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가 곧 오실 터인데 나가서 정중히 맞이하는 것이 예의에 걸맞습니다" 아전이 와서 아뢰었으나 조언형은 병을 핑계 대며 나가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조언형이 감색의 직령에다 분투를 끌고 종 하나를 시켜 술통을 메게 하고, 바로 상방으로 나아갔다. "혼지(강혼의 자) 어디 있는가?" 강혼이 그 목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였다. "나 여기 있네" "날씨가 차가운데 자네 한잔 마시려나?" 조언형이 자리에 앉아 안부도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는데 안주가 없었다. 강혼 역시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마셨다. 세 순배가 지났을 때에 조언형이 말문을 열었다. "지난날 자네가 한 짓은 개나 돼지만도 못하니 자네가 남긴 것을 누가 먹겠나. 자네가 젊었을 적에는 총명하고 민첩하여 사귈 만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조그마한 재주를 가지고 보잘것없이 처신하기가 이렇게 극도에 이른단 말인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기에 내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하려 하다가 한번 만나 나무라려고 하던 터였는데, 이제 이미 서로 만나 보았으니 나는 내일 당장 떠날 것이네" 다시 한잔 더 마시자고 하며 또 석 잔을 잇달아 주니 강혼은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튿날 조언형이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뒤에 벼슬이 판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이 바로 남명 조식이다. 조식의 의기가 격양하는 기풍은 대체로 물려받은 데가 있다고들 하였다.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이라고 준열하게 풍자한 주세붕 주세붕(1495-1554)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경유, 호는 신재이다. 중종 17년(152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독서당에 들어갔으며,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3년 뒤에는 헌납으로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주세붕이 그의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흰 실 여덟 타래를 주면서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정말 어머니의 병이 낫고 80일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제야 그 여덟 타래가 80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켜 준 징조였음을 알았다. 주세붕이 일곱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빗질을 못하자 자신의 머리를 감고서 기름을 바른 뒤 그의 어머니 머리카락에다 갖다 대어 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건너오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 앞에 여막을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는데 3일에 한번씩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세붕이 상주가 된 뒤로는 그 개에게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주세붕의 효성이 짐승까지 감동시켜 그렇다고들 여겼다. 주세붕이 홍문관에 있을 때에 직제학이 바르지 못한 의논을 하므로 주세붕이 면대하여 공박하기를, "귀하는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이오" 하니, 그 사람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가 되어 문성공 안유가 살던 옛 터에다 사우를 지어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며 백운서원이라고 불렀다. 백운서원은 좌우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주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며 연습하게 하였고, 곡식을 저축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학생들의 숙식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 경전과 사기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강독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서원 터를 처음 닦을 때에 그 터에서 구리로 된 그릇 3백여 근을 얻게 되어 그것을 팔아 경비로 썼다. 그 뒤 명종 5년(1550)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는 임금을 경유라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퇴폐한다는 취지로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를 드리되, 송나라 백록동 서원 학규에 의거하여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을 써 주며 겸해서 전토와 노비를 내려 주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도록 하였다. 감사 심통원이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 주고,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 기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사서와 오경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으니, 사원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 주고 편액을 써서 내려 주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명종 5년에 대사성으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세붕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을 한결같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내며 산과 못가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까지 경치가 좋기로 이룸난 곳에는 가끔 그가 남긴 자취가 있다. 60세에 죽었으며, 벼슬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죽계지'와 '무릉지'가 있고 합천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형의 아들 주박을 후사로 삼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풍자했던 어득강 어득강(1470-1550)의 본관은 함종이고, 자는 자유, 호는 관포 또는 혼돈산인이라고도 하였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2년(149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득강은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그는 영남 진주에 살았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우아한 운치를 즐겼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 외직을 자청하였고, 성품이 영리에는 담박하고 물러나는 데는 미련이 없었다. 벼슬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아 조정에서 좋은 벼슬로 그를 불렀지만 모두 물리쳤다. 그는 조그마한 초가집을 산수 사이에다 지어 가족들과 함께 기거하지 않고 아이 종 하나만을 데리고 간단하게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의 생활은 담담하기가 속세를 떠난 중의 생활과 같았다. 그는 평소에 우스갯소리를 잘했다. 어느 날 여러 사람들과 마주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하였다. "도사 정만중이 세자시강원의 문학으로 갈려갔다" 어득강이 문득 그 소리에 맞추어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문학이 되었는데 어째서 정만중이 문학이 되었다고 하는가?" 좌우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어득강이 대답하였다. "'논어'에 문학에는 자유(공자의 제자)와 자하(공자의 제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듣는 자들이 허리를 잡고 웃었는데, 어득강의 자가 자유였기 때문에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었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특별히 가선대부로 증직되었으며, 저서에는 '동주집'이 있다. 소인이란 비난을 면치 못한 주초위왕의 주인공 남곤 남곤(1471-1527)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사화, 호는 지정이다. 고려 말엽에 참지문하를 지낸 남을진의 증손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시문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 박은, 이행, 홍언충 등과 더불어 명망이 높았다. 금남 최보는 그를 인재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눈은 생김새가 특이하여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고, 용모와 거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였다. 성종 25년(149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부제학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평안도 변방으로 귀양갔다. 중종 2년(1507)에 남곤이 상중에 있으면서 박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그 공로로 이조 참판에 승진되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정광필이 크게 기용할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여 그를 불러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정과 재야에서 오래도록 분하게 여겼던 공론에 따라 현덕왕비의 위호를 회복시키는 내용의 글을 올려 왕의 윤허를 받기는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여 대제학의 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당이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옛날부터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남곤의 문장은 버릴 수 없다" 마침내 남곤이 신용개를 대신하여 대제학이 되었다. 남곤은 한편으론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유감을 품었다. 그 무렵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남곤과 같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는데, 남곤이 조정의 의논을 회피하기 위해 능헌관이 되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일로 조광조가 그를 가볍게 보았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서울과 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걱정이 되고 두려워하여 심기가 편치 않았다. 남곤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태로운 말로 불안해하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대궐 동산에 있는 나뭇잎에다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는데, 동산의 벌레들이 꿀물이 묻은 부분을 갉아먹어 '주초위왕'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큰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중종 14년(1519) 11월 15일에 이장곤, 홍경주, 고형산을 꾀어 초저녁에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 왕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비밀리에 아뢰어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모두 남곤이 주장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은 정광필을 갈아치우고 남곤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고, 김전을 영의정으로, 이유청을 우의정으로 삼아 세 정승의 자리를 채웠다. 2년 뒤에 송사련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스스로 소장을 짓는데, 일부러 죄인을 다스리는 행정이 엄중하지 못한 것과 조정의 기강이 풀렸다는 몇 가지 조목을 거론하며 당인들을 얽어 모함하고 교묘하게 꾸며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반역에 동조하였다고 지목하여 되도록 엄중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적용하도록 힘을 써서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변론하거나 구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8년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5, 6년 사이에 그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죽게 되자 인심은 속이기 어려운 터라 공론이 저절로 과격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읽고 있던 남곤은 항상 불안하여 진나라 은호처럼 허공에 글씨를 쓰면서 근심을 품고 즐거운 빛이 없었다.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냐?" 그가 친족들에게 묻자,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였다. "반드시 소인이라는 비난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곤이 마침내 집안 사람을 시켜 자신이 평생 동안 쓴 문고를 가져다 모두 태워 버리게 하였는데 '유자광전'만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중종 22년 57세로 죽었는데, 시호는 문경이다. 선조 초에 그의 벼슬을 깎아 없앴다. 청맹과니라고 칭탁하고 청렴하게 산 남포 남포(?-1540)는 지정 남곤의 동생이고, 자는 사미, 호는 지지당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라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을 끊고 청맹과니(당달봉사)라 칭탁하며 벼슬하지 않고 적성의 감악산에 숨어 항상 무명베 갓에다 해진 옷을 입고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스스로 창랑거사, 소요자라고 일컬었으며, 가는 곳마다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아 세상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 중종 16년(1521)에 비로소 감파동의 재사로 돌아와서 19년 뒤에 죽었는데 나이 82세였다. 그가 병이 나서 앓자 그의 아들 장령 남정진이 근무지인 곡산에서 돌아와 모셨다. 남포가는 아들에게 경계하였다. "네가 여덟 번 고을 수령으로 임명받아 세 번은 사양하고 다섯 번 나갔던 것은 부모가 있음으로 해서 뜻을 굽힌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집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집이 있다. 집은 바람과 비를 가리기에 충분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가기에 충분하니,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 벼슬길에 나갈 계획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묘갈에는 단지 공조의 옛 직함만 써야 한다. 전한과 직제학은 살아서 취임하지 않았는데 죽어서 어찌 묘에다 쓰랴" 명종이 특별히 치하하며 옷감을 내려 주었다. "고 직제학 남포는 평생토록 영리는 멀리하고 물러나는 데는 미련이 없었다. 그 절개를 이미 가상히 여겼거니와 그의 아들 남정진 또한 이와 같이 청렴결백하니 비록 옛날의 훌륭한 관리라 하더라도 이 사람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균관 뜰에다 손수 은행나무를 심어 교훈을 남긴 윤탁 윤탁(1472-1534)의 본관은 파평이고, 편감 윤사은의 아들이다. 자는 언명, 호는 평와이다. 연산군 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계군 이심원에게 글을 배웠는데 주계군은 종실의 자제로서 성리에 관한 학문을 앞장서서 제창한 분이다. 윤탁은 갑자사화 때에 귀양갔었는데 중종이 왕위에 올라 그를 방치된 가운데서 기용하여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당시 정암 조광조와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조정에 모여 도학을 제창하고 천명하면서 자신들이 강학하던 자리를 치워 버리고 모두 윤탁을 선생으로 추대하였다. 윤탁은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고, 부지런한 것을 즐겁게 여겼다. 퇴계 이황이 매양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을 열거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윤탁을 윤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바 '대학'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학설도 송나라 주희가 연구하여 물려준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려고 도모할 적에 윤탁이 죄정을 의논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즉시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뭇 소인들이 윤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는 파직되고 물리침을 당하였다. 지금 성균관 뜰에 그가 손수 심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다. 윤탁은 매양 학생들에게 말하였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마지막에 틀림없이 무성하게 된다"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이들은 모두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실학을 힘쓰며 정정당당하여 그 스승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중종 29년 개성유수로 임지에서 죽었다. 인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김인후 김인후(1510-1560)의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 호는 하서이다. 중종 26년(1531)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9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가 학업을 닦은 뒤 정자 겸 설서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김인후를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은사와 예우가 날마다 융숭하였다. 그래서 간혹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조용히 어려운 데를 묻기도 하고 특별히 서책을 내려 주기도 하였으며, 또 대나무 묵화를 그려 주어 은미한 뜻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김인후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원하여 옥과현감이 되었다. 그 무렵 인종이 승하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김인후는 놀랍고 슬퍼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나 그 일로 인하여 병이 들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어떤 관직에 임명되어도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선산 곁에다 재실을 짓고 '잠재'라 편액하고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송강 정철이 시를 지었다. 동방에 처세하는 근본이 없더니 유독 잠재옹이 있구려 해마다 7월이 오면 깊은 산중에서 통곡하도다 이 시는 김인후가 매년 7월 1일 인종의 기신을 당하면 번번이 산골짜기로 들어가 밤새도록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환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시를 지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위대한 두 분이 있으니 원기로 뭉쳐진 공자와 진실로 다져진 주자이네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버지의 묘소에 언문으로 비를 세운 이문건 이문건(1494-1567)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자발, 호는 점재 또는 휴수라고도 하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이문건은 그의 중형 눌재 이충건과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화를 당하게 되자 당시의 인사들이 겁에 질려 감히 조문조차 못하였지만 이문건은 그의 중형 및 문하생 한 사람과 같이 가서 조광조의 장례를 의식대로 지냈다. 그리고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이문건이 가까이서 오래도록 모셨으므로 가장 후한 예우를 받았으며, 어찰과 갓끈을 내려 주면서 총애하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문건이 빈전도감의 집례관으로서 명정과 시책 그리고 신주의 글씨를 모두 썼는데, 그의 전서는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승지로서 공신명부에 기록되었다가 뒤에 조카인 수찬 이휘의 화에 연좌되어 성주로 귀양갔다. 그곳에서 퇴계, 남명, 율곡 등 여러 선생들과 주고받은 글이 매우 많다. 이문건이 운명할 무렵에 족보를 만들어 자손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놓았는데, 10여 대에 이르도록 적손과 지손으로 더러는 많기도 하고 더러는 적기도 하며 더러는 없기도 한 것이 한결같이 미리 만들어둔 족보와 들어맞았으며, 출생하였다가 일찍 죽은 자에 대해서는 곁에다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으니 대체로 미리 알았던 일들이 많았다. 그가 살아 있었을 적에는 그의 특이함을 아무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 정자 이윤탁의 묘가 양주 노원에 있는데 그곳에 세운 비의 비문과 글씨는 다 이문건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이다. 후손들이 먼 곳에 살고 있어 오래도록 성묘를 못하게 되자, 아무개가 그 주변을 점유하게 되었다. 근래 그 아무개가 묘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내 이윤탁의 묘갈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완연히 새로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산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남의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을 차지하고서 어떻게 비석과 무덤은 훼손하지 않았소?" "신령한 비석 때문입니다. 산 밑에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질병에 걸린 자가 그곳에 기도하면 효험을 보게 되고, 나무하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그 비석에 흠집을 내기라도 하면 재앙이 따르게 되어 그 신령함이 이와 같은데 누가 감히 훼손하겠습니까?" 이에 그 비문을 고찰하여 보니 앞면과 뒷면은 일반 비석과 같고 양쪽의 측면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한 문자가 있었다. 대체로 몇백 년 전에 언문으로 비석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차마 어떻게 못할 비 부모를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쏘냐. 그렇다면 어떻게 차마 훼손하겠는가. 비석도 차마 침범하지 못할 경우이면 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니 만대 후에라도 모면하게 될 줄 알리라. 신령한 비 신령한 비석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앙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배가 침몰되는데도 태연했던 유희춘 유희춘(1513-1577)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인중, 호는 미암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처음 글을 배울 적에 눈에 한번 거치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였다. 신재 최산두의 가르침을 받았다. 모재 김안국의 문하에 종유하였는데, 모재가 그를 공경하여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중종 33년(153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춘방과 홍문관의 관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 때에는 정언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죄가 추가되어 처음에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지는 길이었다. 뱃길이 험하여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일어 함께 가던 세 척의 배가 모두 침몰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슬피 울먹였지만 유희춘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종성에서 19년 동안 있었는데 어려운 생활 속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만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속몽구'를 지어 배우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숙하였다. 혼자서 머나먼 길을 걸어 종성으로 남편을 따라올 때에 마천령을 지나게 되자 시를 읊었다.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끝이 없는 동해가 거울처럼 평평하구려 머나먼 길 아녀자가 무슨 일로 왔던고 삼종의 의리는 중하고 나 한 몸은 가벼워서이네 이 시를 보면 성정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가 처음 왕위에 올라 유희춘을 불러다 대사성에 임명하였으며,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4. 사림파의 수난 임권이 언제인가 경연에 나아가 아뢰었다. "김안로가 조정에 있게 되자 소인으로서 일정한 주관이 없는 자들이 붕당을 만들어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전하께서 붕당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중종의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니 한 가지를 거론하여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격이다. 만일 임금이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바른 논의를 듣기 싫어한다면 누가 기꺼이 바른말을 발설하여 화의 함정으로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김안로가 나라를 그르칠 줄 미리 알고 걱정하였던 이언적 이언적(1491-1553)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복고, 호는 회재, 자계옹, 자옥산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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