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고맙다. 나는 네가 신용이 있는 아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그 말을 믿겠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인 백아아는 목옥을 나왔다. 사두마차가 천천히 산길을 달려간다. 벌써 몇 개의 산모롱이를 돌아 만독화원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따갑게 내려쪼이던 태양도 구름 속으로 들어가버려 엷은 그늘이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백아아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앞자리에 앉아 마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억지를 부리는 무독옹과의 싸움에서 보기좋게 승리를 거둔 그녀였지만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오히려 무슨 걱정이 있는지 아미에 잔뜩 어두운 그늘이 덮여 있었다. "아가씨." 황의소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응?"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듯 황의소녀에게 눈길을 주던 백아아가 돌연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마차를 세워라." "네?" "마차를 세우라니까." 황의소녀가 고삐를 잡아챘다. 그러자 한가하게 걸음을 옮기던 말들이 순순히 걸음을 멈췄다. 마차가 정거하고도 한동안 백아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 황의소녀, 소벽(素碧)은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주인이 이처럼 심란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백아아가 말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소벽은 돌아보지도 않고 우측에 위치한 숲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신 안에 타고 있던 또 다른 황의소녀, 소옥(素玉)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묻는다. "모르겠어." 소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를 일이다.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백아아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차에서 십여 장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가 위치한 곳에서는 마차가 환히 보였지만 저쪽에서는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모습을 나타내시지요." "알고 있었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따라 오고 계시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좌측의 숲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허름한 청의를 걸친 청년이었다. 얼굴 윤곽이 유난히 부드러운 것이 마치 남장을 한 여인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 백아아는 상대가 의외로 젊은 사람인 데 놀라 가벼운 탄성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아니, 이러지 마시오." 복청양은 여인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걸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을 붉혔다. 그가 성장한 이후 동생을 제외한다면 성숙한 여인을 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연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은은한 향기가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또 어쩐 일인지…….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막중한 은혜를 입었으니 의당 큰절을 올려야 할 것이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양해하십시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오히려 내가 부담스럽소. 비록 안면은 없는 처지이나 곤란한 처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렇지요. 하지만 그런 정이 말라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백아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독화원에서 무독옹과 목숨을 건 도박을 할 때 그녀는 문득 누군가의 전음을 들었다. 안심하고 무독옹이 주는 다과를 먹으라는 전음이었다. 워낙 다급한 처지였고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무작정 전음이 시키는 대로 십주칠실의 화분을 내려놓고 목옥 안으로 무독옹을 따라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 다과를 잃어버린 무독옹이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그때 일을 생각하면 백아아는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그려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도움을 준 사람이 이처럼 젊은 청년이라니! 백아아는 조금 신기하고 많이 의아했다. "공자님의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는지요?" "존함이라니 당치 않으나…… 소생은 복청양이라고 하오." "복가 성을 가지셨다면 복가장과는 어떤……?" "그곳 사람이오." "아!" 백아아가 다시 탄성을 질렀다.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이제 보니 복가장의 소가주셨군요." "망한 집안에 소가주면 무엇이고 아니면 어떻겠소. 다 부질없는 짓이오." 복청양이 우울하게 말했다. 산서 사람이라면 복가장에서 일어난 참변은 다들 알고 있었다. 백아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는 일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닫았다. 다행히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복청양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말씀하시지요." "저 마차 안에 아가씨 말고 또 한 사람이 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으시지요?" "그건……." 감출 일이 아니었으므로 복청양은 동생이 실종된 것과 혹시 동생이 안에 타고 있는가 싶어 마차를 뒤따라 온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랬군요……." 백아아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복공자께서는 원래 우리가 적인 줄 알고 따라오셨군요."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오. 이제는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오." "참 공교로운 일이에요." 백아아가 가까운 나무에 몸을 기댔다. 송진이 옷에 묻는 걸 꺼려 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다. "뭐가 말이오?" "복공자께서 그런 오해를 안하셨다면 저는 어찌 되었을까요? 생각하면 아찔해요. 하늘의 안배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죠." "그저 약간의 인연이 있었거니 생각하면 되는 일이오.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사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보다는……." 돌연 백아아의 눈에 반짝 빛이 났다. 뭔가 마음에 드는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다. "동생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죠?" "그렇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작정 돌아가서 헤매고 다니실 건가요?" "그건…… 모르겠소." 이제 다시 가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복금사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허락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무슨 뜻이오?" "굳이 은혜를 갚겠다는 게 아니라……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복공자께서 저를 믿으시고 저희 집까지 동행해 주신다면 앞으로 열흘 이내에 동생의 소재를 알아내 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지요." 복청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이 여인이 지혜가 뛰어나고 매우 대담하다는 것을 이미 보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체 무얼 믿고 이런 약속을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백아아가 그의 의혹을 알아챈 모양이다. "이 자리에서 구구하게 설명드리기는 어려우나 저의 집에 가시면 제가 장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가시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동생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무얼 망설이시는지요?" 갑작스럽게 백아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누나가 철없는 동생을 나무라는 듯한 눈길로 복청양을 쏘아보고 있었다. 복청양은 일순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랫것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몸을 돌린 백아아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잎처럼 연약하면서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단단한 기상이 엿보였다. '알 수 없는 여인이다.' 복청양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백아아의 뒤를 따랐다. 마차 안에는 중년미부(中年美婦)가 깊은 잠이 든 듯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중년미부의 얼굴은 백아아와 너무도 흡사해서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대번에 두 사람이 모녀지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차의 한쪽은 중년미부가 온통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복청양은 별수없이 백아아와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애써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서로의 체향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복청양뿐만이 아닌 듯 백아아도 약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는 것으로 보아 마차가 성내로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성을 가로지른 사두마차는 호화로운 저택 앞에서 멎었다. <은하수정원> 저택의 대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쓴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명필의 작품인 듯 필체가 힘이 있고 보기에 좋다. 은하수정원은 성내에서도 제법 이름있는 기루였다. 아니, 산서 지방에서는 가장 큰 기루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은하수정원에는 꽃처럼 어여쁜 기녀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다고 하던가! 그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곳 은하수정원이 뭇남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장소이며, 여인들에게는 아련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임은 분명했다. "아가씨." 소벽이 부르자 백아아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복청양이 그 뒤를 따랐다. 대문이 열렸다. 백아아가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소벽이 모는 마차는 집을 돌아가는 것이 다른 문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다. "이곳은……." 백아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복청양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은하수정원에 관한 소문은 그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정작 안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루에는 처음이십니까?" 조금 떨어져 길을 안내하며 백아아가 물었다. "그렇소." 복청양이 힐끔 그녀를 보았다. 많은 질문이 담긴 시선이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기는 어렵다.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압니다." 눈치빠른 백아아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이 기루는 어머님이 운영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저는 기녀는 아니랍니다. 그러니 이런 곳으로 안내했다고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내가 어찌……." 복청양은 잠시라도 그녀를 의심한 게 미안했다. 복청양이 인도된 곳은 정갈하게 꾸며진 후원이었다. 잘 손질된 꽃밭이 있었고 작은 연못도 있었다. 연못에는 소교(小橋)가 걸려 흥취를 더해준다. 기루라면 요란한 곳일 거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외에는 아무런 종적도 느낄 수 없었다. 아담한 안채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백아아는 그리로 가지 않고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물 위에 투영되었다. 물속에는 금빛 붕어들이 놀고 있었다. "이제는 제가 장담한 까닭을 아시겠습니까?" 잠시 물속을 들여다보던 백아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니오.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소." "세상 사람들은 기녀라면 우선 깔보는 나쁜 습관이 있지요. 물론 그런 시각이 전부 그르다는 것은 아니나 이런 곳에 몸담고 있는 여자들도 나름대로 말못할 사정이 있답니다."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소." "또한 기녀들은 서러움을 많이 받으며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들이라서 저희들끼리는 서로 돕고 지내지요. 복공자께서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그건……." "흔히들 가장 큰 정보망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개방이라고들 하지요. 그 말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걸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기녀들도 개방에 못지 않답니다. 비록 체계적인 조직으로 뭉쳐 있지는 않지만 어떤 일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낼 수 있지요. 그것은 우리 기녀들은 항상 많은 남자들을 접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겠소. 나는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소." "자랑 같지만 각처에 널려있는 기녀원에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낯을 보아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이 세계에서는 그래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동생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생이 어디에 있든 열흘 내로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소." "그럼 이제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백아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눈은 보석처럼 영롱했고 아무런 사기(邪氣)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무슨……?" "아까 만독화원에서 어떻게 무독옹을 골탕먹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복공자께서 무독옹의 거처에 숨어 들어가 다과를 빼돌린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만독화원을 통과하였는지는 저의 둔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군요." "그건 과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복청양이 미소지었다. "아가씨가 무독옹과 하는 얘기를 듣고 나는 그 화원이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소. 그래서 땅을 파고 안으로 숨어 들었던 거요." "땅속으로!" 말은 쉽지만 만독화원의 너비가 얼마인가? 그 긴 거리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땅을 파고 숨어 들었다니! 백아아는 아연해서 새삼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제 5 장 혼(混) 좋은 구경거리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흔한 구경거리는 볼 것이 없기 마련이다. 볼 만하면서도 흔한 구경거리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볼 만하지도 않고, 흔하지도 않은 구경거리였다. 일주문. 모용세가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는 일주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개(擧皆)가 부근의 농민이거나 상인들로 모용세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소문을 듣고 몰려든 것이다. 하나 개중에는 병장기를 휴대하고 험악한 눈초리를 번뜩이는 무인들도 있었다. 닮은꼴이라곤 전혀 찾아볼 길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거대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공포라는 이름의 감정이 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어깨를 밀어대며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는 것은 아마도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면서 때로는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 호기심.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의 기마인들이 중인들의 틈을 헤치며 안으로 난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거침이 없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넘어져 비명을 질러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인들의 얼굴에 이제까지의 공포와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떠오르며 급급히 몸을 피했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에 기마인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모두 다섯이었다. 중앙에 선 자는 건장한 체구에 무성한 구레나룻을 기른 장한이었다. 그는 등에 커다란 동발(銅 )을 메고 있었는데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질리게 만들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옆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이 상당한 내가고수로 보였다. 구레나룻이 힐끗 고개를 들어 일주문을 본다. "음……." 외마디 신음이 흘러나온다. 일주문 위에는 한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원래는 도복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너덜너덜해져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치고 머리는 산발하여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고, 전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서 마치 껍질을 벗긴 고깃덩이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뚝뚝! 바닥에는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는데 아직도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필경 상상을 초월하는 잔악한 심성의 소유자일 것이다. "저게 누구냐?" 구레나룻의 장한, 비혈륜(飛血輪) 한반(韓伴)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산서지부의 이 인(人)의 부부주(副府主)의 하나로 복가장의 참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오던 길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놀라운 소식이었다. 복가장뿐 아니라 모용세가마저 비슷한 참변을 당했다지 않는가! 서둘러 수하들을 이끌고 모용세가로 달려온 한반은 정작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입구에서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모르겠군. 얼굴이 많이 망가졌어……." 옆에 있는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는 염소수염에 깡마른 자였는데 허리춤에 유성추를 매달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봐야겠는데……." "내려라." 한반이 짧게 명했다. 가장 우측에 있는 자가 말에서 내려 일주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일주문의 높이가 너무 높아 감히 몸을 날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러서라." 한반이 머뭇거리는 수하에게 못마땅한 얼굴로 명하더니 등에 멘 동발을 손에 들었다. "부부주, 그건……." 염소수염이 놀라 중얼거렸지만 한반은 이미 동발을 날리고 있었다. 휘리리릭 동발이 거친 파공성을 내며 일주문 위로 날아갔다. 동발의 기세는 실로 사나워서 그대로 밧줄에 묶인 발목을 끊어버릴 기세였다. 바닥으로 내리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나 그렇게 하면 시신을 훼손하게 된다. 염소수염은 그걸 지적하려고 했지만 한반이 이미 동발을 날린 후였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누군가의 입에서 안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쨍! 누구도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다. 다만 무섭게 날아가던 동발이 무언가에 부딪치는 것만이 겨우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다. 동발을 가로막은 물체는 산산이 부서져 아래로 떨어졌고 동발은 기세를 잃지는 않았지만 방향이 틀어져 시신의 발목을 끊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돌가루가 우수수 바닥에 흩어질 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돌멩이임을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작은 돌이 동발의 기세를 막아낸 것이다. "누구냐?" 한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험한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는 작은 돌멩이로 자신의 동발을 막아낸 자의 능력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중인 환시(環視)리에 망신을 당한 노여움이 더 컸다. 하나 그의 힐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백의공자(白衣公子) 하나가 일주문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백의공자는 허공에서 시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발목을 묶은 밧줄을 일검에 끊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신형을 한 번 뒤집더니 천근추의 수법을 사용하여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는 시신과 거의 같은 속도로 내려오다가 마침내 시신을 받아안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닥에 내려섰다. "와아!" 너나 할 것 없이 중인들에게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방금 백의공자가 보여준 경신술은 아무리 신법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감히 흉내를 내지 못할 뛰어난 것이 아닌가! 한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다시 입을 열지는 못했다. 단 한 수였지만 상대는 이미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증명했다. 이럴 때 공연히 성질을 앞세우다가는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다. 한반은 다행히 분수를 아는 인물이었다. 경탄할 만한 경신술로 시신을 안전하게 내려 바닥에 눕힌 백의공자는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얼굴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앞가슴은 이미 피가 문양처럼 배어 있었고 손에도 피가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건……." 시신의 얼굴을 확인한 백의공자의 어깨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사형……." 의미를 알 수 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넌 누구냐?" 그때 다행히 한반의 준엄한 음성이 백의공자의 정신을 들게 만들었다. 시신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킨 백의공자는 노여움의 불길이 훨훨 이는 눈으로 한반을 노려보았다. 방금 한반이 시신을 훼손하려 한 것이 그의 분노를 산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두 손을 모았다. 참으로 놀라운 자제력이 아닐 수 없다. "소생 장경신이 부부주께 인사드립니다." "장경신이라고?" 이번에는 한반이 놀라야 할 차례였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딱 벌린 채 백의공자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다급히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입가로 침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이 청년. 눈처럼 흰 백의를 걸치고 역시 하얀 띠로 머리를 묶어 어깨까지 드리운, 마치 옥으로 깎은 것처럼 맑은 피부에 여자라면 누구나 세 번씩 돌아보게 만들 만큼 윤곽이 뚜렷한 준수한 용모를 지닌, 청(靑), 홍(紅), 흑(黑) 삼색의 수술이 달린 보검을 멋들어지게 등에 멘 청년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석 자가 그를 정신나가게 만든 것이다. 무당신검(武當神劍) 장경신(張慶新). 그는 별호나 이름보다는 금룡(金龍)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장차 단심백결회를 짊어지고 나갈 세 명의 걸출한 인재, 무림삼룡 중 하나가 아닌가? 장경신은 검의 명문인 무당파가 배출한 용 중 용이었다. 무당장문인 소진도장과 같은 배분으로 소자배(逍字輩)에 속하지만 속가제자라 그런 배분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는 무당파의 모든 절기를 한몸에 이루었으며 소진도장의 각별한 배려와 몇 차례의 특별한 기연으로 이미 그 능력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아직 아무도 그의 진정한 실력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세인(世人)들은 이렇게 말한다. 무림삼룡은 각기 저마다 특색이 있다. 적룡은 가장 표독하며, 청룡은 가장 지혜롭고, 금룡은 가장 정대(正大)하다. 만일 적룡이 회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단심백결회는 가장 강한 단체가 될 것이고, 청룡이 회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가장 무서운 단체가 될 것이며, 금룡이 회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가장 존경받는 단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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