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섭이 대답하였다. "나는 본래 가난한 데다 처자가 딸려 있어 식구가 모두 십여 명이 되므로 거친 음식도 잇대기 어려운데 네가 나의 첩이 된다면 무엇을 먹고 살아가겠느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으리에게 딸린 가족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첩에게 조금의 자산이 있사오니 구제할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소서." 홍기섭이 강직하기는 하나 평소 가난에 쪼들려 마음이 상하였던 터라 못이기는 체 허락하고 몇 해 동안 함께 살면서 의지하는 바가 많았다. 그 뒤 홍기섭이 영안의 예측대로 현달하게 되자 그 연인도 함께 복을 누리면서 오래도록 살았다. 용호영의 장교를 곤장으로 다스린--임익상 임익상(?__?)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경문, 호는 현계다. 헌종 때 용호영을 새로 설치하여 정벌에 관한 일을 논의하게 하자, 거기에 소속된 장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는 자가 많았다. 임익상이 금천 수령으로 재직할 때 용호영의 장교가 무슨 일로 금천 고을에 와서 평민들을 침탈하고 사납게 굴므로 임익상이 몹시 화가 나서 곤장으로 그 장교가 분을 품고 돌아가 그의 대장에게 보고하자, 그 대장이 곧장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듣고 매우 좋아하면서 말하였다. "용호영은 내가 직접 설치하게 한 것이다. 소속 장교들이 폐단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짐작은 하였지만 어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제 임익상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장교를 해임시키고 대장에게는 부하들의 그런 행위를 금지시키도록 엄중히 문책하였다. 그리고 임익상을 불러다 근밀한 자리에 배치하려고 하였더니 어느 재상이 이렇게 아뢰었다. "임익상에게는 심장병이 있으므로 전하를 가까이서 뫼실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그를 바로 안주 목사에 임명하여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임익상은 평소 간질이 있어 그 병이 발작할 때면 의관을 바로하고 꿇어앉아 두 손을 꽉 쥐고 이를 깨물며 진정시키는데, 상하의 치아 사이에 베 조각을 넣어두어 이를 깨무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발작이 멈추면 그 베 조각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병이 발작하지 않아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동안에 몇 차례 발작할 때가 있는데 그 때는 항상 똑바로 앉아 그 고통을 혼자의 힘으로 정말로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으므로 세상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그런 병이 있는 줄도 몰랐다.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을 보고 운명을 점친--임치종 임치종(?__?)은 의주에서 살았는데 젊어서 몹시 가난하여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다. 의주의 풍속에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게 되면 임금은 주지 않고 5년 또는 10년이 지날 경우 상점 주인이 몇천 금의 자본을 대어 고용당한 사람에게 문상이 되도록 하였다. 그 당시는 조선과 중국이 서로 통상은 하지 아니하고, 사신이 왕래할 때 비로소 국경의 관문을 열어 조선 상인과 중국 상인들끼리 서로 물건을 교역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가리켜 문상이라고 하며, 자본금에 해당하는 이익금은 모두 고용한 사람의 소득으로 되돌려 주게 된다. 이렇게 한 뒤로는 자립해서 주상이 되는 그런 풍습이었다. 임치종이 마흔 살에 처음으로 문상이 되어 저자 거리에 나갔더니 한 곳에 청루(기생집)가 있는데, '만금루'란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장사꾼이 대답하였다. "새로 나온 기생의 미모가 당대에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데 만금을 내놓아야 한다오. 그래서 중국의 부자 상인이라 하더라도 그 기생과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정도라오." 그 말을 들은 임치종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조선 사람으로 만약 이 기생에게 선수를 쳐서 친하게 될 것 같으면 중국 사람의 콧대를 꺾어 놓을 수 있겠군.' 마침내 많은 재산을 털어서 그 기생에게 주고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아니 하였다. 그랬더니 돌아올 때가 되자 그 기생이 그의 성명을 물었다.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임치종을 보고 고향 사람들은 비웃었다. 몇 해를 사는 동안 너무나 가난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날의 그 기생이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아내가 되어 장사꾼을 통하여 임치종의 행방을 널리 수소문하였다. 마침내 어렵게 사는 그를 찾아내어 10만 금을 주고 장사를 하도록 권유하여 임치종도 끝내 1백만 금을 소유하게 되는 거부가 되어 그의 호기와 명성이 온 나라에 알려지고, 드디어 벼슬이 곽산 군수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에게는 지혜가 있어서 도모하는 일은 틀림없이 이룩하였으며, 또한 계획을 잘하여 그 당시만 해도 전신과 우편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천리 밖에까지의 돈 운반을 잘하였고, 타고난 기개도 호탕하여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호걸로 알려졌다. 어느 날 은덩이를 뜰에다 내놓고 바람을 쐬며 햇볕에 쬐고 있는데, 가난하게 사는 어떤 사람이 그 많은 은덩이를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자, 임치종이 서슴없이 한 덩이를 집어 주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었더니,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나도 옛날에는 놀라던 사람처럼 가난했던 신세였는데 어찌 동정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의 호걸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그 무렵 충주 어느 아전이 관아의 돈을 횡령하여 축을 내었는데, 임치종의 소문을 듣고는 그를 속여 돈을 뜯어내려고 찾아가 말하였다. "아무개는 충주에 살고 잇는 사람으로 농사가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구휼할 방법이 없기에 그대에게 1만 전을 꾸어가려 하는데 꾸어 주겠소?" 임치종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하였다. "꾸어주리다. 하지만 여기서 충주까지는 1천 3백 리나 되는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운반하려 하오?" 그 아전이 말하였다. "인부를 교대로 바꾸어 가면서 운송할 것이오." 임치종이 비웃으며 대꾸하였다. "그대가 어찌 나를 속여가며 포탈한 돈을 채우려 드는가?" 그 아전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사죄하였다. "정말 그대의 말과 같이 그대를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허나 그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오."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지금은 2월이라 만약 그 돈을 인부를 교대로 바꿔가며 운송한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4월이라야 찾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고 말 터인데, 어찌 내가 그대가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을 모르겠소. 그리고 또 지금은 돈을 운반하는 일이 아주 어려운데, 내가 그대에게 선뜻 돈을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허락했을 적에 그대가 돈을 운반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그대가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 아전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대는 빨리 운반하는 계책이 있소?" 임치종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의 돈이 전국에 두루 퍼져 있어서 1만 전쯤 운반하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소." 이어서 그 아전에게 1천 전을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비록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천 리나 되는 험하고 먼 길을 찾아왔는데 그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요." 그 아전이 사례하고 떠났다. 임치종이 또 닭을 기르는데 직접 모이를 줘가며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병아리들이 뜰에서 모이를 쪼면서 쫑쫑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나타나 그중 한 마리를 낚아채 가버리자 임치종이 집안 사람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내가 멀지 않아 죽을 것이니 서둘러서 장부를 정리하도록 하여라." 집안 사람들이 놀라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십수 년 동안 지내오면서 나를 해롭게 하는 상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솔개가 병아리를 낚아채 갔으니 운수가 장차 쇠퇴해질 것이고 운수가 쇠퇴해지면 내가 죽게 된다." 과연 임치종은 자신의 말대로 몇 달 만에 죽었다. 임치종이 그의 손자가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없음을 알고 천 석 정도의 토지를 궁궐에 맡겨 미리 부탁해 두었는데, 갑오개혁 뒤에 황실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그 토지를 그의 자손들에게 되돌려 주어 그 집안의 넉넉함이 옛날과 같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임치종에게 미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서지방에 발길을 끊었던--김삿갓 김병연(1807__1863)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심, 호는 난고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선천 부사로 있으면서, 순조 12년(1812)에 관서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역적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가 마침내 형법으로 처형되고, 그의 집안은 그 사건으로 폐문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병연은 스스로 하늘과 땅 사이의 죄인이라고 여겨 감히 태양을 쳐다볼 수 없다고 하여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는 특히 공령시(과거 볼 때 쓰는 시체)를 잘하기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그가 일찍이 관서지방을 유람하였는데 관서에 노진이란 사람 역시 공령시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삿갓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김삿갓을 쫓아보낼 생각으로 김익순을 비웃는 시를 지어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가 지은 시 가운데 더욱 김삿갓의 집안을 잘 비유하여 표현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국록을 받았던 선천부사 김익순아 정시는 벼슬이 가산군수에 불과했어 집안은 장동 김씨로 으뜸가는 명문이고 이름은 장안에서 떨치는 순자 항렬일러라 장군의 말 없는 긍지는 농서에서 항복하므로 추락하였고 열사들의 공명은 능연각 초상화 끝에서 빛나도다 김삿갓이 이 시를 보고 가져다 큰 소리로 한 번 읊고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이어서 피를 토하고 나서 다시는 관서지방의 땅을 밟지 않았다. 그가 늘 황해도를 왕래하였는데, 그의 구월산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갔고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게 되어 해마다 구월이면 구월산을 지나게 되니 구월산 빛은 언제나 구월일레라 기상이 크고 의분에 북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다가 세상을 풍자하는 수 없는 시문을 남기고 어느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의주에서 꿈에 선조대왕을 본--임백수 임백수(1797__?)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치호이다. 순조 25년(1825)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조상의 공덕으로 세자 익위사의 부솔에 보임되었으며, 헌종 5년(183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동지 부사의 중책을 맡아 의주에 도착하였으나 병이 자주 위독해서 압록강 건너는 날짜를 세 차례나 물리기까지 하였다. 하루는 그가 목침을 베고 누워 그의 셋째 아들 임경준에게 말하였다. "내가 꿈에 선조대왕을 배알하였더니, 당시의 명망이 대단했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모두 대왕을 뫼시고 서 있었는데, 대왕의 말씀은 온순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울리는 듯하여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오히려 귀에 남아 있으니, 이것은 그저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다. 기록하여 두도록 해라." 임경준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임백수가 갑자기 일어나 두건을 씻고 띠의 먼지를 털어낸 뒤 가마를 타고 곧장 취승정으로 갔는데, 그곳은 바로 선조대왕께서 잠시 머무신 곳이었다. 임백수가 며칠 동안 병으로 앓으면서 누워만 있었던 터에 갑자기 이런 우발적인 행동이 있었으므로 좌우에서는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번갈아가며 찾아가 중지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고 말았지만 모두들 그의 기력이 손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런 탈도 없이 돌아왔고 이튿날은 그대로 병을 참으면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의 병이 점차 회복되는 것이 마치 신명이 돕는 듯하였느니, 어찌 선조대왕의 혼령이 그에게 이르렀던 탓이 아니겠는가? 그 뒤 임백수가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탄핵한 이로 평안도 중화군에 귀양 가서 주 첨지의 이웃집에 붙어 지내다가 한달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5년 전의 꿈에, 어느 곳에 이르러 판서 신석우, 조석우와 함께 셋이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는데, 꿈에서 깨어났어도 너무나 또렷이 기억이 되기에 그 연유를 몰랐더니만 이번에 주 첨지의 집에 가서 보니 문이며 대청이 영락없이 꿈속에서 두 분의 판서와 이야기하였던 그곳이었다. 모든 일은 다 까닭이 있어 정해지는 법이니 남을 탓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의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봉조하가 되었다. 필명은 천하에 떨쳤으나 운명이 기구했던--김정희 김정희(1786__1856)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 호는 완당 또는 추사이다. 순조 9년(180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0년 뒤인 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가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번암 채제공이 그 집 앞을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더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참판은 바로 추사의 아버지였다. 채제공이 김노경의 집안과는 대대로 전해오는 혐원이 있어서 서로 만나지 않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떠나 특별히 그 집을 방문하자, 김노경이 몹시 놀라며 말하였다. "각하께서 어인 일로 소인의 집을 찾아주십니까?" 채제공이 대답하였다. "대문에 붙여 있는 글씨는 누가 쓴 것이오?" 김노경이 응대하였다. "소인의 아이가 썼습니다." 채제공이 말하였다. "이 아이가 틀림없이 명필로 한 시대에 명성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기필코 그 아이의 운명이 기구해질 터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해서는 안 되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존귀하게 될 것이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조진관(조엄의 아들)이 광주 부윤으로 있었는데 관할 지역 내인 남한산성의 군량미를 향리가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그 책임자로서 파직된 일이 있었다. 김정희가 비록 명필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하였지만 익종(헌종의 아버지)이 조진관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세자빈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듣고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장리의 손녀를 어찌 한 나라의 국모로서 모범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로 조정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결국 이 사건 때문에 김정희도 제주도로 귀양 가서 10년을 지내고서야 돌아와 벼슬이 겨우 참판에 이르렀으나 후사가 없었다. 노루가 간 길을 따라가서 사형을 면한--이인응 이인응(?__?)의 본관은 전주이다. 인조의 동생인 능원 대군의 후손이다. 상계군(이담)의 후사로 입양하여 이름을 호로 고치고 경평군에 대물림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철종 11년(1860)에 외척을 비난한 사건으로 귀양 가게 되어 작호가 환수되고 본 이름인 이세보로 불리다가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나서 조선조 왕실 및 그 일족의 족보를 통합할 때 이름을 인응으로 다시 고쳤다. 처음에 이인응의 동생 이택응이 철종 때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에 임명되었으나, 그 당시 외척으로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부당하다고 아뢰고 탄핵함으로써 그 특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러자 철종이 크게 노여워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무서워 떨 정도로 대단해지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인응이 그의 동생 이택응을 위하여 임금에게 몰래 호소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겨, 일제히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다. 신하들의 집단 행동에 몹시 놀란 임금이 여러 차례 타이르는 유시를 내렸으나 그들은 도성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대간의 공론은 잇달아 발의되어 이인응을 만약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매우 격렬하게 탄핵하자, 임금도 어쩔 수가 없어서 이인응을 신지도에 귀양 보내고 위리안치하게 하고 소나무를 베어다 그 집 앞에 심게 하였다. 그런데 그 베어다 심은 소나무가 모두 살아나 잎새가 푸르디 푸르고 그 이듬해 봄에는 송화가 활짝 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 뒤 4년 만인 철종 14년(1863)에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다시 임금에게 이인응을 잡아다 국문하기를 권하고 이어서 사약을 내리도록 명하게 하여 금부도사가 이인응을 결박하여 호송하는 도중 천안 지역의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노루 한 마리가 샛길로 넘어가거늘 이인응이 도사에게 청원하였다. "방금 노루 한 마리가 샛길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좋은 징조인 듯하며, 이 쪽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 같으니 이 길을 따라서 가게 해 주시오." 도사가 그 길로 가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사약을 가지고 내려 온 금부도사는 큰길을 따라갔었기 때문에 길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그럭저럭 과천읍에 이르니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인응의 신병이 갑자기 발작하여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도사가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 가도록 하였는데, 그날 밤에 철종이 승하하고 이튿날 그를 용서하는 왕명이 내려 마침내 사형을 모면하고 곧바로 차례를 뛰어넘어 당상관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고 승록대부로 승진하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 뒤 고종 32년(1895)에 명성왕후의 참변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자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홍순목 홍순목(1816__1884)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희세, 호는 분계이다. 헌종 10년 1844)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6년(1869)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항상 근신하는 자세로 자신의 지조를 지켜 고인의 풍도가 있었다. 그에게 영식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처음 태어날 적에 피가 묻어 있는 태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태어났으므로 홍순목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그 아이를 키우지 않으려고 하자, 집안 사람들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마음이 풀려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종 10년(1873)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규장각 직각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갑신정변을 주도하는 개화당의 핵심 인물이 되어 활약하던 중 실패로 돌아가 위병에게 살해되었다. 홍순목이 그 비보를 듣고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지만 곧바로 그의 관작도 삭탈되었다. 홍영식의 형 홍만식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생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살해당하였고 아버지마저 자결하였다. 그 자신도 자진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지만 폐인으로 자처하였는데, 갑오개혁 뒤에 모두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을 마시고 자결하여 시호가 내려지고 벼슬이 추증되었다. 외국과의 개방과 통상 논의를 맨 먼저 꺼낸--박규수 박규수(1807__1876)의 본관은 반남이고 자는 환경, 호는 환재이다. 헌종 14년(1848)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9년(1872)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의 조부는 연암 박지원으로 문장과 재학이 한 시대에 칭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홍국영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피하여 금천에서 살았다. 얼마나 뒤에 홍국영이 패망하자 그제야 벼슬길에 나서기는 하였지만 천문, 지리, 병법, 농업 그리고 경제에 대한 학술과 서양의 학문까지 환하게 알았던 그의 지위는 군수에 그치고 말았다. 어쨌든 그런 연암의 손자 박규수도 소년 시절에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더욱 높아 계동에 살 적에 익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변장을 한 차림으로 그를 찾아가자 그 일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가 평안 감사로 있을 적에 미국의 배가 삼화항에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민심이 놀라 동요할까 겁이 나서 하루 종일 연광정에서 풍악을 울리게 하면서, 미국의 배를 얕은 여울로 유인하여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11년(1874) 이후에 이르러서는 박규수가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변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외국과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여야 한다는 논의를 처음으로 제기하자,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떠들며 그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뒤인 고종 13년(1876) 병자년 6월 20일에 이르러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부대신 이노우에와 조선 대신 신헌, 부대신 윤자승이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박규수가 주선한 힘이었다. 그리고 또 일본에 통상사절을 보내도록 임금에게 주청하여 참판 김기수를 선발하여 보냈으며, 또 조선의 신진 문관으로 재능과 명망이 있는 18명을 뽑아 일본에 보내어 실정을 시찰하게 하였다. 그의 지위가 정승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계동에 있었는데, 가난한 선비의 생활과 같았으며, 뜰앞에 한 그루의 키가 작고 가지가 가로로 뻗어서 퍼진 소나무만 있어 박규수의 청렴한 풍채를 연상하게 하였다. 그가 평안 감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집안 사람이 절약해서 쓰고 남은 재물로 3백 석을 수확할 수 있는 정도의 토지를 사들였는데 박규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땅 주인의 마음이 고약하여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긴 토지를 이중으로 팔아먹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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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자 앞서 토지를 사들인 자가 박규수에게 호소하였더니, 박규수가 말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대의 전토인데 우리 집에서 잘못 사들인 것이네." 그 토지 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