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청양의 놀라움은 컸다. 소허도장같이 수양이 깊은 도인도 단박에 그를 모용세가를 몰살시킨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소허도장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면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이제 벗어나기 어려운 지경일 것이다. "금사 아가씨가 어떻게 해서 산서지부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그 경위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산서지부가 금사 아가씨를 문초하여 복공자의 소재를 알아내려 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도대체 누가……." 복청양은 찻잔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찻물이 넘쳐 그의 손을 적셨지만 뜨거운 줄도 몰랐다. 백아아가 안타까운 눈길로 그런 그를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금사 아가씨의 소재를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연히 산서지부로 가야 하지 않겠소?" "가서는요?" "당당하게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른 흉수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겠소. 그들도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작정 죄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덮어씌우지는 못할 것이오." "이치로 따지자면 복소협의 말씀이 백 번 옳지만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왕부인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금사는 제 동생입니다. 저로 인해 동생이 곤욕을 치르는 걸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혈육의 정을 내세우시니 우리가 말릴 처지가 아니로군요." 왕부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온 그녀는 한 번 맺은 오해를 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복청양의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왕부인이 백아아를 돌아보았다. "아아가 복소협과 동행하도록 하지요. 비록 별다른 재간은 없는 아이지만 아는 사람이 많으니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 일로 어떻게 그런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사양하실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왕부인이 얼굴에 웃음을 거두고 엄하게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웃을 때는 부드럽기 한량없지만 일단 그 웃음을 거둬들이자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흘러 넘쳤다. "복소협, 세상을 살다보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요. 오히려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라면 허리를 굽혀서라도 도움을 청해야 하며 때로는 상대의 능력을 적절하게 이용하기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용이라는 말에 각별한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약간 이용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오히려 이용당한 사람이 더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아직 복소협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심하십시오. 서로 돕고 도움을 주며,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것을 적절하게 조화시키지 못한다면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현명한 처신은 아닙니다." 복청양은 순간적으로 멍하다가 갑자기 시야가 넓어진 느낌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았다. "귀한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고요." 왕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무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아아와 함께 산서지부로 가십시오.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테니 서로 머리를 맞대면 분명히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필요없는 당부일 테지만 거기 가거든 부디 감정을 앞세워 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명한 사람은 많이 참고 적게 노하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왕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백아아가 급히 부축했다. 왕부인이 편안하게 딸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아무래도 한바탕 곤욕을 치른 후라 체력이 많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부축해 방을 나가며 백아아가 살며시 복청양을 돌아보았다. 문이 닫힌 후에도 복청양은 그 미묘한 눈빛을 한동안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제 6 장 산서지부(山西支府) 쿵! 쾅콰르르 쏴아아 후드득! 하루 종일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마침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일단 하늘의 문이 열리자 비는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때아닌 천둥이 요란하였고 섬광이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남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서둘러 이불 밑으로 파고 들어가고 설령 죄지은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날씨였다. 밤이 되어도 빗줄기는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거세져서 성내에 배를 띄워도 될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귀빈각(貴賓閣). 태원성(太原城) 내에서도 제법 이름있는 객점이었다. 귀빈각은 문을 일찍 닫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먼 데서 밤길을 달려오는 손님을 위해서라고 하던가. 원행(遠行)에 지친 사람들이 머물 곳을 찾을 때 객점의 문이 닫혀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이 귀빈각 주인의 평소 지론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겨우 해시(亥時)를 넘긴 시각이건만 우장을 걸친 점원이 나와 서둘러 문을 닫고 있었다. 단순히 문만 닫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변에 널려있는 잡다한 집기들을 챙기며 비단속을 철저하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가 이처럼 온다면 내일은 문을 열지 않아도 되리라. 점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공으로 얻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느라 바빴다. 철컥철컥! 둔탁한 바퀴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제법 먼 곳에서 나는 것 같았으나, 돌아보자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평범한 모양새의 사두마차였다. 마차바퀴가 물에 잠겨 소리의 원근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빗속에 마차라니?' 점원이 의아해 하기도 전에 사두마차는 귀빈각 앞에서 멎더니 황의소녀 하나가 뛰어내렸다. 황의소녀는 지우산(紙雨傘)을 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펼치자마자 바람에 뒤집어져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햐아!" 점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에 황의소녀의 얇은 옷이 흠뻑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겨우 성숙하기 시작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다리 사이로 움푹 들어간 곳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그야말로 돈을 주고도 보기 어려운 희한한 구경거리가 아닌가! 그러나 황의소녀는 점원이 입을 벌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서둘러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내리시지요, 아가씨." 작고 귀여운 발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모습은 나타내지 않고 발은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무섭게 들이치는 비가 꺼려지는 모양이다. 대신 푸른 장삼을 걸친 청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발이 물에 잠기자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보았다. 마치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의 양을 가늠해 보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런 우장도 걸치지 않았으므로 그의 몸도 금방 흠뻑 젖었다. 그제야 직업의식이 발동한 점원이 화급히 달려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영업이 끝났습니다요." "뭐라 했느냐?" 황의소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정말 죄송합니다요. 하지만 이런 날 어떻게 손님을 받겠습니까요.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보시지요." "닥쳐라!" 점소이가 둘러쓰고 있던 우장이 훌렁 벗겨졌다. 그 바람에 점원은 졸지에 쏟아지는 비를 쫄딱 맞게 되었다. "아니……." 점원이 입을 벌릴 때 우장은 이미 마차 안으로 건네졌고 우장을 받아 둘러쓴 백의여인이 내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자세히 알 길이 없었으나 뛰어난 미인이라는 것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별실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날 것 같지 않은 고운 목소리가 백의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 그럼……?" 점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한 손님이 올 거라면서 아침부터 주인이 별실을 치워놓으라고 닦달하던 것이 기억났던 것이다. 그 귀한 손님이 바로 이들이라는 말인가! "안내하거라." 앞으로 나온 백의여인의 하얀 손 위에 은자가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은자는 나올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점원의 품안으로 갈무리되었다. "알겠습니다요. 어서 이리 오시죠." 안복(眼福)에 재복(財福)까지……. 점원은 오늘 횡재를 했다. 복청양은 백아아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가 애써 장만해준 옷이 모두 젖고 말았구려." 은하수정원을 떠나기 직전, 백아아의 권유에 못 이겨 새 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그게 그만 빗속에 엉망이 되고 만 것이다. "개의치 마십시오." 백아아가 방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 보아도 아침에 이슬을 함빡 머금고 피어나는 나팔꽃처럼 아름다웠다. 복청양은 무심결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끼고 얼른 외면했다. 다행히 서로 어색해지기 전에 간단한 먹을거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맞은편에 앉은 백아아는 마치 갓 혼인한 새댁처럼 이것저것 챙겨 주며 곰살궂게 굴었다. 그러면서 쉴새없이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복청양은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한 그릇의 밥을 다 비웠다. 복청양이 식사를 마치는 것을 기다려 백아아가 몸을 일으켰다. "옆에 방이 마련되어 있으니 저는 이만 건너 가겠습니다." "그러시오." "산서지부에는 내일 날이 밝은 후에 방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밝을 때 대화를 나누어야 말이 통할 테니까요." "모든 걸 아가씨에게 맡기겠소." "그러셔야 합니다. 제 자랑이 아니라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는 복공자보다는 제가 한 수 위일 것입니다." 고개를 숙인 백아아가 몸을 돌려 나갔다. 복청양은 갑자기 허전함을 느꼈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세상이 온통 텅 비면서 천지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것 같았다. 산에서 천산오조라는 괴팍한 사부들을 모시면서 밤이면 언제나 혼자 지냈지만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었다. '내가 왜 이러나?' 복청양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백아아가 그에게 뭐란 말인가. 그저 조금 특별한 인연으로 만나 도움을 받고 있는 여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정을 느끼기에는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애써 멀리 할 것도 없는 그런 여인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복청양은 새삼스럽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런 다짐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의미는 아닌지 모르겠다. 복청양은 살포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느새 벗어놓았던 옷을 걸치며 옆에 풀어뒀던 삼절묵창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잘못 들었을 리는 없다.' 장대비가 지붕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고 뇌성이 요란하다. 천지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하여 마치 이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가 착각했을 리는 없다. 비록 잠결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들은 것이다. 바로 옆방에서 터져나온 여인의 짤막한 비명소리를……. 파앗! 그의 신형이 창문을 박차고 나갔다. 후드득! 사나운 빗줄기가 그의 얼굴을 마구 할퀴었다. 비는 콩알만한 크기였고 맞으면 통증을 느낄 만큼 세찼다. 꽈르릉! 때마침 뇌전(雷電)이 암천(暗天)을 갈랐다. 그림자 하나가 귀빈각의 담을 넘고 있었다. 그림자는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몸집이 기형적으로 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옆구리에 백의여인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백아아다.' 그림자가 담을 넘어 사라지는 그 순간, 복청양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빗속을 가르고 있었다. "게 서라!" 복청양의 고함이 뇌성보다도 크게 울렸다. 하지만 서라고 해서 설 상대였다면 애당초 달아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흑의인은 뒤쫓아 오는 기미를 알고는 더욱 속도를 배가시켰다. 한 사람을 옆에 끼고도 놀랄 만한 빠르기였다. '세상에 저처럼 빠른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복청양은 숨을 훅 들이마시고는 공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전 능력을 일시에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백아아가 위험에 처한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할 만큼 여유있는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천지가 잠든 깊은 밤에 폭우를 뚫고 두 개의 인영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과 지붕을 건너뛰고 아무 것도 거칠 것 없이 거리를 달렸다. 물이 발목까지 차서 철벅거렸지만 이미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성내를 벗어나 한적한 외곽으로 나갔다 싶더니 눈앞에 거대한 장원이 나타났다. 장원은 불빛 하나없이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 그 크기가 웬만한 고관대작의 저택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흑의인은 바로 그 장원의 담을 넘어가고 있었다. '놓칠 줄 아느냐.' 만일 저 넓은 저택의 한 곳에 숨어버린다면 찾기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복청양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장원의 담을 밟으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누구냐?" 힐문과 함께 두 가닥의 검광이 덮쳐온 것은 그때였다. '이런…….' 복청양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거의 본능적으로 두 손을 좌우로 갈랐다. 그러자 양 옆에서 덮쳐오던 검수들이 점혈당해 쿵쿵 떨어졌다. 그들은 아마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흑의인은 두 번째의 담을 넘고 있었다. 복청양도 지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검수들이 덮쳐왔고, 그의 손에 점혈당해 쓰러졌다. 한 가지 모를 것은 어째서 흑의인이 들어갈 때에는 조용하다가 복청양이 담을 넘으면 덤벼드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 복청양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쓸 여가가 없었다. 땡땡땡땡 갑자기 종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침입자가 있는 것을 알고 경보를 울리는 모양이었다. 사방의 전각에 다투어 불이 켜졌다. 불빛 아래 사람들이 우왕좌왕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잠결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움직임에 절도가 있었고 한결같이 병장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상한 곳이다.' 경보가 울리는 순간 낮은 지붕 위에 납작 엎드린 복청양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평범한 집이라면 저렇게 많은 무인들이 쏟아져 나올 리 없다. 물론 세력가의 집이라면 얼마간의 호가무사(護家武士)야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처럼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무가란 말인가?' 백아아를 납치해 온 흑의인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담을 넘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분명 흑의인을 바싹 뒤쫓고 있었다. 그런데 경보가 울리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는 와중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복청양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집에서 동(東)인지 서(西)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무작정 헤맬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어쨌든 그 흑의인은 이 집과 연관이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부딪치고 보자.'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폭우 속에 드러나 있는 가장 큰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은 장원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앞에 넓은 공지가 보였다. 아마도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이는 곳인 듯하였다. 이곳이 무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물증이었다. 들키지 않고 저기까지 갈 수만 있다면 여기가 어디라는 것과 백아아가 잡혀간 곳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심을 굳힌 복청양은 엎드린 채로 조심조심 기어가기 시작했다. 종적이 발각될까 싶어 감히 경신술은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다행한 점이 있다면 폭우가 쏟아지는 관계로 사람들이 횃불을 켜지 못한다는 점이다. 각 건물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 있지만 바깥은 여전히 짙은 어둠에 묻혀 있어서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복청양은 멀지 않은 곳에 건너뛸 만한 지붕을 찾아내고 그리로 옮겨갈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였다. "앗! 저기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저, 저자는 복청양이다! 모용세가를 멸문시킨 천노살성(天怒煞星)이다!" 고함을 지른 자는 공력이 지극히 심후해서 폭우 속에서도 똑똑히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설사 귀머거리라도 저 소리를 못 알아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자의 모습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럴 수가…….' 분명 조심해서 움직였고 어느 누구에게도 뜨이지 않았건만 어떻게 그가 누구라는 것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의아해 하기도 전에 몇 개의 그림자가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각기 손에 장검을 들고 있었고 경신술이 뛰어났다. "흥!" 냉랭한 코웃음소리와 함께 그림자들이 지붕 위로 산개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가 엎드린 위치를 파악한 모양이다. '야단났다.' 복청양의 등이 촉촉이 젖어드는 것은 폭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지만 이미 다섯 방위에서 검수들이 다가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노성과 함께 검광이 번쩍인다. 말을 건네 보지도 않고 대번에 살수를 펼치는 것이다. 다급히 배를 움츠려 검광을 피한 복청양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우수를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은 지극히 적절하여 상대의 가슴이 장세 아래 무방비로 확보되었다. "헉!" 다급한 경악성이 터져나온다. '안 돼.' 그때 산에서 보았던 어린 사슴의 영롱한 눈망울이 눈앞에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인지……. 맑고 초롱초롱한 눈. 그 눈은 언제나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복청양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손에 힘을 뺐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퍽 "어흑!" 상대가 비틀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 순간 그자의 발이 빗물에 쭉 미끄러졌다. 주르르 아래로 밀려 떨어지며 그자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어떤 희망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손을 잡아주는 손이 있었다. 복청양이었다. 그는 자세를 잔뜩 낮춘 채로 떨어지는 자를 잡아 지탱해주고 있었다. 상대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오를 때 다시 검광이 번뜩였다. 한 가닥의 빛이 복청양의 팔을 잘라왔고, 다른 하나는 허리를 베어오고 있었다. 복청양은 얼른 배를 깔고 엎드리며 떼구루루 굴렀다. 당연히 손을 잡힌 자도 같이 구른다. 아래에서 기와가 퍼석퍼석 부서지고 있었다. "인질을 잡다니!" 노성이 연달아 터지며 검광이 화려하게 수를 놓았다. 네 명의 검수가 앞을 다투어 기와 위를 구르는 복청양을 내리친 것이다. 다급해진 복청양은 구르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손을 잡힌 자를 가로휘둘렀다. 그러자 그자의 몸뚱이가 검수들의 다리를 후려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놀란 검수들이 위로 뛰어올랐다. "미안하오." 잠시의 틈을 얻은 복청양은 손을 놓으며 몸을 굴려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여러 가닥의 검광이 복청양을 마중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래를 보며 연속으로 삼지를 쳐냈다. 세 가닥의 날카로운 지풍이 검수들의 어깨에 적중하자 검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복청양은 발끝이 땅에 닿자 비스듬히 신형을 날려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나 이미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모조리 봉쇄된 후였다. 사방에서 검수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검수들의 실력이야 대수로울 것이 없었지만 그 수효가 많은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언제 고수들이 모습을 나타낼지 모른다. 쨍그랑! 몇 개의 검이 복청양을 덮치자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며 그들이 앞 다투어 물러났다. 그들은 팔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경악하여 앞을 바라보았다. 복청양의 손에 삼절묵창이 들려 있었다. 언제까지 맨손으로 무기를 든 자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그가 마침내 삼절묵창을 뽑아든 것이다. "나를 막지 마라!" 손에 애병(愛兵)이 들리자 자신감이 부쩍 솟아올랐다. 그는 묵직하게 소리지르며 여섯 자 길이로 늘어난 삼절묵창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창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겼다. 삼절묵창과 힘을 겨룬 검수들은 하나같이 검을 떨어뜨리거나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틈을 복청양이 파고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청양은 이런 식의 싸움에 익숙해졌다. 그는 창을 휘둘러 상대의 손을 마비시킨 후에 창끝을 돌려 점혈하여 쓰러뜨렸다. 이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펼쳐져서 전혀 거침이 없다. 그의 앞에는 어느새 십여 명의 검수들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었으나 피를 흘리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물러서라." 검수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며 세 사람이 나타났다. 그 중 가운데 있는 자는 허리춤에 유성추를 매달고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이었고, 좌우에는 검을 든 중년인들이었다. 염소수염이 유성추를 손에 들었다. "복청양, 그러잖아도 너를 찾고 있었는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나를?' 복청양이 주춤할 때였다. 두 명의 중년인이 좌우에서 덮쳐왔다. 검을 뽑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목 가까이 한기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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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도는 정확했으며 새삼스럽게 그 결과를 확인한다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나 같았다. '당신은 너무 방심했소…….' 섬전도는 몸을 숙여 복청양을 안아 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