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9편 (19/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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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9편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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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는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니 한 가지를 거론하여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격이다.
만일 임금이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바른 논의를 듣기 싫어 한다면 누가 기꺼이 바른 말을 발설하여 화의 함정으로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헌이다.
영월군수가 되자 단종의 신위를 설치하여 괴상한 변고를 없앤 김륵 김륵(1540-1616)의 본관은 예안이고, 자는 희옥, 호는 백곡이다.
퇴계에게 글을 배웠다.
명종 19년(156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홍문관의 청환직을 지냈다.
어느 날 차자를 올려 임금의 덕성이 매우 절실함을 논하였더니, 임금이 그를 앞에다 불러 놓고 책망하였다. "그대가 나더러 영민하고 슬기로움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 처리하는 일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임금이 더욱 노여워하다가 깨닫고서 신하를 통하여 김륵에게 사과하고 술을 하사하면서 그 자리를 파하였다.
동왕 17년에 영월군수가 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영월군에 괴상한 변고가 있어 수령이 부임하였다가 번번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맨 먼저 용기를 가지고 그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노산군(단종)의 묘를 찾아 배알하고 신위를 설치하여 송 부인(단종 비 송씨)을 배향하게 하고는 제수와 예물을 갖추어 정성스럽게 받들었더니 3년 동안 영월군에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는 영남 안 집사의 명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헌이 되어 국가를 부흥시키는 열 여섯 가지의 계책을 진달하였다.
그 후 영천의 귀학정으로 은퇴하여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77세에 죽었다.
무뢰배 생활을 청산하고 훌륭한 학자가 된 이항 이항(1499-1576)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항지, 호는 일재이다.
타고난 기상과 용력이 범상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장난할 때에 동리 아이들이 겁을 내어 굴복하였다.
자라서는 놀기를 좋아하며 협기가 있어 만 리를 달리려는 뜻이 있었고, 씨름, 활쏘기, 말타기에서는 한 패의 으뜸이어서 억센 적과 주인을 배반한 종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그들을 눌러 이겼다.
무과 준비를 하면서 남치조, 남치근, 민응서 같은 무리와 서로 어울려 따르니 사람들이 미치광이로 지목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비상한 사람임을 아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달이 휘영청 밝은 깊은 밤에 남대문에 올라가 기와가 덮인 처마 끝부분을 잡고 나는 듯이 몇 바퀴 돌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친구 남씨가 과실로 사람을 죽여 의금부의 관원이 시체를 검사하는데, 이항이 주위의 사람들을 헤치고 시체를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로 느닷없이 들어가 시체를 움켜쥐고 나는 듯이 달아나 강물에 던져 버리고 그날로 비호같이 달려 전라도 관찰사를 찾아가 뵙고서 그날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였다.
한편 시체를 조사하던 관원은 갑자기 시체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이 아무개가 한 짓임을 들어서 알고는 호남에다 파발을 띄워 체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항은 그날 전라도 감영에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가 이렇게 회보하여 이항과 연루된 자들이 모두 모면할 수 있었다.
대체로 그의 뛰어난 용맹이 이와 같았다.
30세 이르러 그의 백부가 경계하는 말을 듣고 즉시 뉘우치며 반성하여 그 자리에서 같이 어울리던 무리들과 사절하였다.
그리고는 '대학'을 소매 속에 넣고 도봉산 망월암으로 가서 마음을 단단히 하고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큰 유학자가 되었다.
그 뒤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언관으로 훌륭한 계책을 진언한 것이 많았다.
임금이 진언하는 것마다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차례를 뛰어넘어 임천군수에 임명하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장령에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집쟁이 선비 최영경 최영경(1529-1590)의 본관은 화순이고,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이다.
처음 남명에게 배우기를 청할 적에 당시 국상중이었으므로 죽순을 예물로 바치고 와서 제자가 되었는데, 남명이 한번 보고 그를 특이하게 여겨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라고 마음을 허락하였다.
최영경은 청렴하고 깨끗함이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그는 의로운 일이 아니면 털끝만큼도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가산을 기울여서 장례를 지냈으므로 마침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의 집이 성중에 있었으나 남과 교제하기를 일삼지 않아 그를 아는 자가 별로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쟁이 선비'라고 하였다.
안민학이 처음으로 방문하였다가 그 말을 듣고 그에게 특이한 점이 있음을 알고 성혼에게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특이한 인물이 있었는데도 몰랐다가 지금에야 서로 알았으니 어떻게 가서 보지 아니하겠소" 성혼이 성중에 들어와서 일부러 찾아가 문을 두들기니 한참만에 맨발의 어린 여종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뜰에는 방초가 가득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최영경이 나오는데 베옷에다 떨어진 신을 신은 궁색한 차림이기는 하지만 그 얼굴은 위엄이 있어 보이고 정중하여 남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한 점의 속된 티가 없었으므로 성혼이 매우 좋아 하였다.
그가 물러 나와서 백인걸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무개를 보고 돌아올 적에 홀연히 맑은 바람이 소매에 가득함을 깨달았다" 백인걸도 크게 놀라고 특이하게 여겼으며,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사림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러다가 선조 6년(1573)에 뛰어난 행실로 추천되어 6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 8년 뒤에 지평으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차 동왕 22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조금 있다가 풀려났는데, 대간의 계달로 재차 체포되어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윤원형의 패망을 미리 안 박사종 박사종(1513-1579)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공계, 호는 읍청인데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로지 실천하는 데 힘을 썼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항상 천장을 쳐다보고 탄식할 뿐 세상에 나아갈 뜻은 없었으며, 비록 강호에 머물기는 하였지만 세상일을 잊지는 않았다.
조정의 정치가 온편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으면 하루 종일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였으며, 만년에 봉사(밀봉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 열 조목을 올렸는데, 내용이 모두 절실한 것이었다.
어느 날 고래 한 마리가 한강을 지나다 어부에게 잡힌 일이 있음을 듣고 말하였다. "바다에서 강으로 왔으니 이는 고기가 떠난 것이다.
고기가 떠나서 죽는 곳으로 나아간 격이니 윤원형이 모면 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이듬해에 윤원형이 패망하였다. "수십 년 뒤에 국가가 반드시 어려움이 많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예언하고 군사에 관한 책을 널리 읽으며 마치 장차 난리를 평정할 듯이 하였다.
비록 난리 전에 죽기는 하였지만 그의 말은 징험이 되었다.
선조 15년(1582)에 학문과 덕행이 순수하고 올바르다는 것으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였다가 사직하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었는데, 67세였다.
시문을 지어 소도둑을 석방하게 한 옥봉 옥봉 이씨는 첨지중추부사 조원의 첩이다(조원은 본관이 임천인데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호는 운강이다).
어느 시골 마을의 아낙네가 그의 남편이 억울하게 소를 훔친 혐의로 구속되어 있었으므로 관아에다 탄원서를 올리는데 옥봉 이씨가 그 탄원서의 끝에다 이렇게 써 주었다. "첩 자신이 베를 짜는 직녀가 아닌데 낭군이 어찌 소를 몰고 가는 견우이겠습니까" 고을의 수령이 그 글을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고 마침내 석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여강으로 떠나는 것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신륵사 앞엔 안개낀 물결 일렁이고 청심루 가에는 눈 속의 달 밝구려 또 어떤 사람이 찾아준 데 대하여 고맙게 여긴 시를 읊었다.
음수는 음률을 좋아하던 탁문군의 집이고 청산은 시 잘하던 사조의 움막이네 뜰에 빗속의 나막신 흔적 남았는데 문에는 눈 가운데 나귀가 왔구려 음수는 바로 그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또 노산군 묘에도 시를 지었다.
닷새는 서울에서 사흘은 영월에서 애처로운 노랫소리 노릉 위 구름 속으로 잦아드네 첩의 몸 또한 왕손의 딸이라 이곳의 두견새 울음 차마 듣지 못하겠네 소나무를 심어 관을 만든 박계현 박계현(1524-1580)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군옥, 호는 관포이다.
늘그막에 어린 소나무를 정원에다 심었더니 어떤 손이 장난 삼아 말하였다. "소나무 심어 장자 짓는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는데 이렇게 어린것을 심어 무엇하려 하오?" "내가 죽으면 널 재목으로 쓰려고 하오" "그때는 내가 응당 조문객이 될 것이오" 그 손이 응수하자, 곁에 있던 목공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소인이 그때 널을 만들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오는 날의 나막신 구실을 한 정사룡 정사룡(1491-1570)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운경, 호는 호음이다.
시문은 잘하면서도 경학을 익히지 않아 응교로 있으면서 매번 임금 앞에 나아가 글을 강론할 때를 당하면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차라리 열 번 중국 학질에 걸릴지언정 한 차례 경연에 나가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정사룡이 홍주목사 시절에 사달정을 짓고 그곳에서 날마다 시 읊는 것을 일삼으며 영을 내려 주민들 가운데 소송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살아 있는 메추라기를 갖다 바쳐야만 사건의 심리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어떤 주민이 소송을 하려고 관아의 문에 이르자 메추라기가 죽어 벼려 문지기가 받아 주지 않으므로 주민이 관아에 들어 가서 소송을 하였지만 정사룡이 허락하지 않고 내쫓아 버렸다.
중종 32년(1537)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올 때 소세양은 원접사가 되었고, 정사룡은 가선대부로 평양 영위사가 되었다.
그런데 공 사신의 문장이 광대하여 연로에서 지은 작품이 먼저 조선에 퍼졌다.
조정 의논이 모두 소세양이 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소세양이 의주에 있으면서 병으로 사임하고, 정사룡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나를 비오는 날의 나막신으로 삼는구나" 정사룡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평상시에는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활용함을 이르는 것이었다.
주인의 원수를 갚은 유관의 여종 갑이 유관(1484-1545)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관지, 호는 송암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즉위년(154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이다.
을사사화 때에 억울하게 죄를 받았는데, 정순붕이 유관을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터무니없이 얽어서 위조된 공훈을 공신녹권에 기록하려고 도모하니, 유관의 가속 및 종들은 모두 몰수되어 정순붕 집안의 노비가 되었다.
그 가운데 갑이란 이름을 가진 여종이 있었는데 나이 겨우 14, 5세쯤 되었으며 총명과 지혜가 뛰어났다.
정순붕이 매우 아끼며 어여쁘게 여겨 의복과 음식을 마치 어미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주었다.
그러자 갑이 또한 정순붕이 생각하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비위를 맞추며 일마다 정성을 다하고 매번 옛날 주인에 대한 말이 나올 적마다 반드시 헐뜯으며 욕하였다. "저들이 항상 나를 구박하면서 인색하게 대했으므로 내가 그 때문에 설움을 갚는 것이다" 정순붕이 더욱 그를 신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이가 값진 그릇을 숨겼다가 들켰다.
정순붕이 갑이에게 힐문하자, 갑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제가 이곳에 와서 주인이 주는 옷을 입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며 은혜와 대우가 견줄 데가 없는데 무엇이 괴로워서 물건을 훔치겠습니까?" 정순붕이 의심을 하면서도 그를 풀어 주었다.
이보다 앞서 갑이가 그 집의 젊은 종과 정을 통하고는 그 종에게 말했다. "주인이 만약 나를 다그치면 회초리의 독을 견디지 못하여 장차 너를 끌어들여 증거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내가 액땜을 하려고 하니 반드시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팔이나 다리를 구해 가지고 오라" 종이 갑이의 말대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팔 한쪽을 잘라다 주었다.
그러자 갑이가 정순붕의 베개 속에다 몰래 잘라 온 팔을 넣어 두어 얼마 안 가서 정순붕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 뒤에 정순붕의 집안에서 그 사실을 알고 조사를 하자 갑이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너희들이 우리 상전을 죽였으니 바로 나의 원수이다.
내가 죽으려고 한 지가 오래였는데 이제 원수를 갚았으니 죽을 곳을 알았다.
그런데 무엇을 물으려 하는가?" 갑이는 마침내 곤장을 맞고 죽었다.
하인에게 거지 사윗감을 골라 주고 뒷일을 부탁한 이준경 이준경(1499-1572)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원길, 호는 동고이다.
중종 17년(152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9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준경은 몸가짐이 청백하고 검소하며 기국이 방정하고 엄격하였으며 후덕과 중망이 평소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러나 후배들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당시에 미움을 받기는 하였는데, 정승으로서의 업적을 말한다면 이준경이 제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 신씨가 입으로 '대학'과 '효경'을 가르치면서 늘 타일렀다. "과부의 자식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기를 남보다 열 배나 더하여 옛날의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라" 이준경이 그의 형 정헌공 이윤경과 어머니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종형인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학문에 힘을 썼다.
어렸을 적에 남명 조식과 산중에서 같이 글을 배우면서 장난을 칠 때면 항상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자신을 기약하였으며, 남명에게는 "너는 바위굴에서 말라 죽을 인물이다"라고 놀렸다.
이준경이 정승이 되자 남명이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 "바라건대 공은 위로 솟기를 소나무와 같이 하여도 아래로 뻗기를 칡넝쿨과 같이 넝쿨지지 마시오" 이준경이 동부승지였을 때에 홍섬이 도승지였다.
홍섬이 일찍이 이름난 기생 유희를 가까이 했었는데, 유생 송강 역시 유희와 정을 맺어 매우 가까이 지내는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홍섬이 승정원에서 여러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송강이 죽었다.
나와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는데도 먼저 죽어 곤궁하고 통달한 것이 같지 않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이준경이 그 말을 받았다. "도승지 영감께서도 유희를 사랑하였고 송강 역시 유희를 사랑하였으니 운명이 같을 뿐 아니라 행한 일도 같지 않습니까?" 여러 승지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고 여러 서리들은 놀라 눈을 휘둥거리며 그전에 없었던 큰 변고라고 하였다.
승정원 고사에 여러 승지들은 도승지를 공경하여 감히 농담을 하지 못하며, 불경한 자는 벌연을 베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준경의 집에서 벌연을 베풀기를 무릇 일곱 차례를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준경은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 하여금 이 일 때문에 가산이 거덜난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실마리가 너무나 멋지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경의 집에 피성을 가진 하인이 있었는데, 사람 됨됨이가 조심성이 있었으므로 이준경이 그를 매우 아꼈다.
그런데 그 하인이 늘 이준경에게 청원하였다. "소인에게는 단지 딸자식 하나밖에 없으니 장차 좋은 사람을 데릴사위로 맞아다 늘그막에 의탁했으면 합니다.
대감께서 신랑감을 골라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준경이 대궐에서 돌아와 피성의 하인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너의 사윗감을 얻었으니 빨리 불러오는 것이 좋겠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성부 앞에 어떤 총각이 거적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다" 피씨 하인이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으므로 정승의 명령이라 하면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 총각이 말하였다. "정승은 어떤 벼슬이며 나를 불러다 무엇을 맡기려 하시오?" 총각이 굳게 거절하며 오지 않으므로 피씨 하인이 따라왔다.
위협하고 공갈을 쳐보았지만 만 마리의 황소 같은 고집을 돌리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사실을 돌아와 고하였더니 이준경이 말하였다. "그 사람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리라는 것을 나도 알았다" 다시 문을 지키는 하인 몇 명을 보내자 그제야 심부름간 이준경이 총각에게 물었다. "장가 들고 싶으냐?" "장가는 들어 무엇합니까" 이준경이 여러 번 타이르고 권하자 억지로 허락을 하니, 이준경이 기뻐하며 하인에게 일렀다. "내일 혼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기회를 잃게 된다" 하인이 곁에서 그 총각을 보니 남루하고 멍청한 모습이 바로 누더기를 걸친 거지 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놀랍고 괴상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가 그의 머리를 빗기고 몸을 씻게 한 뒤 새 옷을 내주었다.
이튿날 초례를 치르는데 온 집안 사람이 코를 가리며 웃어대었지만 그의 사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한번 처가살이를 한 뒤로는 두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잠자는 것을 일과로 삼아 문밖을 엿보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자 집안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므로 그의 아내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대감께서 찾아오실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까 문 밖에서 갑자기 고관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의 잡인 통행을 통제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대감이 찾아와서 곧장 방으로 들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늘의 운수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인의 사위가 대답하니 이준경이 말하였다. "이 뒤의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긴다" "재능을 인정해 주시고 대우하여 주시는 은혜를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다만 앞으로의 일의 형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찰할 것이며 결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몇 마디 주고받고 하다가 대감이 떠나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며 그제야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이때부터 앞서보다 대접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 하인이 이준경의 처소에서 돌아오자 그의 사위가 말하였다. "옷을 벗지 말고 다시 빨리 가셔서 대감께서 세상을 떠나시는데 임종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가? 내가 방금 대감을 뵈었더니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면서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으셨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긴 말씀 마시고 빨리 가십시오" 하인이 다시 가서 뵈었더니, 이준경이 바야흐로 수건으로 낯을 닦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가 겨우 눈을 떠서 하인을 보고 말하였다. "네가 어떻게 알고 갔다가 곧장 왔는가?" "쇤네의 사위가 말해 주었으므로 오기는 하였습니다만 어떻게 해서 병환의 진행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도록 위독해지셨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너의 사위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너는 그가 하는 말은 굽혀서 따르고 어기지 말라" 이 말을 마치고 이준경은 세상을 떠났다.
이준경의 다른 호는 남당 또는 청련거사라고 하였으며, 74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선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요망한 중 보우를 죽인 변협 변협(1528-1590)의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화중, 호는 남호이며 명종 3년(1548)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파주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율곡 선생을 찾아가 '주역'과 '계몽'을 강론 받고 오묘한 진리를 홀로 터득한 것이 많았으며, 천문, 지리, 수학, 산학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매우 깊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의 10여 군을 순찰할 때에 눈에 한번 거치면 산천의 도리와 형세를 모두 알아 구도를 살피면서 지시를 하는데 돌 하나 개울 하나도 분명하여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또 일찍이 병영의 군부를 열람하는데 한번 보고서 그 이름을 죄다 기억을 하니 사람들이 신통하게 여겼다.
선조 17년 무렵에 천문을 관찰하며 태을을 추산해 보고는 자질에게 말하였다. "10년을 못 가서 국가가 또 병란의 괴로움을 겪겠다" 이 말은 뒤에 모두 징험이 되었다.
변협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요망한 중 보우가 제주에 귀양오자 변협은 다른 사건을 가지고 곤장을 쳐서 죽이니 유림들이 통쾌하게 여겨 간혹 편지를 보내어 칭하하면 그때마다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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