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소?" "임금이 만약 그런 상황을 아신다면 저절로 그런 실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연회에 참석한 재상들이 모두 놀라며 손순효가 아뢴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임금은 "내가 간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 뿐이었다.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성종이 만날 때마다 그를 경계하였다. "앞으로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시오" 어느 날 승문원에서 올린 외교문서의 내용이 세련되지 못하여, 성종이 편전에 나아가 손순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손순효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오기는 하였는데 머리카락이 망건 밖으로 나와 헝클어져 있고 취한 기운이 온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성종이 노기를 띠고 말했다. "표문의 글이 정교하지 못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려고 하였더니 경이 이렇게 취했구려. 그리고 또 내가 일찍이 경의 면전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가?" 손순효가 답하였다. "신에게 시집간 딸이 있사온대 못 본 지가 오래이기에 오늘 마침 지나다가 들렀더니 술상을 들여오길래 거절을 못하였는데, 다만 세 그릇을 비웠을 뿐입니다" "경이 마셨다는 술잔이 무슨 그릇인가?" "주발로 세 번 마셨습니다" "경은 이미 술이 취했으니 아마도 표문을 지을 수 없을 듯하오. 그러니 제학을 불러서 같이 짓도록 하오"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고 신이 고쳐 짓겠습니다" 성종이 쓰던 벼루를 가져다주게 하였더니 손순효가 곧바로 표문을 지어 바쳤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고 사용원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마침내 한껏 마시며 크게 취한 뒤에야 물러났다. 외손 30여 명이 규장각의 관원이 된 양성지 양성지(1415-148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순부, 호는 눌재이다. 여섯 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아홉 살 때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 23년(144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조용히 주연을 마련하고 각기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더니 양성지가 나아가 말했다. "성상께서 대신을 두터운 예로 대우하시어 매번 술잔을 기울이며 담론하게 하시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술 마시는 일을 절제하시고 옥체를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대가 나를 아끼는구나" 세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고, 홍문관 제학으로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양성지는 나의 제갈량이다" 하며, 발탁하여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좌리공신(성종 즉위를 보좌하는 공신에게 내린 훈명)으로 기록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대제학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글읽기를 좋아하여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 손에세 책을 놓지 않아 상하 천년 사이의 치란흥망과 인물의 고하현부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이 알고 있었다. 장년 시절에는 군사에 관한 논의를 즐겨 하여 관련된 소를 10여 차례나 올렸는데,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군적에게 누락되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한 집안에서 장정이 한 사람뿐인 경우에는 군역에 세우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의 장정이라도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는 병사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평생 뜻이었다.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집현전에 들어간 것이 16년이고, 서적의 교감을 맡은 것이 20년이며, 사관을 겸임한 것이 34년이고, 홍문관에 근무한 것이 26년이며, 문과의 고시관을 열 여섯 번이나 맡았다. 만년에는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로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사를 토론하고 간혹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로 통진별장에서 놀았는데, 조용하기가 시골의 평범한 늙은이 같았다. 일찍이 내각(규장각)의 관제 및 조례를 편집하였는데, 매우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으므로 성종이 가상히 여겨 권장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성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내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당하 문관 중에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 제술 시험을 보일 때의 시험관)을 선발할 적에 이 조례를 적용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문집 3권을 출간하게 하였는데, 그때 각신 30여 명이 모두 양성지의 외손들이었다. 가집 6권이 있다. 68세에 죽었는데 시호는 문양이라고 내렸다. 어릴 때부터 대가가 될 것이라고 촉망받은 신항 신항(1477-1507)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용이이다. 열네 살에 성종의 딸 혜숙옹주에게 장가들고 고원위에 봉하여졌다. 나이 7, 8세 때부터 이미 '시경'과 '서경'을 익혔으며 겸하여 황산곡의 시를 모두 외웠다. 하루는 아버지인 신종호가 시험삼아 외워 보라고 하였더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산수도를 꺼내어 절구를 짓게 하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리를 내어 응답하였다. 물은 푸르고 모래는 희어 가을 기운 드높은데 볕을 따라 날던 기러기 갈대밭에 내리네 다시 보니 연기 같은 비 창망히 내리는 저쪽 밖에 털끝같이 푸른 산이 우리 집이로다 이 절구를 들은 아버지는 매우 감탄하였다. "이 아이는 후일에 반드시 대가가 될 것이다" 혜숙옹주를 출가시키려고 할 무렵 대상자를 선발하는데 성종이 신항을 한 번 보고 좋다고 하였다. 당시 점을 잘 치는 자가 수명이 길지 않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을 취함에 있어 그가 현명한가 현명하지 않은가를 가리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을 논하겠는가. 이 사람은 기상이 범상하지 않으니 그 마음속에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다" 성종은 마침내 그를 사윗감으로 결정하였다. 어느 날 성종이 신항에게 물었다. "네가 글 짓는 것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지은 것이 몇 수나 되는가?" 신항이 몇 수를 적어서 올렸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성종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운명할 즈음에 동생 신잠을 불러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근신이 첫째이고, 재예가 다음이다. 이 두 가지를 겸해서 갖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재예를 버리고 근신을 지켜야 한다" 잠시 후 조용히 읊조리며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좋은 집에 살다가 죽어서 산언덕으로 돌아 가도다" 시호는 문효이다. 높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더라도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 권경희 권경희(1451-149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번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9년(147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수찬으로 임명되자 대간이 권경희의 아내 김씨의 집안이 미천하다는 것을 들어 논박하였다. 권경희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 듣고 그 며느리를 버리도록 핍박하였으나 권경희가 사직하며 말씀드렸다.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10여 년 동안을 함께 가난한 생활 속에서 고생하며 밤낮으로 오늘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지금에 와서 버린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렇게 못할 짓을 해 가며 높은 벼슬에 등용될 수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어찌 못할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의롭게 여겨 역시 며느리를 버리라고 강권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또 논박을 하였으나, 임금이 감싸주며 대간의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경희가 공명을 구하지 않고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선비이다" 그러자 권경희의 처가인 김씨 집안에서 조정에 진상을 보고하여 그들의 신분이 미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져 마침내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다. 권경희의 장인은 김치운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권경희는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예악을 터득한 바가 많았는데 그가 돌아오자 모두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학식이 부쩍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과거에 낙방하고도 장래 대제학감으로 평가받은 김종직 김종직(1431-1492)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계온, 호는 점필재이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를 지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런데 괴애 김수온이 대제학으로서 낙방자의 시권(시험 답안)을 열람하다가 그 속에 점필재의 시권이 있으므로 읽어보니 매우 뛰어난 글이었다. "이 글은 참으로 뒷날 대제학을 맡을 솜씨이다" 김수온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점필재가 낙방된 것을 아깝게 여겨 그 시권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영산 훈도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한강가에 있는 제천정 기둥에 시가 씌어 있었다. 눈 속에 핀 찬 매화와 비 개인 뒤의 산 모습 보기는 쉬워도 그리기는 어려워 시인의 눈에 띄지 않을 줄 일찍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을 그릴 것을 어느 날 괴애가 제천정에서 유람하다가 그 글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이 글은 참으로 지난날 백룡부를 지은 사람의 솜씨이다" 김수온이 그 글을 지은 사람을 추적해 보았더니 과연 점필재의 작품이었으므로 시를 알아보는 지력이 귀신과 같다고들 하였다. 김종직은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승문원에 들어갔는데 어세겸이 승문원의 선배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시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라 하여도 달갑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종이 그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이라 내렸다. 그 뒤 연산군 무오사화 때에 그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화를 당하였으며, 문집도 태워 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있고 나서 억울함이 씻겨졌다. 귀갑이라는 점괘가 정말로 들어맞은 김홍도 김홍도(1524-155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중원, 호는 남봉이다. 재주와 학식으로 일찍이 이름이 알려졌고 명종 원년(1546)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5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당시에 23세였다. 그 뒤 명종 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직제학 김노가 주역 점을 잘 쳤는데 김홍도가 처음 태어났을 적에 점을 쳐보았더니 이름을 귀갑이라고 하라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어릴 적의 이름을 귀갑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김홍도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사람들은 그가 장원할 암시였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김노는 한창 병이 들어 앓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뒤 얼마 안 되어 정말 죽고 말았다. 그 뒤에 김홍도가 윤원형과 사이가 좋지 않아 홍문관 전한으로 갑산에 귀양가서 죽었는데 갑산으로 귀양간다는 점괘가 정말 들어맞은 것이었다. 뒤에 벼슬이 회복되었으며 아들 기수가 존귀하게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홍도는 기상이 호방하고 사물을 얕잡아 보아 늘 입버릇처럼 뇌었다. "집의가 불의를 집행하고 지평이 공평하지 않다" 대관들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아 마침내 화를 당하였다고들 하였다. 어린 나이에 소를 올려 아버지를 구한 김규 김규(1521-1565)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몽서이다. 중종 38년(154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전한에 이르렀다. 성종이 친히 경회루의 못가에 나아가 비오기를 빌며 뜨거운 뙤약볕 아래 앉아 있는데 갑자기 풍악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었다. "방주감찰(수석 감찰)의 집이 이웃에 있는데 오늘이 연회 하는 날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므로 내가 지금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풍악도 걷어치우게 한 채 한데서 이렇게 빌고 있는데, 국록을 먹는 무리들이 어떻게 감히 풍악을 벌여 놓고 즐겁게 노느냐" 임금이 모두 잡아다 옥에 가두라고 명하니 그 자리에 있었던 13명이 한꺼번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그들의 집에서 자제들을 시켜 글을 올려 애걸하였다. "저들이 어처구니없는 죄를 짓고는 또 어린 자제를 시켜 소를 올리게 하여 모면하기를 애걸하니 더욱 밉살스럽다" 임금이 화를 내며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하자 소에 연명하였던 아이들이 모두 겁을 내어 달아나 흩어졌는데, 김규 혼자 도망하지 않고 잡혀 왔다. "너는 어린아이인데 어찌 혼자 도망하지 않았는가?" 임금이 묻자 김규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이 아비를 구원하려고 소를 올렸는데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도망을 하겠습니까?" "이 소는 누가 지었는가?" "신이 지은 것입니다" "누가 썼는가?" "신이 썼습니다" "네 나이 몇 살인가?" "열세 살입니다" "네가 소를 짓고 글씨를 쓸 수 있는가 시험해 보겠다. 만약 속이면 당장 목을 베일 것이다" "짓고 쓰기를 모두 신의 손으로 한 것이오니 한번 시험해 보소서" 임금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긴다'는 제목으로 글을 짓게 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다 짓고 그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 동해에서는 원통하게 죽은 과부 때문에 3년 동안 가뭄을 불러 들였고, 은나라 임금 성탕은 천 리에 비를 내리게 하였으니, 성상께서 그런 일들을 생각해 주소서" 임금이 매우 기특히 여기며 김규에게 물었다. "네 아비가 누구인가?" "방주감찰 김세우입니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김규입니다" "네가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니, 네 글을 보아 네 아비를 석방하고 네 글씨를 보아 네 아비의 친구들을 석방하니, 너는 아비에 대한 효도를 임금에게 옮겨 충성하여라" 임금이 어필로 써서 중관(내시)에게 명하여 의금부 감옥에 갇힌 13명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춘추를 잘 외워 하루아침에 대사간이 된 구종직 구종직(1424-147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정보이다. 세종 26년(144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느 날 성종이 밤에 경회루에 나아갔더니 어떤 사람이 경회루 곁에 엎드려 있었다. 성종이 누구냐고 물었다. "교리 구종직입니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초야에 있던 신이 일찍이 경회루의 요지는 천상의 선계란 말을 들었사온대 마침 대궐에 입직하였다가 감히 몰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성종이 앞으로 나아 오도록 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는 노래를 부를 줄 아는가?" "촌사람의 노래가 어찌 가락에 맞겠습니까?" 성종이 시험삼아 부르도록 명하니, 구종직이 목청을 길게 뽑아 한 곡조 불렀는데 지붕이 진동하는 듯하므로 성종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경전을 외울 수 있는가?" "'춘추'를 대강 기억합니다" 성종이 외우도록 명하니 물이 흐르듯 막힘 없이 외웠다. 성종이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그 자리를 파하였다. 이튿날 특별히 구종직을 대사간으로 임명하자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 가며 글을 올려 적극적으로 불가함을 논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성종이 삼사의 관원을 모두 불러다 입시 하게 하고 또 구종직도 오도록 명하여 그 자리에서 대사헌 이하에게 '춘추'를 외우게 하였는데, 한 구절이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성종이 구종직에게 외우도록 명하여 제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권에서 뽑아 질문을 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환하게 알고 있었다. "경들은 한 구절도 잘 외우지 못하면서 오히려 청직에 올라 있는데 구종직과 같은 사람이 어찌 대사헌에 합당하지 않단 말인가?" 성종이 삼사의 관원을 둘러보며 말하자 모두들 황공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났다. 구종직은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안장이다. 명함에다 시를 써 박원형의 마음을 움직인 윤효손 윤효손(1431-1503)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유경이다. 그의 아버지 윤처관이 의정부 녹사가 되어 이른 새벽에 정승 박원형의 집 문 앞에 가서 명함을 드렸는데, 문지기가 정승이 주무신다는 핑계로 명함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시장한데다 피곤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윤처관은 아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주가 없는 탓으로 이와 같이 욕을 먹으니, 너는 모름지기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네 아비처럼 되지 말아라" 이야기를 들은 윤효손이 그 명함 끝에다 아버지 몰래 시를 적어 넣었다. 정승은 해가 높도록 단잠을 자는데 대문 앞 명함 꼭지에는 털이 났도다 꿈속에서 주공을 만나 보거든 당시 어진 선비 환영하던 수고를 꼭 물어 보소서 이튿날 아침에 윤효손의 아버지가 아들이 시를 쓴 것도 모른 채 다시 찾아가서 명함을 드렸더니 박원형이 그 시를 보고는 즉시 불러들여 물었다. "이 시는 네가 쓴 것이냐?" 윤처관이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글자의 획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그의 아들 윤효손이 쓴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박원형이 윤효손을 불러다 보고는 극도로 감탄하며 칭찬하고 정승의 딸을 윤효손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세종 32년(145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고 기로소(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받던 기구)에 들어갔다. 2. 사화의 소용돌이 작은 임가 숭재와 큰 임가 사홍은 천고의 간웅 중에 가장 큰 간웅이네 천도가 돌아오면 갚음 응당 있으리니 네 뼈 또한 바람에 흩날려짐을 알겠도다 폐비사건을 보고 갑자사화를 예견한 이세좌의 부인 이세좌(1445-150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맹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판서까지 올랐다. 성종이 폐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죄주어 사사할 적에 이세좌가 승지로서 사약을 가지고 갔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왔더니 그의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 폐비의 처형을 논의하더니 결국 어찌되었습니까?" "오늘 이미 사사하였소. 부득이 내가 사약을 전달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탄식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자손도 살아 남는 이가 얼마 없겠구려. 어머니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 아들이 어찌 훗날 보복함이 없겠소"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드디어 이세좌는 동쪽 저자거리에서 참형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 수정 또한 죽음을 당했다. 부인의 선견지명에 주변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폐비 사건에 말려들지 않은 허종 허종(1434-1494)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종경, 호는 상우당이다. 세조 3년(1457)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3년에 북병사로서 이시애를 토벌하여 적개공신 일등에 책록되었다. 그때 나이 34세였다. 소싯적에 벗과 같이 산중의 절에 기숙하며 글을 읽었는데, 밤에 도둑이 들어 옷과 신발을 훔쳐 가 버렸다. 도둑맞은 사실을 알고, 사람들은 모두 애를 태우며 한탄을 하는데 허종은 태연히 붓을 가져다가 벽에다 이렇게 적었다. 이미 내 옷을 훔쳐 갔으면 내 신은 훔쳐 가지 말아야 할 것이지, 옷도 가져가고 또 신발마저 훔쳐 가니 이는 도선생의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것을 보고 식자들은 그의 도량에 감복하였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가뭄이 심하여 조야가 비를 애타게 기다렸다. 방방(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합격증서를 주는 일)을 하는 날 갑과 1등을 부르자마자 비가 쏟아지니 그때 모두 '상나라 장마비처럼 태평성대가 올 징조'라고들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기 위해 갑자기 대로하여 시신에게 머리를 꺼둘러 끌어내리게 하고 칼을 가져다가 무릎 위에 가로 걸쳐놓고 당대의 역사 최적에게 명령하였다. "내가 이 칼을 뽑는데 갑에서 다 나오거든 곧바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려라" 날카로운 칼날의 끄트머리가 나오자 이를 본 시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허종은 두려워하지 않고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말소리가 또록또록 하고 힘찼다. 세조가 참된 장사라고 칭찬하며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술을 마시게 하였다. 허종은 천천히 술상 앞에 나아가서 술을 마시고 물러났는데 그 태도가 참으로 안온하였다. 성종 5년에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승하하고 후궁인 윤씨가 원자를 낳자, 윤씨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다. 윤씨는 여러 후궁들을 질투하여 임금에게까지 불손한 일을 자행했다. 임금이 대로하여 폐하여 내쫓았으며, 사사하려고 신하들을 불러 전정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대단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허종은 영상이었는데, 이른 아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다가 그의 누이 집 앞을 지나게 되어 들어가 뵈었다. 그 누이가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일에 대해 부당함을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민가에서 늙은 종이 집주인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함께 주인 마님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후일에 그 아들이 가통을 계승할 때에 어찌 화환이 없겠는가" 허종이 크게 깨닫고 돌다리를 지나가다가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핑계하고,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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