 조르듯 애교를 떨며 말했다. "천 오라버니, 우리도 고을 구경을 해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두 사람은 언덕으로 산책을 나섰다. 조그만 고을은 팔구십 호의 인가밖에 살지 않았으며 그들 가운데 열 집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어부들이었다. 두 사람이 고을 뒷쪽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석파천은 넌즈시 입을 열었 다. "할아버지가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으니 우리가 도망친다면 지금 가 면 될 것이 아니겠소?" 그는 한시 바삐 정당과 함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던것이다. 정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어디 쉬운 노릇인가요? 우리들이 십 리, 이십 리를 도망친다 하더라도 할아버지는 얼마든지 뒤쫓아올 수 있을 거예요." 이때 갑자기 등뒤에서 외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 너희들이 천 리를 달아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희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석파천과 정당은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사내가 한 그루 커다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 람을 향해 흉칙한 미소를 떠올렸다. 석파천은 이들 두 사람이 바로 설산파의 호연만선과 문만부인 것을 알고 어리둥절해졌으나 곧이어 속으로 놀람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설산파의 두 제자가 석파천을 양자강에서 발견하고 손을 곰으나 한 명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백만검은 그 소식을 접하게 되자 사제들을 수륙(水陸) 두 길로 쫓게 했다. 그리하여 호연만선과 문만부, 이들 두 명의 제자들은 양자강 상 류로 말을 타고 뒤를 쫓아오던 중에 바로 이 조그만 고을에서 석파천 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호연만선은 비교적 행동이 침착해서 자기네들 두 사람으로는 석가라 는 녀석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백 사형이 분부한 대로 충천화전(衝天火箭)을 쏘아올려 신호를 할 작정인데 문만부는 그 동안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으로 두 사람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이때 정당 역시 깜짝 놀랐다. '이 두 사람은 설산파의 제자인데 백만검이 혹시 이 부근에 있는 것 이 아닐까? 만약에 백만검이 나타나면 할아버지는 천 오라버니에게 백 만검과 싸워야 한다고 할 터인데 큰일났구나.' "흥! 우리끼리 하고 있는 말을 당신들이 왜 끼어 들어서 이러쿵저러 쿵 하는 거예요! 재수없게시리." 그녀는 다시 석파천에게 말했다. "천 오라버니, 우리들은 배로 돌아가요." 석파천은 이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문만부는 평소 석중옥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왕만인과 장만풍 (張萬風)이 상처를 입은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호통을 내질렀다. "어디를 가! 이 석가 녀석아, 순순히 나를 따르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걸!" 그러면서 그는 왼손으로 석파천의 어깻죽지를 움켜잡으려 들었다. 석파천은 몸을 옆으로 돌려서 피하는 동시 정당이 가르쳐 준 금나수 법을 펼쳐 팔을 들고 상대방의 초식을 밀쳐냈다. 문만부는 손을 뻗었으나 움켜잡을 수 없게 되자 다리를 들어 석파천 의 배를 걷어차려고 했다. 석파천은 발길질을 피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나절 동안 호조수와 옥녀첨침이라는 이 초만을 뇌리에 되새기고 있 던 참이라 위급한 경우를 당하게 되자 그만 그 두 초식만 머리에 떠올 랐다. 문만부는 바로 자기와 마주 서 있는 참이라 그 두 초식으로는 상대방 의 뒷등과 허리께에 손이 닿지 않는 상태가 아닌가? 이때 그는 자기의 그와 같은 초식이 맞든 맞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대뜸 걸음을 옮겨 상대방의 등뒤로 돌아갔다. 그의 내공이 심후했기 때문에 몸을 돌리고 피하는 것은 신속하기 이 를 데 없었다. 그와 같이 성큼 한 걸음 내딛게 되자 우연히도 문만부의 발길질을 피 하게 되었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호조수를 펼쳐 그의 영태혈을 움켜잡 고 왼손으로는 옥녀첨침으로 그의 현추혈을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낚아 채게 되었다. 다음 순간, 문만부는 나직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더 니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호연만선이 앞으로 달려나와 협공하려 했으나 별안가 석파천이 자기 사제의 요혈을 움켜잡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처 검을 뽑지 못하고 주먹을 들어 석파천의 허리를 후려쳤다. 그는 이 한대의 주먹에 십성의 공력을 돋우게 되었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우지끈 뚝, 하면서 오히려 그의 오른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석파천은 그 순간에 자기의 허리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그만 문만 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문만부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닌가? 석파천은 그의 어깻죽지를 잡고는 얼굴을 자기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 두 눈을 까뒤집고 까무러쳐 있는 끔찍한 얼굴을 볼 수 있었 다. 석파천은 깜짝 놀라며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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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31편 (31/82)
"어이쿠! 야단났다. 띵땅, 그는......그는 혹시......죽은 것이 아닐 까?" 정당은 킥,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천 오라버니, 그 일 초는 정말 훌륭했어요. 하지만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