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13편 (13/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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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1 - 13편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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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누구든 여기엔 없다." 노파는 지팡이를 굳게 움켜쥐고 사납게 방문객들을 노려보았다.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목책 밖에서 사람들이 얼씬거리는 것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중년문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요.
남자는 아마 부상을 입어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이오.
그런 사람들을 혹시 보지 못하였소?" "난 모른다.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노파가 지팡이로 땅을 탕 굴렀다.
그러자 지팡이 끝이 땅속으로 한 자나 들어간다. '대단한 공력이로구나.' 중년문사는 내심 찔끔했다.
그러나 노파가 무공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알자 더욱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단심백결회 산서지부의 사람들이오.
그러니 공연히 거짓말을 할 생각일랑 마시오.
잘못 했다간 큰 경을 칠 테니." "흥, 지금 내가 늙었다고 협박하는 것이냐?" 노파가 코방귀를 뀌었다. "너희가 무슨 용무로 왔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썩 꺼지거라.
여기는 내 집이다.
나는 내 집에 외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라면 갈 것이오만……." 중년문사가 느물느물 웃었다.
그는 노파의 으름장에도 그다지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집 안을 뒤져봐야겠소.
그래서 아무도 없다면 가지 말라고 붙들어도 갈 것이오." "내 집을 뒤진다고? 누구 마음대로?" "왜 그러시오? 저 안에 아무도 없다면 우리가 뒤진다고 해서 꺼릴 것이 없지 않겠소." "닥쳐라, 이놈! 내 집이 뭐 개, 돼지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더냐.
썩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경을 칠 것이다!" "개, 돼지라고?" 중년문사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도 제법 이름깨나 있는 인물로 면전에서 이런 모욕을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 보니 이 할망구가 눈에 뵈는 게 없구나!" "할망구라고? 오냐, 너 그 말 잘했다." 그러잖아도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 길이 없던 노파였다.
중년문사의 욕지거리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이나 같았다.
노파가 불쑥 지팡이를 뻗었다.
그러자 지팡이 끝이 매서운 경풍을 일으키며 중년문사의 요혈을 엄습했다. "헛!" 중년문사는 다급하여 경호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산서지부 사람들이에요." 백아아는 문종이에 구멍을 뚫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왔군요." 목책과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고 노파의 음성이 워낙 커서 복청양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백아아의 곁으로 와 나란히 바깥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이목도 꽤나 넓은 편이구려." "이 부근은 모두 산서지부의 관할이에요.
이목이 좁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니에요.
단지 어림짐작으로 산속을 뒤지고 있을 뿐이죠." 밖에서는 잠시 험악한 대거리가 이어지더니 돌연 노파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
노파의 기세는 매우 강맹하여 잠시간은 중년문사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년문사가 손에 쥔 섭선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기이한 초식을 펼치자 곧 열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를 교환하였는데 노파는 일신에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남과 직접 손질을 한 지가 오래 되었는지 기세만 맹렬할 뿐 초식과 초식의 이어짐이 매끄럽지 못했다.
반면에 중년문사는 신법이 날렵하고 변화를 주로 하는 초식을 구사하여 점차 우세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같은 상황은 점차 변해갔다.
노파는 점차 신명이 오르는지 익숙한 초식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파가 휘두르는 지팡이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바람소리가 윙윙 일어나며 목책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력의 심후함으로는 중년문사는 노파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순간 순간 적절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는 있지만 자주 손이 어지러워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대로 간다면 백여 초가 지나지 않아 중년문사는 노파의 손에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저 할머니의 무공은 굉장하군요." 백아아가 감탄했다.
아까 형식적으로 겨루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정식으로 싸웠다면 그녀도 과연 노파를 이길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헛된 명성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진정한 실력자는 모습을 쉽게 나타내지 않나 보오.
저런 할머니가 저처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소." "정말 그래요." 노파가 패할 염려가 없어져서 두 사람은 마음놓고 구경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또다시 급변하고 있었다.
중년문사와 동행한 검수들이 자기편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빼어들고 노파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일대 칠.
검광이 난무하고 노성과 장영(杖影)이 춤을 추었다.
검수들은 일종의 검진(劍陣)을 연마한 모양으로 나아감과 물러섬에 절도가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여섯이 함께 공격하고 그 부족함을 중년문사가 적절하게 메우자 몇 배의 위력을 발휘했다.
반면에 노파는 아무래도 이런 식의 목숨을 건 싸움에는 서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네는 오직 공력의 심후함만 믿고 마구 지팡이를 휘두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군데의 가벼운 상처를 입고 말았다. "안 되겠어요." 어느새 백아아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고, 얼굴에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저들은 일곱이고 이쪽은 하나이니 이건 공평한 싸움이라고 할 수 없소." "역시 그렇죠? 공평해지려면 누군가 저 할머니를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할 수 있겠소?" "보기만 하세요." 방안을 둘러본 백아아가 구석의 자루를 발견하고 재빨리 달려가더니 한줌의 콩을 쥐고 돌아왔다. "이거면 충분할 거예요." 백아아는 콩 한 알을 오른손 중지에 끼우고 튕겨냈다.
비록 단순한 콩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경기가 실리자 훌륭한 암기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엇?" 노파를 공격하던 검수 하나가 뒷덜미에 날카로운 경풍이 엄습하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반응이 빨라서 콩을 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순간의 호흡이 늦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빈틈을 노파의 지팡이가 뚫고 들어왔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정확하게 움직이던 검진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어때요?" 백아아가 방긋 미소지으며 연달아 십여 개의 콩을 튕겨냈다.
그녀의 이러한 두립탄지(豆粒彈指)의 수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검진을 일시에 혼란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저 안에 누가 있다!" 검수 하나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자는 그 한마디가 자신이 이승에서 뱉은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노파의 지팡이가 머리를 두부처럼 부수기 전까지는.
퍽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처참한 광경이 검수들의 사기를 대번에 감소시켰다.
노파가 검진의 중앙으로 뛰어들며 신나게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사나운 개가 양떼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검수들은 당황하여 검을 들어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어디선가 콩알이 날아와 팔목을 마비시키거나 허리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어김없이 노파의 지팡이가 철퇴처럼 내리쳤다.
신음소리가 낭자하다.
이미 둘은 노파의 손에 죽었고, 셋은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져서 다시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남은 하나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그도 삼초를 넘길 것 같지 않다. "간악한 것들, 어디 두고 보자!" 중년문사가 이를 갈더니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동료가 위기에 처한 것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서라!" 노파가 중년문사를 쫓아가려 하자 뒤에서 검광이 덮쳐왔다.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노파의 몸이 순간적으로 아래로 숙여지면서 지팡이를 가로 휘두른다.
검수는 본능적으로 검을 내려 지팡이를 막았지만 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며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윽!" 검수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한바퀴 원을 그린 노파의 지팡이가 곧장 머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만 하시오!" 벌컥 문이 열리며 복청양이 뛰어나왔다.
그는 밖에 내려서자마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휘청한다.
그 사이에 검수의 머리를 부순 노파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복청양을 돌아보았다. "왜 그만두라 하느냐?" "이, 이미 저항할 수 없게 된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흥, 너는 인정이 꽤 많은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난 그런 거 모른다." 노파가 차갑게 내뱉더니 바닥에 쓰러진 검수들 사이를 춤을 추듯 돌아다녔다.
그네의 지팡이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요란하다.
노파의 주위는 어느새 여섯 구의 시체로 가득 찼다. "잔인하군요." 복청양은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흥, 사내가 이만한 것을 가지고 벌벌 떨어서 어디다 쓰겠느냐? 계집애 같은 인정은 나중에 한가할 때나 베풀거라.
이들은 모두 너를 잡으러 온 자들이다.
살려서 보내준다고 해서 누가 고마워나 한다더냐?" "할머니 말이 맞아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백아아가 복청양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러나저러나 할머니, 우리는 더 여기에 있을 수가 없겠어요.
한 놈이 도망쳤으니 곧 패거리가 이리로 몰려올 거예요." "그렇겠지.
너희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들에게 쫓기느냐?" "그건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답니다." 백아아가 허허거리며 웃었다.
사실은 그녀 자신도 무엇 때문에 쫓기고 있는지 잘 모른다. "좋다.
너희가 왜 쫓기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놈들이 곧 다시 몰려올 거라는 말은 그럴 듯하니 어서 가거라." "할머니도 여기 그냥 계시면 위험할 거예요.
잠시 몸을 피하는 게 어떠세요?" "난 아무 데도 안 간다." 노파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 있어야만 돼.
복랑을 기다려야 하거든." "하지만 그분은 이십 년이 넘게 오지 않았다면서요?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없다! 네까짓 것이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노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에서 파란 섬광이 이는 것이 조금만 더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그녀에게도 손을 쓸 기세였다.
백아아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할머니.
그분은 꼭 오실 거예요.
하지만 여기 있다가 저자들에게 변이라도 당하시면 영영 복랑을 못 만나 뵙잖아요.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어디로 몸을 피하세요."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곰곰이 생각하던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아무도 모르는 동굴이 하나 있다.
나는 그리로 갈 터이니 너희는 어서 가거라." "그럴게요.
고마웠습니다, 할머니." 백아아가 노파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복청양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니 돌연 그녀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노파는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다. "네 사내는 고집이 상당하구나." 그 광경을 보던 노파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제 남자는 아니랍니다." 백아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러냐? 그게 무슨 상관이냐.
같이 있으면 되는 거지.
너도 명심하거라.
만일 저 녀석이 좋다면 절대로 곁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아무리 달콤한 말로 속이더라도 놓아주면 안 된다.
사내라는 족속은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걸 몰라서 이 꼴이 되었지만 너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거라." 말을 끝낸 노파가 휘청휘청 걸어가기 시작했다.
노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가엾으신 분." 깊이 탄식한 백아아는 몸을 돌려 복청양의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그가 중간에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제 8 장 손노인(孫老人) 세상에는 의복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이처럼 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은 다시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누덕누덕 기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어찌나 많은 천으로 기웠던지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바탕이 되는 천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각 천마다 손바닥 크기를 넘지 않아서 한 벌의 옷을 이루기 위하여 수천 쪼가리의 천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영락없이 거지의 몰골이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옷을 이루고 있는 수천 쪼가리의 천은 하나같이 깨끗하고 정갈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람의 손에는 여러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열 손가락을 모두 반지로 채우고도 모자라 한 손가락에 두 개, 세 개씩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의 종류도 갖가지여서 어떤 것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고가의 보석이 박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길에 흘려도 주워갈 사람이 없을 구리반지였다. '세상 참 말세다.' 주루의 계산대에 앉은 주인은 그 사람이 반지가 가득한 손을 뻗어 술잔을 거머쥐는 것을 보며 탄식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마음속에서 공허한 반향을 일으킬 뿐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는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주루에 든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그는 걸인이 들어왔다고 인상을 잔뜩 쓰는 주인에게 어린애 주먹만한 금덩이를 내밀었다.
주인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은 그 사람이 주루의 이층을 통째로 빌리겠다고 하고 온갖 종류의 귀한 음식을 잔뜩 시키는 데도 군말없이 따랐다.
주루를 경영하여 그만한 크기의 금덩이를 손에 넣으려면 한 달은 꼬박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단 하루에 횡재를 한 셈이니 주인은 아마 그 사람이 주루를 몽땅 내놓으라고 해도 군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시진이 지나도록 그 사람은 전망이 가장 좋은 이층 창가에 앉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다못해 주인이 다가가 기녀를 불러줄까 하여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보라고 손짓만 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주인은 지금 아무런 하는 일 없이 그저 그 사람이 하는 양을 구경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젠장, 내 주루를 한 지 십 년이 가깝지만 이런 빌어먹을 경우는 처음 당한다.' 주인은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의 처지로 보면 복덩어리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당연히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는 주는 것 없어도 예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또한 아무리 값진 것을 주어도 밉게만 여겨지는 사람도 있다.
지금 주인의 심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한 사람이 주루의 이층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주인의 눈이 둥그래진다.
주루의 계단은 몹시 낡아서 사람이 올라오면 삐거덕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인은 계산대에 앉아서도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홀연 나타난 것이다.
삼색 수술이 달린 보검을 등에 둘러멘 백의공자였다.
칼날 같은 눈썹이 얼굴을 장식하고 있었고 윤곽이 뚜렷한 용모에 남자다운 고집스러움이 배어있는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어디로 보나 돈이 많아 보이는, 그래서 주루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색을 할 그런 차림의 귀공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군침이 도는 손님이라도 받을 수 없는 처지라 그 백의공자를 보는 주인의 눈은 영 곱지 않았다.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말랬더니 이 녀석들이 내 말을 엿 바꿔 먹었구나.' 주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장 백의공자를 내쫓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창가에 앉은 인물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다." "먼저 와 계셨군요." 백의공자의 입가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엄한 기상이 넘치더니 막상 미소를 짓자 부드러운 기운이 봄바람처럼 일렁였다. '이제 보니 저 작자와 일행이로군.' 주인은 별수없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계산대에 도로 주저앉았다.
무당신검 장경신은 성큼성큼 걸어가 창가의 의자에 몸을 앉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나도 온 지 얼마 안 된다." 천결기인(千結奇人)은 육십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흑발이었고 얼굴에도 주름살 하나 없어 나이먹은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병을 들어 술잔을 채우며 장경신을 힐끔 보았다. "한 잔 하겠느냐?" "그러죠." 이미 탁자에는 또 하나의 술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장경신은 주저하지 않고 그걸 들어 술을 받았다.
술이 잔을 넘쳐 손을 적신다. "그만, 됐습니다." "자고로 술은 차야 맛이다.
사양할 것 없다." 술병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은 천결기인이 자신의 술을 훌쩍 마셨다.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카아, 좋다.
정말 술맛이 꿀맛이로구나!" "아저씨가 술을 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장경신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나는 언제나 맹숭맹숭한 줄 알았느냐? 나도 술은 마실 줄 안다." "그야 그렇겠지만 만리추종 섭대협이 술을 마신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리추종(萬里追 ) 섭등(攝藤).
그게 이 천결기인의 이름이었다.
만리추종은 전대고수(前代高手) 중의 일인으로 기행(奇行)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추종술(追 術)의 제일인자로 한 번 그에게 걸리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 소문이었다.
또한 강호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무림삼룡 중의 하나인 금룡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다. "너는 내가 왜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 줄 아느냐?" 만리추종이 여전히 자작으로 술잔을 비우며 물었다. "모릅니다." 술병을 앞으로 당긴 장경신은 술잔이 비기를 기다려 재빨리 채워 주었다. "그건 말이다.
술이란 놈은 하도 묘해서 이게 일단 들어가면 오감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술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날로 나는 이 장사를 때려치워야만 한다.
그러니 아무리 술이 좋아도 어찌 함부로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런데 오늘은 왜 술을 드십니까?" "그건 말이다.
네놈이 날 보자고 했기 때문이지.
네놈의 전갈을 받는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앞으로 반 년은 술을 마시지 못할 것 같은 예감 말이다.
그래서 오늘 실컷 마시고 취해보려는 것이다.
내 예감이 틀렸느냐?" 천하가 우러러보는 무당신검이 아닌가? 비록 나이는 젊지만 무당신검의 명성은 일파의 장문인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만리추종은 서슴없이 놈자를 붙이고 있었고, 장경신도 전혀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너는 나를 골탕먹이려고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이다만 지금 이 순간만은 방해하지 못한다." "물론이지요.
저도 한 잔 주십시오." 그때부터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저 술잔을 주고받으며 누가 더 많이 마시느냐를 내기하는 것 같았다.
술이 들어갈수록 만리추종의 얼굴은 붉어졌고, 장경신의 안색은 반대로 창백해졌다.
그들은 경쟁하듯이 열 병의 술을 비웠지만 얼굴색만 변했을 뿐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주량을 따지자면 막상막하라고 해야 할까?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이냐?" 열 병째의 술을 비우자 더 이상 술을 가져오지 못하게 한 뒤, 만리추종이 물었다. "한 사람을 찾아 주셔야겠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만리추종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네가 나를 보자고 할 까닭이 없지.
그래 이번엔 누구냐?" "복청양이라는 자입니다." "칠대공적이 아니고?" 만리추종이 놀라움을 나타냈다.
무림삼룡이 회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성패가 칠대공적을 잡는 것으로 결정이 난다는 것도…….
때문에 만리추종은 장경신이 당연히 칠대공적을 찾는 일에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일이라면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줄 결심도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이름이 나오니 놀란 것이다. "아저씨도 제가 회주 자리를 욕심내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장경신이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단심백결회의 회주는 당연히 네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 "회주가 누가 되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장경신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거리에는 사람과 마차의 왕래가 빈번했다.
활기에 넘치는, 그래서 산다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풍경이었다. "적룡이든 청룡이든 모두 회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입니다.
이미 단심백결회는 기반이 탄탄하게 잡혀 있으니까 누가 회주가 되든 별 어려움없이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까지 그런 싸움에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들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분명 너와 같은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을 거다." "아무튼 전 칠대공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림의 해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들을 잡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제가 나서지 않더라도 적룡과 청룡이 그 일을 해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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