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2편 (12/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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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2편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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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여인이 하루는 음문이 갑자기 아프더니, 얼마 뒤에 쇠털과 같은 검고 누른 털이 음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비록 여자의 음문에서 나오는 것일지라도 털이란 피의 나머지다.
피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괴이한 일이 있는 것이니, 먼저 피를 다스리도록 하라" 여인이 안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더니 털이 나오는 증세가 그쳤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에 대사헌 이항이 조광조 등 당인들과 교제하고 결탁했다는 죄목으로 잡아다가 국문하고 곤장 1백 대를 때려 외방에 유배하였다.
연서역에 이르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문장에는 뛰어났으나 일처리 능력이 모자랐던 신광한 신광한(1484-1555)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한지, 호는 기재이다.
영상 신숙주의 손자이다.
문장에는 능했으나 일처리 능력이 부족하였다.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임을 빨리 처결하지 못하여 죄수들이 많이 적체되어 옥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신광한이 옥사를 더 넓게 지어 죄수를 수용하기를 청하였다. "판서를 바꾸느니만 못하다.
옥사를 어찌 다시 짓는단 말인가" 중종은 허락하지 않고 허자를 대신 임명하였다.
허자가 지체없이 처결을 다하니 옥사가 텅텅 비어 새로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장에는 어릴 때부터 뛰어났다.
고집이 센 종 하나가 신공을 바치지 않자 곧 시를 써서 짐짓 타일렀다.
평해군에 사는 종 막동이가 해마다 신공을 못 들은 척 바치지 않네 관청의 위엄으로 잡아오는 것 어려운 일 아니나 모름지기 내년 2월까지 바쳐야 하리 신광한이 소싯적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로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날로 늘었다.
장성하여 문형을 맡게 되자, 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나함이 꿈에 오색 새를 삼킨 것과 같은 유라 하겠다.
중국 사신 장승헌이 왔을 때에 공이 원접사가 되어 주고받은 창화시가 있는데, 장승헌이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듬해에 중국 사신 왕학이 공을 보고 치사하였다. "'황화집'을 보니 중국 사신 장승헌이 공에게 뒤진 바가 많았습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지내고 시호는 문간이다.
남곤을 구부러진 매화 등걸에 빗대어 시를 지은 남추 남추의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계응, 호는 서계, 또는 선은이다.
중종 9년(151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전한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풍채가 선풍도골처럼 뛰어났다. '촉영부'를 지어 온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남곤에게 미움을 받아 영광의 삼계로 물러가 살았다.
그때 나이 28세 였다.
남곤이 남추를 가까이 할 생각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내가 듣건대, 그대의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다 하니 시 한 수를 보여 주게" 남곤이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가리키며 시를 읊으라고 하자 남추가 즉시 응하여 시를 지었다.
한 그루 분에 심은 줄기 약하지만 천추에 눈처럼 깨끗한 자태 씩씩하구나 구부러진 네 몸을 뉘 능히 펴 주어 높이 낀 저녁 구름 곧바로 헤치랴 남곤이 그 시의 뜻이 자기를 풍자함을 알고 크게 노하여 드디어 그를 끊어 버렸다.
남추의 누이가 또한 시에 능하였는데 한번은 남추가 그에게 눈을 소재로 시를 짓게 하되 녹자와 홍자를 운으로 부르니, 그 누이가 즉시 응하였다.
땅에 떨어지니 소리는 누에가 푸른 뽕잎 먹는 것처럼 바스락거리고 공중에 흩날리니 모양은 나비가 붉은 꽃을 엿보는 것 같다 남추가 소싯적에 학업을 닦지 않고도 세상일에 능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글읽기를 권하면, 남추는 번번이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루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가 조금 뒤에 안개가 갠 뒤에 보니 남추가 점잖은 어른들과 함께 바위 위에 앉아 강독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한번은 그가 손수 편지를 써서 집 하인에게 주며 말하였다.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을 터이니, 너는 모름지기 회답을 받아 오너라" 하인이 남추의 말대로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화각 두세 칸이 바위 골짜기에 가로 걸쳐 있는데 깨끗하고 고운 것이 비할 데가 없고, 한 도인이 노승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인이 그 편지를 올리니 도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미 네가 올 것을 알았다" 바둑을 다 두고 나자, 편지 한 통과 청옥으로 만든 바둑알을 주어 보냈다.
하인이 청학동에 올 때는 9월 무렵이어서 낙엽이 길에 흩날리고 가는 눈발이 공중에 뿌렸는데, 하직하고 돌아올 때에 배가 고픈 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신발 밑에는 묵은 풀이 싹트려 하는 것이 보여 의아하게 여겼다.
청학동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따뜻하고 초목이 싱그럽게 자라나서 곧 인간 세상의 3월이었다.
남추가 죽은 뒤에는 바둑알조차 잃어버렸다 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도인은 바로 최고운이고 노승은 바로 금단선사이며 남추 또한 신선 중의 한 사람이다" 이항복에게 귀신으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 복성군 복성군 미(?-1533)는 중종의 아들인데, 경빈 박씨의 소생이다.
중종 27년(1532)에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근처에 쥐를 불태우고 흉악한 물건을 묻어 저주하는 변고가 있고 또 세자(인종)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부도덕한 말을 써 놓은 사건이 있었다.
의심할 만한 사람을 잡아 국문할 적에, 경빈이 한 일이라 지목되어, 경빈을 폐하고 서인으로 삼고 모자를 함께 국문 하였는데, 얼마 뒤에 모두 사사되었다.
백사 이항복이 소싯적에 친구의 집에 가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젊은 여자가 날마다 자기가 묵고 있는 집에 출입하며, 자기를 쳐다보곤 했다.
하루는 공부하던 친구들이 모두 외출 하였는데, 때마침 큰비가 내렸다.
이항복이 혼자 앉아 있는데, 그 여자가 또 찾아와서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항복이 그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하여 물었다. "네가 날마다 와서 나만 유심히 쳐다보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 여인이 꿇어앉아서 말하였다. "저는 본래 무당입니다.
저에게 의지한 신이 있는데 낭군(이항복의 지칭)을 뵙고자 하므로, 먼저 허락 얻기를 바랐으나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와 함께 오너라" "감히 낮에는 뵐 수가 없습니다" 밤이 되어 비는 그치고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항복이 등불을 켜 놓고 기다렸더니 여인이 와서 말하였다. "귀신이 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소년의 외모는 옥설처럼 깨끗하고, 미목이 그림 같았으며, 남색 도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항복이 관복을 입고 나가 맞이하여 읍을 하고 인도해 들어와서 좌정한 뒤에 물었다. "저승과 이승은 길이 다른데, 어찌하여 서로 만나려 하오?" 이 말을 듣자 귀신이 크게 탄식하였다. "나는 왕자 복성군입니다.
참혹한 화를 만나 집이 멸망하고 구천에서 원통함을 삭이지 못해 인간 세상의 공의가 어떠한지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기백이 나약하여 귀신인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젊으나 뒷날 반드시 크게 귀히 될 것이요, 기백이 능히 서로 접근할 수 있으며, 그 말이 또한 믿을 수 있으므로 한마디 가르침의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원통함을 푼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듣지 못하였습니까?" "제사의 고함으로 인하여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친족을 친애하는 은의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듣고 싶은 것은 공의입니다" 이항복이,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극히 원통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갖추어 말하니, 귀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참으로 그렇다면 비록 아홉 번 죽음을 겪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복성군이 무당을 시켜 과일 몇 가지로 예를 올리게 한 다음, 하직하고 떠났다.
이항복이 나가서 그를 전송하였는데 몇 걸음을 가다가 곧 사라졌다.
이항복이 허망한 일에 가깝다 하여 종신토록 말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북청으로 유배 갔을 적에 비로소 동악 이안눌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작서의 변에 옥사가 공평치 못하다며 위관을 나무란 미관 말직의 허굉 허굉(1471-1529)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굉지, 호는 징와이다.
진주의 별장에서 출생했는데, 어떤 중이 지나다가 들러 말하였다. "내일 이 집에 반드시 귀한 아들이 태어나고 장차 명신이 될 것입니다" 이튿날 과연 허굉이 출생하였다.
백부인 충정공 허종이 매우 중히 여기며 말하였다. "나의 뒤를 이어 훌륭히 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고 중종반정(1506) 때에는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우, 윤장, 조계형이 승지로 있었는데 반정하던 날 정원에 입직하고 있다가 개구멍으로 도망쳐 나와서 공신에 기록되기를 요구하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허굉이 곧 항론하여 훈권을 빼앗아 버리니 모두들 다시 논의를 통쾌하게 여겼다.
쥐를 잡아 불로 지져서 세자(인종)를 저주한 적서의 변(1527)에 허굉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근일 옥사가 공평하게 판결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송질이 나서서 항변했다. "신이 위관(재판관)인데, 무슨 일이 공평하게 판결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송질이 허굉을 자기 집에 불러 꾸짖었다. "옥사를 의논하는 것은 수상의 일인데, 그대가 어찌 미관으로 감히 말하는가" "미관은 수상의 말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허굉이 반문하자 송질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변방으로 유배 가는 회재에게 옷을 벗어준 장언량 장언량(1491-1560)의 본관은 풍덕이다.
중종 9년(15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청백한 관리로서 벼슬은 정2품의 한성판윤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이다.
중종 때에 명 나라가 건주위를 치려 할 적에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니, 이기를 도원수로, 장언량을 부원수로 삼고, 이조의 낭관인 임형수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임형수가 도원수인 이기를 찾아가 보고 어버이가 늙은 것을 이유로 종사관의 직을 사양하니, 이기는 "부원수 장언량에게 말하라"고 답하였다.
임형수가 곧 장언량에게 가서 뵈니, 장언량은 융복(군북)으로 청사에 나와서 교의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임형수가 급히 융복을 갖추어 입고 다른 종사관과 함께 서서 예를 행하고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얼마 뒤 명나라에 파병하는 일이 중지되어 가지 않게 되었다.
뒤에 임형수가 장언량을 찾아가니, 중문에 나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며 자리에 인도하고 술을 베풀어 기쁨을 다하고 파하였다.
회재 이언적이 북방 변경인 강계로 유배되어 갈 적에 날씨는 춥고 옷을 얇았다.
장언량이 그를 길에서 만나 여우갖옷을 벗어 주었다.
을사사화 때에 이기가 사람을 시켜 장언량에게 말하였다. "만일 내 말을 따르면 마땅히 큰 훈작을 얻게 될 것이오" "선인(아버지)의 정국훈(중종반정 때의 공훈)이 있으니 이것으로 이미 족하다" 장언량은 끝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 정이 중종반정 때의 원훈으로 하원군에 봉해졌다.
문과 급제한 뒤에 손을 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양연 양연(?-154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거원, 호는 설옹이다.
문양공 성지의 손자로 중종 19년(152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32년(1537)에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참판 윤안인의 말을 듣고 하루 세 번 임금에게 아뢰어 김안로, 채무탁, 허항의 간사함을 배척하여 김안로 등이 사사되었다.
영상 윤은보가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으니, 치하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자, 논상하여 자급을 올려 주었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양연이 젊을 때에 천성이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흔 살에 처음으로 글을 배울 적에 분발하여 결심했다.
그는 왼손을 꽉 움켜쥐고 "문장가가 되지 않으면 맹세코 손을 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는데 한 해 남짓하여 문리가 관통하고 시격이 청고하였다.
그는 장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부쳤다.
글방에는 둥불빛이 어둡고 연지에는 물빛이 맑도다 붓은 내가 원하는 바이고 종이도 겸해 바라노라 이 시는 문방사우를 청하는 뜻이다.
그의 장인이 그 만학이 빨리 성취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장난 삼아 답하였다. "양충의(충의는 양연의 애칭)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너무 늦도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미담으로 전하였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던 날 비로소 손을 열어 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영조가 '양충의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늦도다'라는 글을 호당에 써서 걸었다.
기생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 박신규 박신규의 본관은 밀양이다.
급제하기 전에 전주를 지나는데 마침 감사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박신규는 지나가는 유생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는데, 도내의 병사, 수사와 수령들이 다 모였다.
잔치를 파하려 할 무렵에 모든 기생들이 잔치에 참석한 수령에게 분분하게 물품 지령서인 체하를 올리니 수령들이 앞을 다투어 써서 주었는데, 한 기생이 유생인 박신규 앞에 와서 꿇어앉았다. "나는 가난한 선비로 마침 지나가다가 성대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어찌 너에게 줄 물건이 있겠느냐" 박신규가 웃으며 말하자 기생이 대답했다. "제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상공은 귀인이므로 앞길이 크게 열릴 것이니 미리 체하를 후하게 써 주십시오" 박신규가 웃으면서 수량을 많이 써서 주었다.
그 뒤에 박신규가 전라 감사가 되자 그 기생이 체하를 바치므로 기꺼이 그 물품을 챙겨 주었다.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 조원기 조원기(1457-1533)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이지, 호는 돈후재이다.
미천할 때에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밝은 허암 정희량과 교분이 깊었다.
허암이 예문관 검열이었을 때 하루는 조원기가 그를 찾아가 함께 잤다.
이튿날 높은 소리로 불러 대며 길을 메우고 찾아오는 명관달사가 매우 많았다.
손들이 떠나간 뒤 정희량이 물었다. "명사의 무리들이 부러운가?" "빈한함이 이와 같으니, 관문을 지키는 낮은 벼슬도 나보다는 나은데, 하물며 저 금마문 옥당의 선비이겠는가" "그대는 부러워하지 말게.
저들은 다만 아침 이슬처럼 잠시일 뿐이네.
그대 같은 사람은 빈궁하게 40살 살고 영달하게 40살 살 것이니, 장수는 그 속에 있네" 정희량과 만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원기가 한강을 건너는데, 배가 부서져서 물밑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조원기는 문득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다"는 정희량의 말을 떠올렸다. "정희량군이 어찌 나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는 그대로 산발한 채 눈을 감고 엉금엉금 기어서 언덕에 도달하였으나, 그것이 육지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저 손발로 기어다니는 사람이 누구지?" 조원기가 드디어 눈을 떠서 살펴보니 이미 한강 모래톱을 건너온 것이었다.
조원기는 40살이 되어 문과에 처음 급제하여 벼슬은 찬성에 이르고, 나이도 80을 넘겼다.
시호는 문절이다.
기생의 원한을 풀어준 천추사 조광원 조광원(1492-1573)의 본관은 창녕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조광원이 중국 태자의 탄생일을 경축하기 위한 천추사의 사명을 띄고 연경으로 가는 도중에 평안도의 한 큰 주에서 자게 되었는데, 전도가 별사로 인도하였다.
조광원이 안내하는 관리들에게 따져 물으니, 그 관리가 아뢰었다. "객관에 요귀가 있어 사신이 누차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이 객관을 폐쇄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왕명을 받드는 사신의 체통에 마땅히 객관에서 자야 하는데, 어찌 요괴로 인해 객관을 폐쇄하였는가" 조광원이 서둘러 명하여 객관을 수리 청소하고 숙소를 옮기도록 하였다.
그 고을의 수령이 나와 뵙고 객관에서 자는 것을 간절히 말렸으나, 조광원은 끝내 듣지 않고 그 객관에 들어가 자기로 했다.
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잠자리에 들어 자는 척하니, 담당 방의 기생 및 대령하는 하인들이 "요귀가 들이닥쳐 사신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하며 모두 달아나 피해 버렸다.
밤이 이슥해지자, 갑자기 한 줄기 음산한 바람이 불어와서 장막을 걷어올리고 촛불이 깜박깜박 거리며 거의 꺼지게 되었다.
조광원이 언뜻 깨닫고 일어나 앉으니, 들보 사이 판자에서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판자를 걷어 내는 상황과도 같았다.
얼마 뒤에 사람의 사지가 차례로 내려오는데, 가슴과 배가 머리와 얼굴에 이어져 잇달아 내려와 서로 이어 붙어서 한 여인의 몸이 되었다.
그 여인은 살갗이 눈처럼 희고 피가 묻은 흔적이 낭자하였다.
그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이었는데 온몸이 비단처럼 얄팍하게 붙어 있었다.
그 여인은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며 잠깐 나왔다가 다시 물러나곤 하였다.
조광원이 정색을 하고 호통을 쳤다. "너는 어떠한 요귀냐? 듣건대, 일찍이 왕명을 받든 사신을 여려 차례 해쳤다 하니, 그 죄가 이미 크다.
그런데 또 감히 내 앞에서 당돌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만일 호소할 일이 있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형으로 다스리리라" 요귀가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첩이 하늘처럼 끝없는 혹심한 원통함이 있어 호소하려고 오면 사신이 곧 지레 서거하였사옵지, 첩은 실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은택을 입어 오늘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첩은 본주의 기생 아무입니다.
아무 해 아무 날에 아무 사신을 이 방에서 뫼시었습니다.
밤이 깊은 뒤에 소피로 인해 바깥 섬돌로 나갔더니, 관노 아무가 기둥 아래에 누워 있다가 마침 달빛 아래에서 첩이 오는 것을 보고 뛰어와서 겁탈하려 하므로 첩이 죽음으로써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관노 아무는 본래 힘이 세기로 유명했는데, 옷을 찢어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고 안고서 동산의 큰 돌 옆으로 가서, 손으로 그 돌을 들고 첩을 그 돌 밑에 넣고 눌러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사지가 가루처럼 부서져서 이러한 꼴이 되었으니 어찌 천하의 지극한 원통이 아니겠습니까?" 조광원이 다 듣고 나서 곧 명령을 내렸다. "마땅히 처결함이 있을 터이니, 속히 물러가거라" 그 여인이 다시 울며 사례하고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광원이 시험삼아 모시는 하인을 불러 보았더니 응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므로 마침내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이 되어 본주에 들어가서 기안을 이름마다 점열하고, 아무 관노의 이름을 가리키며 즉시 포박하여 대령하게 하였다.
이어서 많은 사람을 시켜 간밤에 여인이 말한 대로 그 돌을 들어 살펴보니, 그 여인의 살갗이 지금까지 조금도 썩지 않았다.
기생의 시체를 뜰에 내놓고 그 관노를 심문하니,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모두 승복하였다.
곧장 곤장을 쳐서 죽이고 그 주의 수령으로 하여금 관을 짜고 염을 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그 뒤로 드디어 요귀가 없어졌다.
창양군에 습봉되고, 시호는 충경이다.
황진이의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은 서경덕 서경덕(1489-1546)의 본관은 당성이고, 자는 가구, 호는 화담으로, 개성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업으로 삼고 지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화담 가에 집을 짓고 도의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혹 말없이 여러 날 동안 마냥 앉아 있기도 하였다.
만일 하늘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려면 '천'자를 벽에 써서 깊이 연구하고, 다시 다른 글자를 써서 정밀히 생각하고 연구하여 밤이 새는지 해가 지는지 모르고 골똘히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지나 모든 세상의 이치가 환하게 된 뒤에 글을 읽어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으므로 공부를 한 것이 지극히 깊었지만, 후인이 내 말대로 하면 나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논설은 송대 장횡거(이름은 재임)의 학설을 주장한 것이 많았다.
마음에 스스로 터득하여 만족하게 스스로 즐기고, 세상의 시비, 득실과 영욕은 추호도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
집에 끼니 꺼리가 여러 번 떨어졌으되 늘상 태연하였다.
하루는 문생 강문우가 와서 뵈니, 화담 선생이 못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한낮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강론하였는데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강문우가 부엌에 들어가서 그 집 식구들에게 물어 보니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서 밥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못가를 산보하며 놀다가 종이를 한 치쯤 잘라 몇 글자를 써서 물속에 던져 넣으니, 한 쌍의 잉어가 물에서 뛰어나와 돌 위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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