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4편 (4/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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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4편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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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다가 이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박중림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임금에게 불충을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지 않느냐?" 선조 16년(1583)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옛적에 박팽년이 친구를 추천하였는데 그 친구가 은혜를 갚기 위하여 사례하자 박팽년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청렴한 사람이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정이라 하였다.
동왕 51년에 정려가 세워졌다.
박팽년의 아들 생원 헌과 순, 그 아우 분과 박팽년 부자 여덟 사람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순의 아내 이씨는 대구 관비가 되었는데 마침 임신중이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마침 여종은 딸을 낳았으므로 서로 바꾸어 길렀다.
아들 이름은 박비라 하였다.
성종 3년(1472)에 순의 친구의 사위 이극균이 영남 도백이 되었는데, 박비에게 권하여 자수시켰다.
성종 임금은 그를 특별히 사면 하였으며, 이름을 일산으로 고쳤다.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이개 이개(1417-145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청보, 호는 백옥이다.
세종 18년(1436)에 문과시, 동왕 29년에 중시를 거쳐 직제학으로 있었을 때 병자년 사건(단종 복위 모의)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이개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친구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개는 몸이 허약하여 옷무새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국문을 받을 적에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이개의 숙부 이계전이 수양대군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이개가 늘 경계하였다.
사형을 당할 때 이개는 한 수의 시를 썼다.
사직이 안전할 땐 사는 것이 중요하고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영조 4년(172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이다.
세조로부터 받은 봉록을 고스란히 쌓아 둔 하위지 하위지(1387-1456)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중장, 또는 대장이며 호는 단계, 또는 적촌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
과묵하고 조용하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서 대궐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아무리 비가 오더라도 길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시강원과 경연석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그 당시 인재를 말할 적에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한 뒤 좌사간에 올랐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고 공실(왕실)을 강하게 하고 내치를 엄하게 하며 권문을 막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등극하여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봉록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쌓아 두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그 재주를 사랑한 세조가 은근히 타일렀다. "그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면 용서해 주겠다" 하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직접 나와서 죄인들을 세 차례나 단근질을 하였다.
드디어 하위지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말하였다. "이미 역적 이름에 올랐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음인데 또 물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조는 화가 났으나 단근질은 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성삼문과 같은 날에 죽음을 당했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하위지는 호와 박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때 박은 채 스무 살도 못되었다.
박은 조금도 떠는 기색 없이 금부도사에게 말했다. "어머니께 작별인사 드릴 시간을 주시오" 그는 꿇어 앉아서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 또한 누이동생을 돌아보며 단단히 일렀다. "몰수되어 노예가 되겠지만 여자의 의리는 마땅히 한 남자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절대 개돼지 같은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사약을 받자 사람들은 과연 하위지의 자식답다고 말하였다.
하위지의 동생인 생원 강지, 기지는 형 하위지와 함께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였고 소지는 생원이었는데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
하위지의 아들 박은 뒤에 지평에 증직되었다.
세조의 공을 치하하는 글을 쓰고 통곡한 유성원 유성원(?-1456)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태초이다.
당시 세종은 문치에 힘을 써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사들을 모아서 고문에 응하도록 하였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경오년(1450)에 흰 까치가 와서 둥지를 짓더니 하얀 새끼를 낳았다.
계해년에 이 버드나무가 말라 죽었다.
어떤 사람이 유성원을 놀리기를 '화근은 버드나무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유성원은 화를 당하고 집현전도 없어졌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승하하고 단종 원년(1453)에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였다.
백관들이 이것으로써 세조의 공을 포상하여 주공에 비유하고 집현전 학사로 하여금 그 내용을 초안하라고 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가 위협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초안을 작성하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으나 집안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단종이 상왕으로 밀려났을 때, 유성원은 성균관 사예로 있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성균관에서 말을 타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유성원은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혼자 가묘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문을 열고 보니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할 수 없다고 한탄한 유응부 유응부(?-1456)의 본관은 기계이고, 자는 신지이다.
키가 크고 얼굴에 위엄이 있으며 활을 잘 쏘고 용맹스러웠다.
또한 효도가 지극하여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무과에 등과하여 벼슬이 2품 재상직에 올랐으나 풀로 엮은 자리로 문을 가리울 정도로 가난하여 고기 한번을 먹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를 봉양할 물건은 모두 갖추었다.
언젠가 동생 응신과 어머니를 모시고 포천에 간 적이 있는데 도중에 말 위에서 기러기를 쏘아 땅에 떨어뜨림으로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세조 2년(1456)에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할 당시 운검으로 있던 응부는 당장 거사하자고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권람과 한명회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지 어찌 칼을 쓰겠는가!" 이때 박팽년과 성삼문이 적극적으로 제지하면서 다음 기회를 보고 오늘은 그만두자고 하였다. "모든 일은 신속한 것이 제일이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유응부는 자기 뜻을 고집하였지만 박팽년과 성삼문 등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 일은 중단되었고, 그 뒤에 모의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에게 추국을 당하자 유응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종 임금을 복위하려 하다가 불행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 말해서 무엇하겠소?" 또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도다.
지난번 내가 칼을 쓰려고 할 적에 너희들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사람이 꾀가 없으면 짐승과 다름이 없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단근질을 받으면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라고 호령하면서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무인년에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목이다.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한 성삼문 성삼문(1418-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 호는 매죽당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으로부터 아기를 낳았느냐는 물음이 세 번 이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29년(1447) 중시에 장원하였다.
문종이 동궁 시절에 학문에 힘써서 매달 달 밝은 밤이면 손에 책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가서 글을 물었으므로 성삼문은 의관을 벗지 못하고 지냈다.
어느 날 밤중에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발 소리가 들려 와서 나가 보니 문종이었다.
을해년(1455)에 단종이 선위하였을 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세조 2년에 중국 사신을 맞는 잔칫날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거사 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성삼문은 운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낌새를 챈 김질이 밀고하여 사건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삼문을 불러서 세 번 심문하니 웃으면서 그 말이 다 맞다고 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나를 배반하느냐?" 세조가 물으니 삼문이 소리를 질러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을 복위하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배반이오?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소?" 너는 나의 녹을 먹으면서 나를 배신하였으니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상왕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하로 여깁니까? 나는 녹을 먹지 않았으니 우리 집을 몰수하여 계산하시오" 단근질을 당하였으나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신숙주를 돌아보면서 질책하였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적에 세종 임금이 원손을 안고 뜰을 산보 하시면서 우리들을 돌아보시고 '천추만세 후에 경들은 이 아이를 잘 보 호하라'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는 잊었단 말이냐?" 신숙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희안을 신문하였으나 불복하자 세조가 다시 삼문에게 물었다. "강희안도 함께 모의하였느냐?" 삼문이 대답하였다. "그는 우리의 모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름 있는 선비를 다 죽이지 말고 남겨 두고 쓰십시오" 이 때문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였다.
삼문은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자네들은 어진 임금을 잘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살게나.
나는 지하에 들어가 우리 임금을 만나겠네" 죽은 뒤에 그 집을 몰수하고 보니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받은 봉록을 한 방에 고스란히 모아 놓고 각각 어느 달 봉록이라고 써 놓았다.
집에 변변한 살림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침실에 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이 남긴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북소리는 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해는 뉘엿뉘엿 지려고 하네 황천에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 저녁엔 뉘 집에서 잘꼬 성삼문이 중국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가리개에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그림을 보지 않고 먼저 두 구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 수묵도였다.
눈같이 흰 옷에 옥 같은 발뒤꿈치 연못 속 물고기를 얼마나 엿보았느냐 우연히 날아서 산음현을 지나다가 왕희지의 벼루 씻는 연못에 추락하였나 시를 본 그 사람은 매우 감탄하였다.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이 성삼문의 시체를 수습하여 노량진 아차현 남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성삼문이 언젠가 중국에 들어가서 백이, 숙제의 묘 옆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붙였는데, 비석에서 땀이 흘렀다고 한다.
말고삐 잡고 감히 잘못을 간했으니 그 충의 당당하여 햇빛처럼 빛나네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 먹고 자랐거늘 수양산 고사리는 어느 나라 고사린가 오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김시습(1435-1493)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읽고 3세 때 글을 지었으며 5세에 '중용', '대학'을 배워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보고 정말 기특한 재주라 칭찬하고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고 지신사 박이창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먼저 써 내려갔다.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창공을 춤추는도다" 김시습이 대구를 맞추었다. "성주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공중에서 끔틀거립니다"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여러 번 시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좋은 시를 척척 지어 내었다.
세종은 직접 김시습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소문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소문 없이 잘 길러서 학업이 성취된 뒤에 크게 쓸 예정이었다.
세종이 김시습에게 비단 50필을 주면서 네 힘껏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시습이 그 끝자락을 잡아매 그 한끝을 손에 잡고 끌고 나갔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은 천하에 진동하여 이름 대신 '오세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3세에 김반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배우고 윤상에게 '주역'과 '예기'와 '사기'를 배웠다.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읽던 책을 불태운 뒤에 도망쳐 나와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불명은 설잠, 청한자, 벽산청은, 동봉, 췌세옹이라 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 호기가 넘치고 예의 따위는 전혀 차리지 않았다.
성격이 꼿꼿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시대의 잘못을 한탄하고 드디어 몸을 숨겨 전국을 방랑하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천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든 돌멩이든 잡히는 대로 던지고 때로는 활도 쏘아서 거절하였다.
산에 오르면 나뭇잎에 시를 쓰고 혼자 읊조리다가 금방 울면서 그 나뭇잎을 따 버렸다.
비오는 밤이면 흰 종이 100여 장을 꺼내어 물가에 앉아 혼자 읊조리면서 시를 쓰고 쓴 다음엔 그 종이를 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종이가 다 없어져야 그만두곤 하였다.
때로는 나무를 깎아 농부의 모습을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지켜보며 목놓아 울다가 태워 버리곤 하였다.
벼슬한 고관을 만나면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앞에서 "이 백성이 무슨 죄냐?" 하며 통곡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청초한 목소리로 '이소경'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술을 좋아하여 자주 취했으며 취한 뒤에는 "우리 영릉(세종의 능호)을 다시는 못 뵙는구나"라고 한탄하며 슬피 울었다.
이때는 김수온, 서거정이 국사(온나라에서 특히 높이는 우수한 선비)로 일컬어지던 시기였다.
하루는 서거정이 조정에 가는 길에 김시습을 만났다.
김시습은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강중(서거정의 자)은 편안하신가?" 시습이 큰 소리로 무례하게 대하였지만, 서거정은 웃으면서 대해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서거정이 강태공이 낚시질하는 그림을 주고 시를 부탁하니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비바람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올 땐 위천의 물고기랑 욕심이라곤 모르더니 어찌하여 늘그막에 응양장이 되어서 공연히 백이 숙제로 하여금 굶어 죽게 하느냐 이 시가 쓰인 그림을 되돌려 받은 서거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다.
세조가 내전에 법회를 열고 김시습을 초청하였는데, 그는 몰래 새벽에 도망쳤다.
사람을 보내어 뒤따르게 하자, 그는 더러운 오물 속에 들어가 얼굴을 반만 내밀고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김시습은 47세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결혼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예전처럼 방랑 생활을 하였다.
어쩌다 소송의 일로 관가에 들어가면 분명한 잘못인데도 괴변을 늘어놓아 반드시 이겼으며, 재판이 끝나면 큰 소리로 웃으며 이긴 문서를 찢어 버리곤 하였다.
한번은 시장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데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벼슬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여 시습과 절교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종실 수천부정 이정은과 남효온, 안응세, 홍유손 등은 끝까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강릉과 양양 사이를 오갔다.
이때 유자한이 양양군수로 있었다.
그는 김시습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가정을 찾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김시습이 사양하는 편지를 썼다.
낙백하여 세속을 살기보다는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생을 보내는 것이 낫다.
59세에 죽었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시에 자기의 자화상 두 폭을 남기고 찬을 썼다.
네 모양은 너무도 막연하고 네 말은 너무도 미련하다 언덕 밑 구렁텅이로 너를 밀어 넣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조에 집의에 증직되고 정조 8년(178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는데 절 옆에 3년 동안 묻어 놓았다가 장례할 때 보니 생시의 얼굴과 같았으므로 무량사 승려들이 부처님으로 여겼다.
화장을 하고 탑을 세웠다. '육신전'을 지어 충의를 세상에 알린 남효온 남효온(1454-1492)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백공, 호는 추강, 또는 행우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종직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제나 '우리 추강'이라고 불렀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 안응세는 남효온을 형제처럼 대해 주었다.
성종 때 공은 18세의 나이로 상소하여 소릉(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호)의 복구를 청하였는데, 상소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세상을 단념하고 명승지를 찾아 소요하였다.
세속의 일에 분개하여 모악산에 올라 통곡했으며 위태롭고 과격한 말을 거리낌없이 하였으므로 김굉필, 정여창이 늘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김시습은 늘 남효온을 보면 이렇게 물었다. "나는 세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공은 다르지 않은가? 어찌하여 세상을 등지는가?" 그때마다 효온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릉의 일은 천지의 큰 변일세.
소릉을 복위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네" 그 뒤로 시습은 다시 권하지 않았다.
남효온이 '육신전'을 짓자 문인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 적극 말렸으나 효온은 듣지 않았다.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현 충의의 이름을 매몰되게 둘 수 있는가?" '육신전'은 드디어 야사가 되어 세상에 전파되었다.
뒷날 그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해 성종 11년(1480)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술을 즐긴다고 어머니가 꾸짖자 그는 지주부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끊었다.
성종 23년(1492)에 3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부관참시되었다.
정조조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호랑이를 타고 청량포를 건너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조려 조려(1420-1489)의 본관은 함안, 자는 주옹, 호는 어계이다.
단종 원년(1453)에 벼슬길에 나왔는데 명망이 매우 높았다.
어느 날 그는 제생들을 향하여 읍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의 시에 백이 숙제의 뜻과 돈세무민(세상에 숨어 살아도 아무 불만이 없다는 뜻)의 뜻이 나타난 것은 김시습과 마찬가지이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었을 때 청량포에는 아무도 출입 못하게 뱃길을 금지하였다.
이때 공은 함안에 살고 있어 영월과는 거리가 5백여 리나 되었지만 한달에 세 번씩 단종에게 가서 안부를 물었다.
잠은 원관란의 집에서 잤는데 밤마다 단종의 만수무강을 하늘에 빌었다.
세조 3년(1457) 1월 10일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가 밤에 청량포에 닿았지만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때는 벌써 새벽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가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걸어서 건너려고 물로 들어갔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무엇이 잡아 당기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큰 호랑이였다.
공은 호랑이를 향해서 말하였다.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이 강을 건너야 임금의 시체를 거둘 수가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일을 이루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고 싶거늘 어찌하여 너는 나를 잡아당기느냐?"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 앞에 엎드려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조려는 호랑이 등에 업혀 무사히 강을 건넜다.
단종의 빈소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통곡 사배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에 문 밖을 나오자 그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그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 주었다.
추강 남효온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호랑이가 청량포를 건너 주어서 조여는 노산의 시신을 염하였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절이다.
단종 복위에 실패한 후 평범한 농부로 살았던 성담수 성담수(?-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수, 호는 문두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합격, 교리가 되었다.
단종 때 나라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자 사촌 성삼문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면서 죽더라도 마음을 변치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성삼문이 죽게 되자 성담수도 무서운 국문을 받았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서 공주로 돌아갔는데,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성담수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묘 밑에 숨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태평이었다.
한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고 자신이 명문세족임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농부로 보았다.
그의 조카 성몽정이 경기 감사가 되어 본 고을을 순시할 때 숙부 성담수의 주소를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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