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12편 (12/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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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12편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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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산골에 사는 가난한 백성인데 어떻게 이런 안경을 다시 살 수 있겠는가?" 그 값을 억지로 주려하자, 그 사람이 안경집을 풀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그 안경집을 가져다 보니 거기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일에 사또의 순행을 만나 구룡연에서 깨어질 것이다." 감사가 몹시 놀라며 그 사람에게 물었다. "이 글은 그대가 쓴 것인가?"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애당초 이 안경을 살 적에 이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기생 덕분에 화를 면한--조운규 조운규(1714__1774)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사형이다.
영조 16년(174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어느 날, 밤이 깊어진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어렴풋이 꿈속에, 곁에 있는 기생이 흔들며 깨우기에 감사가 놀라 깨어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사또, 어서 창문 밖을 내다보소서." 그 순간 환하게 비치는 달빛이 대낮 같기에 그대로 문틈을 통해 내다보니, 8척이나 되는 건장한 사나이가 휜 눈빛 같은 비수를 휘두르며 금방 감사의 침실로 뛰어들 기세를 하고 있기에, 온몸이 오싹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기생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소녀가 곧장 비장청에 알릴 터이니 사또께서는 가만히 뒷문을 열고 이곳을 벗어나소서." 감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혼자 있게 되면 아마도 재앙이 닥칠 것 같아 기생을 따라서 몰래 뒷문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엌 아래로 들어가니 그 곁에 지를 담는 빈 가마니가 있기에, 그것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가만히 피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칼을 쥔 놈이 부엌 쪽으로 다가오고 있기에 머리끝이 쭈뼛해져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감영 안이 물끓듯이 왁자지껄하고 불빛이 여기저기서 밝게 비치자, 침입했던 적이 칼로 부엌의 기둥을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운명이다." 그리고는 뒤편의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쳐 버렸는데, 사방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 가운데 모두들 외쳐대는 것이었다. "사또는 어디에 계십니까?" "사또는 여기에 있다." 감사가 말하자, 비장과 감영의 종들이 소리를 듣고 감사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그를 부축하여 선화당으로 돌아갔다.
곧 이어 조 감사가 승차되어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 기생에게 후하게 사례하였다.
나무를 실은 남의 소를 타고 가서 급제한--윤필병 윤필병(1730__1810)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이중, 호는 무호당이다.
진사로 포천에 살면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마침 이웃집에서 나무를 팔러 서울로 떠나는 자가 있기에 윤 진사가 나무를 실은 길마 위에 앉아 새벽녘에 동대문 밖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때가 너무 일러서 성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주막에 들어가 잠시 쉬려고 하는데, 주막의 주인이 나와서 맞이하며 물었다. "생원님께서 지금 과거 보러 가는 길이며 성은 윤씨입니까?" 윤필병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주인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뭇짐을 실은 소를 끌고 오는데 나뭇짐 위에 오색이 영롱한 한 괴물이 앉아 이 길을 따라와서 우리 주막으로 들어오기에, 그 나뭇짐 위에 실은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 소를 끌고 온 사람이 말하기를, '이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것이 송아지가 아니고 용같이 생겼으므로 서울의 장터에 내다 팔려고 하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깨기는 하였습니다만 마음속으로 너무나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생원께서 이미 이 길을 따라 오셨고, 또 짐을 실은 소의 길마 위에 앉으셨고, 성씨 또한 윤씨라고 하셨는데, 일찍이 들은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윤씨를 가리켜 소라고 하며 용은 바로 과거에 급제할 징조라고 하였으니, 과거 급제를 하례할 만합니다." 윤 진사가 웃으며 그가 함부로 장난한다고 나무랐는데, 그 길로 가서 정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뒤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처자가 정절을 지킨--김하재 김하재(?__?)의 본관은 광주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정조 8년(1784)에 임금을 향하여 직접 흉악 무도한 욕설을 적은 쪽지를 승지에게 건네준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후처는 어느 집안의 딸인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처음 흑산도엣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형을 집행할 때 의금부의 하인이 형장인 백사장으로 끌고 가려 하자 그 여인이 준엄한 말로 항거하였다. "비록 죄인의 신세가 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당당한 사대부 집안의 출신인데, 어찌 너희에게 끌려 가겠느냐.
내 손이 잘릴지언정 종들의 손에 잡힐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목에다 밧줄을 걸어 조용히 사형을 당하자, 흑산도 사람들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진도에서 종이 되어 옥사 곁에 살면서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스러운 말은 입에 담지 아니하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끓어 앉으며,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공손하고 조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남에게 요구하지를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아껴주며 가련하게 여겼다.
관비를 아내로 맞아 아들 하나를 얻어서는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자세히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이 비록 이 지경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어찌 도리가 아닌 일을 행하여 조상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누이가 어린 나이에 나주의 관비로 배속되었다가 장성하여 신분이 미천한 상인의 아내가 되었는데, 집안 살림이 조금 여유가 있었기에 새 옷 한 벌을 지어 오라비인 그에게 보내어 도우려 하니, 그가 그 옷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불에 채워 버리고 다시는 아는 체하지 말고 살라며 경계하였다.
김하재가 비록 미치광이처럼 한때 본성을 잃고 흉칙한 짓을 하여 스스로 이런 흉화를 불러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이어왔기 때문에 그의 처자들이 정절을 지킴이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어영대장이 정승 아들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교만하고 방자하여 군율로 참형에 처하기 위해 잡아 가두었다.
종사관이 그 아비에게 살려줄 것을 호소하니 할말이 없다는 뜻으로 백지로 된 편지를 대장에게 전했다.
종사관이 크게 깨닫고 뒷날 서북지방의 변란을 목숨을 걸고 평정하고 모든 공을 이미 돌아간 어영대장에게 돌렸다.
교만한 종사관을 반란을 평정시킨 인재로 만든--이창운 이창운(1713__1791)의 본관은 함평이고 자는 성유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영대장과 총융사에 이르렀다.
그는 닥쳐올 운수를 미리 헤아리는 식견이 뛰어났으며 장신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 무렵 김재찬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창운이 그를 불러다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재찬이 늘 교만한 마음을 품고 여러번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창운이 군중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오늘 종사관 김재찬을 군율로 참형에 처할 터이니 빨리 잡아오도록 하라." 김재찬이 그제야 몹시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정승인 그의 아버지 김익에게 구원을 여쭙자 김익이 말하였다. "네가 체통과 예의를 무시하고 교만 방자하게 굴다가 장막의 규율을 위반하였으니 난들 어쩌겠는가?" 한참 있다가 편지 한 장을 아들인 김재찬에게 건네주므로 김재찬이 그것을 가지고 군문으로 나아가니, 벌써 어영대장이 자리에 나와 있고 칼과 창을 든 군사가 정렬하여 위엄이 서릿발 같았다.
그런 가운데 군법을 집행하려 하므로 김재찬은 혼백이 흩어지는 듯 몹시 놀라고 당황하며 겁에 질려 엎드려 있다가, 그의 아버지가 준 편지를 간신히 대장에게 올렸다.
이창운이 그 편지를 뜯어보니 한 장의 공지로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이는 바로 대장에게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창운이 뜻을 정하고 이렇게 영을 내렸다. "내가 그대 아버지의 체면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주니 크게 반성하라." 그를 영창에다 가두었다.
그리고는 이날부터 이창운이 밤이면 영창에 나아가 김재찬에게 평안도 안에 있는 군, 읍의 생긴 모양과 산천의 험준하고 막힘이며, 도로의 트임과 환곡의 총계 숫자며 표와 식량이 얼마인 것과 인구가 몇 만이나 되는 것, 그리고 군대 정원이 몇천 명이나 되는 것들을 낱낱이 빠뜨리지 않고 강독하도록 하고, 그 이튿날 밤에 다시 와서 그 전날 저녁에 안 말을 강론하게 하기를 비바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하였더니, 40여 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평안도 40여 고을에 대한 제반 사정에 능통하여 손바닥을 펴보듯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이창운이 그제야 김재찬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늙은 사람이 국가의 중대한 일을 자네에게 부탁하니 자네는 충성을 다 하도록 노력하여, 국가로 하여금 위태로운 지경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게 하여야 하네.
내가 죽고 난 30년 뒤에 틀림없이 평안도 지방에서 변란이 있을 터인데, 국가에서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지가 이미 2백 년이 되었다.
태평 성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만약이라도 뜻밖의 변고를 당하게 되면 흙더미가 무너지듯 기와가 산산조각이 나듯 걷잡을 수 없는 형세가 전개될 것이다.
내가 온 조정을 두루 살펴보아도 세상을 제대로 다스려 변란을 안정시킬 인재로는 자네보다 나은 이가 없으니, 자네는 신중을 기하여 이 늙은 사람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하게." 그리고 난적을 막는 계책까지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평소 뛰어나게 총명하고 글을 잘한 김재찬이 그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자 않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얼마 뒤에 이창운은 세상을 떠나고 김재찬은 승진을 거듭하여 정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순조 11년(1811)에 이르러 평안도 역적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조정에서 놀라 술렁거리자 도성 안이 들끓는 듯하므로, 순조가 대신들을 불러다 반란군을 섬멸할 대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다.
김재찬의 집이 신문 밖에 있었는데 사자가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빨리 대궐로 나오라는 왕명을 전하고 아울러 재촉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찬은 천천히 일어나 완만한 동작으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좀도둑은 응당 저절로 멸망할 터인데 하필이면 놀라고 소란을 떨어야 하는가?" 집안 사람이 가마를 내어 신속하게 대궐로 나가게 하니, 김재찬이 끝내 덮개가 있는 수레로 바꾸어 타고 일부러 빙둘러 남대문을 경유하여 종로에 이르러서는 하인들에게 더 천천히 가도록 경계하였다.
김재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도성의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다 갖다 대고 서로 말하였다. "정승이 저렇게 한가롭고 편안하게 생각하니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염려 할 일도 없을 듯하다." 도성 안팎이 드디어 안도하게 되었다.
김재찬이 대궐에 도착하여 여러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성상께서 옥체가 불편하신 지 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므로 영이 임금에게서 나오면 백성들이 반드시 믿으려 들지 않을 터이니 왕대비(효의왕후 김씨)의 전지로 도성의 백성들에게 유시하고, 급히 진무대장을 정하여 도성 안에서 진영을 개설하고 우선 선봉장을 보내어 관서의 대장과 힘을 합쳐 역적을 격파하여야 합니다." 곧바로 낭관을 불러 방책과 전략을 상세히 일러주고 관서지방의 모든 정세와 사정을 막힘이 없이 도로와 산천, 인물, 풍토, 봉수, 성보, 군민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함을 촛불로 비춰보듯이 척척 알아맞히니 지휘하는 손에 바람이 일 정도여서 반나절이 채 안 되어 모든 계략과 대비가 끝이 났다.
여러 원로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잠자코 보기만 하다가 말을 꺼냈다. "각하께서 미리 이런 변란이 일어날 줄 알고서 익숙하게 연습해둔 것이 있는 듯합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신속하고 적절히 대웅하게 합니까?" 김재찬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미 30년 동안 미리 외우고 익혔습니다." 좌우에서 어리둥절해하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김재찬이 마침내 이창운의 일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두가 우리 사또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인데, 어찌 실낱 같은 공이라도 있겠습니까?" 물론 홍경래의 반란은 얼마 가지 않아 마침내 평정이 되었다.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의 뜻을 알고 있었던--채제공 채제공(1720__1799)의 본관은 평강이고 자는 백규, 호는 번암이다.
영조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 12년(178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조가 늘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면서 가끔 흔하게 읽혀지지 않는 책 가운데서 제목을 내어 선비들의 학문 역량과 정도를 나름대로 재어 보곤 하였다.
정조는 늘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으로 글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온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그 뜻을 모를 것 같았으나 오직 채제공만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 그 제목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정조는 이제는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제목으로 선비들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영남의 어떤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려고 길을 떠났는데 어느 산 속을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키가 큰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이 자기 집에서 묵고 가라고 하기에 그대로 따라가 그 집에서 묵게 되었다.
밤에 그 사람이 선비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보이는 과거의 글 제목은 바로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일 것이니 그대는 미리 대비하시오." 선비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이란 어느 책에 나오는 글귀입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이는 어느 책에서 나온다느니 할 것 없이 그저 알기 쉬운 것일 뿐이오.
지금 성상께서 이 제목으로 많은 선비들의 공부한 정도를 가늠해 보려고 하는데,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이란 바로 목화인 것이오." 선비가 그제야 크게 깨달았다.
그 이튿날 선비가 그 사람에게 사례하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글 제목을 보니 바로 산 속에 만난 그 사람의 말대로였다.
시험장을 가득 메운 전국 방방곡곡의 수많은 선비들이 글 제목을 이해할 줄 몰라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우면서도 붓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선비만은 거침없이 답안을 써서 갖다 올리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그 선비를 불러다 물었다. "누가 이 제목의 뜻을 가르쳐 주던가?" 선비가 과거 보러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렇게 감탄하였다. "이 사람이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려." 채제공은 남중(남인을 가리킴)의 뛰어난 인물이다.
젊어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며, 산사에서 글을 읽을 적데 부유하고 존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갈 때 이르러 서로 어울려 시를 읊으며 회포를 푸는데 채제공의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바람 불 제 해묵은 잣나무엔 새매가 새끼를 치고 눈 내린 달 빈 산에는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도다 모두들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들 비웃었는데, 어느 재상이 그 시를 보고서 그의 아들에게 말하였다. "네가 이 시의 뜻을 알기나 하느냐? 새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는 법인데 새끼를 쳤다면 그 모양은 범상하지 않을 터이니, 너희들이 매우 볼품없이 용렬함을 비유한 것이고, 눈이 내린 달 빈 산에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올라 드러날 것이다." 채제공이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붓과 먹이 없어 현직 재상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재상이 후하게 붓과 먹을 그의 앞에 내놓았더니 채제공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개가 비록 가난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고 해서 각하께서 나로 하여금 손수 이 물건을 들고 들어가게 하십니까?" 이에 그만 현직 재상이 그에게 사과하고 하인을 딸려 보내어 필묵을 들고 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채제공이 문 밖까지 나오려고 하는데 그만 개가죽이 자기 옷 속에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개가죽은 대체로 가난하여 솜옷이 없는 사람이 남에게 빌려서 등에다 대고 추위를 막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어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채제공이 조금도 부끄러워 하거나 난감해하는 기색이 없이 재상댁의 하인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이것을 내 등에다 떨어지지 않게 잘 꽂아 주게."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여겼다.
어머니의 병구환 때문에 벽파를 붙좇은--심환지 심환지(1730__1802)의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휘원, 호는 만포이다.
영조 38년(176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부조의 공덕으로 세자 익위사 부솔에 보임되고, 영조 47년(177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조 22년(1798)에 정승으로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으나 지조가 있어 교유를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다.
당시 임금의 장인이었던 오흥 부원군 김한구의 아들 참판 김귀주가 그와 교유를 맺고 싶어했으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심환지의 어머니가 편찮아서 피성의 의원을 데려다 진찰을 하였더니 그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다. "산삼 한 근을 쓰지 않으면 병이 나을 수 없습니다." 심환지가 한창 가난에 찌들어 거친 음식도 이어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귀주가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 공금 1천금을 차용하여 피성 의원을 시켜 산삼을 사다가 치료하게 하면서 자신이 돈을 준 사실을 말하지 않도록 단단히 당부하였다.
그러자 피성 의원이 우선 산삼 몇 편을 사다가 심환지에게 주었더니 그가 놀랍게 여기고 기뻐함 산삼을 가져오게 된 자초지종을 묻자 그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다. "마침 친족이 산삼을 캐어다 팔기에 몇 편을 샀으니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심환지가 매우 감사하게 여겼다.
이 때부터 그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있더니 마침내 회복되었다.
심환지가 그 의원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촐하게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대접하게 되었는데, 술을 마시는 중간에 그 의원이 말하였다. "나 역시 가난한 의원입니다.
그런데 산삼 한 근 값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 진흙골 김 참판께서 당신이 가난하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여 드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에게 돈을 주면서 산삼을 사도록 했던 것이다." 심환지가 아무 말도 않은 채 잠자코 있었지만 대단한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일을 가지고 한 번도 찾아가서 사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가난해서 염습하고 장례 치를 꺼리가 없어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김귀주가 또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문하게 하고 상사의 절차를 물어 모든 비용을 마련해주도록 하니, 경재와 비교할 정도로 제수가 풍족하므로 이를 보고 모두 빈정대었더니, 심환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분에게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이런 도움을 받는다 하여 거리끼지 않는다." 김귀주가 이러한 일로 결사적인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풍은 조만영이 정승 김도희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오흥이 본래 깨끗하고 검소하였는데, 지금 금위영의 빚장부에 3천 금이나 되는 많은 빚이 적혀 있으니, 어찌 그렇게도 남용을 하였단 말이오?" 김도희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남용한 것이 아니고 사우지간에 구휼하였기 때문이요." 김귀주가 이런 방법으로 당시의 명사들을 망라하여 벽파의 세력을 늘려 나갔으며, 심환지 역시 이때부터 김귀주를 붙좇아 뒷날 시파의 반대와 탄핵의 대상 인물이 되었다.
해흥군의 넋을 머리에 인--김이소 김이소(1735__1798)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유안, 호는 용암이다.
영조 40년(1764)에 문과에 합격, 정조 16년(1792)에 문과에 합격, 정조 16년(179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익헌이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손가참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중이 되어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한 재상이 나타났는데 옥으로 된 고리를 단 채로 서각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늠름하게 방으로 들어오기에 김이소가 물었다. "공은 뉘시오?" 그 재상이 대답하였다. "나는 해흥군(이련)이오." 김이소가 다시 물었다. "각하의 유해를 이미 고국으로 옮겨다 장례를 지냈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까?" 몇 해 전 해흥군이 동지사로 갔다가 이 손가참에서 객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흥군이 대답하였다. "내가 뭇 귀신들에게 가로막힘을 당하여 산해관을 벗어날 수가 없소.
그래서 혼자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의 전원을 바라보니 만리나 되는 거리인 데다 산이 막혀 있어 자손들의 제사도 받을 수가 없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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