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녀는 말을 좀더 조심할 필요를 느꼈다. 서신을 노리고 암습인까지 보내다니…… 그것도 양웅이 힘겨워할 정도의 고수를 네 명이나…… 서신에는 그녀가 생각한 이상의 비밀, 아주 커다란 비밀이 숨어 있음을 연홍은 눈치챘다. 입이 간지러워도 참아야 했다. 은자도 은자지만, 생각하니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통천하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바람을 쐬러 동정호까지 오셨습니까?" 엽광은 양웅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정중하게 물었다. "아!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위 공자……" 갑자기 야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홍이 그의 곁으로 살짝 다가서 허벅지를 사정없이 꼬집고 있었다. "위 공자님은 계십니까?" 연홍이 나섰다. "영주께서는 볼일이 있어 지금 영채에 없소이다. 군산에 갔다가 급한 일로 무산으로 간다는 기별이 왔소. 조금 시일이 걸릴 것 같은 데……"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연홍이 머리를 조아렸다. "지나는 길에 들렀을 뿐입니다. 혹시 오셨다는 소문이 들리면 다시 뵙기로 하지요. 가요!" 그녀가 양웅의 손을 끌었다. "어!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로 가잔 말이야? 가더라도 일은 보고 가야지." 양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은 무슨 일? 이제 수중에 은자라고는 땡전도 없죠? 나룻배를 사는 데 다 써버렸으니…… 천상 악양에서 화부라도 해야겠군요. 돌아갈 여비라도 벌려면……" 연홍이 탄식 섞인 목소리로 조잘댔다. 필경 엽광더러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화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 서신은 건네 주고……" 연홍이 양웅의 입을 강제로 막았다. 그녀가 양웅을 끌고 발길을 옮겼다. "왜 이래?" 양웅은 화를 냈고 연홍은 눈을 치켜 뜨며 맞섰다. 그들은 엽광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일 기세였다. 엽광은 그렇게 눈치가 없는 자는 아니다. "양 채주!" 엽광이 양웅을 불렀다. "영주를 만날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 그렇소." 양웅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채에 초빙하여 영주를 만날 때까지 쉬게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저희 영채는 객들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악양호변으로 가시면 죽선루(竹船樓)라는 곳이 있습니다. 제 이름을 대십시오.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아! 그리고 이것은……" 휙! 엽광은 양웅에게 심지가 달린 죽통을 던졌다. 엉겁결에 죽통을 받아 든 양웅이 죽통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것은 우리 수로연맹이 서로의 기찰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영채를 향해 죽통을 대고 심지에 불을 붙이십시오." "뭐 이런 것까지……" 양웅이 안색을 찌푸렸다. "아!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었군요. 여러 모로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연홍이 양웅을 뒤로 밀치며 말했다. "다시 뵙겠습니다, 대협." 그녀는 나는 듯 인사를 했다. 그녀가 양웅의 손을 잡고 호변을 향해 급하게 내려갔다. 양웅의 입은 엽광에게 무슨 말을 못 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연홍의 눈초리가 하도 매서워 입을 닫고 말았다. 그들은 호변으로 급히 내려가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통천하의 기물이 이 먼 동정호에…… 그것도 암습자들까지 데리고……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듯한데……" 나룻배를 띄우는 양웅과 연홍을 바라보며 엽광은 미간을 좁혔다. "연홍! 보자 보자 하니 정말 너무하는 군. 호반 영채의 사람들에게 너도 이제 목숨을 구걸받았잖아! 그런데도 그 서신으로 은자를 우려먹을 생각을 해!" 노를 저으며 양웅은 고함을 질렀다.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양 랑은 그놈들이 무슨 이유로 덤빈 줄 알고 있어요?" 연홍도 맞고함을 질렀다. "동정호의 파락호들이겠지! 연홍이 예쁘니까……" "웃기는 소리 마세요! 그래서…… 파락호이기 때문에 통천하의 대호걸께서 쩔쩔맸나요?" 연홍의 말에 양웅은 비로소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하니 적들의 실력은 파락호들의 실력이 아니라 웬만한 강호 고수들도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그들이 노린 것은 견혼수라는 자에게서 받은 서신이었어요." "서신?" 양웅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양 랑, 어쩌면 우리는 괜한 일에 뛰어들었는지 몰라요." "무슨 소리야?" "마타룡, 추운객, 서신을 탈취하려는 자도 양 랑이 힘겨워할 정도의 고수…… 이 서신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폭풍이 숨어 있어요. 우리들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연홍이 울상을 지었다. "음……" 양웅은 신음을 흘렸다. 적들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었다. 게다가 한 명도 아닌 네 명! 그 정도의 고수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서신을 요구할 정도면 연홍의 말대고 그 서신은 자신들이 생각한 몇 배 이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저는 이 서신이 일으킬 풍파로 매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겨 다니는 생활을 원하지 않아요." "쫓겨다니기는 누가 쫓겨다닌단 말인가?" 양웅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만약 호반 영채의 사람들이 도와 주지 않았다면 양 랑과 나의 목숨은 없었어요!" 연홍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자존심이 상한 양웅은 연홍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서둘러 서신을 줘버리자고." "서신을 줘 일이 일파만파로 더 커지면…… 그때는 정말 놈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켤 것 아니에요." "그래서 그 서신을 껴안고 걱정이나 하고 있자고?" "모르겠어요." 연홍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웅은 노질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수록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양웅이 입을 열었다. "연홍, 죽선루라는 곳에서 은연자중하며 마타룡을 기다리자. 마타룡이라면 이 서신에 천하를 뒤집어엎을 내용이 들어 있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내린 최후 결론이었다. 적들이 겁이 나서 은연자중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서신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그것은 반드시 마타룡 본인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양웅은 그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도 마타룡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었다. 최소한 마타룡이라면 혈우(血雨) 속에서 자신을 가려 줄 우산이 되어 줄 수 있을 듯 보였다. * * * 자지러지게 홍엽을 자랑하던 나무들도 급격히 퇴색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회갈색으로 변해 가는 계절…… 위무일은 작은 소(沼)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는 명경같이 맑은 물에 입술을 적셨다. 꺼칠한 수염, 퀭한 눈…… 군산에서 금후봉을 바라보는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찰박! 계곡의 물은 시리도록 찼다. 위무일은 그 물에 얼굴을 씻었다. 그가 옷깃을 여미며 허리를 폈다. 칼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깊은 계곡…… 바로 산귀가 산다는 호출이었다. 위무일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그의 마음은 군산에서와는 달리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차분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뼈, 짐승의 가죽…… 휘잉! 바람은 휑하게 뚫린 해골의 눈을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위무일은 그 육편의 잔해 가운데 우뚝 섰다. 오랫동안 참을성있게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사삭! 삭! 뱀이 수풀 사이를 기어가는 듯한 경미한 소리…… 그 소리는 점차 등을 향해 육박해 오고 있었다. 위무일은 등을 돌린 자세에서 우수를 들었다. 그의 장심이 붉게 물들어 갔다. "칵!" 산림을 울부짖는 괴성(怪聲)! 그와 동시에 세찬 경기가 그의 등을 짓쳐 왔다. 위무일은 회선풍으로 신형을 비틀었다. 그의 쌍수에서 불덩이가 번쩍였다. 타타타타탁! "컥!" 짧은 비명이 터지고 기습을 가한 자는 훌쩍 삼 장을 물러났다. 치렁치렁한 머리칼, 검게 그을린 상처투성이의 피부, 반 알몸의 사내는 짐승처럼 엎드린 채 이를 으르렁거렸다. 반인반수(半人半獸)! 그러나 위무일은 그 짐승 같은 사내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크르르……" 괴인이 등을 활처럼 움츠리며 흉광을 번뜩였다. "칵!" 그가 뇌전처럼 날며 위무일을 육박했다. 위무일도 홍운산수로 그에 맞서 갔다. 타타타탁! 장권이 난마처럼 얽혔다. 괴인의 손놀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변화 무쌍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괴인은 칼을 대신하여 수도로 추운객의 추운백변을 펼치고 있었다. 타타탁! 싸움은 점차 격렬해졌다. 이십여 합을 넘기자 위무일은 미간은 좁혔다. 그의 눈동자에 점점 핏발이 섰다. 미치광이가 된 친구, 그 친구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심…… 그는 그 친구와의 오랜만의 대면을 피를 부르는 싸움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호출로 들어서기까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위무일의 마음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악에 받치는 일이었다. 위무일은 수도에 내력을 배가했다. "익!" 그가 천지가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파파팟! 파팟! 그와 동시에 붉은 장영이 괴인을 사정없이 몰아쳤다. 타타탁! 위무일의 수도를 맞받던 괴인이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괴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위무일의 눈빛이 한광을 비쳤다. 그의 수도가 사정을 두지 않고 괴인을 뒤쫓았다. "칵!" 결국 괴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훌쩍 물러났다. 괴인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그가 위무일을 힐끔 바라보며 내뺄 준비를 했다. "익!" 악에 받친 위무일의 고함이 다시 터졌다. 위무일의 눈동자는 괴인을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려는 듯 이글거렸다. 달아나려던 괴인이 흠칫했다. 괴인은 위무일의 눈에서 다급히 시선을 떼려 했다. 그러나 마치 무엇에 달라붙은 듯 도저히 뗄 수 없었다. 천둥 같은 고함, 분노의 불덩이를 이글거리고 있는 저자! 누구인가? 누구인가…… 물은 협곡을 따라 여전히 흐르고 가을바람은 요란했다. "익!" 또 한 차례의 고함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익?"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다. 순간, 그는 당황했다. 익! 익! 익! 익! 그의 기억은 급속히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기억의 역류를 황급히 막으려 했다. 옛 기억은 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눈앞의 자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가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도록 강제했다. "담익…… 담익……" 결국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동자가 희뿌옇게 빛을 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까닭 모를 눈물이 맺혔다. "친구……"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담익은 짐승처럼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맞네. 바로 나일세." 위무일이 끓어오르는 심화를 가라앉히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무일…… 무일, 자네가 이곳에는 웬일로……"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는 담익의 눈빛, 그의 눈빛은 은근한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담익은 그 두려움을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중이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자네야말로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위무일이 냉랭하게 물었다. "나는…… 나는……" 담익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다리를 까딱거렸다. "아! 중원에는 언제 돌아왔는가?" 그가 황급히 말꼬리를 틀었다. "제법 오래되었어." "아하! 그랬었군. 마중을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 담익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천만에!" 위무일이 안광을 빛냈다. 담익은 흠칫했다. 위무일의 건조한 목소리는 담익에게는 비수였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별로 할 이야기도 없는 것 같고…… 요즘은 술도 먹지 않아서…… 나는 그만 돌아갔으면 하는데." 띄엄띄엄 말을 이으며 담익이 어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가도 되겠는가?" 그가 재빨리 물었다. 그리고 그는 위무일이 대답할 틈도 없이 등을 돌렸다. "익!" 위무일은 담익을 불렀다. 담익이 등을 돌린 채 발걸음을 세웠다. "백부를 왜 죽였는가?"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산림을 떨고 지나는 바람처럼 사면에서 윙윙거리며 담익의 귀를 울렸다. "……" 담익은 벼락을 맞은 듯했다. 그가 제자리에 서서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무…… 무슨…… 말인가? 내…… 내가 사부를 죽이다니……" 담익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떨림은 점차 거친 파문으로 확산되어 갔다. "말하게, 친구……" 그럴수록 위무일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냉랭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담익이 와락 소리쳤다. 그가 위무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일일이 청류동에서 일어나 일을 밝혀야겠나?" 숨겨져 있던 위무일의 분노는 다시 밖으로 뛰쳐 나오고 있었다. 그 분노는 담익의 분노를 단숨에 압도했다. 담익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 청류동에서…… 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는 사…… 사부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어." "좌측 늑골에 비수가 꽂혀 절명했다. 익,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누…… 누가 사…… 사부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담익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무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담익은 자신의 사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워 주었던 사부가 죽었다는데…… 결국 담익은 그런 친구였다. 범행의 흔적조차 제대로 지우지 못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가리지도 못하는…… "백부는 경계심을 잃고 있었어. 상대는 그 방심을 이용해 백부의 가슴에 비수를 쑤셔 박았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백부의 좌측 늑골에 흉수를 가할 수 있겠나?" "그…… 그렇지." "백부가 경계심을 완전히 풀 정도의 사람! 누가 있겠나? 나는 자네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네!" 위무일이 한광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아니야! 나는 아니야!" 담익이 거세게 머리를 저었다. "자네가 맞네. 익…… 만약…… 만약 아니라면 자네는 자네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주게. 이곳에는 왜? 그리고 자네는 왜…… 왜 그렇게 변했는가?" 위무일이 심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나는 아니야. 나는……" 담익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의 전신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핫하하!" 위무일은 하늘을 바라보며 돌연 호출이 떠나갈 정도로 웃었다. "산귀? 흥! 짐승으로 기어 다니는 것은 당연하지! 상강의 버러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네놈! 네놈을 사람으로 거두어 준 분이 누구냐? 백부는 네놈에게 친아버지보다 더한 애정을 쏟았지. 그런 분을 네놈은 죽였다! 네 발로 기는 짐승! 아니지. 짐승도 그 같은 짓은 하지 않아! 나는 네놈의 사지를 잘라 벌레처럼 기어다니게 할 것이다!" 위무일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종국에는 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으으……" 담익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네가 죽였다!" 위무일이 자르듯 소리쳤다. 담익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흐흐흐…… 흐흐흐……" 그가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일…… 모두 맞는 말이다. 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아끼지는 않았지. 흐흐흐……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야. 내가 죽였어. 내가…… 흐흐흐…… 흐흐……" 담익의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피눈물이었다. "사부님은 버러지를 제자로 거두는 게 아니었어.그냥 그렇게 굴러다니다 밟혀서 진물을 터뜨리며 죽게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 휘-잉! 호출에 부는 이 쓸쓸한 바람은 원래부터 불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불기 시작했는지 위무일은 알 수 없었다. 담익은 더욱 느끼지 못했을 테고…… 위무일은 이를 악물었다. 담익이 백부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러나 담익으로부터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자 그의 혼은 구천을 헤매고 몸은 천길 나락으로 굴렀다. 왜 백부를 살해했는냐고 물어야 했다. 그러나 입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모든 기억과 물상들이 파편으로 쫙쫙 갈라져 그의 생각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 "사부는 정말 나를 아꼈지. 나를…… 흐흐흐……" 담익은 여전히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위무일은 그 피눈물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워 구역질이 났다. 그의 칼은 그의 살의(殺意)를 끝없이 충동하며 도산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결국 위무일은 전신의 맥을 뺐다. 허탈했다. 짧아진 해, 산중이라 낮은 더욱 짧았다. 어스름이 지려는 모양이었다. 순간, 담익은 눈물을 멈추었다. 그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치렁한 머리칼, 뚜렷한 이목구비, 반벌거숭이의 몸은 군살 하나 없었다. 옥룡! 화룡대주로 장강을 종횡하던 바로 그였다. 담익은 등을 돌렸다. 그가 어스름 속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위무일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담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담익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질끈 동여매고 나타났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자신의 애병, 파풍도였다. 슥! 담익은 파풍도를 빼 들었다. 첨벙! 그가 칼집을 흐르는 계곡물에 던졌다. 담익은 파풍도를 천천히 내밀었다. 위무일의 비룡도도 빛을 뿌렸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석양은 장중했고 칼날에 비친 빛은 현란했다. 담익의 파풍도가 중단(中段)에서 곤두섰다. 휘잉! 바람은 두 개의 칼날에 자신의 살을 베이고 지나갔다. 순간, 파풍도가 돌연 석양을 떨구며 현란한 빛을 뿌렸다. 쇄액! 비룡도도 쾌도난마로 파풍도에 맞섰다. 쨍! 쨍! 쨍! 긴 침묵, 들리는 것은 칼 부딪치는 소리뿐…… 담익의 파풍도는 수를 더할수록 숨가쁘게 돌아갔다. 추운객의 절학, 추운백변…… 그의 파풍도에는 인정이라고는 없었다. 그것은 위무일도 마찬가지! 비룡도에는 석양보다 붉은 빛무리가 걸려 있었다. 홍운행파도법을 펼친다는 증거…… 비룡도는 담익의 몸에서 자신과 같은 빛깔을 가진 그 무엇을 집요하게 찾으려 했다. 마타룡! 옥룡! 장강을 호령하던 두 젊은 용들의 쟁투(爭鬪)…… 쨍! 쨍! 쨍! 쨍! 싸움은 격렬했지만 주고받는 초식은 무식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담익의 파풍도는 추운객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변화의 묘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것이 위무일을 더욱 짜증스럽게 했다. "왜?" 위무일은 고함을 질렀다. 비룡도에 서린 붉은빛이 일거에 기운을 더해 갔다. 쨍! 쨍! 쨍! 담익은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칼도 그의 표정도 처음의 자세를 고집했다. "말하라!" 위무일의 두 번째 고함은 호출의 물이 거꾸로 흐를 정도로 요란했다. 순간, 비룡도가 형체를 잃었다. 쐐액! 들리는 것은 천지를 양단하는 파공음뿐…… 담익은 눈을 질끈 감았다. 챙캉! 파풍도의 도신이 뚝 부러진 채 허공을 날고 있었다. 폭사탄기를 견뎌 내지 못한 것이다. 위무일의 칼은 담익의 목에 걸려 있었다. "왜?" 그가 한광을 쏟으며 물었다. "후후후……" 담익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무일, 내가 이야기할 것 같은가?" "……" 물론 담익은 자신의 일을 떠벌릴 친구가 아니다. 할 이야기가 있었다면 벌써 했을 것이고…… 위무일은 비룡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룡도가 담익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피를 흘렸다. 피는 비룡도의 도신을 매끄럽게 타고 위무일의 발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를 죽여 주게!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네 발 달린 짐승으로 돌아다닐 것이네. 사부를 죽인 짐승……" 담익의 공허한 음성…… 위무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죽여 주게. 죽음보다 더한 세월……" 팟! 비룡도가 담익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담익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혈무(血霧)를 휘날렸다. 긴 말이 필요없었다. 위무일은 이미 담익에게서 진한 죽음의 향을 느끼고 있었다. 일찍 죽여 주는 것이 그가 가장 친했던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그는 떨어져 있는 담익의 수급을 들었다. 아직도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 위무일은 소매로 그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이제 눈물을 흘리는 자는 그였다. 제 26 장. 전야(前夜). 미각지당춘초몽(味覺池塘春草夢)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연못가 봄풀의 꿈이 채 깨기도 전에 섬돌 앞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낸다. 휘-잉! 수룡채의 뜰을 휩쓰는 바람은 그 가을도 이미 바랬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직 추위를 말하기에는 일렀지만 담청은 오한(惡寒)을 느꼈다. 잠시 한눈을 팔던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주숙예는 보고를 계속했다. "각 수채는 지금 순조롭게 개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총채도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만로방의 저항도 만만치가 않을 텐데…… 각 행회와 탕백기, 철기대의 움직임은 어때요?" 담청이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그 문제를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놈들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사대행회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대행회가? 주황은 총단만으로도 우리 수로연맹을 이길 자신이 있는가 보군." 담청이 중얼거렸다. "배후를 노리겠다는 뜻인지…… 하나 총단이 무너지면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텐데. 그래도 만일을 위해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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