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을 찾아가니 쓸쓸한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고, 앉을래야 앉을 만한 변변한 자리조차 없었다. 탄식하고 집에 돌아온 감사 성몽정은 숙부에게 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성담수는 곧 자리를 돌려보냈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에는 맞지 않지" 이때 나라에서 죄인의 자제들을 참봉을 시키고 그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관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성담수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를 읊고 낚시로 소일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숙이다. 언젠가 성담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온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강물에 발 담그고 곤하게 잠들었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 리를 날다가 깨어나니 몸은 석양에 누워 있네 강물을 피로 물들인 비운의 왕자 금성대군 금성대군(1426-1457)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인품이 맑고 아량이 넓으며 말씨에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을해년에 우의정 한확 등이 아뢰었다. "금성대군이 모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남군, 영풍군, 영양위 정종과 서로 깊이 사귀고 있으니 서둘러서 그 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귀향 가게 되었다. 세조 2년(1456)에 성삼문 등이 죽고 금성대군은 순흥에 안치되고 그 집은 적몰 당했다. 다음해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안동 감옥에 갇혔다. 어느 날 금성대군이 옷을 발가벗은 채 도망쳤다. 관청에서 그를 잡으려고 큰 수색을 벌였지만 잡지 못했다. 얼마 후에 금성대군은 자기 발로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잡지 못하지? 그러나 내가 어찌 끝내 도망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신다" 그는 옷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사배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때 이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죽계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영조 14년(1738)에 예손 이진수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금성대군을 복관하고 시호를 정민이라 하였다. 죽음으로 옥새를 지킨 혜빈 양씨 양씨의 본관은 청주이다. 현감 양경의 딸이고, 찬성사 양지수의 증손녀다. 세종 때 후궁으로 뽑혀 혜빈에 봉해졌고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낳았다. 세종 23년(1441)에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었다. 세종이 빈 중에서 양씨를 택하여 원손을 기르게 하였다. 양씨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단종을 길렀다. 단종이 덕을 갖추어 잘 성장한 것은 실로 양씨의 공이 컸다. 세종과 문종이 차례로 승하하고 을해년(1455)에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혜빈에게 옥새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새는 나라의 중한 보물입니다. 선왕(세종)께서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옥새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혜빈은 목숨을 걸고 옥새를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그 아들 영풍군은 이때 운검으로서 입시중이었는데 동시에 죽음을 당하고 한남군은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피살되었다. 정조 15년(1791)에 혜빈에게 민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귀머거리, 미치광이 흉내로 일관한 권절 권절(14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단조, 호는 율정이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빼어나고 힘이 장사여서 남이 장군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많은 책을 읽어 두루 박식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은 그의 재주가 문무를 겸한 것을 보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더 익히게 하여 사복시 직장을 제수하고 집현전 교리로 뽑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자주 그의 집에 와서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권절은 귀먹은 척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즉위한 후 그의 재주를 아껴서 첨지중추부사로 선발하고 궁중 수의를 맡겼으나 권절은 미친 척하고 그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국가는 태평하고 성주는 만수하소서!"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이렇게 보냈다. 숙종 30년(170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 군자는 때에 따라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소한 조상치 조상치의 본관은 창녕, 자는 자경, 호는 정재, 또는 단고이다. 세종 원년(1419)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하여 들어가서 축하 인사를 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군자가 경계할 일입니다" 세조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세조는 그를 예조 참의에 승진시켜 벼슬을 내렸지만 그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하여 인사하지 않고 곧바로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박팽년이 그에게 "가신 길 바라보니 우뚝하여 따를 수 없네"라는 편지를 썼다. 성삼문이 그에게 편지하기를 "영천의 맑은 바람이 동방의 기수 영수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 선생의 죄인이다" 하였다. 영천으로 돌아온 조상치는 서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단종의 '자규사'를 보고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는 시를 썼다. 소쩍소쩍 달 뜨는 저녁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나 뻐꾹뻐꾹 파잠을 바라보고 날아서 건너고 싶어라 다른 새들 옹기종기 둥지에 모였는데 너 홀로 꽃가지를 향해 피를 토하고 있구나 쓸쓸한 얼굴에 초췌한 모습 즐겨 숭배하지 않고 누구를 돌아보는가 아! 인간의 원한이 어찌 나뿐이랴 충신과 의사의 가슴속의 불평이 손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단종이 죽자 사람 만나기를 일체 사절하여 식구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밤마다 홀로 앉아 잠도 자지 않고 슬피 울었다. 그는 못난 돌을 구해다가 면을 다듬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면에다 "노산군 조정 부제학 도망자 조상치의 무덤"이라고 새겼다. 단종의 장례를 치른 호장 엄흥도 엄흥도의 본관은 영월이고, 직책은 영월군 호장이다. 세조 3년 10월에 단종이 승하하였다. 엄흥도는 곧 달려와 곡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시신을 거두고, 다른 의논이 있을까 겁을 내어 즉시 장례 하였다. 이때 엄흥도의 일가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였다. "선행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요" 그는 장례가 끝나자 아들 엄호현을 데리고 도망갔다. 엄흥도가 죽은 뒤에 그 아들은 몰래 영월로 되돌아왔다. 현종 10년(1669)에 우암 송시열이 엄흥도의 자손을 쓰자고 청하자 상이 허가하였다. 영조 때 정려각이 세워지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종이 제문을 지었다. "어느 때인들 충신열사가 없으리요마는 어찌 엄흥도의 충성만 하겠는가. 아! 그때의 강원도에는 감사도 있었고 수령도 있었지만 일개 호장으로서 능히 큰 충절을 세웠구나. 아! 사육신은 마음을 다해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거니와 영월 호장 엄흥도는 무슨 요구가 있고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일가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이는 진실로 한 조각 붉은 마음 때문일 것이니, 지난 역사에도 듣기 힘든 일이구나. 백대를 전하도록 의열이라 할 만하다"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기건(?-1460)의 본관은 행주이고, 집이 청파동 만리고 개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청파라 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보니 백성들은 전복을 따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언덕이나 구릉에 갖다 버렸다. 이를 본 기건은 고을 사람들에게 관을 짜고 장례 치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제주도 사람이 부모 장례를 치를 줄 알게 된 것은 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기건이 꿈을 꾸었는데,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 앞에 와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뼈다귀를 거두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금년에 공은 반드시 어진 자손을 둘 것입니다" 과연 그 해에 손자를 낳았으며,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가 되었다. 그 뒤로 기씨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그 꿈이 맞은 것이다. 그의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단종조에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람을 일체 사절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나 기건은 자기의 눈이 청맹과니라고 핑계하였다. 세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침을 들고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끝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 나라 풍습에 부인들이 외출할 적에 너울을 쓰지 않았는데 기건이 처음으로 너울을 만들어서 쓰도록 하였다. 평생을 괴물과 함께 살았던 신숙주 신숙주(1417-1475)의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그 이듬해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 29년 중시에 합격한 뒤 서장관으로서 일본에 갔다. 일본 사람들은 신숙주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시를 지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신숙주의 시에 대하여 경탄해 마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신이 일본에 갈 적마다 반드시 신숙주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세조 6년(1460)에 강원, 함길도 절도사가 되어 국경 지방에 깊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오랑캐들이 밤에 공격해 와서 영내가 매우 소란하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막료를 불러 자기가 지은 시를 받아 쓰게 하였다. 병사들은 그때서야 안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가 있었다. 신숙주가 젊었을 적에 경복궁 정시에 응시하러 갔는데 이른 새벽에 커다란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대궐 문 앞에 있어서 모든 응시생들이 다 그 입을 통해 들어갔다. 이때 신숙주는 눈을 부릅뜨고 당당히 서서 그 괴물을 응시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 하나가 신숙주의 옷소매를 잡고 물었다. "공은 저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을 보았소? 그것은 내가 조화로써 만 들어낸 괴물이니 공은 잘 간직하시오" "너는 누구냐?" "나도 사람이오. 공이 앞으로 귀한 재상이 될 것을 알고 평생토록 따라다니면서 행동을 함께 하려고 하오" 신숙주는 그 괴물과 함께 집에 돌아왔는데, 그 괴물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신숙주가 앉으나 누우나 항상 함께 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그에게 자기의 밥을 나누어주면 씹는 소리는 들렸지만 밥그릇은 줄지 않았다. 그 괴물은 신숙주의 집안에 일어날 모든 일과 과거의 합격 여부를 신숙주에게 미리 다 알려주었다. 신숙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갈 적에 이 괴물을 시켜서 먼저 뱃길의 깊고 얕음과 거리를 알아 오도록 시켰기 때문에 신숙주는 먼 뱃길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신숙주는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겨 부탁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이 괴물에게 따로 제사를 차려 주어라" 그 자손들은 신숙주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의 제삿날이면 반드시 따로 한 상을 차려서 괴물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신숙주 생시에 세조는 늘 말하였다. "환공과 관중, 한고조와 장량,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나와 숙주의 관계와 같다" 세조 3년에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충이다. 성종묘에 배향하였다. 국을 식게 만드는 사람 권람 권람(1416-1465)의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큰 뜻을 품었으며 계책이 뛰어났다. 책을 싸가지고 깊은 명산에 들어가 한명회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35세가 되도록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세종 말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달아 장원을 세 차례나 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총재가 되어 '무경(고대의 병서)'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수양대군의 시종이 되었는데, 대군은 그의 큰그릇을 알아주고 대우를 극진히 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장래 꿈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집을 은밀하게 드나 들었으며, 한번 들어가 논의하기 시작하면 해가 늦도록 계속하였으므로 수양대군집 궁인이 공을 보면 "국을 식히는 양반이 또 온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공을 내전으로 불러 위로 잔치를 베풀고 정희왕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옛날 국을 식히던 사람이오" 영의정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이다.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이 있다고 익살을 부린 강맹경 강맹경(1410-1461)의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임금이 맹경의 집을 보고 말했다. "저 썩은 서까래를 빨리 갈아야겠다. 사람 상하겠다. 영상의 집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계전이 중국에 갔을 적에 주객 낭중이 시를 청하였다. 갑자기 시가 떠오르지 않은 계전은 자기 선조의 문집인 '목은집' 가운데 있는 '조조대명궁시'를 써 주었다. 활짝 열린 명당에는 새벽 공기가 차고 우뚝 솟은 깃발은 난간에서 나부낀다. 시를 본 주객은 칭찬을 마지않았다. 강맹경도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계전이 맹경을 보고 농담 삼아 말했다. "만약 중국 사신이 자네에게 시를 청하면 대책이 있는가?" 맹경은 그 말을 받아 즉시 대답하였다.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 '통정집'이 있지?" 그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이계전은 목은의 자손이요, 강맹경은 통정의 후손이다. 맹경의 시호는 문경이다. 온종일 벌주를 마신 구 정승 구치관 구치관(1406-1470)의 본관은 능성이고, 자는 이율이다. 세조 13년(1467)에 영의정이 되었다. 야인 여얼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세조는 구치관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세조는 말했다.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이때 구치관은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의 신임을 받은 터였다.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구치관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다. 어느 날 세조는 두 정승을 내전으로 불러 놓고 말했다. "경들에게 내가 질문을 할 테니, 경들은 바른 대답을 해야 한다. 만약 실수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조금 후에 세조가 신 정승을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신 정성을 불렀는데, 잘못 대답한 것이다" 하고 신숙주에게 벌주를 먹였다. 또 구 정성을 불렀다.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구 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 정승과 구 정승은 하루종일 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남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강순 강순(1390-1468)의 본관은 신천이고, 자는 태초이다. 상상부원군 강윤성의 증손으로, 음직(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공로로 하는 벼슬)으로써 벼슬했다. 세조 13년(1467)에 길주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호조 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상중에 있는 허준을 기용하여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이유소를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였다. 토벌군은 홍원에서 싸우고, 또 만령에서 싸워 반란군을 대파하고, 이시애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건주의 이만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우리 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왔다. 세조는 어유소를 좌장군으로 삼고, 남이를 우장군으로 삼고, 강순을 정서주장으로 삼아 정병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건주의 동북쪽을 공략하여 그들을 소탕하였다. 큰 나무를 베어 하얗게 깎은 뒤에 "모년 모월 모일에 정서주장 강순과 좌대장 어유소 등은 건주위 올미부를 토벌하고, 이에 돌아간다"고 쓰고 돌아왔다. 그는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신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14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입어 반란죄를 입게 되고, 국문을 받게 되었다. 강순이 영의정으로서 국문에 참석하여 남이가 정강이뼈가 부러지도록 국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변명을 해주지 않자, 남이는 "강순이 나에게 모반을 시켰소" 하고 강순을 끌고 들어갔다. 강순은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천한 몸이 다행히 성군을 만나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신의 나이 지금 칠순이 넘었거늘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모의를 했겠습니까?" 예종 임금이 강순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자 남이는 또다시 모함하였다. "성상께서 거짓말에 속아 죄를 면해 주신다면 무슨 방법으로 죄인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을 듣고, 다시 의심이 난 임금은 국문을 시작하였다. 강순은 늙은 몸에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 허위 자복을 하고 말았다. 이를 본 남이가 강순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불복한 것은 장래를 기대한 때문이었는데, 이제 다리뼈가 부서져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소. 나 같은 젊은 사람도 억울하게 죽게 되었거늘 살만큼 산 노인이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억울하오" 드디어 남이와 함께 사형을 당하게 된 강순이 남이를 불렀다. "남이야, 너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모함했느냐?" 남이가 대답하였다.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내나 대감이나 같지 않소. 당신은 수상으로서 나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한마디 변론도 하지 않았으니, 당신도 억울하게 죽어야 마땅하오" 강순은 어처구니가 없어 좌우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젊은이를 친하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려. 반역이 어떤 죄인데 장난을 치다니..." 강순의 아내와 자제들도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얼굴에 분바른 귀신 때문에 장가든 남이 남이(1441-1468)의 본관은 의령이다. 의산군 남휘의 아들이며, 태종의 외손이다. 어릴 적의 일이다. 길거리에서 노는데 어떤 종아이가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데 그 봇짐 위에 분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귀신을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이상히 여겨 그 아이가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 아이가 한 재상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주인집 아가씨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 보면 살릴 수 있다" 남이가 이렇게 말했으나 그 재상의 집에서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그렇게 하라고 하여 남이는 간신히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분바른 여귀는 장자의 가슴에 올라앉아 있다가 남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즉시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서 일어났다. 남이가 문 밖으로 나가자 다시 여귀가 낭자의 가슴에 올라앉았고 낭자는 다시 까무러쳤다. 남이가 다시 들어가자 여귀는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났다. 남이가 여귀에게 물었다. "그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홍시인데 낭자가 먹고 기절한 것입니다" 남이는 그가 본 대로 모두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을 써서 낭자를 살려주었다. 그 낭자가 바로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이었다. 권람은 이 일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남이를 사윗감으로 택하여 첨을 쳤다. 점쟁이가 말했다. "총각은 반드시 죄를 짓고 죽을 것입니다" 자기 딸의 운명을 점쳐 보니 목숨이 매우 짧고 자식이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복을 누리고 화는 없을 터이니 사위를 삼아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용기는 다른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북쪽에서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서쪽에서는 건주위를 정벌하였는데 모두 큰 공을 세우고 훈일등에 녹훈되었다. 남이는 회군할 적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서 다 닳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서 다 말랐네 사내 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그를 대장부라고 하겠느냐 그는 26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어느 날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에 관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펼 징조'라고 설명한 일밖에 없는데 이 말을 몰래 들은 유자광이 그 말에 다른 말을 보태어 남이가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였다. 또 공주를 꾀어 간음하였다고 밀고하였다. 끝내 그는 모함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때 그는 28세로 병조 판서였다. 권람의 딸인 그의 부인은 그보다 몇 년 먼저 죽었다. 점쟁이의 말이 사실로 들어맞은 것이다. 달의 이상 현상을 보고 어머니의 죽음을 안 서거정 서거정(1420-1488)의 본관은 달성이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다. 아버지는 서미성이고, 어머니는 양촌 권근의 딸이다. 서거정은 6세에 글을 읽고 시를 지었으므로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외조부 양촌의 글이 외손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적에 명나라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서거정은 종사관으로 따라갔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에서 자게 되었는데 저녁에 서거정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세조는 서거정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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