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7편 (7/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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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7편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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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러면 제가 이야기를 하지요.
저의 아내는 사실 오래 전부터 김공에게 결초보은할 은인이라고 늘 말해 왔지요.
뜻밖에도 김공께서 감사가 되어 이런 누추한 집에 오시게 되었으니 저의 아내로 하여금 직접 존안을 뵐 수 있도록 잠시 내당(안방)에 들러 주시면 어떻겠소?" 부득이 그 청을 받아들인 김 감사는 주인의 뒤를 따라 내당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벌써 주안상이 차려져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권 참봉의 부인이 나와서 공손히 절을 하였다.
김 감사도 정중히 맞절을 하였다.
뒤이어 곱게 차려 입은 두 젊은 색시가 나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 집의 며느리들이었다.
김 감사는 다시 주인에게 인도되어 후원으로 돌아갔다.
후원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방이 있는데 머리가 백발인 노파가 손으로 문지방을 잡고 앉아서 무슨 말인지 같은 말을 자꾸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어보니 무슨 축원을 드리고 있는데 그 축원은 바로 김 감사가 정승이 되도록 해 달라는 축원이었다.
김 감사는 놀랍고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 사연을 주인 권 참봉이 설명하였다.
바로 내 장모요.
이 집에 이사온 뒤로 이곳에 제단을 차려 놓고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축원을 하였는데, 이제는 너무 늙어 제단까지 갈 기력이 없어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방안에서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김우항은 그들의 축원대로 몇 년 뒤에 우의정에 올랐다.
시를 보고 작자의 미래를 점친--남용익 남용익(1628__1692)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운경, 호는 호곡이다.
어릴 때부터 시명을 날렸다.
언젠가 어떤 노장이 누에를 시제로 하여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남용익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함련(한시의 앞의 연)과 미련(한시의 끝 연)을 지었다.
오릴 적엔 검은 입술로 푸른 잎을 먹더니 늘그막엔 누런 배로 푸른 사다리를 오르네 본래의 몸을 벗고 나비가 되었으니 장자의 꿈속에 들어가 그를 헷갈리게 한 것은 아닌지 시를 본 노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통 시재가 아니다.
하지만 장래에 이 아이는 초년에 요직을 거쳐 늘그막엔 대관이 되겠지만 이 시의 끝구를 보면 말년에 부귀를 보존하지 못할 상이다." 남용익의 일생을 보면 이 노장의 시참이 들어맞은 세이다.
그는 21세(1648)에 대과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1656년 문과 중시에 장원,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명천 배소에서 죽었다.
남용익이 정언으로 있을 때 몹시 앓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배소에서 외롭게 죽은 남용익의 말년 운을 말해 주는 듯하여 역시 시참을 생각하게 한다.
변방에 행인의 발길은 드문데 나그네 사름 얼굴에 가득하네 쓸쓸한 비는 십리길에 부슬부슬 내리는데 밤이 되어 귀문관을 건넌다네 귀양가면 그곳에 술이 있느냐고 물은--오도일 오도일(1645__1703)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관지, 호는 서파다.
현종 14년(167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하였다.
시문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동이 삼학사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다.
언제가 숙종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오도일은 술을 너무 좋아하여 고질병이 되었는데 도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계주시(술조심을 깨우치는 시)를 소개한다." 성군의 은총이 지극하여 급제의 영광을 받았고 어머니의 자애가 깊어 오래오래 수하시네 임금의 은혜와 어머니의 사랑을 어느 한쪽도 갚지 못하였는데 만약 술 때문에 병이 난다면 뉘우친들 돌이킬 수 있으랴 계속하여 숙종이 하교하였다. "이 계주시를 늘 읽고 정신을 차린다면 어찌 술에 실수할 일이 있겠느냐?" 이러한 전교를 받은 오도일은 깊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고질이 된 술버릇을 지금까지 끊지 못하고 무릎 끊고 전교를 읽으니 눈물만 흐른다네 뼈에 맺힌 깊은 은혜 무엇으로 갚을까 죽기 전에 오로지 지은 죄나 반성해야지 숙종 28년(17020 민언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귀양 가던 날도 오도일은 만취가 되어서 자신을 호송하려 온 의금부 나졸들에게 말했다. "장성에 가면 소주가 있느냐?" "소주야 어디에 간들 없겠습니까." 나졸들이 대답하자 오도일이 말했다. "그래? 그래! 소주만 있으면 됐다." 천안역을 지날 때 천안 군수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니, 오도일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작별의 정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달랠 길 없었는데 마침 이곳 천안 군수가 술병을 갖고 왔네 나는 술이 좋아 이날까지 평생을 마셨지만 오늘 마시는 이 술은 영원히 못 잊겠네 오도일은 장성까지 가는 동안 음식은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먹었다.
정작 귀양지에 도착한 그는 며칠 못 가서 죽었다.
시인 유도삼이 다음과 같은 만시를 썼다.
대사마1)가 가셨으니 그 시혼은 어디에 노니실까 멱라수2)로 머리를 돌리니 맑은 바람이 잇달아 불어오네 1) 대사마:병조 판서, 즉 병조 판서를 지낸 오도일을 일컬음.
2) 멱라수:중국 호남성 북쪽에 있는 강.
초나라 삼려대부인 굴원이 혼탁한 세상을 비관하여 물에 빠져 죽은 곳으로 유명함.
여기서는 오도일을 굴원에 비유함.
유도삼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어느 날 밤에 낙산사에서 시를 짓고 노는데 갑자기 절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시를 잘한다는 감사의 시솜씨가 가소롭구나!" 이상하게 여긴 유 감사가 속으로 놀라면서도 억지로 태연한 척하고 이어서 시를 읊조리자 또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놀란 유 감사는 즉시 하인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더니 하인은 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다른 사람은 없고 웬 소금 장수가 돌멩이를 베고 누워 잡니다." 유 감사는 즉시 소금 장수를 데려오게 한 뒤에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나를 비웃느냐?" "예 사또께서 좋은 시를 짓지 못하시고 끙끙대기만 하기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어째? 좋다! 그러면 네가 한번 좋은 시를 지어 보아라.
만약 당장 좋은 시를 짓지 못한다면 관장을 비웃은 죄로 곤장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 감사의 말 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금 장수는 한 구절을 지었다.
큰바다는 동남쪽으로 하늘에 떠 있고 일만 이천 기이한 봉우리는 대지 위에 꽂혔네 그의 시솜씨에 깜짝 놀란 유 감사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과연 기재로다.
성명이 무엇이오?" "천인의 성명을 알릴 필요야 없지요.
제 성은 오가입니다." 오도일의 혼이 소금 장수로 나타났음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덕천에 귀양 가서 관아의 뜰을 청소한--이관명 이관명(1661__173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자빈, 호는 병산이다.
숙종 13년 (168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세마에 보임되고 외직으로 함열군수가 되었다.
숙종24년(169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관명이 옥당의 교리로 당직하고 있을 적에 그의 아우 한포재 이건명이 강화유수에 발탁되어 사은(임금의 은혜에 사례함)한 뒤에 금관자를 달고 옥당에 들렀을 때 동료들이 그의 형을 놀리며 말하였다. "아우는 재상이 되었는데 형은 아직 옥당에서 당직을 하고 있다니, 어찌하여 태어나기는 먼저 태어났는데 벼슬은 뒤진단 말인가?" 이관명이 태연하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다른 욕심 없이 오직 벼슬살이만 한다면 나의 교리 벼슬이 어찌 유수만 못하겠는가.
단지 죽은 뒤에 명정이나 자손들의 영화를 뽐내는 데 쓰일 뿐이지!" 경종 2년(1722)에 아우 이건명이 극형을 받자, 그도 연좌되어 덕천에 유배되어 종의 신분으로 패랭이를 쓰고 베옷을 입고 날마다 관아의 넓은 뜰을 깨끗이 비질을 하고 물러나와서는 종일토록 관문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군수가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직분을 다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방면되어 돌아와서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가고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있다고 할 만한--윤지술 윤지술(1697__1721)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노팽, 호는 북정이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의 장의로 경종 1년(1721)에 상소를 올려, 대행왕(승하하여 묘호가 정해지기 전의 임금, 여기서는 숙종을 일컬음)의 묘지문을 지은 이이명의 잘못을 탄핵하다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숙야재 민익수, 정암 민우수가 윤지술이 죽은 후의 뒷일에 대한 수습에 대해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야재는 그 딸을 윤지술의 아들 윤일복에게 시집 보내고, 정암은 그 부인을 보내어 윤지술의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게 하였다.
또 윤일복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그가 글을 배우려 하지 않으므로 정암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우거하여 그의 집에 가서 가르쳤다.
이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이 가히 다시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다.
이 때 병계 윤봉구가 문화현령이 되었는데, 윤지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옛날 책["맹자"의 이루 편]에 이르기를, '까닭없이 선비가 죽으면 대부는 떠나가야 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대부는 못될망정 때를 보아 떠나가야 겠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의사의 피로 죽어서 사람을 감복시킨--임창 임창(1653__1723)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회이, 호는 강개옹이다.
어려서부터 의리와 절개를 매우 높이 생각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숙종 계비 민씨)가 중궁의 자리를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비분에 겨워 걸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궐문을 지키며 통곡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충절을 의롭게 여겼다.
숙종 27년(1701)이 되어 계부인 지중추부사 흥망이 소사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조카 임창과 화합하였는데, 술을 마시면서 임창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오늘의 이별이 어찌 천고의 영결이 되지 않을 줄 알겠느냐." 임창이 용감히 나아가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소를 올려 민씨의 죽음을 다시 토의하자는 의논을 개진하니 교리 이탄이 괴이한 소라 일컫고 처벌을 주청하여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경종 2년(1722)에 심단이 판의금부사로서 임금을 대면하고 곧바로 그를 처형하였으니 그의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니므로 지사가 한을 품은 것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당시 어떤 고사의 가죽주머니에 피가 물든 흔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 고사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의사 임창의 피다." 그가 사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촉 땅의 사람이 진나라 충신 장홍의 피를 간직한 것과, 당나라 충신 안노공(이름은 진경이 우혁의 피를 혓바닥으로 핥은 것들이 모두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윤지술, 이의연과 함께 신임사화의 삼포의로 불린다.
황룡이 버드나무에 걸려 있는 꿈을 꾸고 장원 급제한--이만성 이만성(1636__1708)의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사추, 호는 귀락당이다.
숙종 8년(1682)에 진사가 되고 22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의 과거시험성적을 매길 때의 일이다.
대제학 최석정(소론)이 시관 이세재를 시켜 대독하게 할 적에 그 글귀에 비점(시문이 잘된 곳에 찍는 둥근 점)을 하고 이의가 있을까 염려하여 말아서 무릎 앞에 두니, 김진규(노론) 등 여러 사람이 그를 의심하여 나아가서 보기를 청하고 문제를 삼으려 하다가 그 글이 아름답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시험 답안지의 이름을 열어보게 되어서는 곧 기뻐하며 말하였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
참다운 인재를 잃을 뻔하였다." 초방(급제자 명단을 기초한 것)이 새벽에 나붙었는데 이만성이 2등이었다.
이만성이 믿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과거시험을 응시하지 않았다면 그만이려니와 응시한 이상 반드시 장원일 것이다." 무릇 이만성의 꿈에 황룡이 문앞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는데, 손안에 있는 푸른 매를 놓자 매가 멀리 위에 올라가 그를 쪼으니 피가 흘러 자기 옷에 가득하였으므로 매우 자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정방이 이르자 과연 장원이 되었다.
천성이 강직하고 엄숙하여 그의 조카 도암(이름은 재임)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루는 도암의 어머니 민 부인이 그에게 떡을 사서 먹이니.
이만성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마침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민 부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만성은 말하였다. "어린아이에게 자정이 깊다고 하여 떡을 사서 먹이면 아이의 습관이 어떻게 되겠으며, 앞으로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가르쳐도 쓸데없을 것이므로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민 부인이 그만 사과하고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과객의 풍자시를 보고 술자리를 거둔--김창집 김창집(1648__17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여성, 호는 몽와이다.
현종 14년 (1673)에 진사가 되고 숙종 6년9168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강화유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문루를 중수하고 낙성연을 베풀 적에 그의 아우 삼연 김창흡이 좌중에 있으면서 시를 읊으려 하는데, 갑자기 누 아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한 유생이 누에 올라와서 참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창집이 그 유생에게 술자리로 올라오게 하니, 그의 옷과 갓이 때가 묻고 해어졌으며 행색이 걸인과 같았다.
김창흡이 말하였다. "그대는 시를 지을 줄 아느냐?" 이어서 운자를 보이고 술을 대접했더니 그 유생이 말하였다. "갈 길이 바쁘오." 그리고 곧 율시를 읊었다.
한 줄기 장강은 만석문을 둘렀는데 하늘이 형승으로 동쪽나라 보호케 했네 지난날 병자호란 그때의 일 생각하면 완손이라 변방의 혼 얼마나 애끓게 했더뇨 오늘날 제공들은 술잔을 들지 마오 당시의 대장들도 술 마시기 좋아했다오 서생의 소매 속에 삼척검이 우노니 북산 향해 옛 원한 씻으려 하도다 시를 다 읊고 난 유생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김창집이 말하였다. "이 시는 나를 깨우치는 것이다." 곧 술잔치 지리를 거두었다.
숙종 32년(1706)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숙종이 승하하고 3년이 지난 경종 2년(1722) 4월에 성주의 적소에서 사약을 받았다.
사약을 받아 죽을 때 민진원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옛사람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을 논하고 웃고 말하는 것이 평소와 같았다.
시 여섯 수를 지었는데, 그 중의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등잔불 깜빡깜빡 몇 경이 지났느냐 운명에 다다르니 생각이 자연 화평하기 어렵구나 이웃집 닭 울어대니 밤은 어이 짧은고 성 모퉁이 노랫소리 먼동이 이미 밝도다 좋은 소식 잠시 전하는 것 어찌 다시 기뻐하랴 흉한 소식 잇따라 와도 놀랄 것이 없도다 저승으로 이번에 떠나 여러 아우 상종하니 이숭에서 홀로 구차히 사는 것보다 낫도다 또 읊었다 임금 사랑 아버지처럼 사랑했으니 하늘의 해가 이 충심을 알아주리 선현(조정암을 일컬음)의 이 시구의 말은 비절하기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문충공 이이명, 충익공 조태채, 충민공 이건명과 같이 화를 당하였는데, 세상에 노론 사대신이라 일컫는다.
관상을 보면 기이하게 들어맞는--김창흡 김창흡(1653__1722)의 자는 자익이고 호는 삼연이다.
몽와 김창집의 아우다.
현종, 숙종, 경종의 세 왕조를 섬겼는데 덕업과 명절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이후 명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장사꾼과도 어울려 다녔다.
설악산으로 들어가려는 도중에 소낙비를 만났다.
잠시 바위 밑에서 쉬는데 그곳에는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앉아 있고 중 한 사람이 자고 있었다.
김창흡은 시상이 호연히 일어나서 흥얼흥얼 읊조려 마지 않았다.
노인이 말하였다. "서생은 무슨 좋은 시구가 있기에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는가?" 그러자 김창흡이 말하였다. "노인이 만일 시를 안다면 내가 그 시구를 말하리다." 이어서 시를 읊었다.
선산을 한번 보는 것이 분수에 없음을 알겠거니 가을비 쓸쓸히 내려 짐짓 마가 되었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소." 김창흡이 말하니, 노인이 대답하였다. "시구가 사뭇 아름답기는 하나, '알다'의 '지'자는 온당하지 못하다." 이에 김창흡이 말하였다. "생각해 봐도 그보다 나은 다른 글자가 없었소." 노인이 말하였다. "시험 삼아 '아니다'의 '비'지로 쓰면 이미 유원하고 뜻도 심후하다." 그러자 김창흡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당신이 이미 시를 아니 반드시 아름다운 시구가 있을 것이므로 외어줄 수 있겠소?" 노인이 말하였다. "비가 이미 그쳤고 갈길이 또한 바쁘니 길게 이야기할 수가 없소.
저 중이 시에 매우 능하니 그와 더불어 담론하도록 하오." 곧 옷을 떨치고 떠나버렸다.
김창흡이 자고 있는 중을 불러 일으켜 말하였다. "그대는 시에 능하다 하니 듣기를 청하오." 중이 말하였다. "서생이 이처럼 굳이 요구하니, 서생을 위해 한 수 읊겠소." 중은 다음과 같이 읊고 곧 떠나갔다.
늙은 중은 바랑을 베고 누워 금강산 길을 꿈속에 누비는데 쓸쓸히 뚝뚝 잎지는 소리에 해지는 가을 하늘에 놀라 깨었네 김창흡은 그 시에 감탄하면서 외우고 또 외었다.
삼연이 사람의 상을 보면 이따금 신기하게 그 사람의 신수를 맞히곤 하였다.
마전군수 정야가 김창흡과 봄을 찾아 풍계의 깊숙한 곳에 이르러 풀을 깔고 한담을 나누었는데, 이 때 김창흡이 말하였다. "우리 형제 중에 나와 내 아우들은 모두 운명이 곤궁하니 말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둘째형(김창협을 일컬음)은 평소 문명을 날렸고, 새로 문과에 급제하여 앞길이 확 트이니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 골상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없고 정력이 부족하고 약하여 큰 그릇은 못 된다.
우리 백형(김창집을 일컬음)은 음덕의 길로 진출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범한 인물로 보나 실은 참으로 대신의 그릇이다.
하는 바의 모든 일이 섬세하고 민첩하여 우리 형제 중에 제일일 뿐만 아니라 훗날 찾아봐도 형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후일 내 말을 마땅히 믿게 될 것이다.
다만, 위세를 부리면 험난한 일을 많이 만나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를 뿐이다." 훗날 그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김창흡의 벼슬은 진선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강이다.
거짓말을 한 아전을 도와준--조태채 조태채(1680__1722)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유량, 호는 이우당이다.
숙종 12년 (1686)에 문과에 급제하고, 43년(1717)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
조태채가 부인 심씨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한성판윤으로서 마침 공무가 있어 새벽에 일어나서 한성부의 아전이 와서 청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고 해가 돋을 때까지라도 오지 않았다.
조태채가 크게 노하여 곧 공청에 나아가서 해당 아전을 잡아들여 장차 곤장을 치려 하자 아전이 울며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주 슬픈 사정이 있으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조태채가 노여움을 참고 물었다. "네가 할 말이 무엇이냐?" 아전이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내를 잃었는데 집에 어린 자식 셋이 있습니다.
맏자식은 나이 5세이고, 둘째 자식은 겨우 3세이며, 딸 하나는 태어난 지 이제 막 6개월이 되었습니다.
소인이 그 어미의 일을 겸하여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려는데, 어린 딸이 어찌나 울어대는지, 이웃집 여자를 청하여 젖을 먹였습니다.
조금 뒤에 둘째 자식이 또 배고프다고 울부짖어 소인이 돈으로 죽을 사서 먹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사이에 자연 때가 늦었습니다.
소인이 이미 공적인 일을 알고 또 대감의 위엄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고의로 죄를 범하겠습니까?" 조태채는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겨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네 사정이 나와 흡사하다." 조태채는 아전을 곧바로 석방하고 쌀과 베를 넉넉히 주어 자식 양육하는 데 크게 보태 쓰도록 하였다.
그 아전은 상처를 한 적도 없으며 다만 조태채의 사정을 알고 짐짓 거짓말을 꾸며 죄를 면하고 도움을 얻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군자는 속을 수 있는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이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하인으로 선혜청의 서리로 있었다.
경종 1__2년(1721__22)에 소론의 대관이 조태채를 비방하는 계를 내어 짐짓 홍동석을 시켜 쓰게 하였다.
홍동석이 붓을 던지며 말하였다. "자식이 그 아버지의 죄를 손수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인이 상전에게는 부자의 의리와 같습니다.
소인은 이 계사를 쓸 수 없습니다." 모든 대관이 노하여 그를 하옥시키고 매우 혹독한 형벌을 주었으나, 홍동석은 끝내 쓰지 않았다.
조태채가 제주로 유배되자 홍동석은 아전의 직을 사퇴하고 따라갔다.
조태채에게 사사의 명이 내려질 무렵에 조태채의 둘째 아들 회헌 조관빈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유배지로부터 30리 거리에 와서 미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금부도사가 먼저 와서 약사발을 올리고 조태채에게 사약을 마시라고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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