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4편 (4/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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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4편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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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국상을 당했으니 이제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할일 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옷과 밥만 축낼 뿐이며 이런 낭비는 결코 옳지 못합니다." 박탁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하직을 고하고 떠나갔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노모를 모시고 다시 산골로 들어간 이후로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이완의 집은 서울 동부 낙봉 밑에 있었는데 인평대군(1622__1658, 인조의 셋째 아들)의 집이 바로 이웃에 있었다.
이완은 대장으로 승진하자 급히 서둘러 안국방으로 이사하였다.
병권을 가진 신하가 왕자와 한마을에 사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판단은 사려 깊은 행동으로 인정받았다.
이완이 훈련대장으로 있을 적 때의 일이다.
밤중에 입궐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사모 관대의 복장으로 서둘러 말에 타려고 하자 이완의 첩이 가로막고 섰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왕명인데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난 이완은 첩의 사려 깊은 행동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대장의 신분이면 마땅히 속에 갑옷을 입어서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이 유비무환의 조처는 적중하였다.
이완이 입궐할 때 궐내의 모든 등은 꺼져 있었고 사방에서 화살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러나 갑옷 덕분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임금 앞에 설 수 있었고, 효종으로부터 과연 대장의 재목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바로 이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 인준이 뒤에 이완의 적통을 이었다.
순가의 재치로 평안 병사까지 한--이무 이무(?__?)의 본 관은 성주다.
대사헌 이의의 증손으로서 무과에 급제한 뒤 태안 방어사가 되어 임지로 내려가던 중 마침 한양으로 올라오는 우암 송시열과 같은 주막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방어사의 관노와 우암의 노복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생겨 서로 티격태격하는 중에 관노가 우암을 알아보고 이무에게 알려주었다.
비로소 그가 우암임을 눈치 챈 이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출세를 한번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이무는 방으로 들어가 우암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누구시오?" "예, 나는 송시열인데 왜 그러시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도덕과 문장이 당대에 으뜸인 우암 선생을 철모르는 아이들까지도 다 알아서 아무도 그 어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거늘, 하물며 당신 같은 시골 선비 따위가 감히 우암 선생을 사칭하다니! 애이! 내가 이런 자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도 창피한 노릇이다." 그는 짐짓 화난 얼굴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우암은 '그놈 꽤 쓸만한 놈이구나' 하고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뒤 이무는 평안 병사에까지 특진되는 행운을 얻었다.
병사의 청을 군명으로 들어주지 않은--조석윤 조석윤(?__?)의 본관은 배천이고 자는 윤지, 호는 낙정이다.
인조 4년(1626)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취소)되었고, 인조 6년(1628) 별시문과에 다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방(같은 종이에 기록된 합격자 발표)에 급제한 자들로부터 하례 인사를 받게 되었는데 머리털이 하얗게 센 한 급제자와 인사를 나눌 차례가 되었다.
인사를 치르고 난 노인 급제자는 얼굴을 들어 빤히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며 혼잣말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아하! 이제야 내 의문이 풀렸구나.
그러면 그렇지! 이런 장원급제 한 사람을 길러내고 난 뒤에야 내 차례가 돌아왔으니 내가 그 동안 번번이 낙제할 수밖에." 영문을 모르는 조석윤이 그 사연을 묻자 그 노인 급제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호남 사람인데 과거 보는 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오.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올 때 진위 갈원에 이르면, 그날 밤 꿈에 한 아이를 보게 되고 그 해 과거는 영락없이 낙방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그 아이를 만나지 않으려고 숙소를 옮겨도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미운 아이는 에누리 없이 나타났고 과거는 영락없이 낙방이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이번에 급제하게 되어 불행중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원을 만나고 보니 그 동안에 쌓였던 의문들이 한꺼번에 풀리게 되어 실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번번이 꿈속에 나타나던 그 아이가 바로 오늘의 장원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이 힘만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묵묵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답니다." 조석윤이 진주 목사로 있을 때였다.
목사는 경상좌병사의 하관도 되므로 조석윤은 날마다 새벽이면 병사에게 안부 인사를 갔다.
새벽 문안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루어지니 도무지 귀찮은 점은 고사하고라도 매일매일 하는 접대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관의 귀찮은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날 병사가 이제 새벽 문안을 그만두라는 간청에 조석윤은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병사를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며 군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니 아무리 상관의 명이라 하더라도 들을 수 없습니다." 조석윤의 집은 금천 우파리에 있었으므로 노량진을 거쳐야 서울을 오가게 되어 있었다.
어느 해 여름날 이웃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급히 비보를 전하였다. "지금 한강에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몰살하였는데 그 배에 대감의 자제가 탄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속히 사람을 시켜 시신을 찾아야 합니다." 조석윤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돌아올 날짜가 오늘인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은 되네마는, 우리 아이는 풍랑으로 전복될 위험한 배에는 아마도 타지 않았을 것일세.
틀림없이 자네가 우리 아이를 잘못 본 것일 걸세." 그날 밤에 조석윤의 아들은 돌아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살아 돌아온 내력을 설명하였다. "배를 막상 타고 보니 그 배엔 소가 많이 실려 있는데 바람은 세차게 불어 배가 흔들렸으므로 안전하게 갈지 의문이 들어 다시 내려서 배를 타고 오느라 이렇게 ㄴ었습니다." 이 남다른 부자간의 믿음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했다.
두 아들로부터 술주정 행패를 당한--민정중 민정중(1628__1692)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대수, 호는 노봉이다.
인조 27년(1649)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당시의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던 강빈의 일(소현 세자빈이었던 강씨에게 세자를 죽였다는 무고로 사약을 내린 사건)을 거론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성을 알고 있는 숙종은 그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민정중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로부터 땀이 나는 불상이 있다는 부고 가 올라왔다.
민정중은 민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즉시 그 불상을 부수게 하였다.
민정중이 대사간이 된 뒤에 절 두 채를 헐고 그 재목으로 태학 제사(성균관의 동재와 서재)를 짓게 하였다.
민정중은 아우 민여양과 더불어 우애가 남달랐고 형제가 모두 술을 좋아하였다.
그의 아버지 민광훈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형제가 다 아버지를 뵈러 와서 달포 동안을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동안에 형제에게 경사스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민정중에겐 이조 정랑 벼슬이, 아우에겐 부제학이란 교지가 같은 날 내려온 것이다.
평소 아들들에게 술을 엄금하던 아버지 민광훈도 이 날만은 술마시기를 허락하였다.
두 형제는 오래 참아 왔던 목마름을 술로 풀다 보니 자연 정도가 넘게 되었다.
취한 뒤에도 계속 술을 더 가지고 오라고 하자 하인들은 아버지 민광훈의 분부라며 이제 더 이상은 주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였다.
만취한 형제는 고함을 벼락같이 질렀다. "너의 순상(감사, 곧 아버지인 민광훈을 말함)이 암행어사 대접을 이렇게 밖에 못한단 말이냐, 응? 술 더 가져와라.
술!" 두 형제는 술주정을 실컷 부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튿날 술에서 깨어난 형제는 지난밤의 실수를 듣고 깜짝 놀라 아버지 민 감사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석고대죄 하였는데 그렇게 엄하던 민 감사도 웃기만 하고 꾸짖지 않았다.
나이 겨우 일곱에 피난길의 식구를 모두 살림-- 민유중 민유중(1630__1687)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지숙, 호는 둔촌이다.
민정중의 아우다.
인조 26년(1648) 진사시에, 효종 원년(1650) 문과에 각각 급제하였다.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에 봉해졌다.
노론의 중진으로 경서에 밝다는 평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전국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집집마다 피난길을 떠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정이 수도를 강화로 옮기려 하자, 대부분의 백성들도 '강화는 천연의 요새라 믿을 만한 곳이니 피난을 강화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나이 어린 민유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님이 가시는 곳에는 으레 적군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들었습니다.
강화로 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이 때 민유중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결국 민유중의 집은 피난을 영남으로 갔고 일가가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민유중이 사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글을 읽기 위한 휴가를 청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공부에 독실한 그의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서 수년 동안 발령을 유보하여 주었다.
어릴 적에 동춘 송준길에게 글을 배우고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송나라 때 주자(이름은 희)와 황면재(이름은 간)의 사이와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민유중은 또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우암과 여러 면에서 처신과 입장을 함께 하였으며 길흉영욕을 함께 나누었다.
민유중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 꿈에, 전에 의술로 궁중에서 이름을 얻은 안씨 노인이 찾아와서 식구 백 명이 흉년으로 굶어 죽게 생겼으니 쌀을 좀 달라고 하였다.
그 안 노인이 의술로 이름을 떨칠 때 민유중의 집안도 그의 치료를 받아 많은 효과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저의 손자놈 이름이 세원이며 재령 유동에 살고 있습니다." 꿈이었지만 그 꿈 내용이 너무도 생생하여 즉시 붓을 들어 '재령 유동 안세원'이란 글자부터 기록해 두고, 그 이튿날 아침에 재령으로 관문(조선조 때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어 유동에 사는 안세원을 즉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안세원이 해주로 재빨리 압송되어 왔다.
재령 군수는 안세원이 혹 범죄인이 아닌가 의심하고 신속하게 압송한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식구 백여 명이 아사 직전에 있음이 확실하므로 감사 민유중은 그에게 쌀 50곡(50곡은 15__20말)을 주었다.
안씨는 그 쌀 때문에 식구 백 명의 목숨도 건지고 조상의 제사도 지낼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안씨 집안은 특이한 식사 의식이 생겨났다.
즉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제일 어른이 이렇게 묻는다. "이 밥 누가 주었지?" 그러면 무든 식구들은 한꺼번에 대답한다. "민대야! 민대야!" 이렇게 소리친 뒤에 밥을 먹는 의식이 생겨나서 자손 대대로 가법으로 전해졌다.
민유중이 효종 때 경성 판관으로 특별보직되었을 때의 일이다.
민공이 북병사에게 문안을 하루도 빼지 않았다.
북병사는 그만두기를 간절히 청했지만 민공의 문안은 하루도 거르지 않게 되자 북병사는 다른 수를 썼다.
자기의 첩을 시켜 하루도 빼지 않고 정성껏 술상을 차리도록 했다.
미안한 쪽은 이제 민공이었다.
술상 차리는 일을 제발 그만두라고 사정하니 북병사는 다음과 같이 응수하였다. "판관이 내 청을 들어주지 않는데 내가 왜 판관의 청을 들어줍니까?" 판관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새벽에 하던 문안을 격일제로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곳 북쪽지방의 한 미담으로 전해졌다.
목소리만 들어보고도 죽음을 예견한--심만 신만(?__?)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만청, 호는 주촌이다.
아홉 살에 정조부 신흠으로부터 제경편을 지으라는 지시를 받고 이 글을 지어서 칭찬을 받았다.
성장한 뒤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병자년 난리에 어머니 한씨와 아내 홍씨가 모두 절개를 위해 죽게 되자 통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하늘을 두고 맹세하였다. "만약 용정(청나라 조정을 의미.
본뜻은 흉노 선우가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에서 사생 결단의 한판 싸움을 붙지 못한다면 죽는 날까지 시골에 묻혀서 썩으리라." 그 뒤로 신만은 병서를 열심으로 공부하면서 때때로 칼을 쓰다듬으며 복수의 결심을 다지곤 하였다.
1688년에 ㄷ유산에 들어가 해를 념기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신만은 성격이 호방하여 얽매임을 싫어하였으며 의술에 능통하여 얼굴빛만 보고도 몇 달 뒤에 죽는다는 것을 알아맞히기도 하였다.
어느 해 정초에 고모부 되는 이항의 집에 인사를 갔는데 때마침 그 집에 세배 온 이씨의 일가라는 사람이 객청 마루에 저만큼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심각한 진단을 하였다. "저기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가오는 4월에는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신만의 말에 놀라고 당황한 사람은 그의 고모였다. "예끼, 이 사람아! 정초부터 그 무슨 불길한 소리인가?" 고모는 객청을 향하여 미안한 얼굴로 어색한 변명을 하였다. "저 사람의 미치광이 같은 말을 개의치 말게나." 객청에 앉은 사람도 기분은 몹시 나빴지만 겉으로는 태연함을 보이기 위해 억지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저 사람이 바로 그 신생이 아닙니까?"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열 살짜리 이 집 손자가 신만을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에 아저씨가 한 말이 심상치 않던데, 왜 약을 써서 살려주지 않지요?" 신만은 웃으면서 그 아이에게 말했다. "너 참 신통하구나! 너 그 사람 살리고 싶으냐? 약 화제를 쓸 터이니 너 빨리 가서 의감을 갖고 오너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 그 책이 없었고 장본인도 언짢은 표정으로 그 즉시 떠나갔으므로 약 처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해 4월에 그 사람은 정말로 죽고 말았다.
그 사람이 무슨 병이기에 그렇게 죽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신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 얼굴빛을 살피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산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 때 벌써 말기라 날수를 계산해 보니 4월을 넘기지 못하겠기에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그의 고모부 이항은 또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 사람이 신의를 만났으면서도 살려달라고 청하지 않았으니 죽을 수 밖에 더 있는가!" 언젠가 우암 송시열이 신만을 보고 말했다. "자네 같은 재주로 만약 학문에 정진한다면 크게 성공할 터인데 자네의 생각이 문제일세." 우암의 말을 듣자 신만은 즉시 대답했다. "예! 이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신만은 앉음새를 즉시 고쳐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그러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뒤로 벌렁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암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껄껄 웃고 말았다.
우암이 신만과 친교를 맺은 뒤로 조정에서의 화려했던 우암의 정치적 술수는 바로 신만의 머리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에 병조 판서로 있던 홍중보와는 내외종간이었다.
어느 날 홍중보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 잔 적이 있는데, 이튿날 아침에 외사촌 형 홍중보가 외출한 틈을 타서 신만은 그의 침구에다 똥을 싸 놓고 간다는 말도 없이 도망쳐 돌아왔다.
앞을 내다보고 난세에 신중한 처신을 한--신정 신정(?__?)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인백, 호는 분애다.
신흠의 손자다.
인조 26년(1648)에 진사가 되고, 현종 5년(1644)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 때 공서파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 조씨와 결탁하여 손자인 김세룡을 조씨의 딸 효명옹주에 장가 들여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병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낙홍 부원군에 봉해져 굉장한 세도를 누리는 것을 신정은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이 때 신정의 누이동생이 조씨의 자부가 되자 신정과 그의 아버지 신익전은 처신을 더더욱 조심하였다.
1651년 김자점이 역모에 걸려 인조의 후궁 조씨와 더불어 처형될 때, 신정의 종형인 신면이 김자점과 친밀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심문 도중에 죽었으나 신정의 집안은 안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앞을 내다보고 신중하게 처신한 그의 사려 깊은 행위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신정은 결코 틀에 얽매인 답답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세상을 넌지시 구경하는 여유 자적한 그는 방외지인 같은 멋을 지니고 있어 풍류가 넘치는 멋도 있었다.
그의 시 중에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 적지 않으며,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문장의 대가인 호곡 남용익(1628__1692) 이 내방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공께서 곧 "기아"를 간행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책을 저의 시도 한 편 들었는지요?" 신정의 물음에 남용익이 답하였다. "아니, 아직 넣지 못했네." 그러자 신정이 다음과 같이 말한 후에 시 한 수를 읊었다. "제가 영남에서 매화 한 그루를 갖고 온 적이 있어 이렇게 한번 지어 보았는데 한번 보아주시지요." 조그만 매화 한 그루 고개 넘어 나 따라왔네 내가 앓아 누운 줄 알지 못하고 내 베갯머리를 향해 꽃을 피웠네 눈을 지그시 감고 몇 번이고 읊조리던 남용익은 돌아가서 이 시를 "기아"에 실었다.
재주가 없어 백이전을 10만 번 읽은 억만재의--김득신 김득신(1604__1684)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공, 호는 백곡 또는 귀석산인이다.
감사 김치의 아들이다.
현종 3년(166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으로 습봉되었다.
81세에 화적을 만나 부상을 입고 상처로 죽었다.
글재주가 워낙 둔하여 글을 읽을 땐 언제나 남보다 배를 읽어야 했다 한퇴지와 유종원의 글을 골라서 1만여 번을 읽었으며, 그 중에도 백이전을 더욱 좋아하여 1억 1만 3천 번(당시 1만을 1억이라고 하였음)을 읽었으므로 드디어 자기의 서실을 억만재라고 이름하였다.
현종 11년(1670)에 조선 팔도에 흉년이 들고 이듬해 역질이 만연하여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런 와중에도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는 자가 이었다. "금년에 죽은 사람의 수와 자네가 글 읽은 수를 견주어 보면 어느 것이 많겠나?" 시재가 있어 좋은 시를 많이 남겼다.
절구 몇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길이 끝이 나자 경기도 길로 접어드니 가도 가도 길은 멀어 잠시도 쉴 수 없네 나귀등에 앉아 졸다가 잠이 깨어 바라보니 저녁 나절에 잔설이 남아 있는 저 산 이름이 무엇이더냐 해는 뉘엇뉘엇 갯벌 너머로 지고 새들은 둥지를 찾아 멀리 날아가네 석양판 느즈막히 나귀탄 저 나그네 앞산에 비묻어올까봐 마음이 조급하네 저녁 노을은 강모래에 내려앉고 가을 소리는 숲에서 울려오는데 소를 몰고 돌아온 목동의 옷이 앞산에 내린 비에 촉촉히 젖어 있네 시재가 뛰어나 까다로운 운자에 강한--홍석기 홍석기(1606__1680)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원구, 호는 만주다.
인동 부사, 남원 부사 등 외직을 지낸 뒤 사직하고 청주에 살면서 화양에 있는 송시열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본시 시재가 뛰어나 강운(시를 짓기에 까다로운 운자)으로 시를 짓는 데 매우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어느 날 친구와 동행하다가 소나무에서 까마귀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친구는 침, 금, 심 3자의 강운을 주고 시를 짓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홍석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그 친구를 놀라게 했다.
시어머님 화좀 참으소 바느질하기 정말 싫소 꿈도 많고 시름도 많아 이불 안고 뒹군다네 누가 정말 시어머니 모진 마음 이해한다면 골방 속에 며느리 속마음 쪽집게로 집어내리 전서에 동방 일인자--허목 허목(1595__1682)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화보, 호는 미수 또는 대령노인이다.
현감 허교의 아들이며 오리 이원익이 그 사람됨을 기이하게 여겨 손녀 사위로 삼았다.
처음에 제자백가서를 공부하다가 다시 경서에 전심했으며 예학에 깊고 특히 전서에 동방 일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은일(속세를 떠나 숨어 살다가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린 선비)로 천거되어 크게 등용되기 시작, 81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이다.
허목은 태어날 때 손과 발에 특이한 손금도 발금이 있었는데, 손바닥에는 '글 문'자, 발바닥에는 '우물 정'자 모양의 금이 뚜렷하였고,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아홉 살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그 날 배운 글을 백 번을 읽고도 외지 못하였다.
그래서 허목은 자봉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수십 년 동안 독서에 몰두하였다.
인조 4년(1626) 박지계(1573__1635)가 원종(인조의 아버지)을 왕으로 추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인조가 기뻐하였으나 허목은 이를 반대, '임금으로 하여금 예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맹렬히 반대 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얻어 정거(일정 기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법)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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