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나이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장가를 들었는데 배는 불룩하고 머리칼은 짤막하였다. 그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책을 자루에 넣어 적성의 암거천 가로 가서 살았다. 그런데 그 무렵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리 수십 명이 몽둥이를 들고 밤에 그 집으로 들어가 식량을 빼앗으려고 위협하였다. 정민수가 마침 울타리 틈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짤막한 작대기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는 뭐 무기가 없겠는가? 도대체 너희들이 나를 어쩌겠다는 것이냐?" 도적이 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웃자 정민수도 따라서 크게 웃고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젖혀 그들을 모두 들어오게 해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남은 물건이 있거들랑 모두 가지고 가지고 가거라." 관솔에 불을 붙여 집안이 환하게 보이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방안에는 단지 물러나는데, 그 중 한 명이 정민수의 갓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정민수가 도둑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타일렀다. "해진 갓을 아깝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나로 하여금 갓도 없이 민둥 머리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하게 하는가?" 이에 그만 도둑도 미안해 하면서 그 갓을 되돌려 주었다. 소탈한 천성을 타고난 화가--김홍도 김홍도(1745__?)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사능, 호는 단원이다. 그림 솜씨가 뛰어나 산수, 인물, 화조, 영모 그림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정조 때 대궐 안에 그림을 그려 바쳤는데 그림 한 폭이 올려 질 적마다 임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임금이 어느 날 대궐의 벽에다 흰색의 칠을 하게 하고 거기다 바다 위의 모든 신선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그는 내시를 시켜 진한 먹물 몇 되를 받들게 하고 그림 폭에서 비켜나 옷을 걷어 올리고 서서 붓을 휘둘러 대는데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비가 쏟아지듯 하더니 몇 시간이 채 안 되어서 완성시켰다. 그가 조상의 공덕을 관원이 되어 연풍현감에 이르렀다. 임금이 금강산 네 고을의 산수를 그리도록 하면서 여러 고을에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게 명하였으니 모두가 특별한 은혜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고 하는데 매우 아름답고 탐스럽기는 하였지만 가진 돈이 없어 그 매화를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단원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자가 있어 매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3천 전을 받았다. 그 중에서 2천 전은 떼어다 매화를 사고, 8백 전은 떼어다 술을 사다가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불러모아 매화시를 지으며 마시고, 나머지 겨우 2백 전으로 쌀이며 땔감을 사들일 생활 밑천으로 접어두고 하루 앞의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의 소탈함이랄까, 천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의 아들 김양기는 호가 긍원인데 그도 역시 그림을 잘 그려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내력과 법도가 있었던 것 같다. 산은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은 산수화가--최북 최북(?__?)의 본관은 무주이고 초명은 치이며, 자는 칠칠이다. 세상에서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고, 이름 자인 '북'자를 파자하여 '칠칠'이란 자를 쓰며 당시에 행세하였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쪽 눈이 멀어서 항상 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술 마시기를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여 한번은 금강산 구룡연에 들어가 술에 몹시 취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천하데 유명한 최북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드디어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때마침 이를 보고 구원해 준 사람이 있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술을 마셨으므로 저자 안의 술심부름꾼이 술병을 가지고 오면 그가 번번이 모두 마셨기에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웠다. 그가 평양과 동래, 두 곳을 유람하였는데,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그가 머무는 집의 문 앞까지 따라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는 자가 잇달았다.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간청하자 그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으므로,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물은 왜 그리지 않습니까?" 최북이 쥐고 있던 붓을 내던지며 대답하였다. "허허 이 종이 밖에는 모두가 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린 그림이 자신의 드는데도 값을 적게 주면 번번이 성을 내어 꾸짖으며 그 그림폭을 찢어버리고 남겨 두지 않으며, 간혹 그린 그림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 값을 지나치게 많이 주면 큰 소리로 껄껄 웃다가 그 사람을 툭툭 치면서 그 돈을 되돌려 주고, 문 밖에 나가 다시 사람을 불러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녀석은 값도 제대로 모르는 멍청이야." 스스로 호를 호생자라 하였다. 그는 성격이 오만하여 남이 하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하지 않았다. 한번은 서평 공자와 1백 금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그가 한창 우세한 국면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서평 공자가 한 수만 물러 달라고 하자, 최북이 바둑판을 쓸어버리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 말하였다. "바둑은 본래 장난 삼아 두는 것인데 되물러 주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한 판도 둘 수 없게 됩니다." 그 뒤로 다시는 서평 공자와 바둑을 두지 아니하였다. 또 언젠가 정승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문지기가 그만 그의 성명이나 호를 부르기가 거추장스러워 주인에게 최 직장이 오셨다고 적당히 고하였더니, 최북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째서 정승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직장이라고 부르는가?" 그러자 문지기가 물었다.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최북이 또 되물었다. "내가 언데 직장이 되었는가? 직함을 빌려서 나를 높이 불러 주려고 한다면 어찌 정승이란 호칭은 놔두고 기껏 직장으로 부른단 말이냐?' 정승을 만나지도 않고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최북의 그림이 세상에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최산수라고 불렀다. 금릉 남공철이 이단전의 소개로 산방에서 최북을 알게 되었다. 최북이 남공철에게 말하였다. "국가에서 수군 몇 만 명을 요소에 배치한 것은 장차 왜적에 대비한 것이긴 합니다만 왜적은 해전 연습만 필사적이 데 비하여 우리나라 풍속은 해전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쳐들어오더라고 우리가 바다로 나가 응전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들은 저절로 물에 빠져 죽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삼남의 백성들을 괴롭히면서 소란을 떨게 합니까?" 다시 술을 가져다 새벽녘이 되도록 마시면서 대화를 계속하였다 세상에서는 최북을 술꾼이니 그림 그리는 아전이니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미치광이로까지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조리가 있고 넌지시 비꼬는 내용이 많았다. 이단전이 말하였다. "최북은 글 읽기를 좋아하면서 경저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린--임희지 임희지(1765__?)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경부, 호는 수월도인이다. 그의 사람됨이 기개가 높고 지조가 있었으며 술을 좋아하여 여러 날을 술에 취한 상탤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는데, 대나무를 그리는 솜씨는 표암 강세황과 명성이 비슷하였지만 난초 그림은 단연 그보다 뛰어났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는 번번이 '수월'이란 두 글자를 써서 그것이 그림의 내용과 연결이 되게 하고, 간혹 그림에다 글씨를 쓸 경우에는 마치 도교에서 전하는 부록(예언서)처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글자의 획도 기이하고 고색을 띠게 하여 다른 사람이 쓴 글자와는 특이하게 하였다. 그는 또 피리를 잘 불었으므로 그에게 배우는 자가 많았다. 집안에 남은 물건이라고는 없었고 한 명의 첩을 데리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정원에다 꽃을 가꿀 형편은 못되지만 이 계집이 좋은 꽃 한 떨기 구실은 제대로 한다오." 거처하는 집은 몇 칸에 지나지 않고, 반 이랑도 채 안 되는 빈 터에다 못을 파서 사방 몇 자 정도 되기는 하였으나 물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 쌀 일은 물을 모아 그곳에다 부으니 조그마한 연못이 꾸밈없이 커 보였다. 그리고는 그 못가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말하였다. "나의 호를 수월도인이라고 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뜻에서이니, 달이 어떻게 물을 가려가며 비추겠는가." 과히 그의 풍류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였다. 그가 다른 책은 가진 것이 없고 오직 "진서" 한 부만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배를 타고 교동으로 가려고 하는데 바다 가운데 이르러 갑자기 거센 비바람을 만나 거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처와 보살을 불러대자, 임희지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일어나 시커먼 구름과 흰 파도 사이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얼마를 지나 비비람이 잠잠해지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이 한번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바다 가운데서의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기이하고 장엄한 진풍경은 아무나 구경할 수 없으니 춤을 안 추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가 거위의 깃을 엮어 옷을 만들고는 달 밝은 밤에 두 개의 상투를 틀고 맨발에 거위 깃옷을 걸치고 생황을 가로로 불면서 걸어가니, 보는 이들이 정말 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모두 도망쳤는데, 그의 미치광스럽도록 꾸밈없는 행동이 대체로 이런 정도였다. 닥쳐 올 일을 미리 짐작하고 대처한--이서구 이서구(1754__1825)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또는 강산이다. 영조 50년(1774)에 문과에 급제하고, 순조 25년(1825)에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그가 정승에 임명되자 판서인 풍석 서유구가 좌객들에게 말하였다. "강산이 정승이 되리라는 것은 그가 약관 때부터 우리 선친께서 이미 짐작하셨던 바다. 강산이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우리 선친과 규장각의 관원으로 함께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고 계실 적에, 그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며 행동거지가 무게가 있어 사람들이 그를 대단한 인재로 지목하고 모두들 그가 삼공이나 보상의 지위에 오를 것을 예견했었다. 언젠가 우리 선친께서 혼자 남산 밑 조그마한 집에 살고 있는 강산을 찾아가신 적이 있었다. 인사가 끝나자 갑자기 행랑 아래서 떠들썩한 소리로 강산의 성명을 불러대며 욕설을 퍼붓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강산은 목소리며 얼굴 표정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저 놈이 강상의 죄를 범하였는데 다시 그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으면 또다시 멋대로 못된 짓을 저지를 것이다. 저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만약 용서한다면 앞으로 법을 시행할 수 없게 되고 사회기강이 허물어질 터이니, 너는 저놈을 수구문 밖으로 끌고 가서 없애 버리고 오너라.' 그 종이 명을 받고 떠났는데, 우리 선친께서 그 일의 시종을 알아보려고 점심을 함께 하며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에 수구문으로 갔던 종이 돌아와 그 놈을 그만 죽였다고 고하자, 강상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놈이 비록 큰죄를 범하여 법대로 죽이기는 하였지만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자이니 매장은 후하게 해주어라.' 종이 응답하고 나가므로, 우리 선친께서 그래도 미심쩍게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종이 다시 와서 고하기를, '형조의 서리가 뵙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강산이 서리를 불러들여 연유를 물었더니 서리가 대답하였다. '형조 판서 재감께서 지금 등청하여 계시면서 수구문 밖에 피와 살점이 난자한 시체 한 구가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는데, 바로 본댁의 종이었습니다. 관아에 통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이는 법을 벗어나 처벌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소인에게 탐지하여 보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 형조 판서는 바로 채제공이었다. 강산이 조용히 서리에게 말했다. '그 자는 우리 집의 사노이며 강상의 죄를 범하였기에 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또 관아에 통고할 것 같으면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기에 그리한 것이네.' 젊고 명망이 있는 인사로 목소리와 얼굴빛이 전혀 동요됨이 없이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였느니 어찌 원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이서구는 닥쳐 올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때가 많았다. 순조 때 두번째로 전라 감사에 임명되어 적폐를 바로잡고 선정을 펴니 온 도가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올 무렵에 호적을 가져다 여러 서리에게 나누어 주며 다시 베껴 오도록 하여 어느 창고에다 별도로 보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호적 창고에 불이 나서 다른 장부는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타버렸지만 새로 베껴다 따로 보관해 둔 호적은 아무런 탈이 없었다. 자기가 떠난 후 이러한 일이 저질러질 것을 짐작한 바 있었다. 또 다른 일로는 그가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어느 날, 하늘의 북두칠성이 나주지방에 광채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영에서 부리는 하인을 불러 단단히 일렀다. "네가 지금 당장 나주의 아무개 집에 가면 그 집 며느리가 틀림없이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거든 반드시 죽여 버리고 계집아이거든 죽이지 말고 돌아오너라." 한참 뒤에 감영의 하인이 돌아와 이렇게 보고하였다. "정말 계집아이를 낳았더이다." 이서구가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국가의 운명을 어지럽힐 존재였겠지만 하찮은 계집아이인데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권세가의 첩실이 되어 그 세력이 한 시대를 기울일 것이다." 그 계집아이가 과연 커서 하옥 김좌근의 첩이 되었는데 바로 나합이었다. 장례 때 백학이 상여를 인도한--이제로 이제로(?__?)의 본관은 전주이다. 겨우 스무 살에 글 짓는 솜씨가 뛰어났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인 석견루 이복현의 꿈에, 붉은 색의 종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종이에 '이제로를 불러 들인다'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복현이 꿈에서 깨어 매우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이제로 역시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이제로가 갑자기 그의 아버지 이복현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자의 운명이 이미 다하여 슬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나이다." 이어서 울먹이며 제 방으로 돌아가더니 조금 지나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상한 향기가 그의 방에 가득하고 느닷없이 수백 마리의 백학이 그 집에 날아와 떼를 지어 쫓아도 떠나지 않았다. 발인하는 날이 되자 사방에 운무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더니만 백학이 상여에 모여 앞뒤에서 인도하기에 백학을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바로 제천 의림지 위의 모산리 뒷산 기슭이었다. 그 산 위에다 널을 멈추게 하였더니 갑자기 운무가 갈라지는 것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기에 드디어 그 갈라지는 곳을 따라 묘자리를 파기 시작하였다. 파 들어가다보니 구덩이 가운데 경쇠돌이 있으므로 두드리자 '공공' 하는 소리가 나기에 일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괭이로 조금 비집고 보니까 그 밑에 두 마리 백학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하므로 엉겁결에 덮어 버렸는데 그 한 마리가 다친 듯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마침내 그 위에다 장례를 지냈다. 그 뒤에 어느 중이 그 묘 아래를 지나다가 그곳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저기가 아주 좋은 묏자리다. 저 곳에 묻힌 이의 손자가 틀림없이 스무 살 전에 옥관자를 두르는 재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정기가 좀 새는 듯한데 꼭 들어 맞을는지?" 그 뒤에 정말로 손자 이인응이 태어나 열 아홉 살에 풍계군의 후사로 출계하여 경평군에 봉하여졌으므로 1품 관원이 되어 옥관자를 두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당시 외척을 비난하였다 하여 작호를 삭탈당하고 먼 섬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왔다. 이인응의 동생 이택응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가 요절하였으니, 그 묘터의 운세와 그 중의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다. 도둑도 감복하여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게 한--홍기섭 홍기섭(?__?)의 본관은 남양이다. 처음에 참봉으로 임명되어 계동의 윗마을에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집에는 네 벽뿐이었다. 어느 날 밤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가 두루 살펴보니 단지 밥솥 한 개가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도둑이 너무 가련하게 여겨 가지고 있던 일곱 꾸러미의 돈을 솥 안에 넣어 두고 가버렸다. 홍기섭은 본래 출입하기를 좋아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로 세수하고 친척과 친구의 집을 두루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비록 가난하게 살면서도 선대로부터 부려 온 여종이 있었다. 그 여종이 홍기섭의 세숫물을 준비하려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안에 돈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마치 누런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종이 기쁨에 찬 소리로 그렇게 된 까닭을 이런 투로 고하였다. "이는 하늘이 불쌍하게 여겨 내려 준 것이 분명하니 우선 땔나무와 식량이며 고기를 사다가 한때 굶주렸던 배를 채워야 하겠습니다." 홍기섭이 이렇게 타일렀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려 준 것이겠는가? 틀림없이 이 돈을 잃어버린 자가 있을 터이니 오늘은 내가 집에 있으면서 동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돌려 주리라." 드디어 대문에다 글을 이렇게 써서 붙였다. "돈을 잃어버린 자가 있으면 찾아가시오!" 해가 질 무렵이 되어 그제 밤의 그 도둑이 동정을 살펴보려고 왔다가 대문에 써붙인 글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집의 여종을 불러 물었다. "이 집이 위 집이오?" 그 여종이 대답하였다. "홍 참봉댁이오." 그 도둑이 또 물었다. "대문에 써붙인 방은 무슨 뜻이오?" 여종이 그 까닭을 상세히 설명하자 그 도적이 물었다. "나으리는 어디 계시오?" 그 여종과 함께 들어가 홍기섭에게 인사를 마친 뒤에 이렇게 여쭈었다. "소인은 도둑입니다. 어제 밤에 밥솥을 훔쳐 가려고 들어와 나으리 집안의 형편을 살펴보고는 도리어 훔친 돈이 있기에 솥안에 넣어 두고 떠났습니다. 그러하오니 나으리께서는 이 돈으로 며칠의 생활 밑거리를 삼도록 하소서." 홍기섭이 대단히 노여워하며 그로 하여금 그 돈을 받아가게 하자, 그 도둑이 거절하며 말하였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양반을 보았습니다. 이 뒤로는 맹세코 도둑질하는 습관을 고치고 나으리 댁의 하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어서 돈을 받아서 가더니만 그 이ㅌ날부터 매일 홍기섭을 찾아왔는데 매우 영리하였다. 이 사람의 집안은 본래 가난하지 않아 자주 급박한 형편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므로 그의 진실된 마음에 감동되어 홍기섭 역시 사양하며 물리치지 못하였다. 뒤에 홍기섭의 손녀가 헌종의 계비가 되고 아들 홍재룡이 익풍 부원군이 되자, 홍기섭의 벼슬도 감사에 이르렀으며 드디어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 도둑의 성은 유씨로 세상에서 유 군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손들에게 대대로 옛날의 정의를 기억하게 하였는데, 그 뒤로도 익풍 부원군 집안의 하인들이 유 군자의 손자를 보고 도둑의 손자라고 놀려 대었다고 한다. 홍기섭은 체구가 작고 야위었지만 외모가 깔끔하였다. 그가 가난에 쪼들릴 적에 가끔 영안 부원군 김조순을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영안 부원군이 평소 남의 상을 보는 지혜가 있어 홍기섭이 귀하게 될 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마침 영안 부원군의 집에 나이 서른 살이 안 된 과부인 침모가 있었다. 그는 인물도 반반한 데다 집안 형편 또한 넉넉하였으므로 영안 부원군이 그를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어느 날 영안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몸 단장을 화려하게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그의 집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홍기섭이 오기를 기다려 잘 꾸민 안장을 푸른 갈기의 당나귀 등에다 얹고 나이 어린 상노를 시켜 홍기섭에게 당나귀를 타도록 권하게 하였더니, 홍기섭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상노가 대답하였다. "아무 곳의 경치가 뛰어나서 구경하실 만하기에 아무아무 영감 나으리께서도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좌우에서도 떠나기를 권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를 그럴 듯 하게 속인다는 것이다. 드디어 당나귀를 타고 떠나서 어느 곳에 이르니 몇 칸의 초가집이 깨끗이 정돈되어 먼지 한 점 없었다. 상노가 말에서 내리기를 고하기에 홍기섭이 말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묘령의 여인이 구름같은 머리칼을 살그머니 반쯤 들고 마루에서 내려와 영접하여 들이거늘 홍기섭이 드디어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평생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로군." 소매를 털고 돌아오려고 하였더니, 그 여인이 두세 번 들어가기를 권하는데 흰 벽과 깁으로 바른 창문 등이 매우 범절이 있어 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차와 과일을 올리면서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소녀가 나이 젊은 과부로 재가하려고 하여 나으리의 높은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첩이 되어 섬기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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