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6편 (6/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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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6편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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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서 일어난 서거정은 땀을 몹시 흘렸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서거정이 말했다. "달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달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 이렇게 꿈이 좋지 못하니 틀림없이 어머니에게 일이 있을 것이다" "서거정의 효심은 실로 하늘을 감동시키는구나" 수양대군은 감탄하여 서거정을 불러 말하였다. "편지에 그대의 어머니가 병이 위독하시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서거정은 한강을 건너와서야 그 편지가 어머니의 부고인지 알았다.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 가끔 이 꿈 얘기를 하였다. "내가 자네를 택한 것은 비단 자네의 재주 때문만은 아닐세" 서거정은 문형에 뽑히고 시호는 문충이다.
후원을 거닐다가 미복 차림의 왕을 만나 큰소리친 최지 최지의 본관은 전주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했다.
따스한 봄날 시를 읊조리면서 대궐 후원을 산책하다가 미복을 입고 나온 세조를 만났다.
최지는 허리를 구부려 업을 하였을 뿐 공손하게 절을 하지 않았다.
세조가 물었다. "너는 누구이기에 감히 내지에 들어와서 이렇듯 무례하게 구느냐?" 최지가 대답하였다. "나는 문사요.
궁중에는 상감 한 분만 계실 뿐인데 어찌 당신에게 특별하게 예의를 표할 필요가 있겠소?" 이때 최지는 마음속으로 그가 왕자 중의 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최지가 길가에 걸터앉자 세조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원양(공자의 옛 친구이다.
원양이 걸터앉아서 공자를 기다렸는데 그를 만나자 공자가 막대기로 정강이를 치면서 "젊어서는 무례하더니 늙어서는 죽지도 않는구나" 하고 놀려 준 고사가 논어에 전한다)이냐? 어찌하여 걸터앉느냐?" 조금 후에 시녀와 내시가 잇따라 왔다.
최지는 놀라 떨면서 사죄하였다.
세조 임금이 그를 편전으로 불러서 경서를 강론하자 최지는 세조가 묻는 대로 척척 대답하였고 경서의 깊은 뜻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풀이 하였다.
세조는 크게 기뻐하여 술을 권하였다.
최지는 술이 얼큰하게 취하였다. "이 선비가 성리학에 밝구나.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이 한이구나" 세조는 즉시 최지를 성균관 사성에 임명하였다.
빌려 온 신숙주의 책을 뜯어 벽에 바른 김수온 김수온(1409-1481)의 본관은 영동이고, 호는 괴애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병조 정랑으로 있었다.
하루는 그가 좌랑 김 아무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잘 보네.
자네의 관상을 보니 오래 살 관상일세" 김 좌랑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비법을 함부로 전할 수 있나? 술을 한턱 잘 내면 조금은 일러줄 수가 있지" 기대에 부푼 김 좌랑은 잔치를 차려 병조의 동료들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김수온에게 다시 청했다. "저의 관상이 오래 살게 생겼다고 했으니, 이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선생은 이미 50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것이오.
선생이 얼마를 더 살지는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남에게 책을 빌려 오면 책장을 떼서 도포 소매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한 장씩 꺼내어 암송하고 혹 잊어버리면 다시 꺼내서 보곤 하였으며 다 외운 뒤에는 모두 버렸다.
신숙주가 아끼는 고문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책에 책표지를 다시 만들어 애지중지하다가 김수온의 성화에 못 이겨 빌려주게 되었다.
한 달 쯤 뒤에 신숙주가 김수온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신숙주는 그 집 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책이 모두 낱장으로 뜯기어 그 집 벽에 붙어 있었다.
신숙주가 어이가 없어 하며 그에게 사연을 물어 보자 김수온은 태연하게 말했다. "벽에 붙여 놓고 드나들 적마다 읽고 외우면 참 편리하지요" 그의 벼슬은 영중추에 이르렀다.
글짓기에는 이기고 속임수에는 진 이석형 이석형(1415-1477)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백옥, 호는 저헌이다.
그의 아버지 이회림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그 부인과 더불어 삼각산에서 기도하고 그를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아버지가 꿈을 꾸었다.
꿈을 막 깨자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려 왔으므로 이름을 석형이라고 지은 것이다.
공은 출산되었을 때 푸른 보자기에 싸여 나왔다.
푸른 보자기를 째고 보니 태아의 살갗이 검고 뼈마디가 늘씬늘씬하였고 전신에 털이 있었으므로 그 어머니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아이를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보고는 "참으로 기이한 사내아이구나" 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이석형은 볼기에 손바닥만한 검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 모양을 닮았다.
이석형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꿈에 볼기의 거북점이 거북으로 살아나 이석형의 몸을 맴돌곤 하였다.
이석형은 차츰차츰 자라나면서 모습이 씩씩하고 도량이 넓어졌으며 배움을 부지런히 하였다.
생원시, 진사시를 거쳐 세종 23년(1441) 문과시에 장원하고 동왕 29년 중시에 합격하였다.
세종이 팔준도를 직접 만들고 그 그림에 쓸 글을 지어 오도록 신하들에게 명했다.
이때 이석형이 전의 두련을 만들었다.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이 천년 운세에 감응하고 땅의 쓰임이 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신물이 있는 힘을 다 바치네 이 글을 본 성삼문은 '이번 과장에서는 이석형의 글이 가장 우수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이석형을 보고 속임수를 써서 말했다. "그대가 시골 학자를 본따서 이 글을 지은 모양인데 말 마자와 임금 군자를 대로 만든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 이석형은 점잖은 사람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지어 놓은 글을 버리고 다시 시를 지었다.
성삼문이 그 글을 훔쳐서 전을 만들어 일 등을 차지하였다.
이석형이 성삼문을 보고 말했다. "내 무릎은 남에게 굽힌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삼문이 이석형에게 응수했다. "나는 남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은 사람의 무릎을 굽히게 하는 사람이오"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점쟁이의 아들을 살려준 홍윤성 홍윤성(1425-1475)의 본관은 회인이고, 자는 수옹이다.
천성이 사납고 잔인하여 살생을 좋아하였다.
문종 즉위년(1451)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제천정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십 명의 장사들이 배에 올라가 뱃사공을 위협하여 배가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홍윤성이 몸을 날려 배 위에 올라가 노를 부러뜨리고 그들을 모두 물에다 던져 버린 뒤 자신이 직접 배를 저어 한강을 건넜다.
이를 본 수양대군이 그를 오라고 하여 만났다.
홍윤성은 수양대군에게 절을 하지 않고 고개만 약간 숙이면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은 유충하고 나라는 뒤숭숭하며 대신들은 임금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거늘, 대군께서 이렇게 뱃놀이에만 빠져 있고 부하들은 길가는 나그네를 괴롭히니 매우 한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불렀습니까?" 수양대군은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와 은밀하게 친분을 맺어 두었다.
뒤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홍윤성은 정난공신이 되어 인산부원군에 봉해지고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홍윤성은 홍계관의 점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점을 쳤는데, 점쟁이 계관이 한참 있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말했다. "매우 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형조 판서에 오를 것입니다.
그때에 저의 자식놈이 죄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할 신세가 될 터인데 제발 오늘을 잊지 마시고 저의 자식을 살려주십시오" 계관이 자기 아들을 불러내 홍윤성 앞에서 말하였다. "모년 모월에 너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면 형조 판서 어른께 누구의 자식임을 말씀드려야 한다" 이 말을 들은 홍윤성은 매우 놀라고 정신이 없어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과연 그 뒤에 추국이 있을 때 스스로 점쟁이 홍계관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밝히는 자가 있었다.
홍윤성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그를 풀어 주었다.
세조 14년(1468)에 우의정과 영의정에 올랐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홍산에 살면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고 홍산 수령 역시 괴로움을 많이 받았다.
세조가 온천에 갔는데, 홍산 사람 나계문의 아내 윤씨가 밖에서 울면서 호소하였다.
세조가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여인에게 그 사연을 들었다. "홍윤성의 집 종들이 세력을 믿고 자기 남편을 때려서 죽게 하였지만 현감 최윤은 홍윤성의 권세를 겁내어 자기 남편을 직접 때려 죽게 한 사람만 가두고 다른 사람은 불문에 부쳤습니다.
또 홍윤성 집의 종들이 와서 갇힌 죄수를 데리고 갔으며, 감사 김지경은 현감에게 부탁하여 그 죄수를 사면하라고 하고 도리어 저의 아버지 윤기에게 홍윤성을 모해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공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호소를 듣고 난 세조는 윤씨 여인을 불쌍히 여겨 감사 김지경과 현감 최윤 그리고 홍윤성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게 하고 윤성의 집 종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얼마 후에 임금이 홍윤성을 지난 공을 참작하여 특별히 사면하고, 이어 명하였다. "윤씨 여인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절의가 가상하다.
그 여인에게 쌀 열 가마를 주어라" 송도 계원에도 들지 못한 한명회 한명회(1415-1487)의 본관은 청주이다.
젊었을 적에 불우하게 살았으며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성의 경덕궁 문지기가 되었다.
명절을 맞아 관료들은 만월대에 모여 유쾌하게 놀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두들 언약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남쪽에서 이곳 개성으로 와서 벼슬하게 된 고향 친구들이다.
오늘 우리는 계모임을 만들어서 영원한 우의를 다지자!"고 하였다.
외로움을 느낀 한명회도 이 계모임에 넣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모두들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하고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한명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끼워 주지 않은 것이다.
그 이듬해가 되자 세상이 바뀌었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한명회는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을 뿐 아니라 부원군이 되어 그 권세가 막강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의 송도 계원들은 모두 힘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그만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를 일컬어 '송도 계원'이라고 부르는 말이 유행되었다.
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한 이징옥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이다.
형 이징석은 18세, 징옥은 14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산돼지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
두 아들은 집을 떠났다.
형 징석은 산돼지를 잡아서 돌아왔고, 징옥은 이틀 뒤에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의아해 하며 이징옥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말이 형의 용맹이 너보다 못하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너의 형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너는 이틀 후에 오면서 빈 몸으로 왔느냐?" "어머니 문 밖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 보니 마당에 큰 산돼지 한 마리가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징옥은 어머니가 산 산돼지를 보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하고 밤낮으로 추격하여 그 돼지가 기진맥진했을 때를 기다려 사로잡아 온 것이다.
언젠가 이징옥은 길을 가다가 슬피 우는 젊은 부인을 만났다.
징옥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저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 호랑이가 지금 대밭 속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징옥은 팔을 걷어붙이고 즉시 대밭으로 들어갔다.
칼로 호랑이 배를 갈라 보니 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징옥은 그 고기를 보자기에 싸서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였다.
이징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징옥의 아내가 집안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기를 원했으므로 이징옥은 억지로 붙들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 이징옥이 영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지 오랜 뒤였다.
이징옥은 사냥해서 얻은 수백 마리의 짐승을 시집간 아내 집으로 보내 주었다.
이징옥의 무용은 따를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인이나 오랑캐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
그는 육진을 설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김종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세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징옥은 함길도 절제사로 있었다.
이징옥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세조는 이징옥에게 서울에서 내려간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 주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을 보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준 이튿날 이징옥은 생각했다. '절제사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인데 박호문이 소문도 없이 갑자기 와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즉시 절제사가 있는 경성으로 달려갔다.
그는 박호문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불러낸 뒤에 그가 나오자마자 쳐서 죽이고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제 강을 건너가 내가 대금황제가 되면 만족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 이튿날 행군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판관 정종이 이징옥을 죽이려고 사람을 지붕 위에 매복시켜 두었다.
밤이 되어 이징옥이 의자에 앉아 잠깐 졸고 있는데 의자 밑에 있던 이징옥의 아들이 갑자기 말하였다. "꿈에 아버지가 머리에서 피를 흘려 그 피가 다리에까지 흘러 내려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징옥은 그것은 좋은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종이 군사들을 데리고 돌진해 들어왔다.
이징옥이 그들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그 자신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미인계를 써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 이시애(?-1467)의 본관은 길주이고, 벼슬은 회령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동생 이시합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길주에 도착하자 이시합은 길주의 관기로 있는 자신의 첩 소생 딸을 절도사의 침실에 들여보내어 수청을 들도록 하고 잠긴 문을 안에서 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문으로 들어온 반란군들에 의하여 절도사 강효문은 피살되었고, 이시애는 길주를 발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총사로 삼았다.
귀성군 이준은 겨우 18세였지만 무술과 전략이 있다는 이유였다.
또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어유소를 각각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 난의 토벌에 나섰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수령을 살해하고 반란군에게 호응하는 일이 일어났다.
함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관찰사 신면을 공격하였는데, 신면은 누각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달려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관서지방 출신으로 벼슬이 2품에 오른 단천 사람 최윤손을 불러 효유사로 임명하고 함길도로 내려보냈다.
효유사의 임무는 반란군을 회유하고 그곳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내려간 최윤손이 반란군의 편이 되어 조정의 비밀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강순과 허종이 거느리는 관군은 홍원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또 북청과 만령에서도 크게 싸웠다.
반란군은 높은 지역으로 달아나 진을 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 대었으므로 관군이 접근할 수 없었다.
토벌 좌장군 어유소는 작전을 바꾸었다.
정예병을 뽑아 작은 배에 나눠 태우고 풀색, 나무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혀서 보냈다.
그들은 해안을 통해 상륙하여 나뭇가지를 잡고 그들이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을 택하여 그들의 등뒤에서 징을 치고 북을 두드려 소란을 피우도록 작전을 짰다.
등뒤 높은 곳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적들은 깜짝 놀라 대오가 흐트러지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뒤따라 도착한 관군의 대부대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방패를 이고 개미떼처럼 언덕을 기어오르니, 반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용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시애는 급하게 길주로 도망하였다.
그는 가족과 살림을 꾸려 오랑캐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길주 사람 허유례가 적장의 부하 이주 등을 꾀어 이시애와 이시합을 생포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진중에서 끊어져 서울로 보내졌다.
시로써 신숙주를 굴복시킨 윤자운 윤자운(1416-1478)의 본관은 무송이고, 자는 망지, 호는 낙한헌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 26년에 문과에 각각 합격했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수상을 지내고, 성종조에 좌리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의 문명은 신숙주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동년(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이)모임에서 신숙주와 겨루어 대련을 짓기로 하였다.
신숙주가 먼저 "반가운 친구는 모두가 백발이요" 하니 윤자운이 "젊은 재상은 다만 일편단심뿐"이라고 화답했다.
신숙주는 그만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윤자운을 극구 찬양하였다. "나는 공의 정밀하고 민첩함을 따를 수 없구려!" '흑두'와 '청안', '백발'과 '단심'은 멋진 대구를 이루어서 훌륭한 대련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신숙주를 감탄시킨 것은 '단심'이란 쌍관어를 절묘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쌍관어'란 한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말이며, 시작법에서 은유의 맛을 느끼게 하는 시의 기법이다.
그때 신숙주가 사랑하던 기생의 이름이 바로 '단심'이었던 것이다.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은 윤필상 윤필상(1427-1504)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양경이다.
세종 29년(144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조 9년(1463) 11월에 그는 형방승지로서 대궐에 들어가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윤필상은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아마도 주상께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걱정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낱낱이 작은 책자에다 기록하여 두었다.
밤 오경이 되자 내시가 와서 형방승지를 급히 부른다는 왕명을 전하였다.
유필상은 허둥지둥 의관을 갖추고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기록한 작은 책자를 소매 속에 넣고 침전 앞에 대령하였다.
임금이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일렀다. "오늘밤은 매우 추워 따뜻한 방에서 털옷을 껴입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옥중의 죄수들이 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먼 지방은 힘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현재 도성의 감옥에 있는 죄수가 얼마인지 속히 아뢰어라" "신의 직책이 형방승지입니다.
형옥에 관한 일은 신의 직무입니다" 윤필상이 즉시 작은 책자를 가지고 숫자를 보면서 죄목별로 죄수의 수를 소상하게 아뢰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특하게 여겨 창문을 열고 침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윤필상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는데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임금은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내전(왕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보배로운 신하요" 그제야 윤필상은 정희왕후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 뒤로부터 차례를 뛰어넘어 기용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높은 벼슬에 승진되었다.
성종 9년(147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10년에 그는 진도로 귀양갔다.
성종 비 윤씨를 폐비하는 조정 의논에 참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중종 때에 신원 되었다.
윤필상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갔을 때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본 일이 있다.
점쟁이는 그에게 말했다. "수명과 벼슬은 모두 높겠지만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을 운입니다" 윤필상은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이라는 찬란한 벼슬 생활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끝내는 진도에 유배되었다.
어느 날 저녁, 이웃에 사는 사람이 김매는 품꾼들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상림의 밭으로 모이십시오" 윤필상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느 곳을 상림이라 하오?" 밭주인이 대답했다. "여기서 5리 쯤 되는 곳에 상림, 중림, 하림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윤필상은 그제야 삼림 밑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점괘가 떠올랐다.
그는 낙담하여 허공만 쳐다보았다.
얼마 안 되어 연산군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
용상을 가리키며 이 자리가 아깝다고 예언한 손순효 손순효(1427-149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경보, 호는 물재 또는 칠휴거사라고 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세조 3년에는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성종조에는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성종이 주연을 마련하여 중신들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거나하게 되자 손순효가 입을 열었다. "직접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성종이 앉아 있는 어탑(임금이 앉는 상탑)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손순효가 머지않아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용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손순효가 또 아뢰었다. "부녀자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 국정을 어지럽히는 일이 너무 심하고, 바른 말을 마음대로 하는 언로가 막히겠습니다" 성종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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