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12편 (12/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본문 바로가기

[야설록]천객 - 1 - 12편 (12/17)

💬 0 👁 3
☰ 목록
책갈피와 음성 읽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매우 단순한 백아아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복청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백소저를 납치한 사람은 누구이며, 또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 두 사람은 동일인인가, 아니면 적대관계에 있는 인물들인가? 또 나를 구해서 이리로 데려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처음 백아아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가 무슨 신묘한 방법을 써서 자신을 구해낸 줄 알았다.
상황이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보니 그도 아니다.
백아아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끌려갔다 끌려왔을 뿐이다.
모든 일이 의문투성이였다.
하기야 의문을 따지자면 한도 없었다.
처음에 보이지 않는 흉수가 간악한 음모를 꾸며 복가장을 멸문지경으로 몰아넣었을 때부터 시작하여 모용세가가 참변을 당했고 소허도장이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이 모든 일이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모두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모든 게 너무 공교로웠다.
우연이란 한두 번은 일어날 수 있어도 여러 번 계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의 주변은 끝없는 우연의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복청양의 얼굴이 안쓰러울 만큼 굳어있자 백아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이 모든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어요.
하지만 모르는 일을 아무리 생각해 봤자 해답이 나오겠어요? 이럴 때는 그냥 모르는 대로 넘어가는 게 좋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죠." "나도 그러리라 믿소." 복청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혹시 이두옹 고염세란 인물을 아시오?" "이두옹 고염세라고요? 그는 산서지부의 부주인데요?" "그가 부주라고?" "그래요.
이두옹의 명성은 산서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사람을 직접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나는 어제 그와 싸웠소." 복청양은 고염세와 어떻게 싸웠으며 그에게 부상을 입은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복공자가 이두옹을 죽이지 않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에요." 백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복공자의 손에 그가 죽었다면 복공자는 단심백결회와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맺게 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복공자가 어디를 가든 안심하고 지낼 수는 없었을 테죠." "그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소." "어쨌든 여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겠군요." 백아아가 몸을 일으켰다.
뜻밖에도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치마가 깡충 위로 올라갔다.
치마는 겨우 무릎 부근에 걸려 있어서 희고 매끈한 다리가 그대로 내보였다.
복청양은 의아해서 그녀를 보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싸매 주느라 치마를 뜯어낸 것이다.
복청양의 시선이 다리에 닿자 백아아는 얼굴을 붉혔지만 짐짓 활발하게 말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모르겠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움직일 수 없어도 움직여야만 해요.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산서지부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거예요.
복공자가 어젯밤에 산서지부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필시 추적대를 보낼 텐데 이런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호굴(虎窟) 입구에서 잡아먹히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그렇군." 복청양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채 반도 일어나지 않아 신음을 토해내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격렬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으며 금방 이마에 땀이 흘렀다. "괜찮겠어요?" 백아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죽지는 않을 거요." 복청양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이제는 제대로 몸을 세우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무리하지 말고 이걸 사용하세요." 백아아가 검은빛이 나는 긴 막대기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삼절묵창이로군." 손에 익숙한 감촉을 느끼자 복청양은 와락 반가움이 일었다.
난전중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삼절묵창이 아닌가! 그런데 이게 무사히 남아 있었다니, 복청양은 없던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삼절묵창이 그의 손에서 여섯 자 길이로 늘어났다. "신기하네요." 백아아가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치를 알고 보면 간단한 일이오." 복청양은 삼절묵창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신형이 휘청했다.
그러나 잠깐 고통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 그는 끝내 몸을 바로 세웠다.
백아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어깨 아래로 들어오며 등을 감싸안았다. "저한테 기대세요." 복청양은 사양하지 않고 백아아에게 체중을 실었다.
그녀는 가녀린 몸매였지만 의외로 강인하게 의지가 되어 주었다.
와락 여인의 향기가 몰려왔다.
복청양은 백아아의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웠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두 사람은 느리게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어서 숨을 곳을 찾아야 해요." 백아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산서지부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을요." 제 7 장 애광(愛狂) 노파는 산속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나무집 문간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젯밤의 폭우에 잠을 설쳤거나, 아니면 문간으로 비껴 들어오고 있는 햇살이 너무 따스해서인지도 모른다.
나무집은 방 하나와 부엌 한 칸으로 이루어진 매우 단순한 형태였다.
벽에는 겨울을 나기 위함인 듯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왼쪽으로 돌로 쌓은 우물이 보였다.
나무집 주변에는 단단한 목책(木柵)이 둘려져 있어 짐승의 접근을 막아주었다.
목책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턱을 거의 가슴에 묻으며 졸던 노파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네의 시선이 목책 밖으로 이어진 산길을 향하고 있었다.
정기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흐릿한 눈이었다.
오랜 세월의 풍상에 찌든 듯 눈가에 진물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이 돌연 빛을 내었다.
멀리 구부러진 산길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남일녀였다.
남자는 몸이 불편한지 검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고, 여자가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걸음은 매우 느렸다.
노파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이제까지 흐리기만 하던 눈이 갑자기 놀라움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복랑(卜郞)……." 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파는 옆에 세워두었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줄이 툭툭 솟으며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극도의 놀라움을 애써 갈무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노파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랑!" 노파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 나갔다.
도저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파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빠른 동작이었다.
노파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고 있는 두 남녀에게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
그네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복랑! 복랑! 마침내 오셨군요!" 산길을 헤매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집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을 교환하던 복청양과 백아아는 느닷없이 늙은 노파가 팔을 벌리며 달려오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복랑!" 노파는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복청양을 얼싸안을 기세였다. "무슨 짓이에요?" 백아아가 급히 우수를 앞으로 밀었다.
그녀의 손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일어났다.
그녀는 차마 이 늙은 노파를 해칠 수 없어 겨우 이성(二成)의 공력만을 사용한 것이다.
노파의 신형이 휘청하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노파는 흉맹한 눈으로 백아아를 노려보았다. "넌 뭐냐?" "뭐요?" "오냐, 이제 보니 네년이 그 동안 복랑을 잡고 있었구나!" 노파가 지팡이로 땅을 쿵, 치더니 갈고리 같은 손을 뻗어 백아아의 얼굴을 할퀴었다. "앗!" 백아아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백아아는 이 노파가 그저 산속에 사는 평범한 인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살수를 펼치자 당황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대응도 신속했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틀어 피하며 우수를 뻗어 노파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미 상대가 상당한 고수라는 것을 알고 신중하게 손을 쓴 것이다.
노파의 신형이 그림자만 남기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노파는 물러설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봐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지팡이의 기세가 워낙 흉험해서 백아아는 더 이상 복청양을 부축한 채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낮추어 지팡이를 피하며 급히 복청양의 겨드랑이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노파는 복청양을 해칠 마음은 없는지 지팡이가 그의 몸에 닿기 직전에 장세(杖勢)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때 이미 몸이 자유로워진 백아아의 우장(右掌)이 노파의 얼굴을 덮쳐가고 있었다.
하얀 손이 면전에 어른거리자 노파는 당황하여 좌수를 들어 그녀의 장력을 막아냈다.
펑 요란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노파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백아아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주눅들지 않고 백아아는 주먹을 절반쯤 감아쥐며 남산박호의 수법으로 일장을 갈겼다.
노파의 공력이 자신보다 하수가 아님을 깨닫고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급히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욱!" 답답한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느닷없이 노파가 달려들고 그네와 싸우기 위하여 백아아가 빠져 나가자 복청양은 삼절묵창에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치자 그 경기에 휘말려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만 것이다.
쿵 소리도 요란하게 복청양이 바닥에 쓰러졌다. "복랑!" 노파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네는 백아아의 장세가 몸 가까이 닥쳐오는 것도 무시하고 기겁하여 곧장 복청양에게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앗!" 노파의 전신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자 백아아는 놀라 급히 장세를 거두어 들였다.
단순한 남산박호의 수법을 펼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능력으로는 이토록 빠르게 장세를 회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혈이 역류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어서 백아아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 사이 노파는 땅에 쓰러진 복청양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흐흥, 어흥…… 복랑! 내가 잘못했어요.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 복랑?" '아니?' 노파의 울음이 너무 갑작스러워 백아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파의 울음은 진실되고 격렬해서 거짓으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보니 이 노파는 제정신이 아니구나.' 백아아는 공연히 온전하지도 않은 사람과 손질을 한 것이 후회되었다.
복청양도 어이가 없었던지 잠자코 노파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노파는 여전히 헤울음을 놓으며 복청양의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복랑, 이제 보니 많이 다쳤군요.
누가 이런 짓을 했어요? 그자가 누구인지 말해줘요.
제가 가서 혼내 줄께요." "난, 난…… 괜찮습니다." 복청양이 안심시키자 노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진물이 가득한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활짝 웃는 노파의 모습은 몹시도 괴기한 것이었다. "알았어요, 복랑.
나한테 좋은 금창약이 있으니 그걸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
자, 어서 들어가요." 노파가 복청양을 불끈 안아 들었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노파는 건장한 사내를 안아 들고도 조금도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백아아는 노파가 버리고 간 지팡이를 주워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노파를 따라 들어갔다.
집기라고는 작은 농짝 하나가 윗목에 달랑 놓여있는 허름한 방이었다.
방구석에는 몇 개의 자루가 놓여있었는데 아마도 양식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복청양은 아랫목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백아아는 그 곁에 앉아 있었다.
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파가 이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온 노파는 우선 복청양의 상처를 씻고 금창약을 발라 주더니 그들이 배고파 하는 기색을 알아차리고 이처럼 자진하여 부엌으로 나간 것이다.
각별한 환대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백아아가 실소를 터뜨렸다.
복청양보다는 강호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이처럼 괴상한 일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겠소." "제 생각에 저 할머니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요.
복랑이라고 하는 걸 보면 틀림없어요." "그럼 저 할머니의 정인(情人)도 성이 복씨였다는 말이오?" "그래요.
공교로운 일이죠.
하지만 세상에 복가 성을 가진 사람이 복공자 하나뿐만은 아닐 테니 이상할 건 없어요." "누군지 모르지만 덕분에 호강하는군." 말은 웃으며 했지만 복청양은 가슴이 아파왔다.
얼마나 기다림이 간절했으면 사람도 몰라볼 만큼 머리가 돌아버렸단 말인가! '누군지 무척이나 무정한 사람이로군.' "그러나저러나 할머니가 발라준 약은 어때요?" "보기보다 신통한 약인 것 같소.
벌써 많이 좋아진 느낌이오." "다행이네요.
하여튼 복인(福人)은 어딜 가도 다르다니까요." "지금 나를 비웃는 거요?" "천만에요.
제가 어찌 복공자를 비웃을 수 있겠어요." 백아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복청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노파의 처절한 울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도 절절한 그 울음소리가 웬일인지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째서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군.' 문이 열리면서 노파가 개다리소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복랑, 기다리셨죠.
무척 배고팠을 거예요." 백아아가 얼른 일어나며 소반을 받으려고 했지만 노파는 사납게 눈을 흘기더니 자기 손으로 복청양의 앞에 놓았다. "어서 드세요." 노파는 소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중을 드는 것이 마치 아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야, 원.' 복청양은 백아아의 샐쭉하는 모습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그녀도 배가 몹시 고플 것이나 노파의 태도가 너무 완강해서 감히 상 앞으로 다가앉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 어서……." "고맙습니다." 복청양은 노파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여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그가 막 한 숟갈의 밥을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가만히 복청양을 보고 있던 노파의 눈이 갑자기 흉포한 빛을 띠었다. "넌, 넌 복랑이 아니구나?" "예?" "넌 복랑이 아니야! 넌 대체 누구냐?" 노파가 소리치며 와락 소반을 뒤집었다.
그 바람에 복청양은 꼼짝 못하고 음식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었다. "넌 복랑이 아니야! 복랑은 어디 있느냐?" 노파가 진짜로 실성한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짓이에요?" 놀란 백아아가 노파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노파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가 싶어 겁이 났다.
그래서 서둘러 노파의 맥문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노파는 맥문이 제압당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지 멍하니 허공만을 보고 있었다. "복랑이 아니야…… 복랑이…… 그 사람이 아니야……." 노파의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그네의 얼굴은 극히 꼴사나웠지만 조금도 추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백아아가 무심결에 손을 풀었다.
그러자 노파는 무릎걸음으로 방구석으로 물러앉더니 작게 움츠러들었다. "복랑이 아니야…… 얼굴은 많이 닮았지만 그 사람이 아니야.
너무 젊어.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그 사람이 저렇게 젊을 리가 없어……." "물론 저분은 할머니의 복랑이 아니에요.
그러니 정신 차리세요, 할머니." 백아아의 가슴에 아련한 슬픔이 배어 들어왔다.
그녀는 왠지 이 노파의 슬픔이 자신에게로 전이(轉移)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올까……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 왜 오지 않는 건지……." 한바탕의 소란이 노파의 정신을 들게 한 모양이었다.
노파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눈이 이전처럼 흐릿 하지는 않았다. "할머니, 그분을 기다린 지 오래 되셨어요?" 백아아가 노파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오래 되었냐고? 암, 오래 되었지.
벌써 이십 년도 넘었어.
그때는 나도 꽃다운 처녀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복랑이 설사 다시 온다고 해도 날 알아보지 못할 거야." "이십 년도 넘었다고요?" 이십 년 전에 꽃다운 처녀였다면 이 노파의 나이는 불과 사십 어름일 것이다.
그러나 노파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사십대의 중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고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었으며 피부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칠십은 된 모습이었다. '이 할머니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 사람은 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떠났어.
그래서 기다렸는데 오지를 않아.
나를 잊은 건지, 아니면 어디서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건지……." "정말로 나쁘군요.
그 사람은……." 백아아는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왈칵 증오심이 솟았다.
정을 주고 떠난 사람은 그 정을 잊을지 모르지만 정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세월을 죽이며 혼자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 사람은 나빠.
언제든 그 사람이 다시 온다면 내 손으로 꼭 죽이고 말 거야." "그러세요, 할머니."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한 번만 다시 보았으면 좋겠어……." 노파가 눈을 들어 복청양을 보았다. "넌 참으로 그 사람과 많이 닮았구나……." "그렇습니까?" 졸지에 음식상을 뒤집어쓴 복청양이었지만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파가 맑은 정신을 되찾아 다행이라는 느낌이었다. "복랑이 젊었을 땐 꼭 너와 같았다.
넌 누구냐?" "전……." 복청양은 문득 자신이 복가 성을 가진 것을 안다면 이 노파가 다시 발작을 할까 두려웠다. "전 심가 성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렇구나…… 세상에 아무리 닮은 사람이 많다 하지만 너처럼 복랑과 흡사한 사람은 아마 다시없을 것이다." 노파가 몸을 일으키더니 바닥에 흩어진 그릇을 소반에 주섬주섬 주워담았다. "상을 엎어서 미안하구나.
내 곧 다시 차려 오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할머니." "아니다.
모처럼 내 집에 온 손님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조금만 기다려라." 소반을 들고 나가는 노파의 뒷모습은 이제 조금도 실성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보니 복씨 성을 쓰는 사람들은 참으로 무정하군요." 노파가 나가자 백아아가 복청양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찌 복가들만 그렇겠소.
세상에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소.
그런 사람일수록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들 큰소리를 치지." "제발 복공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거야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때로는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당신은 저 할머니가 사십대라는 말이 믿어지오?" "그거야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한 말이 아니겠어요?" "아니오.
난 왠지 그런 것 같소." "그건 왜요?" "모르겠소." 복청양은 막연하게 허공을 보았다. "공연히 그런 생각이 드오.
사람의 기다림이 너무 간절하면 저처럼 늙을 수도 있지 않겠소? 우리에겐 평범한 일 년이라도 저 할머니에게는 이 년, 삼 년, 혹은 그보다 더 길게 느껴졌을 거요.
그러니 사람이 어떻게 늙지 않겠소." "하긴…… 일리있는 말이로군요." "우리 저 할머니의 복랑을 찾아주기로 합시다." 갑자기 생기를 띠는 복청양의 말에 백아아가 가당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복공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오.
할머니한테 자세히 물어보면 분명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저 할머니의 무공으로 보아 그 정인 되는 사람도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하지만 복가 성을 쓰는 고수가 몇이나 되겠소.
나라면 물론 어렵겠지만 당신은 발이 넓으니 가능할 것이오." "그러고 보니 지금 당장 생각나는 복씨 성을 쓰는 고수만 해도 셋은 되는군요." "바로 그거요! 아마도 그 사람은 사십대 중반일 것이오.
그렇게 따져 나간다면 범위가 한결 줄어들지 않겠소." "하여간…… 복공자는 공연한 일을 만드는군요." 백아아의 미소는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노파의 딱한 처지는 백아아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누구냐?" 밖에서 노파의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린 사람을 찾으러 왔소." 손에 섭선을 든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눈매가 가는 것이 심지가 깊은 인물로 보였다.
중년인의 뒤에는 검을 둘러멘 검수가 여섯이나 늘어서 있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HTML/스크립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은 최대 120자이며 페이지를 이동하지 않고 바로 등록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Copyright © webstoryboard.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