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정화상이 절굿공이로 솥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읏!" 복청양의 신형이 휘청했다.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비어오며 귀에서 수만 개의 징이 일시에 소리를 내는 것 같다. '흐흐…… 네놈이…….' 동정화상은 그런 복청양을 보면서 계속 동솥을 두드렸다. 굉굉굉 소리가 울려퍼짐에 따라 복청양은 비틀거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는 피가 흘러나왔다. 몸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연신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굉 "크윽!" 복청양이 마침내 입에서 선혈을 뿜어내며 휘청했다. "흐흐…… 가거라!" 동정화상이 절굿공이와 동솥을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수에서 황금빛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수기공. 동정화상이 자랑하는 절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맞서 복청양도 두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덮쳐옴을 깨닫고 혼신의 힘을 다해 거기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왼손은 흐릿한 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오른손에서는 회색빛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천산오조의 양대절기인 회현잠영권(回現潛影拳)과 기록장(奇鹿掌)을 동시에 펼치고 있는 것이다. 급한 김에 십이성의 공력을 끌어올렸건만, 그의 장(掌)과 권(拳)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무형의 기세가 동정화상의 금수기공에 부딪쳐 갈 뿐이었다. 꽈르릉!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흙먼지가 기둥이 되어 말려 올라가고 주변의 잔디가 벌렁 배를 드러냈다. "크윽!" 복청양은 전신의 혈관이 터져버리는 것 같은 충격에 신음을 토해 내며 연달아 세 걸음을 물러났다. 그의 앞에는 깊은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동정화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청양 이놈, 다음에 만날 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동정화상의 한 맺힌 고함소리만 아스라이 멀어질 뿐이었다. "휴우!" 복청양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만일 동정화상이 천노살성이라는 이름에 짓눌려 지레 겁먹지 않고 다시 한 번 금수기공을 일으켰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후의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 해가 뜬다. 동천에 떠오르는 해는 어제와 같은 황금빛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빛 빛살이 주는 의미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것은 찬란한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스런 비웃음이 될 수도 있다. 복청양의 앞에 두 사람이 있었다. 금노야와 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가려야 할 곳을 모두 가리고 있어서 그러함인가? 여인은 알몸이었을 때보다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한결 아름다웠다. 금노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옆에 서 있고, 여인은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복청양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아니, 이러지 마시고……." 복청양은 당황하여 여인을 막으려다가 급히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하마터면 여인의 손을 붙들 뻔했다. 여인이 절을 올린 자세 그대로 복청양을 우러러보았다. "죽을 목숨을 구해주신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지……." 여인의 눈가에 함빡 눈물이 고였다. 그 동안의 억울함과 설움이 일시에 복받침인가?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저는 그저 지나가다 의분을 못 이겨 끼어든 것뿐입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러시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복청양은 분에 넘치는 인사에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오." 금노야가 옆에서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의를 보고 의분을 일으키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직접 나서서 악인을 응징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오. 내자의 말처럼 은공은 우리 내외에게 새로운 목숨을 주셨소이다." "노인장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복청양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 흐뭇한 마음이 이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복청양은 오늘에야 비로소 무공을 익힌 보람을 느꼈다. 무릇 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약한 자를 돕고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야말로 무인이 힘써 행해야 할 참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은공의 큰 은혜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우리 내외가 한 가지 선물을 드리고 싶소." 금노야가 품속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물건을 꺼내더니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이게 뭡니까?" 복청양은 엉겁결에 그 물건을 받으며 의아하여 금노야를 바라보았다. "펴보시오." 금노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깃들었다. 그가 이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건 아마 참으로 오랜만일 것이다. "이건……." 보자기를 편 복청양의 안색이 변했다. 안에서 나온 것은 한 권의 얇은 책자였다. 불과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천공검환록(天孔劍幻錄)> 표지에는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첫눈에 귀한 책자임을 알아본 복청양이 의아해서 물었다. "너무 부담갖지 마시오. 이 늙은 것의 작은 정성이니……." 금노야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 책은 십 년 전에 내가 우연히 죽을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을 구해주고 얻은 것이외다. 그 사람의 말로는 그 책이 천고에 다시없는 비서(秘書)라고 하더군요. 그 책 안에는 세상을 놀라게 할 대단한 무공이 담겨져 있다고 했소이다. 하지만 나는 본래 무공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라 그저 귀한 물건이겠거니 하고 이제껏 보관해 두고 있었소이다. 하지만 이제 은공을 만나니 비로소 그 책의 임자를 찾은 것 같소이다." "이 귀한 걸 제가 어찌…… 받을 수 없소이다." 복청양이 정색하며 책을 금노야에게 돌려주었다. 금노야의 태도로 보아 그가 이 책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며 이 책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노야는 책을 돌려받지 않았다. "무릇 모든 물건에는 임자가 있기 마련이오. 또한 물건이라는 것은 그 쓰임새에 따라 적당한 주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오. 무를 익힌 무인에게는 보검이 보물이고 나 같은 장사꾼에게는 주판이 다시없는 보물이듯이 말이오. 황금이 억만 냥이 있어도 코흘리개 어린아이한테는 다섯 알의 공깃돌만 못하고 제아무리 귀한 책이라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쏘시개감밖에 되지 못하는 것 또한 같은 이치이오. 그러니 그 물건의 주인은 바로 은공이외다. 그것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하나 무공을 모르는 내가 백 년을 가지고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부디 거절하지 마시오." "노인장……." 복청양의 가슴에 따뜻한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그는 이 작은 책자에 금노야 내외의 크디큰 정성이 담겨있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성을 거절한다는 것 또한 옳지 못한 일이다. 복청양은 고개를 숙여 사례한 뒤에 책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염치 없는 일인지는 알지만 노인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잠시 이 책을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고맙소." 금노야의 얼굴이 환히 펴졌다. "이제야 이 늙은 것이 큰 짐을 던 듯하오. 사실 그 동안 그 귀한 걸 가지고 있으면서 혹여라도 그 책으로 인해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하였다오. 그런데 이제야 주인을 제대로 만났으니……." "주인을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야 없지요." 복청양의 입가에 조금은 서글픈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지금 천하가 두려워하는 살성이라는 칭호가 붙은 몸이 아닌가! 제 한 몸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올바른 주인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얘기를 백 번 해보았자 금노야가 이해할 리 없다. 그날 오후. 복청양은 금노야 내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그 집을 나왔다. 다시 태행산을 향해 가는 것이다. 뜻밖의 일로 잃어버린 하룻길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자연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 * * 여인의 눈썹처럼 가는 그믐달이 사위에 흐린 빛을 뿌리고 있었다. 다각다각 사두마차가 달빛이 흐드러지게 깔려있는 밤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사두마차였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이런 마차가 어째서 밤길을 가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다각다각 마차는 한가롭게 달려가다 옆의 소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아무의 발길도 닿지 않은 밤길을 달렸다. 이윽고 마차가 멎었다. 그곳은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누런 황토가 사방에 깔려 있었고 암석이 곳곳에 널려 있다. 인적이 끊긴 곳, 그래서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다. "아가씨." 마부석에 앉은 소벽이 뒤를 보며 말했다. "다 왔느냐?" 마차 안에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마차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내린 것은 백아아였다. 그녀는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의 한가운데 서 있건만,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꼭 알맞은 시간에 왔구나."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 백아아가 중얼거렸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예." 소벽과 소옥이 합창하듯 대답한다. 두 시비를 힐끔 돌아본 백아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긴 치맛자락이 사르륵 바닥을 끌었다. "난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야." 멀어져 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소옥이 조잘거렸다. "뭐가?" "아가씨가 왜 이런 곳으로 온 거지? 요즘 아가씨가 하시는 일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낸들 알겠니?" 소벽은 어쩐지 이 황량한 벌판에 오래 머물고 싶지가 않았다. 꼭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소옥이 그녀답지 않게 말이 많은 것도 아마 그런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마차가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온 백아아는 주위를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온통 바위가 널려있을 뿐 나무나 풀은 한 포기도 없었다. 정말로 황량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아마 짐승도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저기로군." 이윽고 동물 모양의 형상을 한 바위를 찾아낸 백아아가 서둘 것 없다는 듯 천천히 그 앞으로 가더니 조용히 걸터앉았다. 흐린 달밤에 바위에 고즈넉이 걸터앉아 있는 미녀. 시인이 본다면 즉각 시상이 떠오를 만한 정경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흐르면서 약간의 긴장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지, 그녀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직 일 각이 남았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도저히 사람의 것 같지 않은,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메마른 것이었다. 백아아는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삭막한 바람만이 한바탕 그녀의 치맛자락을 들추며 지나갈 뿐이다. "오셨으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뭐 하는 짓인가요?"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철없는 어린아이를 꾸짖는 것 같은 조용조용한 나무람이 백아아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아직 일 각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소." "일 각 먼저 만나나 일 각 나중에 만나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소. 나는 이제까지 시간을 어겨 본 적이 없소."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혹시 사람들을 끌고 오지 않았는지 살펴볼 시간이 내겐 필요하오." "나는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어요.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교활하지. 특히 아름다운 여인은 더……." 그러자 백아아가 환하게 웃는다. 이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인간이 자신을 아름답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거 칭찬인가요?" "칭찬이오. 당신은 정말로 아름답소.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들은 특히 찬사를 받기를 좋아하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눈에는 해골 위에 살갗을 한 겹 씌워놓은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소." "그거 유감이군요." 그런 말을 듣고 불쾌감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마도 정상이 아니리라. "당신은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나요?" "그런 건 왜 묻소?"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공연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은 이상한 여자요." "그런가요?" 백아아가 웃는다. "지금까지 내게 그런 걸 물은 사람은 없었소. 나만 보면 그저 달아나기에 바빴지." "난 겁이 없는 편이죠." "이건 그런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내가 보기에 당신을 이토록 대담하게 만드는 건 아마도 자신감인 듯하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상대를 겁내지 않지." "그런가요? 당신은 소문하고는 다르군요. 꽤 멋진 말을 할 줄 아네요. 그러나저러나 아직도 일 각이 되질 않았나요? 언제까지 이렇게 얼굴도 보지 않고 말해야 하나요?" "기다리시오. 나는 왠지 당신이 사람들을 끌고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그런 간사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 "잘 봤어요. 나는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어요. 두 시비밖에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확인을 하여야만 하오.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원칙이었소. 그리고 당신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소." 목소리가 사라졌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백아아는 느낌으로 그걸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도 이 벌판만큼이나 황량하구나.' 백아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웬일인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언제나 경계하며 상대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틈에 끼여 있으면 자신도 덩달아 삭막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르다. 복청양, 그 사람은 너무 진실되어 상대가 자신을 속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속아넘어가지. 그리고 마주, 그분은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 있다. 천하에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모두를 신뢰한다. 그 두 사람이 상대방을 신뢰하는 모습은 같지만 그 믿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다시 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 한 사람이 나타났다. 죽은 나무처럼 메마른 사람이었다. 그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흑의경장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몸은 대나무처럼 꼬치꼬치 말라있고 옷 밖으로 나온 손도 역시 무덤 속에서 금방 꺼낸 뼈다귀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죽은 나무 같은 느낌이 짙게 풍기는 것은 그처럼 몸이 말라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호흡도 하는 것 같지 않았으며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도 고뇌도, 심지어는 차가운 이성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죽어 있었다. 살아 있으되 죽은 사람. 백아아는 그가 돌연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신 습관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그래, 확인은 해봤나요?" "해봤소." 흑의인이 말했다. "확인해 보니 어떤가요? 내가 사람을 데리고 와서 어디에 숨겨 두었던가요?" "그러지 않았소. 사방 백 장 이내에는 당신이 타고온 마차와 두 시비밖에는 없었소." 사방 백 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에 인근 백 장을 모두 수색하였다는 말인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백아아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나이. 암혼(暗魂). 그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일신에 가공할 재간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얼마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와 실력을 겨룬 사람치고 살아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어둠과 같이 있었다. 그는 자객이었다. 그것도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청부 살인업자였다. 그는 돈만 주면 누구라도 죽였다. 그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죽여야 할 대상이 무명의 필부라도 죽였고, 갓 탯줄을 끊은 어린아이라도 죽였다. 일파의 장문인이나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는 무림명숙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밤의 사자였으며, 일신에 지니고 있는 재간에 비해 언제나 경멸을 받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세인들은 자객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객들은 언제나 그늘 속에 숨어 있으면서 상대의 허점을 찾아 칼을 꽂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두 곱절, 세 곱절 뛰어난 사람들도 죽였지만 그것은 항상 암살이었기에 가능했다. 만약에 정면으로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었다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세인들이 자객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이었고 자객이 경멸의 대상이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아는 알고 있었다. 암혼이야말로 살수(殺手) 중의 살수이며 진정한 자객이라는 것을. 그가 어둠 속에 숨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하기 때문이지 결코 실력이 떨어져서는 아니다. 만일 정말로 자객의 술(術)에만 능하고 진신능력은 별게 아니었다면 그가 감히 칠대공적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안심했나요?" 백아아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자주 웃소." 암혼이 여전히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나는 자주 웃는 여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 그런 여자는 신용이 없거든." "나는 웃기도 잘하지만 신용도 있는 편이죠." "당신에 대해서는 나도 얼마간 알고 있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 당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다소 의외였소." "왜죠?" "당신이란 사람은 모든 사람과 친하기 때문이오.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왜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나는 아직 용건을 얘기하지 않았는데요." "그건 들으나마나요.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은 언제나 같은 용건이니까." 암혼이 가까운 바위에 몸을 앉혔다. 그런 사소한 동작을 하면서도 그는 줄곧 백아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 이를테면 머리카락 하나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까지도 모두 그의 감각에 포착되고 있었다. "이젠 용건을 이야기할 차례요." "그렇군요." 백아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도 이 암혼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그 호기심이 점차 퇴색하는 것 같다. '이 사내는 내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암혼은 자객의 모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심함, 냉정함, 그리고 지나치리만큼의 조심성, 그 밖의 몇몇 것들……. 하지만 자객이 아닌 사람의 특성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 감정, 사랑, 따뜻한 마음, 그 밖의 몇몇 것들……. 이처럼 차고 건조한 사내에게는 백아아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투도 점차 사무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 사람을 죽여 주었으면 해요."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암혼이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대가요. 당신은 그 일에 얼마를 지불하겠소?" "얼마나 원하나요?" "나는 좀 비싼 편이오." "알아요." "내가 받는 금액은 누구를 죽여야 하느냐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소. 하지만 금화로 삼백 냥이 넘으면 그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소." "좋아요. 금화 오백 냥을 드리죠." 암혼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가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큰 청부를 맞는 건 오랜만이군." "그 말을 승낙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암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승낙이오." "하지만 당신은 아직 그 대상이 누구인지 듣지 않았는데요?" "그게 누구든 상관없소. 삼백 냥이 넘으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이미 한 것 같은데……." "당신과는 거래하기가 참 쉽군요." "돈이 많으면 그렇소."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미 거래는 끝난 것이다. 남은 것이 있다면 사소한 몇 가지의 절차뿐이었다. 암혼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소." "그런 것 같군요." "그자의 이름이 뭐요? 그리고 언제까지 그 일을 끝내면 되겠소?" "그 사람의 이름은 단황이에요." 암혼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으로 보아 단황이라는 이름을 기억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설명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은 사흘 후, 이 시간에 바로 이 자리로 오면 돼요. 그러면 단황이라는 사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잠시 동안 암혼은 정말로 나무토막이 되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그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 백아아는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우수수 바람이 흙먼지를 가지고 달아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애썼소." 이윽고 암혼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갖은 방법으로 함정을 파고 나를 유인했소. 거짓 청부를 맡겨서 사지로 끌어들이는 것은 흔히 쓰는 방법이지. 나는 이제 얘기만 듣고도 그것이 함정인지, 아니면 진정한 청부인지 알 수 있게끔 되었소. 하지만 당신의 청부는 그 어느쪽인지 알 수가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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