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문장이 기이하고 필력이 굳세어서, 위의 종유와 진의 왕희지의 필법을 사모하여 본받았다. 중국 사람이 자기 글씨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뒤로 글씨를 쓰지 않아서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김구의 필법을 '인수체'라 했으니, 이것은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김구가 한번은 옥당에 당직하고 있을 때이다. 달밤에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나가 보았더니, 임금이 걸어서 옥당까지 오고 별감이 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김구가 종종 걸음으로 나가 엎드리자 임금이 말했다. "달이 이처럼 밝으므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내가 이곳에 이르렀다. 어찌 임금과 신하의 예로 대하랴. 마땅히 벗으로 서로 대해야 한다"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의이다. 예견과 지혜로 엄청난 화를 면한 이자 이자(1480-1533)의 본관은 한산이고,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14년에 음성으로 물러나 살면서 호를 음애라 하였다. 그 뒤 충주의 토계로 이사하여 집 이름을 몽암이라 하고, 호를 몽옹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54세에 죽었다. 그곳에 서원이 있다. 이자가 중종 13년(1518)에 조선 개국 이래로 말썽이 되었던 이씨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는 임무를 띤 종계변무주청사로 한충, 남곤과 함께 연경에 갔다. 그곳에서 남곤이 병에 걸리자, 한충은 간호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저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선비들의 씨를 없애고 말 것이다" 이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이 간사한 인물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만리나 되는 타국에 함께 와서 죽어 가는 꼴을 어떻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이자는 끝까지 남곤을 돌보아 죽지 않도록 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 때에 이자가 잡혀갔다가 석방이 된 것은 남곤이 지난날 간호 받은 일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가 김안로와는 인척 관계가 있고, 또 주계군 이심원에게 같이 글을 배운 사이이지만 두 사람이 평생토록 행한 일들은 선행과 악행이 서로 반대가 되었으니, 김안로는 언제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기묘사화 뒤에 이자가 용궁으로 쫓겨나 있었는데 중종 27년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함창에 있는 자기 선산에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궁을 지나면서 이자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자를 꺼려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시험삼아 동정을 탐지해 보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이자는 그의 마음 속을 먼저 환히 들여다보고 김안로가 그곳으로 올 때쯤 되어 홰나무꽃을 달인 물에 얼굴을 씻고 이불을 두르고 앉아 김안로를 맞았다. 김안로가 이자의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음애공은 이제 끝장이 났다. 염려할 게 없다" 술을 마구 마셔 위장이 못쓰게 된 유운 유운(1485-1528)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종룡, 호는 항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호하다가 배척을 당하여 파직되었으며, 2년 뒤에는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유운은 성격이 활달하고 조행에 유의하지 않아 당시 집권 세력의 논의에 용납되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단양군의 객사에다 시 한 편을 써 놓았다. 흉측하고 미련한 돌 모두 주워다 깨끗한 물 흐르는 데다 고루 깔아나 볼까 바람도 잡고 바다신마저 가두고서 그 뒤에야 나의 배를 띄우리 간교한 무리들이 그 시를 외워 권하면서 유운이 신진 사류들의 고상하고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아 이런 시를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4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자 그날로 임금에게 취임 인사를 하고 곧장 의금부로 달려가서 감옥의 문틈으로 그곳에 갇혀 있는 조광조의 자를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오래 전부터 일이 있으리란 것을 알았으나 이런 극한 상황에까지 이를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나" 그는 조광조를 극력 비호하다가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잡고 있던 자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해치려고 하여 일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놓이자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위장을 버려 죽음에 이르렀다. 중종 13년 무렵에 독서당 관원과 선배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뒤에 조광조가 유운과 함께 자게 되었다. 밤중에 유운이 술이 다 깨지 않아 벗은 채로 일어나 조광조를 밟고 넘어갔다. 난간에 서서 소변을 보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자, 조광조가 준엄하게 말했다. "종룡(유운의 자), 이게 무슨 꼴인가?" "이게 좋은 걸세. 자네가 부르짖는 '소학'의 도리는 본받고 싶지 않네" 유운이 부끄러움 없이 이렇게 말하자 조광조 또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풍채와 인품을 아껴서 단지 언행을 단속하도록 권면할 뿐이었다. 조정과 저자를 숙연하게 한 대사헌 최숙생 최숙생(1457-152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자진, 호는 고재이다. 성종 23년(14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중종 14년(1519)에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최숙생이 사헌부 대사헌이었을 적에 서울 사대문 안의 무당들을 모두 내쫓아 동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와 서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에 모이도록 명령을 내리고, 성남에 있는 비구니들이 사는 건물을 철거시켰으며, 불상을 헐어 버리고 중들이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집 가운데 규정을 위반하고 멋대로 지은 칸살은 철저히 수색하여 죄를 다스리는 동시에 위반한 칸살은 여지없이 철거시키는 등 무너진 기강을 다시 일으키는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자 조정과 저자가 숙연해져 범법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그 무렵 이세정이 경서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에는 정통하고 능숙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써 이장곤, 성몽정, 김세필, 김안국, 김정국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이세정은 성품이 치밀하지 못하고 산만하며 옹졸하고 우직하여 재간이 없었으나, 같은 시기에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힘을 모아 조정에 추천하여 청양헌감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최숙생이 새로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이세정의 여러 제자들이 남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청양헌감에 대하여 넌지시 부탁하였다. "우리 스승에게는 학문과 깨끗한 지조가 있으니 조심스럽게 대하고 고과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마시오" "그렇게 하겠소" 최숙생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러나 최숙생이 충청 감영에 도착하자마자 청양현감을 근무평점을 꼴지로 매겨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뒤 최숙생이 갈려서 중앙으로 돌아오자 김정국 등 세 사람이 최숙생을 찾아가 따졌다. "충청도 한 도 안에 교활한 관리로 주민을 해롭게 하는 자가 그렇게도 없어서 하필이면 조세징수 실적이 부진한 자의 고과에 꼴지를 매겼단 말이오. 당신의 성적 고과가 잘못된 것 아니오?" "다른 고을 수령의 경우는 비록 교활하다 하더라도 도적은 제 하나 뿐에 불과하므로 주민들이 오히려 견뎌 낼 수 있소. 청양현감 자신은 비록 깨끗하긴 하지만 통제불능의 큰 도적인 고을의 여섯 아전이 그 밑에 있으니 주민들이 견딜 수가 없소. 그리고 또 뱃속이 텅빈 사람이 어떻게 한 고을을 다스리겠소?" "스승님의 뱃속에는 육경이 꽉 차 있는데 어찌하여 텅비었다고 말하시오?" 김정국이 묻자 최숙생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스승 뱃속의 육경을 모두 가져다 나누어 자신들의 창자와 뱃속에다 가득 채워 가지고 그것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출세를 하였으니, 당신 스승의 배가 아무리 크더라도 거기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고 중종반정을 도모한 성희안 성희안(1461-151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우옹, 호는 인재이다. 판관이었던 아버지 성찬이 덕천군 이후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희안을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희안을 낳을 무렵 꿈에 신인이 와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짚고 다녀 너의 집안을 번창하게 하라"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태어난 성희안은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종 16년(1485) 21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2년 뒤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면서 동생 희옹과 같이 산 속에서 마를 캐어 아침, 저녁의 제물로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피곤해서 동생과 함께 바위 위에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므로 깜짝 놀라 깨어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안이 즉시 손을 휘두르며 돌을 던져 호랑이를 쫓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효성에 감동되어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종이 그를 불러다 위로하고 새매를 내려 주었다. "너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를 특별히 내려 주니 사냥하는 도구로 삼으라" 희안이 임금의 은총을 받으면 항상 골수에 새겨 두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기로 다짐하였다. 연산군이 양화도의 망원정에서 놀이할 때에 희안이 이조 참판으로 그 행차에 수행하였다. 연산군이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령하자 희안이 이렇게 지었다. 성상의 마음은 원래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의 경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자신을 은근히 비난하며 풍자하는 내용이라고 하여 몹시 화를 내며 그의 벼슬을 파면하고 기용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음탕하고 포악함이 날로 더 심해져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희안이 매우 분개하며 어지러운 정국을 안정시켜 질서가 있는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뜻이 있기는 하였지만,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박원종이 무사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와 같이 도모하고 싶었으나 만에 하나 뜻이 같은 사이가 아니면 어쩌나 하고 그에게 말을 꺼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우연히도 같은 동리에 사는 신윤무란 사람이 박원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알았다. 희안이 그 사람을 시켜 은밀한 뜻을 시험하게 하였더니 박원종이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울분을 쌓아온 지 오래이다" 희안이 그제야 밤낮으로 원종의 집에 가서 통곡하며 말했다.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된 꼴을 어찌 보기만 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은 마침내 반정할 결심을 하였다. 이조 판서인 유순정이 당시에 인망이 있었고 그도 반정 거사에 참여할 뜻이 있음을 알고서 연산군 12년 9월 2일에 충성심으로 분기한 인사들이 앞장서서 임금을 폐위시켜 연산군으로 삼고, 지성대군을 추대하였다. 그가 곧 조선조 11대 임금 중종이다. 그 뒤 국가를 안정시킨 1등 공신으로 공훈명부에 기록되고 창산부원군에 봉하여졌다. 박원종, 유순정 등과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시킨 뒤에 서로 번갈아 가며 임금을 보필하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반정삼대신이다. 중종이 삼대신을 대우하기를 보통 신하들과 다르게 하여 조정에서 물러 나갈 경우는 그들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문을 나간 뒤에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데, 삼대신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성희안이 노쇠하고 병이 들어 조정에서 물러나올 때에 매우 느린 걸음으로 문에 이르자 중종이 말하였다. "정승은 성상께서 기립하여 계심을 모르십니까? 걸음걸이가 어찌 그리도 느립니까?" 성희안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늙은 것이 죽을 곳을 몰랐습니다. 옛날 한나라 때 곽씨 일족이 죽음을 당한 화가 곽광이 선제를 모시고 수레를 탄 시점에서 싹텄으니, 신하로서 임금이 두려워하는 위엄을 지니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한 자는 없었습니다" 중종 2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53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시애난 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신용개 신용개(1453-1519)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개지, 호는 이요정 또는 송계이며, 신숙주의 손자이다. 성종 14년(148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5년 뒤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연산군 때에 영광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형조 참판으로 불려 왔고, 대제학에 올랐다. 신용개는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 너그러웠으나 언뜻 바라보면 범할 수 없는 의젓한 위엄을 지녔다. 이시애의 난리에 그의 아버지 신면이 함길도 관찰사로 갑자기 닥친 변고에 대응하지 못하여 대청 위의 후미진 다락 틈에 숨어 있었다. 적도들이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막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느 아전이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마침내 살해되고 말았다. 신용개가 장성하자 그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겠다고 하여 홍유손과 교유하면서 여러 차례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생김새와 성명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전이 서울에 왔는데 신용개는 당시 의정부 사인이었다. 그래서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틈타 도끼를 끼고 그 아전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는 홍유손을 시켜 마치 관청의 일로 서로 알려야 할 사안이 있는 것처럼 하여 불러내게 하고는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였다. 신용개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가끔 늙은 여종을 불러 서로 큰 술잔을 기울이며 취하도록 마셨다. 국화 여덟 분을 길렀는데, 마침 가을철이어서 국화가 활짝 피었으므로 마루에 들여놓았더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을 듯하였다. 신용개가 그 향기를 사랑하고 완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집안 사람들에게 일렀다. "오늘은 여덟 분의 훌륭한 손님이 찾아올 터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해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해가 지려고 하는데도 조용하기만 하고 손님은 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신용개가 말하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러는 사이 달이 떠서 빛이 방안으로 들어오니 꽃빛은 난만하고 달빛은 희고 깨끗하였다. 신용개가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였다. "이것이 나의 아름다운 손님이다" 그가 여덟 개의 국화 화분을 가리키며, 각각 앞에다 좋은 안주를 놓았다. "내가 마땅히 술을 권하리라" 그가 국화 앞에 은도배로 각기 두 잔씩 따라 주고 자신도 취하였다. 중종 11년에 정승으로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5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경이다. 대사간을 시켜 준다고 꾀는 심정을 꾸짖은 성세창 성세창(1481-1548)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번중, 호는 둔재이다. 예조 판서 성현의 아들이며, 김굉필의 제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23년에 국문을 받고 평해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벌받은 뒤에 불려 왔다. 인종 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장연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보다 앞서 중종 14년에 승지로 있으면서 시국이 위태롭게 될 기미를 알았다. 오래 전부터 김정, 이자와 친하였는데 매번 그들에게 서슬이 너무 날카롭다는 것으로 경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임명되어 집에 있었는데, 심정이 그가 청류들과는 뜻이 다르다고 여겨 성세창의 집을 찾아와 사간원 대사간을 시켜준다고 꾀었다. 성세창은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사양했다. "용렬하고 우둔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책을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지난날 국가에서 백면서생들을 처벌한 것은 실제로 애매하며 그들을 처벌하자고 북문으로 들어가 비밀리에 아뢴 것은 매우 올바르지 못하오. 언관(간관)의 직책에 있는 자는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의당 바로 간하여 그 잘못을 규명해야 할 것이오" 심정은 얼굴빛이 변하여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 일로 당시 재상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남곤이 죽자 정광필이 다시 정승이 되었다. 중종 23년에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때 성세창이 이조 참판으로 있었다. 성세창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식이 뛰어났는데, 그의 문장은 매우 법도가 있고 우아하였다. 오랫동안 예문관에 있다가 대제학을 맞게 되자 여러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필법, 서화와 음률에도 정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절이라고 지목하였다.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세양 소세양(1486-1562)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언겸, 호는 양곡이며 도사 소자파의 아들이다. 중종 4년(150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갔다. 정언으로 임금을 알현하고 모시면서 현덕왕후의 위호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청하였는데, 말씨가 의분에 차 있으므로 즉시 중종의 윤허를 받기도 하였다. 신광한, 정사룡과는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으며, 이행이 소세양을 가장 칭찬하고 마음을 터놓았다. 그가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다. "소세양은 당연히 대제학이 되어야 할 인재인데 하위직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정대부에서 자헌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행이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세양이 부모를 봉양하려고 청원하여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이행이 또 아뢰었다. "문장이 뛰어난 인재를 외직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이 즉시 다시 불러들이도록 명하였다. 벼슬은 판중 추부사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필법은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맑고 한가한 복을 누린 지 20년에 이르르니, 근세에 글 잘하는 사람 치고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이로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소세양이 우찬성이었을 때에 동료였던 상진은 오히려 벼슬이 소세양보다 낮았었다. 그러다가 상징이 정승으로 임명됨에 이르러 학을 그린 두루마리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써 주기를 요청하자 소세양이 한 편의 절구를 써 주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에 강가는 어둠이 깔리고 붉게 시든 여귀꽃은 양쪽 언덕을 음산하게 하네 부질없이 가을 바람을 향하여 옛 짝을 불러보건만 정처 없는 구름과 물 만겹으로 깊숙이 흘러간 줄 모르는구려 백년 후를 내다보고 소나무를 심은 황형 황형(1459-1520)의 본관은 후창이며, 자는 언평이다. 성종 11년(1480)에 2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6년 뒤에 중시에 장원하여 승지를 역임하고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황형의 시골집이 강화도의 연미정에 있었는데, 그가 그곳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대감께서 이미 늙었는데 무엇하러 그렇게 많이 심으십니까?"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에 김천일, 최원이 들어와서 강화도를 보전하는데, 배와 기구를 만들 때 모두 그때 심었던 나무를 베어다 쓰고도 남았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에 양호가 선조대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고 할 적에 관에서 그 소나무를 베어다 행궁을 짓고 집과 성책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제야 황형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황형이 박원종을 대신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던 날 박원종이 술을 가지고 동쪽의 교외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장군은 잠깐 머무는 것이 좋겠소'라는 여덟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술을 권하는 틈에 가만히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반정 계획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형은 취한 것을 핑계로 못 본 체하고 갔다가 포천에 이르러 반정된 것을 들었다. 강화도에 있던 옛 집이 지금은 월곶진의 관사가 되었는데 건물을 지은 구조가 튼튼하여 새 것처럼 전해지며, 그 집을 고치려고 하면 문득 재변이 생긴다고 한다. 그 집의 뜰 아래 무더기로 된 대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그가 대마도에서 회군할 때에 가지고 와서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62세에 이르러 죽었으며, 시호는 장무이다. 관찰사를 훈계한 뒤 군수 자리를 버리고 떠난 조언형 조언형(1469-152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형지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낭관을 역임하였다. 조언형의 성품은 악한 것을 미워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적당히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행동을 같이할 수 없어 이조 낭관을 거처 집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좌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다. 강혼과는 어려서부터 가까운 사이였는데, 자라서도 우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혼이 연산군 때에 하는 짓을 보고는 분하게 여기며 미워하기를 마지않았다. 중종반정 초기에 단천군수로 있었는데, 강혼이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서 단천 고을에 순시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조언형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행장을 꾸리게 하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여 탁주 한 통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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