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를 쓰든 말든 그건 내 맘이다. 너는 이 무독옹이 손에 인정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느냐?"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노선배께서 손을 쓸 때에는 꼭 그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노선배께서는 결코 경우없는 분이 아니시지요. 그러니 이번 일에도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네 말이 맞다." 어쩐 일인가? 무독옹이 이제까지의 살기를 거둬들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독수를 쓴 것은 분명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그건 바로 너를 이리로 부르기 위해서다." "소녀를 말입니까?" "그렇다." 무독옹이 화분을 옆으로 밀더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세우자 그는 앉아있을 때보다 더욱 작아진 것 같았다. "너에게 긴히 할말이 있으니 이리로 오너라. 언제까지 이 먼 거리에서 얘기하자는 것이냐?" "저보고 그리로 오라고요?" 백아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의 미소는 눈앞에 펼쳐진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호홋, 노선배께서는 소녀를 너무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군요. 소녀가 이 만독화원(萬毒花園)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갈 만큼 대담하다고 여기십니까?" "너라면 올 것이다." 무독옹이 무겁게 말했다. "왜냐하면 네가 오지 않으면 네 어미를 살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백아아의 아미가 조금 찡그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주저함없이 걸음을 사뿐 옮겨 놓았다. "그럼 제가 그리로 가지요." 백아아가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구불구불한 길을 매우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여유까지 있는 듯했다.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무독옹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자, 왔어요." 이윽고 만독화원을 통과한 백아아가 활짝 웃으며 무독옹의 앞에 섰다. "무슨 할말이 있으신지요?" "얘야, 너는 아마도 입에 피독단(避毒丹)을 물고 있는 모양이구나." 무독옹이 탄식했다. "바로 맞았습니다." 백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독단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만독화원에 발을 들여 놓았겠습니까?" "흐흐……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만, 그걸로 나를 놀라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무독옹이 다시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는 최초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너는 네 어미가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아느냐?" "하교를 바랍니다." 백아아가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한단지독(寒丹之毒)이라는 것이다. 복용하는 즉시 정신이 혼미해져서 의식을 잃게 되고 열흘 이내로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설사 대라신선이 환생한다 해도 살릴 수 없는 지독한 것이지." "그런……." 백아아의 몸이 가볍게 떨린다. "그렇지만 노선배께는 물론 해약이 있겠지요?" "물론이다. 나는 해약이 없는 독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무독옹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내게는 당연히 해약이 있으며 그걸 너에게 줄 용의도 있다. 그 대신 너는 내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겠느냐?" "노선배께서는 이미 소녀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실 줄 압니다." "그렇다." 무독옹이 옆의 화분을 매만졌다. 그는 이 화분을 매우 아끼는지 손길이 몹시 정성스러웠다. "너에게 부끄러운 얘기를 해야겠구나. 나는 본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가 약간의 독을 다루는 재간이 있으나 그것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았다." "노선배의 그런 점은 소녀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르구나. 이번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못난 손자가 하나 있다." "손자라고 하시면……?" 무독옹에게 가족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므로 백아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녀석은 나의 유일한 핏줄이다. 비록 잘나지는 못했으나 내게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이지. 그런데 그 아이에게 요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백아아는 잠자코 있었다. 지금은 함부로 입을 열 때가 아니다. "그 아이가 우연히 너를 보고 그만 상사병이 걸린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얼마간의 의술을 지니고 있다.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나 그 어떤 병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상사병만은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것은 약이 오직 하나뿐이라……." "그렇다면……?" "네 짐작대로다." 무독옹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도 이런 말을 하기는 몹시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네가 내 손자에게 시집 오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나는 즉시 한단지독의 해약을 주겠다." 백아아의 주먹이 소리없이 쥐어졌다. 그녀는 무독옹이 무리한 요구를 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자기가 중독시켜 놓고는 그 해약을 주는 대신 시집을 오라니! 독의 일인자라는 무독옹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백아아는 다행히 성질을 앞세워 함부로 손질을 할 만큼 경솔하지는 않았다. "노선배께서는 소녀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나도 지나치다는 건 안다. 그러나 너보고 이 자리에서 자결을 하라는 것보다는 수월하지 않느냐? 어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면 시집을 온다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냐?" "노선배께서는 쉽게 말씀하시지만 소녀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백아아는 고개를 돌려 사두마차를 보았다. 두 시비가 여전히 검을 쥐고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차의 문은 굳게 닫겨 있었다. 적막하다. 어디에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소녀가 손자분과 혼인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무독옹이 한껏 인심을 쓰듯 말했다. "하나는 힘으로 나를 이기는 것이다. 너에게는 아마 그게 가장 쉬울 것이다. 되든 안 되든 힘껏 싸워 볼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네 어미를 구할 수 없다. 네가 설사 나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내가 해약을 내놓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겠죠." "또 한 가지 방법은 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다." "시험이라뇨?" "흐흐…… 솔깃한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은 압니다. 그러나 어떤 시험인지 한 번 들어보고 싶군요." "무척 간단한 것이다. 너는 저 집 안으로 들어가 향 한 대가 탈 동안 나와 마주앉아 차 한 잔과 과자 하나를 나눠 먹으면 되는 것이다." 차 한 잔과 과자 하나. 무독옹의 말처럼 그것은 간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백아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 향과 차, 그리고 과자는 물론 평범한 것이 아니겠지요?" "내 집에 평범한 물건은 없다." 무독옹이 약간의 자부심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는 말아라. 너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아직 너를 해칠 마음은 없다. 향과 차와 과자는 모두 같은 작용을 한다. 사람의 정신을 약간 흐리게 하지. 향은 네가 지니고 있는 피독단으로 충분히 방비할 수 있을 것이나 차와 과자는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피독단도 소용이 없지. 만일 네가 그걸 먹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나는 기꺼이 너에게 해약을 넘겨주겠다. 하지만 그걸 먹고 정신이 혼미해진다면 나는 너를 데리고 손자에게로 가서 초야를 치르게 할 생각이다." "아! 노선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비록 노골적인 말이었으나 백아아의 탄식에는 불쾌함이 아니라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무독옹의 손자 사랑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이 지나쳐서 그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싫다면 더 시간 끌 것 없이 이 길로 발길을 돌려 돌아가거라. 하지만 그러면 너의 어미는 구할 길이 없다. 이미 중독된 지 이레가 지났으니 사흘 후에는 관이나 좋은 걸로 장만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모든 건 너의 판단에 달렸다. 나는 결코 강요는 하지 않는다." 버젓이 강요를 하면서도 무독옹은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얼굴이 너무나 진실되어 도저히 비아냥거리는 걸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백아아는 입술을 물었다. "소녀는 세 번째의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세 번째라니? 그런 건 없다." 무독옹이 다소 어리둥절해 할 때였다. 백아아가 소리없이 손을 뻗어 옆의 화분을 잡았다. 동시에 그녀의 우수는 활짝 펼쳐져 무독옹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방비하기도 어려운 기습이었다. 그러나 무독옹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힘으로 나를 이겨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무독옹이 손을 펴 백아아의 장세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자신의 공력이 심후함을 이용하여 그녀를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백아아는 무독옹의 손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손을 칼처럼 세워 내리치면서 좌수는 여전히 화분을 잡고 있었다. 무독옹의 안색이 변했다. "이제 보니……." 그는 급히 우수를 뻗어 화분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막으며 좌수로는 금나수법(擒拿手法)을 변용하여 그녀의 맥문을 잡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를 교환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겨룸과는 상당히 상이한 것이었다. 백아아는 우수로 무독옹을 물러나게 한 뒤 좌수로는 화분을 움켜쥐려고 하고 있었고 무독옹 역시 두 손을 갈라 그녀의 공세를 방비하고 있었다. 둘 다 화분을 사이에 두고 절기를 펼치고 있었으므로 발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고 장과 장이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절묘한 금나수법과 지와 권, 그리고 수도(手刀)를 이용하여 서로의 예봉을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물러서라!" 무독옹이 고함을 지르며 벼락같이 백아아의 가슴을 찔렀다. 그의 손에는 막강한 진력이 담겨 있어서 그 장세에 맞았다가는 당장에 피를 토하고 즉사할 판이었다. 피하려면 천상 물러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아아는 태연하게 좌수를 이룡탐주(二龍貪珠)의 초식으로 변화시켜 무독옹의 눈을 찔러갔다. 무독옹이 설마 자신을 죽이랴 싶어 대담하게 양패구상(兩敗俱傷)의 독수를 쓴 것이다. "이것이!" 당황한 무독옹은 급히 장세를 회수하며 우수를 들어 백아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앞으로 찔러가는 장세를 회수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맥문을 움켜쥐는 금나수법이 너무나 절묘하여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백아아는 이내 팔뚝이 저릿하면서 전신에 맥이 탁 풀어졌다. "하하…… 어떠냐?" 백아아를 제압한 무독옹이 득의의 웃음을 터뜨리다 돌연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백아아의 우수에 화분이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화분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호호…… 제가 이긴 것 같네요." 백아아의 고운 팔목은 무독옹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그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녀는 맥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화분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 것이 아닌가! 무독옹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걸 어서 내려 놓아라!" "호호…… 어렵게 손에 넣은 십주칠실(十週七實)인데 내려 놓으라니요?" 백아아가 교소를 터뜨렸다. "노선배, 화분이 깨어지면 십주칠실을 되살릴 길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이제 그만 고집부리시고 십주칠실과 어머님의 해약을 맞바꾸는 게 어떨까요?" "흐흐…… 너는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무독옹이 짐짓 여유를 부리며 백아아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손에 걸려든 이상 그냥 빠져나갈 수는 없다. 너는 이미 중독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아, 아파요……." 백아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우수에 들려있는 화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흔들린다. 무독옹은 기겁하여 급히 손에 힘을 풀었다. "조, 조심해라. 그 십주칠실은 십 년에 겨우 일곱 개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다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이다." "압니다. 하지만 이걸 오래 들고 있자니 팔이 아프군요." 백아아의 음성은 너무나 태연했다. 이미 중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거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노선배, 소녀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서 해약을 주시지요." "너는 정말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사람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이지요. 그러니 목숨을 담보삼아 소녀를 위협할 생각일랑 아예 버리십시오." "이것아! 십주칠실이 아무리 귀하다 하나 사람의 목숨만큼은 귀하지 못하다. 그러니 공연히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그걸 내려 놓아라." "소녀도 그러고 싶지만 해약을 내주시기 전에는 그럴 수가 없군요." 그것은 참으로 묘한 대치였다. 한 사람은 맥문을 거머쥔 채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화분을 깨뜨린다고 겁을 주는 것이다. 누구도 쉽게 양보할 태세가 아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만사가 끝장이다.' 백아아는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무독옹의 말이 공연한 엄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무독옹이 이 십주칠실을 손자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그러는 중에도 무독옹에게 잡힌 팔이 어깨까지 은은하게 저려오고 있었다. 이미 독이 혈관을 타고 퍼져 올라오는 모양이다. "얘야, 조금만 더 지체하면 독이 심장까지 퍼질 것이고 그러면 나도 구할 방법이 없다." 무독옹이 탄식했다. 그도 백아아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미 물러나기에는 때가 늦은 것 같았다. 백아아의 이마에 콩알만한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노선배, 소녀는 더 견딜 수가 없군요. 화분을 떨어뜨리겠어요." "그러면 너는 죽는다. 너뿐 아니라 네 어미도 죽는다." '이 노독물은 끝내 포기하지 않을 셈인가?' 백아아는 이를 악물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 돌연 그녀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보더니 눈길을 무독옹에게로 향했다. "좋아요. 우리 공평하게 흥정을 하는 게 어떨까요?" "무슨 흥정을 하잔 말이냐?" "소녀가 화분을 내려 놓겠어요. 그 대신 노선배께서는 저의 몸에 중독된 독의 해약을 주세요. 그런 다음에 소녀가 노선배의 차와 과자를 맛보기로 하죠." "정말이냐?" 무독옹은 멍해졌다. 그는 일이 어째서 이렇게 급전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간교한 것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려고?' 그러나 그 사이 백아아는 이미 화분을 얌전하게 내려 놓고 있었다. "자, 소녀는 약속을 지켰어요. 그러니 이제는 노선배 차례입니다." "너는 참으로 모를 아이로구나." 무독옹이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백아아가 급히 손목을 어루만졌다. 팔뚝이 저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거라." 주의를 준 무독옹이 품속에서 금박으로 싼 단약을 꺼내더니 백아아의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그걸 먹고 운기하거라. 서둘지 않으면 때를 놓치게 된다."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로군요." 백아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단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녀는 무독옹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무독옹은 급히 십주칠실이 심겨진 화분을 목옥 뒤로 옮겼다. 혹여라도 다시 그게 백아아의 수중에 들어갈까 대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분명 무슨 간계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게 무언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앙칼지게 나오던 것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 백아아가 밝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노선배의 약은 참으로 효용이 대단하군요." "어떠냐?" "이미 독이 모두 해독되어 불편한 곳을 모르겠습니다." "그럴 것이다. 그러면 들어가자." 무독옹이 몸을 돌렸다. 백아아는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무독옹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사방의 벽에 설치된 선반을 마구 뒤지고 있었다. 선반 위에는 갖가지 약병들과 이름모를 약초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정돈이 잘 되어 있었는데 무독옹의 거친 손길에 의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 이상해…… 이럴 리가 없는데……." "노선배, 무슨 일이 있나요?" 백아아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나무의자 위에 몸을 앉힌 그녀의 앞에는 역시 나무로 만든 둥근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 향로와 접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비어 있었다.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다. "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무독옹이 돌아서며 노성을 질렀다. 그의 두 눈은 흉포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백아아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아아는 태연했다. "수작이라뇨? 소녀가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소녀는 줄곧 노선배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이 향로에 꽂혀있던 향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접시 위에 있던 과자는? 설마 귀신이 있어서 그걸 모두 가져가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여기 과자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백아아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접시를 들여다본다. 그러나 행여 독이 묻어 있나 싶어 접시를 만지지는 않았다. "그거 정말 이상하군요. 그러면 오늘의 내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무효다, 무효야. 준비한 것이 다 없어졌는데 무슨 내기를 한다는 말이냐?" "그럴 수는 없지요." 백아아의 음성이 서늘해졌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만만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대신 얼굴에 서리가 한 겹 내려앉은 것 같았다. "소녀에게 다과를 주겠다고 제안한 건 분명 노선배이십니다. 소녀는 그게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응락했고요. 그 일로 인해 소녀는 어쩌면 목숨보다도 소중한 정절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멋대로 무효라고 하시다니 소녀는 받아들일 수가 없군요." "그럼 어쩌란 말이냐?" "당연히 다과를 내주셔야죠. 만일 노선배께서 다과를 내주실 수 없다면 그 내기는 노선배가 진 것입니다. 그러니 해약을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무독옹이 돌연 선반 위에 있던 작은 단지를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단지가 박살나면서 시커먼 액체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역겨운 냄새가 실내에 가득했다. 백아아는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며 무독옹을 노려보았다. "어르신은 저 같은 것은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대선배이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한 말을 어기시겠다는 말입니까? 만일 노선배께서 내기에 진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소녀는 이 자리에서 혀를 물고 죽을지언정 이후 어떠한 말도 듣지 않겠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이치를 따져 순리대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소녀는 이미 노선배께서 제안한 내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다과를 내놓으시든지 아니면 해약을 주십시오." "오냐, 이제야 알겠다." 무독옹이 돌연 손을 활짝 펴서 일장을 갈겼다. 그러나 백아아는 장세가 몸 가까이 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마 그녀를 죽일 수 없었던지 무독옹이 장세를 틀었다. 그러자 목옥의 벽에 구멍이 뻥 뚫렸다. 무서운 위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도 성질이 풀리지 않는지 무독옹은 씩씩거리며 백아아를 노려보았다. "너 도대체 무슨 간교한 술책을 부린 것이냐? 내 물건들을 어디로 빼돌렸느냐?" "이제 억지는 그만 부리십시오. 이곳에는 소녀와 노선배 단 둘뿐입니다. 그런데 노선배께서 장님이 아닌 이상 소녀가 수작을 부렸다면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곳은 만독화원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설마 외인이 침입했단 말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그, 그건 그렇다……." 무독옹의 얼굴은 이제 울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공들인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어서 해약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소녀는 이 길로 돌아가서 무독옹이 신용없는 분이라는 걸 천하에 널리 알린 후에 어머님과 함께 자진을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아아는 입을 굳게 다물며 몸을 돌렸다. 정말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휙 뒷머리로 서늘한 경풍이 일었다. 백아아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촉감이 가볍다. 하얀 자기병이었다. "그 안에 해약이 들어 있다!" 뒤에서 무독옹이 울부짖듯 소리치고 있었다. "그걸 가지고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하, 하지만 그 대신 나의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겠느냐?" "무슨 부탁이신지요?" 백아아는 비로소 몸을 돌려 무독옹을 보며 물었다. "내 손자를 한 번만 만나다오. 그 아이와 혼인을 하라는 게 아니다. 그저 만나서 다정한 말 한마디만 건네다오. 그러면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아아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서글픔이 떠올랐다. 그녀는 초라하게 구겨진 무독옹의 모습을 보며 아까처럼 냉정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 정말이냐?" 무독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는 어둠의 나락 끝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우선 어머님을 구한 뒤에 때를 보아 찾아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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