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3편 (13/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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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3편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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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선생이 손으로 잡아서 살펴보고는 웃으면서 물에 도로 던져 넣고 말하였다. "좌도(바르지 못한 도)를 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중종 때에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선조 때에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쉬이 들지 않았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글 읽던 당시에는 세상 다스리는 경륜 뜻했는데 노년에는 도리어 안자의 가난 달게 여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 산수는 금함 없어 몸을 편히 할 수 있네 산의 나물과 물의 고기로 이 배를 채울 수 있고 달을 읊조리고 바람을 노래하니 정신을 상쾌하게 하네 학문이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참으로 쾌활하거니 헛되이 백년의 인간이 되는 것 면하게 되리 그를 추종하여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수업한 사람이 날로 문에 가득하였다.
송도에 인물이 많아서 차오산(이름은 천로임)의 문장, 한석봉(이름은 호임)의 명필 등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또한 명창 진이란 기녀가 있어 얼굴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타며 시에 능하였는데, 또한 여자 중의 호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컫기를 "송경에 삼절이 있으니, 그 첫째는 박연폭포이고 그 둘째는 화담 선생이고 그 셋째는 곧 황진이다"라고 하였다.
진이는 화담 선생이 고상하게 살며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들고 실띠를 매고 '대학'을 끼고 가서 절하였다. "소첩이 듣건대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 하였습니다.
소첩도 학문을 알므로 실띠를 매고 왔으니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화담 선생은 웃으면서 그를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이용하여 접근하되, 마치 마등이 아난타에게 달라붙는 것처럼 여러 날 동안 접근하였으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이는 부끄러움과 한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화담을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칡적삼과 베치마차림에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국내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다.
진이는 늘 말하였다. "지족 노선이 30년 동안 벽을 쳐다보고 수도했어도 나에게 지조가 무너졌는데,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냈으되 끝내 난잡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화담이 시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서사정'이라는 현판을 걸고서 그 위에서 즐겁게 놀았다.
하루는 문도들과 '주역'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을 적에 홀연히 늙은 중이 와서 섬돌 아래에서 절하였는데, 무성한 눈썹에 고리눈이며 상모가 흉악하고 사나웠다.
화담이 물었다. "너는 여기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빈도가 마치 갈 곳이 있어 집 앞을 지나는 길에 잠시 뵙기를 청합니다" "내가 죄없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너는 놓아 줄 수 있겠느냐?" "이는 천명에 관계되니 진실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중이 절하며 하직하고 가 버리자, 화담이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문도들이 모두 당황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그 까닭을 궁금해하자 화담이 말하였다. "그 중은 아무 산의 신호이다.
오늘 저녁 아무 마을, 아무 집에서 장차 사위를 맞이하여 폐백을 받는데, 처녀가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않겠느냐" 무도들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이미 환하게 아시면 어찌 구제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유곤이 특이한 공적이 있자, 범이 그 아들을 업고 하수를 건너갔고, 황공이 적도를 외자 범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였으니, 지금 만 가지 경우에도 두루 통하는 선생의 도로써 어찌 눌러 이기는 술법이 없으시겠습니까?" 화담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뒤에 말하였다. "내가 조금 시험해 보려 하나, 다만 시킬 만한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한 문생이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하자, 화담은 기뻐하면서 책 하나를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연화경' 안의 보현품이다.
옛날 고환국 손모가 이 경문을 외어 액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불가에서 '고왕관음경'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네가 그 집에 가서 모름지기 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다만 대청 위에 상탁과 향, 촛불을 갖추어 차려 놓고 그 처녀를 방안에 가둔 뒤 문을 굳게 잠그고 건장한 여종 5, 6인을 시켜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말도록 하라.
너는 대청 위에 앉아 이 경만 외우되 구두를 그르치지 말고 닭이 울 때까지 끌어가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 그 문생이 화담의 가르침을 받고 그곳에 가니, 곧 산골 마을의 부잣집 민가였다.
집들이 즐비하고 노적가리가 담장 높이 솟았으며, 마당에는 차일과 장막이 여러 군데 쳐져 있고 문밖에 신발이 가득하였다.
방안에 들어가 주인을 만나 보니, 풍채와 인품이 좋은 노인이 물었다. "손은 무슨 일로 밤에 여기로 왔소?" 그 문생이 대답하였다. "저는 과객이 아닙니다.
주인집에 큰 일이 있는데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오늘밤 주인집에 큰 액이 있으니, 만일 내 말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거의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며 말하였다. "어디서 온 풍객이 미친 헛소리를 하오?" "나는 뜻만 커서 큰소리치는 초나라의 접여가 아니라, 계책이 초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는 조나라의 모수입니다.
우선 앞으로의 일을 보고 나서 내 말이 속인 것이라면 곤장을 쳐서 쫓아 내면 될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마음으로 매우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 하고 하인을 시켜 일체 손의 말대로 대청을 청소한 다음, 상탁을 설치하고 처녀는 방안에 깊이 숨겨 놓았다.
그 문생은 곧 옷을 가다듬고 대청 위에 단정히 앉았다.
안팎이 조용하고 등불, 촛불이 환하게 밝았다.
그는 상탁 앞에서 불경을 외웠다.
삼경 때쯤 되자, 벽력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지붕의 기와가 모두 진동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숨어서 보니, 이마가 흰 큰 범이 뜰 가운데로 뛰어내려 왔는데,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소리는 뇌성같이 웅장하였다.
그 범은 멋대로 날뛰며 물어뜯고 으르렁거렸는데, 그 형세가 매우 사나왔다.
문생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불경을 끊임없이 읽을 뿐이었다.
이때에 처녀가 변을 보겠다는 핑계로 나가려 했으나 여종들이 좌우에서 그를 포박한 것처럼 단단히 붙잡으니, 처녀는 손발을 어지럽게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이윽고 범이 홀연히 번개처럼 잽싸게 떨쳐 일어나서 크게 울부짖고 창문 앞 기둥 나무를 물어뜯었는데, 이렇게 세 번 하였다.
조금 뒤에 마을의 닭이 '꼬끼오' 하고 울자, 범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처녀는 까무라쳐 버렸다.
이윽고 집안 식구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따뜻한 물을 처녀의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깨어났다.
그 문생이 불경 읽는 것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주인이 절을 하고 사례하였다. "공은 신인인데, 내가 눈이 있으되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천금을 올려 공자를 위해 축수함으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내가 우연히 남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의리로 인하여 잠시 술법을 시험해 본 것이지, 애당초 술법을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생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주인 노인이 재삼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옷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와 화담에게 고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세 곳을 잘못 읽었느냐" 화담이 웃으며 말하자 문생이 대답하였다. "잘못 읽은 곳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 그 중이 또 들렀다 가면서 나에게 사람을 살려준 공을 사례하고 또 '경문 세 곳을 잘못 읽어서 기둥 나무를 물어뜯어서 표시하였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잘못 읽었던 것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명당자리를 얻은 김언겸 김언겸의 본관은 김해이다.
대대로 고양에 살면서 곤궁함을 견디어 내며 유학을 업으로 삼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머니가 서울에 있으면서 병으로 죽자 언겸이 그 관을 모시고 돌아와 고향 선산에 장사지내려 하였다.
상여가 신원에 당도하였을 때 상여의 수레바퀴가 부러지고 말았는데 언겸이 어찌할 바를 몰라 길 옆에서 슬피 울었다.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도와주어 길 옆의 높은 곳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곧 선산으로 이장하려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언겸이 친히 잔디와 흙을 져다가 묘역을 만들었다.
이때 나라의 능을 개수하는 일로 어떤 지관이 지나다가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새 무덤을 누가 잡았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길지이다" 언겸이 그 말을 듣고 뒤따라가서 절을 하고 사정을 말하는데, 말할 적마다 눈물이 같이 떨어졌다.
지사가 측은히 여기며 말하였다. "산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왼쪽의 청룡과 오른쪽의 백호가 너무 가깝고 명당이 좁아서 비록 대지는 아니다.
그러나 산의 형세가 멀리 뻗어나서 격국이 절로 이루어졌으니, 금방(과거)에 급제하는 귀인이 두 대를 연달아 나올 것이다" 이어서 김언겸의 성명과 족계를 묻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상주는 효성이 있는 사람이오.
나는 젊을 때부터 산을 보아서 이 길을 지나간 것이 몇 번인지 모르건만, 10보 안에 이런 좋은 묘지가 있는 줄 몰랐으니, 참으로 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절대로 이장하지 마시오" 김언겸이 그 지사의 말을 따라 영구히 안장하였다.
장사지낸 지 3년 뒤에 언겸이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의 아들 현성은 호가 남창인데, 문과에 올라 벼슬이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김현성은 관리로서 몸가짐을 청고하게 하여 얼음과 황경나무처럼 맑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백성들을 잘살게 하지는 못하였다.
마침 어느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한 유생이 글로 그를 조롱하였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나 온 고을이 못살아 원망하였으며, 조금도 재물을 범하지 않았으나 관의 창고가 텅비게 되었다" 김현성이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실제 행적이다"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죽음 앞에서도 호통을 친 홍순복 홍순복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자유, 호는 고암이다.
김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홍순복이 남원에 있으면서 행장을 차려 장차 떠나려는 참인데, 아내 김씨가 띠를 잡고 그를 말리므로 홍순복이 분연히 칼을 뽑아 띠를 끊어 버리고 떠났다.
드디어 관학유생과 함께 궐문을 지키며 소를 올렸는데, 체포되어 갇혔다가 곧바로 석방 되었다.
중종 15년(1520)에 이신이 "김식이 도망 중에 있으면서 문도를 거느리고 집정을 제거하기를 도모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홍순복이 김식의 제자로서 연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할 때 승복하여 장류를 당하게 되었다.
대간이 "공사가 공손하지 않고 시정을 많이 헐뜯었다" 하여 사죄의 율로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그가 처형을 당할 적에 썩은 노끈이 두 번이나 끊어졌다.
홍순복이 감형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그대가 왕명을 받들어 처형을 감독하면서,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호통을 칠 적에 그의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암으로 신주를 쓰라" 홍순복은 타고난 자질이 개결하였다.
처조 김맹유가 고을 수령이 되었는데, 홍순복이 우연히 그 고을에 들렀다.
김맹유가 물었다. "그대가 그리도 궁핍한데, 어찌 하나도 구하는 것이 없는가?" "공이 관물을 주는 것도 부당하고 내가 받는 것도 부당합니다" "사소한 노자가 의리에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그만 둘 수 없다면 꿀 5합, 개가죽 반 벌이면 족합니다" 김맹유가 이 물건들을 싸서 주었다.
홍순복은 집에 돌아와서 다시 돌려주며 말하였다. "개가죽은 말 안장이 끊어지는 근심이 있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고 꿀은 먼 길에 갈증을 두려워한 것이었는데, 지금 다행히 면하였으니 그것을 집에 두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하므로 돌려보냅니다" 돌부처에 미혹된 자들을 깨우친 이인형 이인형(1436-1497)의 본관은 함안이고, 자는 공부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를 거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일찍이 금산군수로 있을 적의 일이다.
성종 13년(1482) 무렵에 개령현 송방리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오래되어 눈, 코, 귀, 입이 모두 마모된 돌부처 하나를 얻어, 이를 밭가에 방치해 두었다.
우연히 천식증을 앓는 사람이 그 돌부처에 절을 하고 나서 병을 고쳐 영험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빛이 비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자 여자가 분잡하게 이르고 쌀, 베, 종이, 돈, 향, 초, 꽃, 과일을 가지고 오는 자가 밤낮 끊이지 않았다.
어떤 중이 와서 향화를 주관하자, 시주자가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사찰을 짓고자 하였다.
사족의 부녀들도 친히 와서 기도하고 개령현감, 금산훈도가 모두 그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기도 하고 혹 자식을 점지해 주기를 빌기도 하였다.
이때 이인형이 그 소문을 듣고 유생 및 사령군사를 보내어 그 중과 시주자를 잡아 쫓아 버렸다.
이를 문간공 김종직이 시로 축하하였다.
쑥대밭에 버려진 지 몇 해나 되었던가 미련한 돌덩이가 무슨 신이 있으랴 처음에는 나무 거사가 먹이 구하는 것 같더니 점차로 돈 부수는 지방 사인 되었네 종신토록 장가를 못 들어도 김안로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고 한 정희등 정희등(?-1544)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원룡, 사간 구의 아들이다.
구의 호는 괴은이다.
조광조 등과 함께 기묘사류에 속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문을 닫고 틀어박혀 병을 핑계하고 자리에 앉아 18년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며느리를 맞아 예를 드리는 날에 일어나 다니기를 평시처럼 하니, 집안 식구들이 비로소 병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정희등은 조행이 독실하고 식견이 매우 넓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한차례 글을 읽되 비록 시간이 급하더라도 중지하지 않고 날마다 법도로 삼아 깊이 자득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가 되고 중종 29년에 문과 급제하여 교리, 필선을 지냈다.
정희등이 상처를 하자, 김안로가 딸의 배필로 삼으려 했다. "차라리 종신토록 장가를 들지 않더라도 권세가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 정희등이 끝내 끊어 버리고 응답하지 않자 김안로가 매우 유감으로 여겨 벼슬길이 막혔다.
김안로가 망하자 비로소 청직에 선발되었다.
정희등이 본디 진복창의 사람됨이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구수담이 진복창의 재주와 기예를 크게 인정하여 극력 천거 발탁하므로, 정희등이 큰 소리로 반대하였다. "훗날 나라를 그르칠 수도 있는 간인을 시론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되오" 진복창이 정희등에게 유감을 품은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구수담도 정희등이 너무 너그럽지 못한 것을 그르게 여겼다.
명종 즉위년(1545)에 정희등이 지평의 직에 있으면서 아뢰었다. "구수담, 박광우, 김저가 일찍이 옥당에 있으면서 신과 함께 이조에서 대간을 뽑을 때에 잘못 선발한 실수를 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간신 진복창을 지칭한 것이었다.
명종이 크게 성내어 정희등을 죄주려 하니, 대신이 회계하였다. "정희등이 강직하게 직언한 것을 죄주어서는 옳지 못합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 관원이 모두 교체되었다.
정희등이 출사하여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걷어내 불태우며 말하였다. "사군자가 간인이 앉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숙연해 하였다.
정희등이 용천으로 유배되어 갈 적에 어머니 김씨가 길까지 쫓아와 말하였다. "네가 젊을 때부터 정직하게 살아왔으니, 죄를 얻은들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느냐.
지금 영결하게 되니 나는 실로 할 말이 없다" 길에서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희등은 이날 밤에 곤장 맞은 여독으로 죽었다.
뒤에 구수담이 죄를 받아 죽을 적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진복창의 간사함이 이에 이를 줄 몰랐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원룡(정희등의 자)을 만나겠느냐" 정희등이 죽게 되자, 가산은 관에 몰수되어 염습할 수조차 없었다.
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울고 있을 뿐이었는데, 한밤중에 도성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명 3백 필을 거두어 모아 주면서, "누구인지 묻지 말라" 하였다.
장사지내는 날 영남에서 선비 1백여 인이 와서 조문하였는데, 모두 부의를 냈지만 성명을 말하지 않고 갔다.
글은 배우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아들을 가르친 임형수 임형수(1504-1547)의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 호는 금호이다.
중종 26년(1531)에 생원이 되고 중종 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한 뒤에 설서를 지냈다.
수찬으로 회령 판관에 임명되어 임지로 나가는데,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끼만을 먹고 어떤 때에는 수일의 분량을 한꺼번에 먹으면서 말하였다. "장수가 되는 사람은 이러한 습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변방의 오랑캐를 잘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고, '오산가' 수백 구를 지어 북방의 풍물을 기록하였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사 당할 때 의기양양함이 평일과 같았다.
그는 태연히 안뜰에 들어가 부모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임형수는 채 열 살이 못 된 아들을 불러서 경계하였다.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 아들이 돌아서자, 다시 불러 말하였다. "만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는 사약을 끌어다가 끓어 앉아 마시었다.
어떤 종이 울면서 안주를 올리니, 임형수가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였다. "상여꾼들이 벌을 줄 때에도 안주를 쓰지 않는 법인데, 이것은 어떤 술이냐" 임형수는 호당에 있을 당시 퇴계 이황과 같이 있었는데, 이황에게 사나이의 호쾌한 취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눈이 산에 가득히 쌓일 때 검은 돈피 가죽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긴 화살을 허리에 차고, 어깨에는 천근 짜리 센 각궁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달려들어가면, 큰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천만 그루의 나무가 진동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 일어나서 길을 헤매며 달아날 때에 곧 활을 한껏 잡아당겨 쏘아 맞히고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그 돼지의 멱을 딴 다음, 고목을 베어 불을 피워 놓고 긴 꼬챙이로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때 호상(걸상)에 걸터앉아 고기를 저며서 먹으며 큼직한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따뜻하게 데워서 시원하게 마신다.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비단처럼 펄펄 내려 취한 얼굴에 흩날리게 된다.
이것이 장쾌한 일이네" 그 말을 들은 이황은, 임형수의 인품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가 하던 말을 뇌었다. "그 기상의 호탕함을 지금도 상상하겠다"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일컬어진 김구 김구(1488-153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대유, 호는 자암이다.
예조 판서 김예몽의 증손이다.
16세에 한성시에 장원하고, 중종 2년(1507)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동왕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에 부제학으로서 개령으로 귀양갔다가 남해로 옮겨 섬 속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중종 26년에 임피로 옮겼다가 동왕 28년에 석방되자, 예산으로 달려가서 부모의 분묘에서 곡하고 추모의 정을 펴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분묘에 올라 눈물을 흘리니, 그 자리에 있던 풀과 나무가 다 말라 버렸다.
그로 인해 병이 들어 1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김안국이 소싯적에 생원, 진사의 회시에 모두 장원이 되었는데, 방을 발표할 때에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여 진사는 2등이 되니, 평생 그것을 한으로 여겼다.
김안국이 시관이었을 때 김구가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되자, 모든 시관이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였지만, 김안국이 분연히 말하였다. "왕희지의 글씨와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김구는 드디어 두 장원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이듬해인 중종 15년(1520) 봄에 김구의 부인이 말 한 필에 짐 한 바리를 싣고 종 5, 6명을 데리고 김구의 적소를 따라갔다.
그때 김식이 도망 중이어서 현상을 걸고 그를 체포하는 영이 매우 엄하여, 갈림길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지키며 여행자는 모두 수색 검문한 뒤에야 보냈다.
경상감사 반석평이 노상에서 한 부인의 행차가 붙잡혀서 가지 못하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양곡을 주고 또 감영의 소속 아전을 시켜 그 일행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김구는 마침내 죽림에 집을 짓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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