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석이 옆에서 금부도사에게 청하였다. "죄인의 아들이 오래지 않아 당도한다 하니, 시간을 조금만 연기하여 부자가 마지막 상면하도록 하소서."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홍동석이 그만 약사발을 차서 엎어버리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사색이 되었다. 도사가 부득이하여 '약사발이 바닷물에 떠내려 갔다.'고 계를 지어 올렸고, 그 사이에 조관빈이 당도하였다. 의금부에서 약사발을 다시 보내는 데 한 달 남짓 걸렸는데 사약을 받아 죽을 때 조태채가 조관빈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동석을 너는 동기로 보아야 한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상을 따라 올라와서 다시 선혜청의 아전이 되어 대대로 세습하고 그 자손은 조씨 가문에 출입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조태채가 제주의 적소에 있을 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등 3대신이 화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선조의 세 원로 재상이 원통한 눈물 흘리시니 한밤중에 슬피 노래하는 한 외로운 신하 있네 이 시가 도성에 흘러 들어가자 반대파 소론 사람들이 더욱 미워하여 마침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른바 노론 사대신의 한 사람이고, 시호는 충익이다. '양'자 때문에 화를 당한--이이명 이이명(1658__1722)의 자는 양숙, 소자는 지인, 호는 소재이다. 민적의 아들로 지평 민채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숙종 6년(1680) 나이 23세 때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고, 12년(1686)에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30년(1704) 대제학에 추천되고, 32년(1706)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어릴 적에 한번은 옥당에서 숙직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식사를 마치자 아버지는 그에게 달리는 연습을 하게 하되 상번의 방에서 하번의 방 중간 청사에 이르기까지 수십 보를 달리게 한 뒤에 말하였다. "밥이 내려 갔느냐?" 그리고 곧 글을 읽도록 하여 잠시라도 놀지 못하게 하였다. 이마가 넓게 트였으며 말소리가 매우 힘찼다. 숙종 43년(1717) 독대를 할 때 동궁(뒤의 영조)을 보호하기를 아뢰었고, 46년(1720)에 세제책봉의 고명을 받을 적에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과 함께 세제(뒤의 영조)를 세우기를 미리 청하고 빈청에 모여 각각 손바닥 속에 써서 보였으니 곧 '양(養)'자였다. 이는 곧 영조 잠저 때의 호인 양심헌의 '양'자를 가리킨 것이다. 마침내 대책을 결정하고 경종에게 아뢰어 세제를 세웠다. 경종 1년(1771)에 당인(소론)이 무함하는 소를 올려 손바닥에 써서 보인 '양'자는 곧 이이명의 자인 양숙의 '양'자라 하여 불궤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 때 체포되어 와서 한강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복관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참형당할 때 휜 기운이 목에서 나와 하늘에 뻗친--이건명 이건명(1633__1722)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중강, 호는 한포재다. 민서의 아들이다. 숙종 10년(1684)에 진사가 되고, 12년(168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44년(1718)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1년(1721) 세자를 세울 적에 왕세제(뒤의 영조)를 책립하는 일로 세자책봉 주청사의 사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다가 임무를 완수하고 경종 2년(1722)에 환조하여 신임사화 때 홍양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사자에 의해 처참되고 처자식까지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필시를 지었다. 나라에 목숨 바치는 단심 있으니 죽고 사는 것은 저 하늘에 맡기네 외로운 신 오늘날의 슬픔은 선왕을 뵈올 면목이 없는 것일세 참형당할 적에 목에서 흰 기운이 나와 무지게처럼 하늘에 뻗쳤다. 백수의 노신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세제책립을 반대한--조태구 조태구(1660__1723)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덕수, 호는 소헌이다. 숙종 9년 (1683)에 생원이 되고, 12년(1686) 종제 조태채와 문과에 동방급제하고, 46년 (1720)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1년(1721)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정할 때 조태구는 앞서의 노론 사대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창황히 입궐하여 선인문으로부터 청대하니 최석정, 이광좌, 이조, 한배하, 김연, 이태좌 등이 뒤따라 당도하여 같이 입시하였다. 조태구가 나아가 아뢰었다. "백수의 노신이 살아 있은들 또한 무엇을 하겠습니까? 세제 세우는 명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시면 신 등은 죽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이 때 소론과 노론의 당쟁은 극에 달하였다. 학질이 떨어질 정도로 위엄이 높던--이광좌 이광좌(1674__174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상보, 호는 운곡이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이다. 숙종 24년(1694)에 장원급제하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종 2년(1722)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러 나이 많은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효행이 뛰어나 부모의 병환에 부모의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의 입에 넣어드리기도 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게 되자, 죽으로 연명하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송인명이 정려문을 세웠다. 인품이 장중하고 위망이 있어 조정이나 초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소민으로서 학질을 앓는 자의 등에 그의 성명을 써서 붙이면 학질이 곧바로 나았을 정도라고 한다.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욕심을 꺾은--신임 신임(1622__1678)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화중, 호는 한죽당이다. 효종 8년 (1657)에 진사가 되고 숙종 12년(1686)에 문과에 급제하여 연안부사로 나갔다. 연안부의 남쪽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밑에 일반 백성의 토지가 3천 평이 되었다. 당시 어느 후궁이 욕심을 내어 그 땅을 떼어 받으려고 내수사의 사람들이 임금의 분부라며 와서 협박하였다. 부사가 이를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서너 차례나 문서가 왔다갔다 하였다. 이에 임금도 억지로 강요하지 못하고 말았다. 경종 2년(1722)에 좌참찬으로 소를 올려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아뢰고 이어서 동궁(영조)을 보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사상이 갖은 방법으로 얽어 무함하여, 마침내 사형만을 면하고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영조 1년(1725)에 가장 먼저 사면하여 석방을 명하니, 3월에 처음 배에 올랐다가 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쳐 겨우 5월에 육지에 내렸는데 병이 심하여 남해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 벼슬살이한 지 40년 동안 온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화로와 등잔 등 몇 가지로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조정의 대소 관리 임면을 관장하는 이조판서의 자리에만 10년 동안 있었으면서도 청탁하거나 뇌물을 바치는 자들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여 집안이 물처럼 맑았다. 시호는 충경이다. 신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외아들인 판관 신사원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유복녀가 있었는데 시집 보낼 나이가 되었다. 그 과부된 며느리가 매양 시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딸아이의 신랑감은 아버님께서 관상을 잘 보신 후 가려 주소서." 신임이 말하였다. "수 80세에 부부가 해로하고 벼슬자리는 상신에 이르며 아들을 많이 두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임이 웃으며 말하였다. "세상에 어찌 그처럼 겸비한 사람이 있겠느냐? 네 소원대로는 필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 뒤로부터 신임은 출입할 때마다 반듯 합당한 신랑감을 물었다. 하루는 초헌을 타고 한 곳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장난하며 노는 속에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아이는 쑥대처럼 흐트러진 머리에 쑥 튀어나온 턱의 생김으로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임이 초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의복은 남루하나 골격이 범상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물러 성명을 물으니, 모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였다. 곧바로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보니 삼간 초가에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며, 혼자 사는 부인이 있을 뿐이었다. 신임이 여종을 불러 전갈하였다. "나는 아무 동에 사는 신 판서이다. 손녀가 있어 바야흐로 혼처를 구하던 중이었는데 댁의 도령과 정혼하고 간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 며느리에게 일렀다. "오늘에서야 정혼하였다." 며느리가 어느 집이냐고 묻자, 신임은 말하였다. "뒤에 알게 될 것이다." 폐백을 받던 전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혼한 집을 말하니, 며느리가 급히 늙은 여종을 보내어 그 가세 및 신랑감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여종이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가세는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고 신랑감의 얼굴을 아주 추합니다." 며느리는 그 말을 듣고 상혼 낙백할 정도로 실망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혼인날이 되어 그 신랑을 보니 과연 여종의 말과 같으므로 매우 못마땅하였다. 사흘이 지난 뒤에 신랑을 그 집에 보냈는데 저녁 때 다시 왔다. 신임이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다시 왔느냐?" 신랑이 대답하였다. "집에 돌아가니 저녁밥이 준비되자 않았고 또 돌아오는 하인과 말이 있으므로 도로 왔습니다." 신임이 웃으며 그를 머물러 있게 하였더니 집에 돌아가려 하지 않고 매일 안방에서 자는 것이었다. 하루는 신임이 말하였다. "남자는 사랑방에 거처하고 안일을 말하지 않는 법인데, 날마다 안방에서 잠자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오늘밤부터 나와 같이 자는 것이 좋겠다." 신랑이 대답하였다. "삼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밤이 되어 신임의 옆에 자는데 신임이 잠들려고 눈을 감으면 신랑이 손으로 신임의 가슴을 쳤다. 신임이 놀라 말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신랑은 말하였다. "잠버릇이 좋지 못하므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눈을 감으려면 또 이와 같이 하였다. 신임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곧 말하였다. "너는 안방에 가서 자는 것이 좋겠다. 나는 같이 잘 수가 없구나." 신랑이 곧 침구를 말아서 안방으로 들어가니, 그 때 잔치에 온 신임의 일가 부녀자들이 신부의 방에 모여 있다가 놀라 일어나서 피하니 신랑은 큰소리로 말하였다. "다른 분들은 급히 나가고 색시만 남는 것이 좋겠소." 이 때문에 처가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괴롭게 여겼다. 신임이 황해 감사로 부임할 적에 신랑도 따라갔다. 황해도의 먹을 조정에 진상할 때 신임이 신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먹을 쓰려느냐?" 신랑은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신임이 가리켜 보이며 말하였다. "네 마음대로 골라 가져 가거라." 신랑은 큰 먹 5백 동을 가져다가 해당 창고에 별도로 놓아두니, 비장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하면 진상품이 모자랄까 염려됩니다." 신임은 말하였다. "급히 다시 더 만들도록 하라." 신랑이 책실로 돌아와서 친지 및 하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보내고 나니 하나도 남는 바가 없었다. 이 신랑은 다름 아닌 유척기이며, 호는 지수재이다. 수가 80세에 이르고 부부가 해로하고 벼슬이 영상에 이르렀으며 아들 넷을 두었으니, 과연 그 자부의 소원처럼 되었다. 유척기가 뒤에 황해 감사가 되어 사위 윤랑을 데리고 갔는데, 또한 먹을 진상할 때를 당하여 윤랑을 불러 그에게 마음대로 골라 가게 하였더니, 윤랑은 대절, 중절 합하여 2동을 골라서 별도로 보관해 두었다. 유척기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더 골라 갖지 않느냐?" 윤랑이 말하였다. "모든 물건은 한량이 있는 것인데 제가 만일 더 가져가면 아마도 국고에 해가 있을 듯합니다." 유척기는 웃으며 말하였다. "사람의 의량도 대소가 매한가지다. 너의 그릇됨이 또한 정승에 이를 수 있겠다." 윤랑이 과연 정승이 되었으니, 바로 방원 윤시동 우상이다. 목호룡의 기를 꺾은 비파의 명인--김성기 김성기(?__?)는 처음에 상방(궁중에서 쓰는 물품을 만들던 곳)의 궁인이었는데, 얼마 뒤에 활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거문고를 배워 거문고를 잘 타기로 이름났고, 또 퉁소와 비파에 능하여 스스로 매우 높은 단계의 음률까지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교방(장악원의 아악과 속악을 맡아보던 곳)의 자제들이 가서 그 악보를 배워 이름을 드날린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모두 김성기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이에 김성기는 이미 그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고 아내와 자식의 생활을 위해 축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사람들이 재물로 교제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구차하게 여겼으니 가세는 날로 더욱 기울어졌다. 서호 위에 작은 배 하나를 사서 손수 낚싯대 하나를 들고 오가며 고기를 낚고 드디어 자호를 조은이라 하였다. 강물은 조용하고 달빛이 밝을 때를 만나면 노를 저어 중류에 가서 퉁소를 끌어 서너 차례 부는데 소리가 매우 비장하여 강 위의 기러기와 따오기도 날며 슬피 울고, 갈대 사이로 오가던 배에 탄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 때 목호룡이 고변을 올려 이미 노론 사대신을 죽이고 점차 동궁(뒤의 영조)까지 흔들어 놓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 공훈으로 동성군에 봉해졌다 하여 공경으로부터 이하 사람들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는데 준마를 갖추고 하인들을 시켜 김성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오늘 술자리에 그대가 아니면 즐거움을 누릴 수 없으니 그대는 조금 나를 돌보아 주게." 김성기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가지 않자, 심부름하는 자들이 와서 굳이 청하였으되 김성기가 굳이 가지 않으니, 목호룡이 매우 부끄럽게 여겨 그 수하들을 시켜 위협하였다. "오지 않으면 재가 장차 너를 크게 괴롭힐 것이다." 김성기가 바야흐로 손들과 비파를 타다가 수염을 뽐내고 비파를 심부름 온 사람의 앞에 던지며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호룡에게 말하라. 내 나이 70이다. 어찌 너(목호룡)를 두려워하랴. 너는 고변을 잘하니 가서 나를 고하라. 나는 한번 죽는 이외에 무슨 죄를 가하랴." 목효룡이 그 말을 듣고 기운을 잃어 그로 인해 잔치를 파하였다. 그 뒤부터 김성기가 도성에 들어가지 않으니 놀기를 좋아하여 곧 술을 싣고 강 위에 가서 퉁소를 즐겼다. 몹시 어둔하여 서당의 스승조차 포기하려 했던--윤봉구 윤봉구(1681__1767)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서응,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아버지 명운은 벼슬이 사재감청점에 이르렀다. 두번 상처하고 세번째 마음씨 고운 완산 이씨에게 장가 들었다. 어느 날 이씨의 꿈에, 한 여자가 사당으로부터 와서 말하였다. "나는 곧 가옹(집주인, 남편)의 전실이다. 전번의 계실(두번째 들어온 아내)이 내 아이를 매우 박하게 대우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성의가 없으므로 내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대는 아름다운 덕이 저승에까지 미쳐 감동을 주어 반드시 귀한 자식 두 사람을 낳을 것이니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 뒤에 과연 아들 둘을 낳았다. 맏이는 봉구인데, 유일(학문과 덕망이 높으면서 숨어 있는 사람)로 벼슬은 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문헌이며, 둘째는 봉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다. 윤봉구가 어려서 서당에 입학하였는데 말이 둔하여 구두를 잘 떼지 못하니, 서당의 스승이 떠나가려 하였다. 이에 윤봉구가 그만 눈물을 흘리며 잠을 자지 않으니, 스승이 그 뜻에 감동하여 다시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윤봉구 또한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는 학업에 성공하게 되었다. 장성하고 나서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계속 공부를 하여 학문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화분을 받고 출세한--이재 이재(1680__1746)의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 호는 도암 또는 한천이다. 숙종 28년(1702)에 문과에 급제하고, 33년(1707)에 중시에 급제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내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재가 지은 "삼관기"에 이렇게 씌어 있다. "내가 알성시에 급제하여 급제자의 이름을 부르던 날 어전에 이르니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옆에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는 바로 임방 공이었다. 대개 태어나던 해에 임공은 41세가 된 사람으로 나와 동방급제가 되었으니,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들은 이야기이다. 임방이 숙종 6년(1680)에 장차 정시에 응시하려 할 적에 그날 밤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 화문 두 개가 내려와서 하나는 어떤 사람이 그의 집에 와서 전하고, 화분 하나는 이미 아현이 감사댁에 전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선인(이재의 아버지, 곧 이만창임)이 문장의 명성이 매우 성대하여 사람들이 멀지 않아 급제할 것이라 여겼으므로 임방의 생각으로는 혹 이만창과 동방급제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그해 새로 태어난 아이(이재)를 지루하게 기다려 23년 뒤에 동방급제하게 할 줄이야 누가 생각하였는가. 과거시험 제목도 또 의란조였으니 그 또한 기이 하도다." 이 때 서덕수의 집이 혹독한 화를 입어 문호가 탕패하고 아이들과 과부들이 외지를 떠돌아다녔다. 이 때 화의 기색이 하늘에까지 덮어 이글거리고 사람과 물자의 모든 내왕이 끊여져 살아 있는 사람도 굶어 죽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홀연히 밥과 국 등 먹을 것을 사지고 와서 문밖께 두고 고하지도 않고 가는 자가 있으므로 그 집에서 두려워서 감히 나가서 응하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 가져다가 먹었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차례여서 그 덕택에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뒤에 그 음식을 가지고 온 자의 뒤를 밟으니 바로 도암의 행적이었다. 숙질이 변란에 항거하여 나라를 위해 몸바친--이봉상 이봉상(1676__1754)의 자는 숙의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5세손으로서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답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숙종 18년(169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총융사 형조참판,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1727) 김일경의 당이 뜻을 얻어 집권하데 되자, 충청병사로 내쫓기게 되었다. 역적 필명 등이 그 당이 집권 등과 몰래 결탁하여 안팎으로 내통하여 불궤한 일을 도모하니, 중외(서울과 외방)의 인심이 들끓고 있어서 염려스러움과 두려움이 매우 컸다. 이러한 위구스러움을 걱정하면서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떠나왔다. 무신년 곧 영조 4년(1728) 3월 15일에 이인좌 등이 변란을 일으켜 송장을 가장하고 병기를 상거 속에 몰래 숨겨 두어 어둠을 이용하여 충주성에 들어왔다. 밤 4고에 하늘에서는 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이들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병영에 다가오니, 병영의 비장 양덕부가 적의 유혹을 받고 성문을 열어 끌어들여 곧바로 이봉상의 침소에 들어왔다. 이봉상이 창졸에 칼을 뽑아 들고 나가서 그들과 서로 맞부딪쳐 싸우다가 손에 큰 상처를 입었으나 더욱 분발하였다. 적에게 포박당하게 되어서는 적이 횃불로 그 입을 지지고 목에 칼을 대며 말하였다.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다. 만일 나를 따르면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봉상이 꾸짖어 말하였다. "우리집은 대대로 충의를 지켜왔는데, 어찌 너희 역적들의 반란에 따르겠느냐." 적을 계속 꾸짖다가 죽었다. 이봉상의 계부 홍무도 병영 안에 있다가 적에게 잡히게 되자 적이 위협하여 끓어 앉게 하니, 홍무가 이에 대항하여 꾸짖었다. "내 조카가 이미 나라를 위해 죽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너 같은 자에게 무릎을 끓겠느냐." 적이 병부를 찾으니, 홍무는 말하였다. "본지 알지 못하고, 알아도 말하지 않으리라." 적이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니 적이 크게 성내어 몽둥이와 칼로 교대로 위협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수금된 지 6일 만에 마침내 죽었다. 이봉상의 어머니 정씨가 이봉상의 죽음에도 울지 않고 말하였다. "내 아이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그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한스럽게 여기랴." 이봉상이 순국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좌찬성을 증직하고 충민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을 세웠다. 영장 남연년과 비장 홍림이 아울러 목숨을 잃었다. 30년 묵은 옥사를 처결하고도 애통해 한--황인검 황인검(1711__1765)의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경득이다. 영조 23년(174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소시에 절에서 글을 읽을 적에 어떤 중이 성의를 다해 심부름하여 시종 게을리하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면 쌀을 빌어다가 밥을 지어 올렸다. 황인검이 뒤에 귀하게 되어서는 전혀 서로 찾아보지 못하였다. 뒤에 경상감사가 되어 열읍을 순시하다가 노상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 매우 반가워서 그와 함께 감영으로 돌아와 밤마다 같이 자며 매우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 하루는 황인검이 중에게 일렀다. "내가 어려서 너의 신세를 크게 진 바 있으므로 네가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으로 돌아오면 살림을 넉넉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출세 길을 터 주겠다." 중이 이를 고맙게 여기며 말하였다. "소승은 본래 속인으로 우연히 산골짜기 속에 새로 만들어 놓은 무덤 앞의 소복한 미인을 보고 홀연히 음탕한 마음이 생겨 겁탈하다가 그만 죽게 하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의 죄를 속바치려 맹세하고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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