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2편 (2/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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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2편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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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다.
첫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려했지만 그 사람은 정색을 하며 고집하였다. "나으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화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둑은 졌지만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 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으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덕원은 국수라고 알려진 자신의 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이경휘 이경휘(1617__1669)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군미, 호는 춘천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가 되고, 22년(1641) 정시문과에 아우인 이경억(1620__1673)과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들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이시발은 태양 두 개가 떠오르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이경휘가 6세 때 "항우전"을 애독하였지 이시발이 이경휘에게 나와서 감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자 이경휘는, '제가 들으니 감사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포악한 사람에게 어떻게 절을 할 수 있습니까' 하며 거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경휘가 이조 함의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현종이 의관으로 있는 양제신을 지방 수령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으나 듣지 않았다.
현종이 정청(인사권을 가진 병조나 이조의 관원들이 집무하는 궐내의 사무실)에 다음과 같이 힐문하였다. "양제신을 수령으로 의망(관원 임명시 이조, 병조에서 세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일)하라고 명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의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경휘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의관이 수령에 제수되는 일은 전례에 없는 일입니다.
어명은 이미 받았으나 감히 그 명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 현종은 이경휘의 직을 갈고 양제신은 양천 현감으로 제수하였다.
언젠가 현종은 정승 정태화에게 이경휘 형제 중 누가 더 나으냐고 물었다.
이 때 정태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 형제는 난형난제라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말하였다. "내가 보기엔 이경휘가 장자 재목이다.
이상진(우의정을 역임, 청백리에 뽑힘)이 전에 그의 막료로 있을 적에 자신의 진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때였는데 이경휘만은 알아보고 많은 다른 추천을 배제하고 그를 적극 천거한 것을 보았다." 이경휘의 추천을 받은 이상진은 뒤에 명재상이 되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이경휘의 안목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효종의 제삿날 하루 종일 통곡한--송 장군 송 장군의 본관이 광주라는 사실만 전할 뿐 이름은 알 수 없다.
병자호란에 대해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고 있던 효종은 인재를 전국에서 구하였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을 내려 천근을 들어올릴 수 있는 장사가 있으면 역마를 태워 서울로 보내라고 하였다.
송 장군은 광주에 있는 공조라는 사람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조가 마당 한구석에 있는 큰 바위를 가리키면서 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 장군은 그 바위를 번쩍 쳐들었다가 가볍게 다시 내려놓았다.
깜짝 놀란 공조는 이 사실을 즉시 광주부에 고하였고, 광주 유수는 즉시 그의 힘을 시험하여 공조의 말이 사실로 입증되자 송 장군을 깨끗이 목욕시키고 새옷으로 갈아입힌 뒤에 서울로 올려보냈다.
금원에서 활쏘는 연습을 하고 있던 효종은 급히 송 장군을 입궐시켜 그의 힘을 시험하여 보니 광주 유수가 올린 내용과 일치하였다.
효종은 우선 그의 힘을 칭찬한 귀에 그에게 많은 음식을 하사하였다.
많은 양의 음식을 그 자리에서 거뜬히 먹어 치우는 것을 본 효종은 그에게 의관을 내려 주고, 또 금호문 밖에 그의 집을 마련해 주도록 조처하였다.
송 장군은 효종의 특별한 배려로 궁중의 한 여종과 혼인도 하였다.
효종은 그에게 작은 고을을 맡겨 보라고 여러 번 이조에 명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그에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경륜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우선 변방의 수비를 맡겨서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자는 이조의 청이 받아들여져 송 장군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북로 진장이 되었다.
송 장군이 멀리 임지로 떠난 뒤에도 효종은 그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그에게 물품을 하사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서울로 불러 올려 다른 벼슬을 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1659년 음력 5월에 갑자기 승하하게 된다.
효종의 승하 소식을 들은 송 장군은 정신없이 서울로 와서 대궐문 밖에 엎드려 눈물이 말라 피눈물이 나오도록 울고 울고 또 울었다.
효종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혼인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장군의 아내는 국상이 끝나자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북병사는 임지를 마음대로 이탈한 죄를 물어 송 장군을 군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조정의 의논 또한 그의 처벌을 주장하였는데, 효종에 대한 그의 충심을 참작한 현종의 특별한 배려로 석방되었다.
석방으로 인해 죽음은 겨우 면하였으나 의지할 곳을 찾지 않고 남루한 차림으로 용인 등지를 전전하면서 거지 노릇을 하였다.
해마다 효종의 제삿날이 되면 그는 산중으로 들어가 온종일 목이 쉬도록 통곡한 후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음식을 멱을 때면 마치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먹는 모양과 비슷하였으므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그의 걸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의로운 신하의 울음소리에 여름서리가 내린다고 한--김홍욱 김홍욱(?__?)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문숙, 호는 학주다.
인조 초에 진사시, 인조 13년(163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 지평, 수찬 등 삼사의 벼슬을 역임했다.
황해 감사로 있을 때 날씨가 몹시 가물어 효종은 국정 전반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건의를 전국에 널리 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개 천재지변이 있을 때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서 재난을 면한다는 염원으로 왕부터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히 함은 물론, 온 나라안에 널리 알려 정치에 대한 좋은 의견이나 솔직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행한 왕가의 관례로 기우제를 지내는 일과 흔히 병행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 때 김홍욱은 왕이 금기하는 민회빈 강씨의 일을 구언상소장에 다음과 같이 새삼 거론하여 노여움을 샀다. "한 여인에게 원한을 사면 3년간의 가뭄을 불러오고 슬피 우는 의로운 신하의 울음소리에 여름 서리가 내린다고 합니다.
지난날 강씨 일문의 억울한 죽음이 어찌 한 사람의 원한에 그치겠습니까.
천지의 온화한 기를 손상하고 지금 전에 없는 가뭄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극도로 화가 난 효종이 친국하였다.
본시 몸이 허약한 김홍욱이었으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임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옛적에 훌륭한 임금들이 바른말 하는 신하를 벌주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임금이 선비를 죽였다는 후세의 비판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신의 소망은 지하에 가서 옛 충신 용강과 비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효종은 분을 참지 못하며 말하였다. "옛날의 용강과 비간이 너처럼 역적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더냐!" 그리고 끝내 김홍욱을 죽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 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직언한 김홍욱을 장하게 여겼다 뒤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심양에서 봉림대군의 시중을 든 영리한--논학 논학은 박노(1584__1643)의 종이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간주인 박노를 따라가 봉림대군의 시중을 많이 들었는데, 그 때 논학의 영리함이 봉림대군에게 인정되어 사랑을 받았다.
봉림대군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봉림은 논학을 시켜 아기의 사주를 보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점을 보고 돌아온 논학이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진 봉림대군이 몸이 달아서 점을 본 내용을 다그쳐 묻자 논학은 봉림을 귀를 빌려 귓속말로 보고하였다. "아기가 앞으로 임금이 된답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봉림이 논학에게 점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을 신신 당부하였음은 물론이다.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에 세자 소현이 죽자 자연 봉림이 세자에 오르고 왕위를 잇게 되어 결국 점괘대로 그 때의 아기는 뒤에 현종이 된다.
봉림이 등극하여 임금(효종)이 되자 지난날의 정을 잊지 않고 논학을 불러 무슨 벼슬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논학은 아무 벼슬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효종은 그에게 담비 가죽을 하사하였다.
논학은 술먹는 일로 낙을 삼았다.
돈이 떨어지면 하사 받은 담비 가죽을 잡히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신 후엔 그것이 왕의 하사품임을 밝혀서 도로 찾곤 하였다.
심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청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리고 있는 정명수, 김돌의 처벌을 청나라에 강력히 요구하다가 도리어 청나라에서 사형된 정뇌경(1608__1639)을 구명하지 못한 책임을 주인 박노에게 돌려 비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번엔 의주 부윤 황일호(1588__1641)가 명과 청의 싸움에서 명나라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 청에 알려져 또 사형을 받게 되었다.
이날 박노의 무능함을 욕하던 관원들이 속수 무책으로 있자 논학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대신들의 앞에 나가 지난날 주인이 받은 수모를 앙갚음하였다. "지난번에 우리 영감님이 필선(세자시강원의 정4품 벼슬.
정뇌경을 일컬음)을 구하지 못한다고 그렇게들 탓하더니 어찌하여 이 많은 나으리들께서 의주 부윤의 목숨 하나를 못 구한다지요?" 효종 2년(1651)에 청나라의 강요로 금안군의 딸을 공주로 속여 청나라 왕실로 시집 보내게 되었다.
이 때 논학이 배행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통역 정명수의 횡포가 심하였다.
이를 보고 참지 못한 논학은 공주의 가마 앞에 서서 공주의 명을 받아 정명수를 치니 정명수는 꼼짝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매를 맞는 수밖에 없었다.
불상에 고기를 문지르고 그날 밤에 죽은-- 어느 선비 이 이야기는 참봉 송덕기가 한 이야기다.
인조 때 선비 수십 명이 어느 산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소고기를 구워 먹다가 한 선비가 구운 고기 한 점을 집어 불상의 입에 문지르면서 '자 너도 한 점 먹어야지'하 고 불경한 장난을 쳤다.
아침에 그 사람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마도 밤에 무서운 꿈을 꾸고 가위가 눌려서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선비의 죽음이 혹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이천 선생도 일생 동안 불상을 등지고 앉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를 보면 부질없는 그런 행동은 결코 선비가 취할 바가 아님을 잘 말해 준다.
꿈을 통해서 전생의 인연을 만난 평안 감사--유심 유심(1608__1667)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정보, 호는 도계다.
전창위 유정량의 아들이다.
6세 때 계축옥사로 가산이 적몰되고 귀양지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가 있다가 인조 반정으로 풀려났다.
나이 13세에 유수증에게 글을 배웠는데 스승으로 '유씨가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163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사관을 거쳐 참판에 오르고 전창위에 습봉되었다.
유심은 어릴 적부터 자주 꾸는 이상한 꿈이 하나 있었다.
어느 동네 골목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오고 또 웬 부부가 슬피 곡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꿈이 만년에 가서는 조금 바뀌어 곡하는 사람이 부부에서 노파 한 사람으로 바뀐 점이다.
유심이 평안 감사로 나갔을 때다.
그 날도 유심은 그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깨고 난 다음에도 그 노파의 곡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유심은 사람을 시켜 꿈속에서 본 그곳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찾아보게 하였다.
유심의 명으로 다녀온 사람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자세히 일러주신 대로 가서 찾아보았더니 어떤 노파 한 사람이 그 때까지도 울고 있었습니다.
우는 사연을 물은즉 노파의 이야기는 대개 이러하였습니다.
그 노파에게는 열 살 멱은 아들이 있었는데 총명하기가 남다르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답니다.
언제인가 감사께서 이곳에 부임하는 것을 본 그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도 글공부를 많이 하면 감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너는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에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결코 감사가 될 수 없다고 알려 주자, 그날부터 그 아이는 밥을 먹지 않고 굶으면서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말만 하다가 끝내 굶어서 죽었답니다.
그 충격으로 남편마저 죽고 외롭게 홀로 남았으며 오늘 저녁이 바로 그 아이의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감사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보고 그 장면들이 그 동안 자기가 오랫동안 꿈속에서 보아 오던 장면들과 어쩌면 그렇게 일치할 수 있는지 우선 놀랐다.
죽은 아이의 생년월일을 따져보니 자신의 생년월일과 똑같았다.
그 뒤 유심은 평안 감사직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심의 전생 인연이 바로 그 아이의 일생이고 그 아이의 소원이 바로 유심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천문을 잘보아 경술년 기근을 재상에게 당부한--김시진 김시진(?__?)의 본관은 경주고 자는 백옥, 호는 반고다.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증손이다.
인조 22년(1644)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지평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 수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편당을 만들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흔히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나 신축년에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국 연지방에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는데, 바로 그 해에 청나라에 국상이 일어났다.
또 을사년에 하늘에 살별(혜성)이 나타났을 때, 10년 후에 중국에 병난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는데 갑인년에 과연 오삼계에 의한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언젠가 김시진은 정태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경술년(1670)이 돌아오면 큰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을 터인데 그 때 상공께서는 그들을 구제할 방안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 때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게 될 테니 저의 걱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지요." 현종 11년 경술년(1670)이 되자 과연 전국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팔도에서 속출하는 사태가 생겼으며, 김시진은 3년 전인 1667년에 이미 죽고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정태화는 김시진의 예언에 감탄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김시진은 언젠가 바위틈에 꼬부라져 자란 소나무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바위틈에 자라나는 외로운 저 소나무 나이도 들었지만 게다가 꼬부라졌네 언제쯤이면 하늘 끝까지 죽죽 자라 햇빛을 가리우는 저 구름을 쓸어낼까 자라나는 소나무마다 기둥감을 기약하랴 오직 귀한 것은 곧은 마음 지니고 추운 이 겨울에 푸르름을 지님일세 이 시를 본 사람은 지은이의 마음이 잘 실려 있다는 평을 하였다.
살아서 백도요, 죽어서 대제학이 된--정두경 정두경(1597__1673)의 본관은 온양이고 자는 군평, 호는 동명이다.
인조 7년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홍문관 등 여러 청환직을 지내는 동안 훌륭한 글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명나라 문장 강일광이 왔을 때 김유가 접반사였는데 이 때 강일광을 대접하기 위해 시문의 대가를 전국으로 널리 구하였다.
당시 정두경은 아무 벼슬도 없는 백도로 응하였는데 당당하게 선발되어 유례가 드문 일로서 당시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계곡 장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정두경의 솜씨를 찬양하였다.
백두의 신분으로 나라를 빛낸 것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일 그 사람의 시문을 보면 온통 심장 전체가 비단인가 봐 또 현종은 그의 시를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나라 안에서는 왕이 으뜸이요 하늘 밑에선 부처님이 높다네 그의 시를 읊고 난 왕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김종직 같은 사람이 문형(대제학)을 잡지 못한 일이 국조의 잘못된 사례로 남았는데, 오늘날 정두경 역시 끝내 대제학이 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냐? 그는 생시에 예조 참판을 지냈으니 대제학에 증직하라!" 꿈에 신덕왕후 강씨를 만난--권유 권유(?__?)의 본관은 안동이다.
정릉 참봉으로 있을 때 왕릉에서 숙식을 하는데 꿈에, 왕비의 복색을 한 어떤 부인이 나타나 왕릉 앞에 있는 정자각에 앉더니 급히 참봉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3백 년 전에 폐비된 강씨(이태조의 계비.
방번, 방석의 생모)로서 회덕의 큰 선비(송시열을 일컬음)의 덕을 입었는데'우암의 청으로 현종 10년에 순원현경의 휘호를 추상받았음' 앞으로 그에게 닥칠 화(제주도로 유배되어 가던 중 사약을 받음)를 막아 줄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미 죽은 사람도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 쌍의 학이 양 어깨에 내려앉은 꿈의 주인공--신천익 신천익(1592__1661)의 본관은 거창이고 자는 백거, 호는 소은이다.
아버지 신인이 영광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아직 자식이 없었으므로 아내 이씨와 더불어 신에게 자식을 점지해 줄 것을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한 쌍의 학이 날아와 양 어깨에 앉아 있다가 한 마리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날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얼마 안 가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천익과 해익이라 지었다.
신천익은 광해 4년(161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부제학을 지냈고, 아우 신해익은 자는 증거, 호는 호산병은이며 광해 5년에 문과 급제, 좌랑을 지냈으나 불행하게도 25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장례를 치르던 날 보랏빛 기운이 하늘을 귀덮었다고 전한다.
늦팔자가 좋은--조계원 조계원(1592__1670)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자장, 호는 약천이다.
인조 6년(1628)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1636년에 형조 정량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의 명으로 소현세자가 명나라 정벌에 참전하게 되자 보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였다.
이 때 조계원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가죽주머니와 베주머니 하나씩을 빠짐없이 각자 준비하도록 하였다.
도대체 그 용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지만 조계원은 무조건 시행하게 하였다.
세자 일행이 면과 청이 싸우는 접전지에 도착하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몸을 둘 만한 곳이 없어 모두들 당황해 할 뿐 대책이 없어 막연하였다.
그 때 조계원이 모든 베주머니에 흙을 담아 쌓게 하고 가죽 주머니로 물을 운반하여 그 위에 붓게 하니 물이 얼어붙어 훌륭한 성이 되었다.
덕분에 세자 일행은 화살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조계원은 집이 몹시도 가난하여 상툰 신흠의 사위가 된 뒤에 처가살이를 하면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처가에서 얻어먹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 천덕꾸러기가 되어 처갓집 노비들로부터 '돼지 조 생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온갖 수모를 받았다.
돼지처럼 많이 먹고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조계원만큼 늦팔자가 좋은 사람도 흔치 않다.
남보다 늦게 과거하여 벼슬이 정경의 지위에 올랐으며 70세를 넘게 살았다.
또 아들 5형제가 모두 출세하여 장남 진석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을 뿐 아니라 필법으로 이름을 얻었고, 차남 귀석은 감사를 지냈고 삼남 희석은 음보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하는 벼슬)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고 사남 사석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오남 가석은 이조 참의를 하였다.
명문거족의 연안 이씨 신랑감을 마다하고 하필 가난한 서생 조계원을 사윗감으로 고집하여 선택한 신흠의 안목에 사람들을 탄복하였다.
연안 이씨도 문장과 절의로 이름을 얻었지만 50세를 념기지 못하고 일직 죽었다.
계속 일곱 대가 골고루 수를 누린--이의전 집안 이의전(1568__1647)의 본관은 전주고 자는 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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