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은 구르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신형을 미처 안정시키기도 전에 머리는 벌써 허리 아래로 숙여졌고 흉터투성이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자, 장대협. 이, 이거…… 미처 몰라뵙고……." "대협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장경신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서 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다. "그보다 부부주께서는 이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 글쎄요. 아직 확인을 안해서……." 한반은 바닥에 누워있는 시신을 흘끗 보았다. 장경신이 놀라는 것으로 보아 간단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신의 신분보다는 앞으로 이 일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분은 저의 사형이십니다. 도호를 소허라고 하지요." "소허도장!" 한반의 놀라움은 이제 도를 지나서 넘칠 지경이었다. "소, 소허도장이시라면 얼마 전 산서지부에 오셨다가 저보다 한 발 먼저 이리로 떠나셨는데……." "아마 그게 화근인 것 같습니다. 사형께서는 필경 흉수를 목격하셨을 것이고, 그에게 화를 당한 게 분명합니다." 장경신이 우울하게 말했다. "부부주께서는 이 일의 흉수가 누구인지 혹시 짐작 가는 인물은 없습니까?" "그, 그게…… 최근에 모용세가와 원한관계를 맺은 곳이라면 복가장이 있겠지요." "하지만 복가장은 모용세가에 의해 멸문을 당했다고 들었는데요?" "그야 그렇지만 한두 사람쯤이야 살아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복가장이 사형을 해할 정도로 능력이 있을까?' 장경신은 고개를 들어 구름을 보았다. 한가롭게 떠돌고 있는 구름은 언제나 평화롭다. 아마도 저 하늘에는 원한이나 질시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들은 어째서 이토록 잔인한가! "부부주,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신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물론 하실 수 있지요." 무림삼룡은 단심백결회 내에서 아무런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반을 대하는 장경신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고 예의를 잃지 않았다. "지금 곧 전력을 기울여 복가장에 생존자가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가능하다면 그자의 신분과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알았으면 합니다." "그러지요. 우리 산서지부의 역량을 이 일에 집중하여 빠른 시일 내에 알아내겠습니다." 소허도장이라면 무당파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단심백결회 내에서도 중요한 일을 맡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요인이 산서지부의 관할에서 변을 당했으니 장경신의 부탁이 아니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무당산에 사람을 보내어 이 일을 통보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장경신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모용세가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펼쳐져 있을 참상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가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사라지자 한반은 비로소 허리를 펴며 이마의 땀을 씻어냈다. '소문으로는 무당신검이 정인군자라고 하더니 과연이로구나.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무당신검이 이런 군자라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데에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였던가? 한반은 어느덧 장경신에 대한 존경심으로 몸을 덥히고 있었다. * * * 그것은 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사용하면 알맞을 크기로, 손바닥을 펴면 그 위에 딱 들어왔다. 강상(江上)에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배 위에는 문사(文士) 차림의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얹힌 작은 활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사뭇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문득 그의 손이 움직인다. 그러자 소매 속에서 나왔는지 작은 활에나 어울리는 화살이 손바닥에 얹힌다. 화살은 의생들이 쓰는 대침(大針)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전체가 검은빛이었다. 청명한 햇살이 수면에 떨어져 잘게 부서지고 있건만 화살은 빛을 흡수하는지 아무런 광채도 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는 한 손으로 활에 화살을 재고 있었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오랜 수련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하기 어려운 행동이기도 하다. 하나 그는 활을 쏘지는 않고 그저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삐이걱삐걱 노 젓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배 한 척이 강의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고 있었다. 배 위에 서서 노를 젓고 있는 것은 여인이었는데, 노질이 서툰 듯 배가 자꾸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려고 하여 애를 먹고 있었다. 청년이 그쪽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오른 것과 여인이 탄 배가 그의 배 곁에 바싹 붙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두 배는 뱃전을 나란히 하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상대편이 있는 쪽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늦었군." 청년이 조금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직 오시(午時)가 안 되었는데요." 여인, 백아아가 말했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간편한 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보기 좋았다. 청년의 눈길이 명화(名畵)를 감상하듯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내가 먼저 왔으니 늦은 거야." "죄송합니다." 백아아가 고개를 숙였다. 청년의 말투가 상당히 무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불쾌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난 누굴 기다리는 게 싫어. 다음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도록." 휙 그의 손에서 화살이 날아갔다. 강변으로 날아간 검은 빛줄기가 하늘거리는 갈대에 꽂혔다. 신기하게도 화살은 갈대를 베어버리지도, 통과하지도 않고 그대로 박힌 채 갈대가 흔들리는 대로 춤을 추었다. 백아아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래, 왜 날 보자고 했느냐?" 청년이 물었다. "한 사람에 대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누구냐?" "혹시 복청양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복청양?" 청년의 이마에 가는 주름이 그어졌다. "너는 내 머릿속에 사람의 이름이 몇이나 들어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걸 소녀가 어찌 알겠습니까?" "줄잡아 삼천은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출신문파와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의 장단점까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방금 네가 얘기한 복청양이라는 자는 누군지 모르겠구나." "그는 얼마 전에 모용세가에 의해 참변을 당한 복가장의 소가주입니다." "복가장?" 휙 두 번째의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은 먼저의 것에서 정확하게 한 치 아래에 박혔다. 두 개의 화살을 머리에 인 갈대가 마구 흔들렸다. "그래, 이제 생각이 난다. 복가장의 가주인 복후정에게는 일남일녀가 있다. 그는 그 중 아들을 천산오조라는 기인들의 제자로 들여보냈다고 했지. 천산오조가 어떤 자들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자가 복청양이냐?" "그렇습니다." "네가 그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그자가 이번 모용세가의 참변과 관계가 있다는 뜻이냐?" "본인의 말로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녀가 확인한 바로는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흠, 모용세가의 삼백 식솔을 단신으로 처리했다면 가벼이 볼 자가 아니로군. 하지만 그자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백아아는 조금 당황하여 머리를 숙였다. 이자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자 앞에 서면 자신의 뱃속까지 들여다보이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가정이라도 버리지 않는다. 그자가 복수심에 불타서 모용세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이 일은 아주 단순하다.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슬며시 산서지부에 정보를 흘려주기만 하면 깨끗하게 처리될 것이다. 하나 만일 그 일이 그자의 소행이 아니라면 아주 재미있어진다. 후후…… 그렇다면 누군가가 머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몰라도 된다." 청년이 잘라 말했다. "그자가 소허라는 말코 도사도 죽였다고 하더냐?" "소허도장과 일전을 겨루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죽였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좋다. 그 얘긴 그만 하자. 이 일은 아주 흥미진진하지만 아직 본 궤도에는 진입하지 않은 것 같구나. 그러니 좀더 두고 보는 게 좋겠다. 그보다……." 청년이 음탕한 기운이 흐르는 눈으로 백아아의 전신을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내가 지난번에 한 제의에 대한 대답은 준비되었느냐? 내 첩으로 들어앉으라는 제의 말이다." "그건……."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만하면 됐다." 청년이 조금 불쾌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품어왔다. 하지만 싫다고 하는 계집을 강제로 품은 적은 없다. 그러니 조금 더 시일을 주기로 하지. 네가 네 어미의 명 때문에 마지못해 나를 돕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내 수족이 될 때까지. 그날이 되면 너는 네 스스로 내 앞에서 옷을 벗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 보아라." 휙 세 번째의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은 이번에는 갈대의 허리를 싹뚝 잘라버렸다. 남궁격은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쉴새없이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중 주류를 이루는 것이 아까 만난 백아아였다. '그 계집은 나를 마땅찮게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게 등을 돌릴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죽여 없애는 게 마땅할 것이나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다.' 강변을 따라 걷는 그의 발걸음이 놀랍도록 빨랐다. 그는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일 장의 거리를 단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숨이 가빠하거나 힘들다는 기색이 없었다. 누가 본다면 경탄하여 입을 벌렸을 것이나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무궁수사(無弓秀士) 남궁격(南宮格). 그는 적룡, 금룡과 더불어 무림삼룡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었다. 흉중에 누구보다도 큰 야심을 감추고 있으며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고 하지 않는 인물. 그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궁격은 십방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철궁도(鐵弓島)의 도주(島主)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소도주의 신분이었으나 일 년 전에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일약 도주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형식적으로는 단심백결회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고 있지 않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십방좌의 일인이었다. 아직도 화화궁 소궁주의 신분인 적룡이나 무당파의 제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금룡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회주의 자리를 그 두 사람에게 강탈당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우선은 칠대공적을 잡는 게 먼저다. 그들 중 넷만 확보하면 회주의 자리는 내 것이 된다. 하지만 어쩌면 뜻밖의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변수. 그것은 백아아에게 들은 복청양이라는 인물이다. '만일 아주 뛰어나게 머리가 좋은 자가 있어서…… 아니, 내 생각이 너무 앞서가는지 모르겠다. 천하에 그런 인물이 존재할 리 없다.' 어떠한 가정도 제외하지 않는다는 남궁격이지만 자신보다 머리가 좋은, 아니 자신과 비견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복청양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언젠가 다시 그 이름이 엄청난 비중으로 떠오르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땅거미가 스물스물 몰려오고 있었다. 남궁격은 한적한 외곽에 위치한 작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한때 어느 갑부의 별원(別院)으로 사용되던 곳이지만 지금은 버려져 폐가가 되어가고 있는 집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되는 듯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인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남궁격은 마당 중앙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만대모(萬大母)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아침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는데 지금은 조용합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말을 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특별한 동향은 없느냐?" "조용합니다. 아직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알았다." 남궁격은 무성한 잡초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을 지나자 안채가 나타났다. 안채는 반쯤 허물어진 볼썽사나운 몰골이었는데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거미줄이 보기흉하게 엉켜 있었다. '내가 칠대공적의 하나인 만대모를 이미 잡아두었다는 걸 안다면 배아파 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적룡, 그 계집은 눈에 불을 켜고 빼앗으려고 할 테지.' 무림삼룡이 회주 자리를 놓고 암암리에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청룡과 적룡의 다툼이 가장 심했고, 금룡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형국이었다. 대청으로 올라선 남궁격은 그 중 거미줄과 흙먼지가 가장 많이 앉아있는 마룻장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매캐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드러났다. 남궁격은 만족한 웃음을 띠우며 발을 내렸다. 그러나 하반신이 미처 내려가기도 전에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대청에서 돌연 남궁격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청마루 밑에는 긴 통로가 뚫려 있었다.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는데 양쪽 벽에 유등(油燈)이 걸려 있어 겨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똑같이 칠공(七空)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옆구리가 박살나 있었다. 같은 사람에게 당한 흔적이다. 그러나 남궁격은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안으로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굵은 쇠창살로 가로막힌 문이 있었다. 문에는 어른 주먹만한 자물통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용광로에 담궜다 꺼낸 것처럼 흐물흐물 녹아 있었다. 창살 안에는 역시 굵은 쇠사슬이 벽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것도 여러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끊어진 쇠사슬 아래 또 한 사람이 역시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 넘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남궁격은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가 만대모를 잡아 가두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들어와 수하들을 죽이고 만대모를 구해 갔으며, 또 그 사실을 밖에서 경비를 서는 자들은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후훗, 재미있군." 그러나 잠시 후 남궁격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차가운 웃음이었다.? '적룡, 그 계집이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다. 적룡에게 이만한 능력이 있다면 회주 자리를 넘겨주어도 아깝지 않다. 이건 다른 자의 짓이다. 누군가가 나, 남궁격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남궁격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복청양이라는 자와 어쩌면 진짜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보다 머리가 좋은 암중의 인물까지. "그게 누구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 남궁격을 건드린 건 그자의 가장 큰 실수다. 암, 실수고 말고." 불끈 주먹을 움켜쥐는 남궁격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거대한 엉덩이였다. 그것도 엉덩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마치 작은 동산이 하나 솟아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사람의 엉덩이였고 그것도 여자의 것이었다. 코끼리만큼이나 거대한 체구의 만대모가 엉덩이를 하늘로 향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풍선처럼 부푼 동산이 마구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몸을 심하게 떨고 있는 모양이다. "마주시여……." "만대모." 단황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는 나를 마주로 인정하고 섬기겠느냐?" "그러믄요. 그럼요…… 쇤네는 마주의 종이고 노예입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어떤 명이라도 듣겠다고?" 심유한 눈이 거대한 압력으로 짓눌렀다. 그럴수록 만대모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 단황을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저 굉장히 뻐기는 인물이구나 하는 정도의 첫인상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단황은 점점 거대해지고 자신은 벼룩처럼 작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비대한 몸뚱이가 축축이 젖어드는 것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 죽으라면 기꺼이……." 만대모의 음성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아졌고 이마는 완전히 땅에 닿아 있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인육을 앞으로는 먹지 말라고 하면 듣겠느냐?" "예?" 만대모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만대모는 인육(人肉)에 미친 여자였다. 그녀는 적어도 이레에 한 번씩은 인육을 먹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발작증세가 나타난다. 그녀가 칠대공적의 하나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인육을 즐기는 습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육을 끊으라니, 그건 죽으라는 것보다 더한 형벌이 아닌가! 만대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할 때, 단황의 음성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쓸데없는 일에 머리 쓸 것 없다. 나는 그런 명은 내리지 않을 터인즉." "가, 감사합니다. 마주!" 만대모는 이마뿐 아니라 코까지 땅에 박았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눈물이 콧물과 섞여 줄줄 흐른다. 단황은 무심한 눈길을 그녀에게서 거두어 들였다. '무흔색투와 무독옹에 이어서 만대모까지 내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제 십삼흑주 중 셋을 손에 넣은 셈이다.' 찰나, 그의 눈에서 파란 섬광이 일었다. '남은 건 열! 그들도 곧 저처럼 내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 * * 은하수정원의 밤은 웃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 남자들의 호탕한 웃음, 취객들의 컬컬한 웃음, 그리고 점소이들의 의례적인 웃음. 노래소리, 여인이 사르륵 치마 끄는 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리, 비파 소리, 욕지거리와 싸움박질 소리, 간혹 들려오는 술 게워내는 소리까지……. 웃음으로 시작하는 은하수정원의 밤은 여러 가지 소리가 섞이면서 더욱 깊어만 갔다. 그러나 유독 소리와 소리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는 곳이 있었다. 분명히 은하수정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소란과는 영 동떨어져 있는 곳. 후원에 자리한 별채에도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복청양은 몸을 일으켰다. 중년미부(中年美婦)가 백아아를 대동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한쪽에 비켜 서 있는 복청양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던져주고는 방을 가로질러 자리에 가 앉았다. 백아아는 그 옆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앉으시지요, 복소협." "말씀 낮추십시오." 복청양은 자리에 앉으며 중년미부를 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으며 수척해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독기(毒氣)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야 있나요. 제 생명의 은인한테." "그런 말씀을 계속 하시면 제가 거북해집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조금 도와드렸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 그릇의 물을 준 것을 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몰라도 그 물로 갈증을 푼 사람은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는 법이지요." 문이 열리더니 소옥이 두 잔의 차를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소옥은 차를 탁자에 내려놓고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태도로 보아 은하수정원의 여인들은 이 중년미부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모양이었다. 방안이 차향으로 가득했다. 중년미부의 긴 손가락이 찻잔을 감았다. "나는 성씨가 왕(王)이지요. 앞으로는 왕이라고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아아(雅兒)에게서 얘기는 들었습니다. 동생을 찾고 계시다고요?" "예." "그 동안 아아가 나름대로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이 아이가 나보다 낫지요. 나는 쓸데없이 위엄만 앞세우는데 아아는 사교성이 좋아 친한 사람들이 많아요." "복공자께 실망을 드리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아아가 끼어들었다. 딸이 입을 열자 왕부인은 잠자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후의 일은 그녀에게 맡기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럼……?" "동생의 이름이 복금사라고 하셨죠?" "그렇소."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금사 아가씨는 지금 단심백결회의 산서지부 뇌옥에 갇혀 있습니다." "금사가……." 복청양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금사가 산서지부에 갇혀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아마도 모용세가의 참변과 관계가 있는 모양입니다. 산서지부에서는 모용세가의 참변을 복공자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복청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두 여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복공자는 아직 모르고 계시겠지만 사실 그 동안 모용세가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습니다. 모용세가로 갔던 소허도장이 시체로 발견되었지요." 백아아는 소허도장의 시신이 발견된 경위와 무당신검의 부탁으로 산서지부가 혈안이 되어 흉수를 찾고 있다는 걸 자세히 일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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