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장풍파랑 - 48편 (48/61)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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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장풍파랑 - 48편 (4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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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상을 준비하라!" 오유가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며 천태림과 도연오를 선수 아래 차양이 쳐진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차양 아래의 의자에 각기 자리를 잡았다. "오 채주,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소?" 도연오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껄껄껄! 그렇게라도 보였다면 다행이오.
하지만 지금 우리 진강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겠소.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오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강이 알아주던 풍류(風流) 협객(俠客), 오 채주께서 사는 일에 재미를 못 느낀다니...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소." "풍류 협객이라...
다 젊은 날의 이야기지." 도연오의 말에 오유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천태림과 도연오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도 오유의 주름살에서 문득 자신의 나이를 느끼는 중이었다. "소강들은 우리 대강들이 어디 권모술수로 대강이 된 듯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오.
나는 수룡왕을 따라 물길을 오가며 새파랗던 젊음을 모두 이 장강에 쏟았소." 도연오가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오." "맞소이다." 천태림과 오유도 감회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앞일에 대한 이야기보다 회고의 정이 깊어지는가 보다. "그때는 갈대숲 사이사이에 녹림의 수적들이었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던가?" 천태림이 회고의 정을 이어나갔다. "죽을 고비를 어찌 셀 수가 있겠소? 그만한 고초를 겪으며 수로연맹을 세웠는데 알아주는 자들은 점점 없고...
수룡왕만 오래 살았어도 우리 늙은이들이 이 같은 천대를 받지는 않을 텐데.
ㅉ!" 오유가 쓴맛을 다셨다. "장강의 앞물결은 뒷물결에 밀려나고 또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니 이 자리에서 옛일을 이야기 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제 그만 둡시다." 도연오가 한숨을 쉬며 과거로의 여정을 끊었다. "아! 소문은 들었소?" 오유가 돌연 물었다. "무슨 소문... " 도연오가 귀를 세웠다.
강호의 풍문에 누구보다 빠른 그였지만 이제 막 동정호에 도착한지라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소문은 귀에 담을 틈이 없었다. "삼악오가 죽었소.
소림의 장경각주 성진대사의 화열불면장에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 "정말이오? 언제 그같은 일이... " 천태림이 다급히 물었다. "상강이 불타던 바로 그날이오.
담 채주의 죽음은 전해졌는데 삼악오의 죽음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상강의 수하들이 그 현장에서 모두 내뺐기 때문이오.
삼악오가 죽었다는 소문을 알린 사람은 바로 천 채주의 영식(令息)과 한수 이 채주의 독자(獨子)외다.
성진대사와 삼악오가 일전을 벌이던 그 자리에 있었다더군." "아!" 천태림은 탄성을 터뜨렸다.
걱정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던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한 가지 소문은...
천 채주의 영식인 화인이라는 아이의 뛰어남은 이전부터 듣고 있었소.
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소.
삼악오를 상대로 대등한 승부까지 펼쳤다고 하니... " 오유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화인도 삼악오와 싸웠다는 말이오?"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묻는 사람은 도연오였다.
천태림은 의외의 말에 그저 멍한 표정만 지을 뿐... "한수의 이만이라는 아이가 직접 보았다고 하오.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일전을 펼치고 있는데 성진대사가 홀연히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이만이라는 아이의 말로는 성진대사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화인이라는 아이가 삼악오를 꺾었을 것이라고 합디다." "허어!" 도연오가 무릎을 쳤다.
천태림은 으쓱해지는 기분을 감추기 위해 애써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마타룡도 있었을 터인데... " 도연오의 관심사는 또한 위무일이었다. "마타룡에 대한 소문은 듣지 못했소.
아마 제 차례를 기다리던 도중 성진대사가 나타났겠지." "쯔쯔...
천 채주, 화인은 언제나 일을 너무 서두르는 것 같소.
마타룡이 먼저 삼악오와 싸웠어야 할 일인데." 도연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먼저 싸웠건 뒤에 싸웠건 어쨌든 대단한 아이요.
마타룡의 등장으로 빛을 잃는가 했는데...
단신으로 황사로를 쑥밭으로 만들고 이번에는 전대의 노물, 삼악오를 상대로 대등한 승부를 벌였다고 하니...
천 채주, 부럽소이다.
부러워." 오유는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삼악오와의 싸움! 그 결과는 대강들과의 약조를 깨고 황사로를 쑥밭으로 만든 천화인의 행동까지 원래의 업적대로 공훈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떻소? 총채주의 자격은 있는 것 같소?" 도연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물론! 그놈이 아니면 누가 총채주가 되겠소?" 탁! 오유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호쾌히 소리쳤다. "화인이라는 아이의 실력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오.
이제 총채와 태부인이라는 그 여자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오." 그가 한광을 쏟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도연오가 물었다.
원래 가릉강을 제외한 대다수의 대강들은 천화인에 대한 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 한 다리는 총채에 걸쳐놓은 상태였다.
도연오 자신만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금사강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장강의 돌풍(突風)이 어떤 변고를 불러올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 채주께서 우리 진강의 일에 그렇게 관심이 없는 줄 몰랐소." 오유가 얼굴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천 채주와 나는 동정호에 오늘 도착했소." "자식 놈의 소문도 이제야 들었소." 천태림도 변명했다. "하긴 내놓고 떠벌린 일이 아니니 어찌 두 분 채주께서 진강의 일을 아셨겠소." 오유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우리 진강은 이번 싸움에서 외당당주를 비롯 십 여명의 수하들을 잃었소."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어쩌다가... " 도연오가 안색을 바꾸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사강처럼 아예 사대행회를 박살낼 계획으로 싸우다 그만한 피해를 입었다면 말도 하지 않겠소." 오유는 천태림과 도연오의 오해를 미리 막았다. "북풍로가 전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왔단 말입니까? 그들도 주위 형세를 고려 전면적인 싸움은 피했을 텐데." 도연오가 의문을 표했다. "만로방 놈들과 싸워 본 것은 몇 몇 분회가 고작이오.
북풍로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소." 오유가 내뱉듯이 말했다.
천태림과 도연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북풍로를 보지도 못했다면 만로방 총단의 탕백기나 철기대가 움직였다는 말인가?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 오유가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허리에는 환도(環刀)를 차고 어깨는 날렵한 등짐을 진 칠팔 명의 무사들이었다고 하오." "아!" 도연오가 탄성을 터뜨렸다.
전후 사정을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환도라면 조선의 병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군도(軍刀)... "역시 북풍로와 손잡고 인삼을 밀매하던 조선의 무사들이 왔었군요." "맞소이다!" 오유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살아남은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칼 솜씨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고 하오.
외당당주가 단 십 합도 못 넘기고 목숨을 잃었으니... " "그럴 것이오.
그럴 것이외다.
나도 이미 그들의 소문은 듣고 있었으니... " 도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백(長白)의 줄기에 틀어 앉은 조선은 곳곳이 심산(深山)이고 비처다.
그만큼 인물이 많다는 이야기...
도포 자락들은 별 볼일 없었으나 칼을 든 무사들은 모두 용맹무쌍 강단이 있었고 인삼을 밀매하는 하오배들도 한가닥 실력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흐흠! 문제가 쉽지 않군.
만약 만로방의 일전에도 그들이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하겠소? 그때가 되면 예닐곱이 아니라 수십 명은 모여들텐데." 천태림이 걱정을 보탰다. "글세...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는...
그들은 중원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뛰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도 중원의 형세를 전혀 모르지는 않을 테니...
만약 만로방이 패한다면 그들은 협조자는 협조자대로 잃고 적은 적대로 만드는 꼴이 아니겠소.
자신들의 피를 흘려 가면서 그같이 위험한 도박을 할 이유는 없지.
중원의 협조자야 적당한 자를 다시 물색하면 되는 일인데.
진강의 수하들을 친 이유는 지금 만로방이 가장 좋은 협조자이니 그들의 부탁에 마지못해 사람을 보냈겠지요.
다른 이유를 찾으라면 우리는 이만한 실력이 있으니 모두들 조심하라는 뜻을 중원에 은근히 과시하고자 함도 있을 게고... " 도연오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천태림이 동감을 표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군!" 오유가 무릎을 쳤다.
도연오와 천태림이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외당당주의 목을 그렇게 쉽게 날릴 정도면 수하들도 모두 죽일 능력이 있었다는 뜻! 그런데 그들은 외당당주의 목을 날린 후, 일제히 도신을 감추었다고 하오.
도 채주의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왜 그들이 그같은 관용을 베풀었는지 이해가 되는군요." "만로방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번 싸움에 뛰어들기를 꺼려할 것이오.
사실 그들은 중원에서 협조자를 만드는 일 보다 원한을 가지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
조선 무사들의 개입은 더 이상 없을 것이오." 내친김에 도연오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천태림과 오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그럼 이제 만로방과의 일전은 별 어려움이 없다고 보아도 되겠군." 오유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외다.
좌우 쌍용(雙龍)이 진두(陣頭)에서 비상(飛上) 할 터인데 주황, 그놈이 무슨 재주로... " 도연오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문제는 연맹 내부의 일인데... " 오유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일이라면 여기서 왈가왈부 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소.
쌍십절의 만회를 지켜봅시다.
각자가 어떤 색깔로 자신의 입장을 표할지.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총채는 틀림없이 사대행회와의 일전을 문제 삼아 대강들에 대한 반격에 나설 것이오.
총채의 공격에 대비 미리 말이나 맞춥시다." 도연오가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맞는 말이오.
우리가 여기서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언제나 장강에 폭풍을 몰고 오는 자는 마타룡, 바로 그 애송이였지." 오유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연오는 의자를 끄덕였고 천태림은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삽시간에 우울한 침묵이 그들의 어깨를 눌렀다. * * * 위무일은 산고와 함께 악양의 거대한 포목점(布木店)에 서 있었다.
포목점에서는 객들이 고른 천을 바로 옷으로도 만들어 주었다.
삭! 삭! 삭! 옷을 만드는 자의 솜씨는 능숙했다.
위무일은 옷을 만드는 동안 객잔에서 요기를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산고는 꼼짝을 않고 옷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위무일은 어쩔 수 없이 산고에게 자신이 있을 객잔을 가리켜 준 후, 삼악오들만 대동하고 객잔으로 향했다.
포목점의 회계대(會計臺)에서 계산을 미리 끝내고 객잔으로 걸어가며 위무일은 피식 웃었다.
그는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고절한 사람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주면 주는 만큼 돌아와야 할 응분의 대가...
옷 한 벌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산고의 얼굴에서 그는 지금 그 대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저것 봐! 저것!" "아이구!" 위무일을 뒤따르며 삼악오들은 악양의 화려함에 연신 탄성을 터뜨렸다.
깊게 쓴 죽립, 그 아래로 길게 늘어진 수염, 노인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당당한 풍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위무일을 뒤따르는 삼악오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외 고인처럼 의젓했다.
그러나 삼악오들은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싶기도 하고 만져 보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었다.
위무일의 눈치만 아니었다면 악양을 한바탕 난장으로 벌써 만들어 놓았을 그들이었다.
쌍십절의 회맹이 코앞이라 악양에는 적잖은 수로연맹의 사람들이 보였다.
위무일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일다경을 걸었다.
그가 찾은 객잔은 번화가에서 떨어진 한적한 객잔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 하나가 뽀르르 그를 맞았다.
악양을 찾는 자들은 당연히 동정호가 보이는 곳에서 술을 마시려 한다.
그래서 이곳 객잔은 예전부터 한산한 편이었다.
한산하다고 해서 음식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음식 맛도 제법이었고 비구(肥狗:살찐 개고기), 웅장(熊掌:곰발바닥), 표태(豹胎:표범의 태) 같은 절미도 갖추고 있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술을 마신 후 그는 심심찮게 이곳을 찾았다.
천화인을 대동한 적도 있었고 담청도 서너 번 왔었다.
담청과는 이곳 객잔에서 밤을 밝히기까지 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위무일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생각하니 악양은 담청의 그림자뿐인 듯 했다.
위무일은 담청에 대한 생각을 서둘러 지우며 점소이에게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객잔 전체에 흐르는 구수한 향...
삼악오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굳이 식탐(食貪)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만약 점소이가 때맞추어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남의 것이라도 뺏어 먹으려 들었을 그들이었다.
제법 푸짐하게 차린 상이었다. "우걱! 우걱!" "왁! 왁!" 삼악오들은 정신없이 음식에 코를 박았다.
잠깐 사이에 비워진 접시들이 탁자의 한 곳을 채웠다.
위무일은 일일이 주문을 하기가 귀찮아 아예 점소이로 하여금 계속 먹을 것을 내어 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소채와 소주(素酒)로 목을 축였다.
객잔의 주루에 앉았던 주객(酒客)들이 삼악오의 식탐에 모두 혀를 내두를 때였다. "아!" "음... " 주루 여기저기서 경탄사가 터지며 주객들의 눈길이 한 곳으로 쏠렸다.
위무일도 주객들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눈길을 돌렸다.
출렁이는 바닷물결이 수놓아진 분홍색 피자를 걸친 여인이었다.
주객들의 눈길에 부끄러운 듯 긴소매로 얼굴을 살짝 가리는 여인은 산고였다.
부끄러움도 잠시 그녀가 휘적휘적 위무일을 향해 걸어왔다.
주객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위무일에게 몰렸다.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들이었다.
위무일은 소주를 들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흘렸다.
생각하니 그의 나이도 아직은 약관...
부러워하는 주객들의 눈길! 그 또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삼악오는 배가 터져라 음식을 먹어댔다.
그리고 산고를 대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위무일의 술좌석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었다.
짙은 나무의 향과 단청 냄새...
그 폐허에는 이제 새로 지은 몇 칸의 목채(木寨)만이 서 있었다.
동정호를 굽어보며 장강을 호령하던 호반영채! 위무일은 사당(祠堂)처럼 변해 버린 영채를 바라보며 코끝을 매만졌다.
그는 허리춤의 칼을 풀어 산고에게 건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마당에 듬성듬성한 풀을 뜯고 폐허의 흔적을 지웠다.
알 길 없는 삼악오가 그의 행동을 흉내냈다.
위무일이 다시 허리를 폈을 때는 깊은 밤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팔짱을 끼고 하늘을 우러렀다. "산고, 나는 돌아왔다." 위무일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돌아왔음을 그 누가 모를까? 특별히 그 말을 입밖에 내어야 할 심사가 위무일에게는 있는 모양이었다.
휙! 유성(流星)이 그의 머리 위로 흘렀다.
제 24 장.
풍운만장(風雲萬丈).
펄럭! 펄럭! 군산은 화려한 깃발들의 잔치였다.
총채의 깃발을 선두로 한 각 수채의 깃발...
깃발들은 동정호의 바람에 나부끼며 신바람에 한껏 꼬리를 떨었으나 사람들의 마음은 그와 같지 않았다.
황평은 펄럭이는 깃발에서 시선을 뗐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는 그 뿐이 아니었다.
각 수채의 깃발 아래 늘어선 무사들...
그들도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쌍십절! 수 년을 벌여 온 싸움, 그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만로방과의 최후 일전이 결정되는 날이다.
긴장감이 맴도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리고 또 하나...
수로연맹에 몸을 담고 있는 중급 이상의 무사라면 오늘 쌍십절의 만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로방과의 일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
황평, 그는 당연히 그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장강의 주인을 가름할 춘절의 만회! 쌍십절의 만회는 바로 장강의 패주를 놓고 다툴 춘절의 만회를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황평은 고개를 뽑았다.
번뜩이는 도검, 총채의 무사들은 안광을 빛내며 겹겹이 수룡채를 에워싸고 있었다.
굳게 닫혀진 수룡채의 문 안에는 수로연맹의 모든 요인들이 모여 있었다.
황평은 수룡채에 모인 그들이 지금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만회가 열린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아마 지금은 일상의 안부를 묻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만로방과의 일전을 논하고 또 다음에는...' 황평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태부인이라는 사갈(蛇蝎) 같은 여자가 사대행회와의 일전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대강들을 질책하는 것이 보였다.
대강들은 자신의 입장을 변론할 것이고 소강들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편을 나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눈에 보지 않아도 뻔한 아수라장! '후후후... ' 황평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최후의 발악일 뿐이다.
장강 총채주의 자리는 당연히 대공자 님의 것이지.' 그가 안광을 빛냈다.
민강이 금사강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민강의 합류는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민강의 합류로 대강들은 다시 굳게 뭉쳤고 총채를 지원하던 소강들은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각 수채의 거수(擧手)로는 천화인이 장강의 총채주로 결정난 판국!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숨을 돌리기 힘들다는 것을 황평도 잘 알았다.
장강의 저울추는 언제나 힘 있는 자를 향해 기울기 마련이다.
태부인이라는 여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마타룡! 황평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삼사 년 전, 장강에 돌연히 몰아치던 광풍을...
그리고 파양호에 뿌려진 피, 만로방의 총단은 근자에도 불길에 휩싸였었다.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하나가 육대강의 힘에 맞먹는 힘을 가졌음을...
그러나...
춘절의 만회를 알리는 이 중요한 시점에 마타룡, 그는 없었다.
그는 오지 않았고 만회가 시작된 이 순간에도 그가 온다는 기별은 없었다.
당연히 와야 할 그가 오지 않다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한수의 소채주, 이만은 마타룡이 대공자에 대해 시종일관(始終一貫) 우호적이었다고 전했다.
그 때문인지 대공자의 태도는 근래에 드물게 유유자적했다.
황평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없다.
그러므로 마타룡의 마음을 알 길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타룡은 변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이 같이 느끼는 것은 그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대다수 수로연맹의 동도들도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마타룡은 민강에서 마 채주를 만났다고 했다.
마 채주가 그의 마음을 돌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형강에서 상강까지 대공자와 동행하며 죽마를 타고 놀던 때의 우의(友誼)가 되살아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비무의 결과를 숨기기로 약속한 채 대공자와 자웅을 겨룬 후 패해 은거를 택했다던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타룡이 변한 것만은 분명했다. '끝났다.' 황평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춘절의 만회까지 갈 필요 없이 오늘 모든 것이 결판 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황평의 마음은 다시 초조해졌다.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걸어나올 채주의 모습을 그리며 다시 수룡채에 시선을 던졌다.
그때였다.
털컹! 굳게 닫혔던 수룡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어!" 황평을 비롯 연무장에 도열한 수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회가 시작된 지는 이제 일다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벌써 각 채주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어 수룡채를 걸어나오고 있었다.
주위에 적잖은 눈이 있었으나 진강의 채주, 오유는 개의치 않았다. "교활한 계집!"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허어! 그것... " 한수의 채주, 이민도 탄식을 터뜨렸다. "만회가 이렇게 짧게 끝나기로는 수로연맹이 생긴 이후, 처음일 것이오." 천태림도 입맛을 다셨다.
주숙예가 만회의 시작을 알리고 산회(散會)를 선언하기까지 일다경에 불과했다.
총채와 채주들 간에 이야기를 주고받을 틈도 없었다.
고작 들은 이야기라고는 만로방과의 최후 일전에 대한 통고 뿐... "태부인의 말이 맞소.
만로방과의 최후 일전이 바로 코앞이오.
어찌 다른 일에 신경을 기울일 수 있겠소.
끌끌끌... " 도연오가 말했다.
그의 의외의 말에 오유 등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연오는 다른 채주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동지에 만로방 놈들을 들이칠 계획이라...
수하들을 미리 대기 시켜 놓기를 잘했군." 그가 중얼거렸다. "이대로 떠날 작정이오?" 오유가 안색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이대로 떠나지 않으면? 태부인이라는 여자와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겠다는 말이오? 무슨 이유로?" 도연오가 오유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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