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2 - 5편 (5/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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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2 - 5편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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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군성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소녀를 바라보았다. "천노살성께 술을 먹여 드려라." 소녀가 즉각 움직였다.
그들에게는 군성초의 명은 하늘의 명과 같아서 감히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녀의 하얀 손에 들린 술잔이 복청양의 입가로 다가왔다. "나는 싫소.
마시지 않겠소." 복청양이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마시지 않겠다면 그 술을 너의 얼굴에 끼얹으라 할 것이다." 군성초가 웃음기도 없이 뱉어낸 말이었다. '고약하군.' 복청양은 술잔이 입가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군성초의 명이 떨어지면 저 술은 틀림없이 그의 얼굴을 적시게 될 것이다.
마지못해 그가 입을 벌리자 소녀가 재빨리 술잔을 입에 대준다.
술은 한 모금에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다른 소녀가 눈치있게 안주를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이거야, 원…… 웬 호강인지…….' 평생 처음으로 여자가 먹여주는 술과 안주를 먹으며 복청양은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윽고 한 순배의 술이 돌자 군성초가 물었다. "모르오." 복청양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나는 군성초라고 한다." "그렇군." 복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군성초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신이 바로 적룡이로군." "그렇다.
그러면 네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도 알겠지?" "모르겠소." "너는 감히 우리 단심백결회에 도전했다.
흥, 뭐 제마옥을 치러가겠다고? 제마옥이 너희 집 안방인 줄 알았더냐?"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소." "없다? 그럼 네가 가고 있는 곳이 제마옥이 아니란 말이냐?" "그건…… 사실이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부인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제마옥으로 간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 여인이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 이 여인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는 많은 격전을 치러왔는데 적들은 한결같이 그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제마옥으로 간다는 걸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손노인과 그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 이토록 널리 유통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이제 너는 단심백결회로 압송될 것이다.
거기서 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게 되겠지." "나는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소." "안다." 군성초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
열이면 열 다 그렇다.
여기 있는 예가 계집도 아마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할 걸?" 적발수룡의 이름은 예요(芮妖)였다.
군성초가 그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적발수룡의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내 이름은 너처럼 천박한 입으로 부르라고 있는 게 아니다!" "호? 그래?" 군성초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적발수룡을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천박하다고 하다니…… 간이 제법 커졌구나.
하지만 오늘은 내가 참기로 하지.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벌주를 줄 수야 없는 일이 아니냐."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켰다." 적발수룡이 말했다. "천노살성을 잡아달라고 해서 잡아주었으니 된 것 아니냐? 이제는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물론 나도 약속은 지킨다.
일구이언은 하지 않지." 군성초의 말투는 영락없는 남자였다.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남자 같은 말투가 튀어나오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만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 이후 나는 너를 쫓지 않겠다.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 "정말이냐?" 적발수룡이 조금은 미심쩍은 얼굴로 확인했다.
무림삼룡이 칠대공적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적룡이 그녀의 뒤를 쫓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녀로서는 생기가 삼 푼 정도 늘어난 셈이다. "평소 같으면 내가 이런 양보를 할 리 없지." 군성초가 술잔을 훌쩍 비운다.
그러자 소녀 하나가 재빨리 잔을 채운다.
군성초는 벌써 술병 하나를 혼자서 비우고 있었지만 별달리 취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천노살성의 이름은 칠대공적보다 가치가 있지.
내가 너와 거래를 하자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너로서야 천노살성보다 낮게 취급되는 것이 불만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난 다만 나를 귀찮게 하는 물건들이 사라져 주기를 바랄 뿐이다." "방금 물건이라 하였느냐?" 군성초의 눈초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적발수룡의 말이 비위에 거슬린 모양이다. "그건……." 적발수룡은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다물고 말았다.
지금은 말을 보태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군성초는 적발수룡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 "그게 뭐요?" 복청양이 두려움없는 눈으로 군성초를 바라보았다.
아까 적발수룡을 흔들리게 한 그 눈빛이었지만 그걸 보는 군성초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너의 배후가 누구냐?" "배후라고?" "시치미 뗄 생각일랑 마라.
네게 배후가 없다 한들 그 말을 누가 믿겠느냐? 모용세가를 멸문시킨 일부터 시작하여 산서지부를 치고 제마옥으로 향하는 것까지, 이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단심백결회를 단계적으로 압박하려는 수작인지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 혼자서는 이런 일을 벌일 능력이 없다.
그러니 배후를 대란 말이다." "재미있는 말이긴 하지만 내겐 배후 같은 건 없소." "없다?" 군성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복청양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사내라면 그 정도 뻗대는 맛은 있어야지.
하지만 그래 봐야 모두 헛수고다.
너는 앞으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백 번도 더하게 되겠지만 불행히도 너에겐 그럴 자유마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진 형벌을 당한 후에 입을 여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털어놓는 게 어떠냐? 그러면 내가 특별히 관용을 베풀 수도 있다." "눈물나도록 고맙군." 이 모든 일들이 누군가의 치밀한 계략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복청양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배후 인물이 손노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위협에 굴복하여 그런 얘기를 구구하게 털어놓기는 싫었다. "당신이 무슨 의도로 나를 핍박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부질없는 짓이오." "과연 그럴까?" 군성초가 염적을 들어올리더니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걸 쓰다듬었다. "어디 천노살성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볼까?" 군성초가 입으로 피리를 가져갔다.
복청양은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몰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가느다란 피리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복청양의 안색이 변했다.
분명 가는 피리소리에 불과한데도 그 피리소리가 귀를 파고드는 순간 머릿속이 웅웅 울리며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음파(音波)의 반란이었다.
수만 마리의 말이 일시에 달려드는 것 같기도 하고 거센 해일이 정면으로 덮쳐오는 것 같기도 하다. "으으……." 복청양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적발수룡이나 다른 소녀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의아한 얼굴로 복청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하니 군성초가 이미 상대를 가려가며 적음을 흘려넣을 정도의 수준에 올라있다는 말인가? 복청양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그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귀청이 터져나갈 것 같고 머릿속에서 수천 개의 종이 일시에 울리는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복청양은 마침내 운기하여 적음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요하던 심신이 차츰 편안해지며 그의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적음이 변했다.
졸졸졸 흐르는 시내가 되고 천자만홍의 화원에서 펄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깊은 밤 수풀 속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복청양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십성의 공력을 끌어올려 적음에 저항하였지만 적음은 여전히 그의 심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럴 수가…….' 복청양은 대경하여 마침내 전신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의 안색이 흡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붉게 변하고 있었다.
군성초의 안색 역시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복청양이 이렇게까지 오래 버틸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피리를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잠시 피리에서 입을 떼고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 한소리를 불어넣었다.
우르릉 복청양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흔들린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군성초를 바라보았다.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대단하구나.'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며 적발수룡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군성초의 음공도 대단하지만 그에 대항하는 복청양도 결코 하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다.
만일 물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저자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적발수룡은 공연히 두려움이 일었다.
다시 피리소리가 변했다.
그러자 복청양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의 안색은 적색에서 이제 청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음소리는 흘리지 않는다.
적음이 이제까지의 유연하던 곡조에서 변화해서 토막토막 끊어지고 있었다.
마치 음률을 전혀 모르는 아이가 장난으로 피리를 불고 있는 듯하다.
하나 거기에 대항하는 복청양의 모습은 처절할 정도였다.
그의 머리는 산발하여 흩어졌고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신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으며 바늘에라도 찔린 사람처럼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군성초의 모습 역시 성한 것은 아니었다.
항상 여유를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것이었다.
옷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바람도 없는데 마구 퍼득인다.
혼신의 공력을 주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다간 두 사람이 다 위험하다.
하기야 그렇게 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적발수룡은 이제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두 사람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군성초가 손가락 끝으로 피리를 탁 튕겼다. "억!" 그러자 마침내 복청양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의 얼굴이 까맣게 변하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탁! 두 번째로 손가락이 피리를 튕겼다. "으악!" 복청양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는 턱 아래로 선혈을 주르르 흘리며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휴우!" 군성초가 깊은 한숨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창백했으며 몹시 피로해 보였다. "저자는 죽었느냐?" 적발수룡이 바닥에 쓰러진 복청양을 보며 물었다. "죽지는 않았다.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것이다." 군성초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적발수룡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억지로 버티고는 있지만 그녀는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다. '위험했다.
저자가 혼천지곡(混天之曲)의 삼음(三音)마저 발출하게 했다면 저 자리에 쓰러진 것은 저자가 아니라 내가 되었을 것이다.' 방금 군성초는 복청양을 이기기 위하여 적월혼천지곡(赤月混天之曲)이라는 절정의 음공(音功)을 전개했다.
적월혼천지곡은 칠십 년 전 적월자(赤月子)라는 음공의 대가가 즐겨 사용하던 절기로 그녀도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따라서 복청양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그녀도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말았을 것이다. '천노살성이 허명만 높은 줄 알았더니 정말로 대단하구나.' 그녀는 손을 뻗어 술잔을 잡았다.
그러자 손이 덜덜 떨리면서 술이 넘쳐 손을 적셨다.
적발수룡이 기묘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가?' 군성초는 문득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일 적발수룡이 이 틈을 타서 공격해 온다면 그녀는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본 궁의 고수들을 더 데리고 오는 건데…….' 군성초는 배에 있는 자신의 수하들이 그다지 미덥지 않았다.
적발수룡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군성초는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여전히 앉아 있었다.
요란하게 배가 흔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냐?" 군성초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강의 하류로 내려가면서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 물결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던 배가 돌연 속도를 늦추면서 커다란 진동을 일으킨 것이다.
여인 하나가 군성초의 앞으로 달려왔다. "앞에 뭔가가 있습니다, 소궁주님!" "뭐라고?" 군성초가 휙 몸을 날렸다.
그것은 극도로 지친 사람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연극이었단 말인가?' 적발수룡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경솔하게 손을 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군성초가 적발수룡의 시선을 의식해서 무리하게 신법을 전개했다는 것을…….
그것을 알았다면 적발수룡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선수로 달려간 군성초는 전면을 응시했다.
수하의 보고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앞에는 많은 널빤지가 튼튼한 줄로 연결되어 강 이편에서 저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일종의 부교(浮橋)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변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제히 강으로 들어섰는데 물속으로 뛰어드는 게 아니라 강 위를 밟으며 오고 있었다.
널빤지와 널빤지를 건너뛰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하나의 널빤지에 한 사람씩 길게 일렬로 늘어섰다.
줄잡아 삼십 명은 되는 것 같다.
한결같이 푸른 상의에 검은 바지를 걸치고 있는 장한들로 머리에는 하얀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커다란 강궁(强弓)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철궁도다……." 군성초가 신음했다.
철궁위대(鐵弓衛隊).
십방좌의 하나인 철궁도가 자랑하는 최정예가 아닌가! 철궁위대는 다가오는 배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배가 그들을 들이받을 것이건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마침내 배와 철궁위대와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닻을 내려라." 군성초가 명령했다.
여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자 수부와 같은 손놀림으로 육중한 닻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배가 약간의 흔들림을 보이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철궁위대와의 부딪침은 면한 것이다.
푸드득! 옷자락 퍼득이는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수면 위를 걸어와 부교의 중앙에 자리잡았다.
청의를 걸친 문사 차림의 청년이었다. "남궁격." 군성초가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이오, 소궁주." 무궁수사 남궁격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구려." "흥, 그럼 이 모든 것이 우연한 만남이란 말인가요?" 군성초의 냉소에는 차가운 서리가 맺혀 있었다. "사실 그렇소.
본 도주는 쥐새끼 한 마리를 잡으려고 한 것인데 뜻밖에도 소궁주와 마주칠 줄은 몰랐구려." 남궁격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여유있는 미소가 활짝 피어나 있었다.
여유롭고 한가한 미소.
그것은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남궁격과는 반대로 군성초의 심정은 극도로 초조했다. '저 교활한 것이 이곳에 덫을 치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오늘은 아무래도 무사히 벗어나기 힘들겠다.' 군성초는 재빨리 피아간의 전력을 저울질 해보았다.
앞에 버티고 있는 삼십여 명의 철궁위대는 철궁도가 자랑하는 일급 궁수들이었다.
철궁도는 강궁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철궁위대는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더구나 적은 눈앞에 있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강변에 다시 수십 명의 철궁위대가 얼찐거리는 게 보인다.
남궁격이 철궁도의 전력을 오 할 이상 풀어놓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거리를 격한 입장에서 수십 개의 강궁이 일제히 강전(强箭)을 발사한다면 화화궁의 여인들은 꼼짝하지도 못하고 제물이 될 것이다.
물로 뛰어들어 싸우자고 한들 화화궁도들은 수공을 익히지 못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뒤에는 적발수룡이 있었다.
일단 난전이 벌어지면 적발수룡이 누구의 편을 들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나 그 모든 것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까 복청양과의 대결에서 지나치게 진기를 허비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수하가 많아도 결국 최종승부는 자신과 남궁격의 겨룸에서 결판이 날 터인데 지금의 몸 상태로는 남궁격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불리하기만 하지 요행은 바라기 어렵다. '남궁격은 교활하기 그지없는 자다.
저자가 십에 십, 자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직접 나타날 리가 없다.' 하지만 군성초는 표면적으로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담담한 눈으로 남궁격을 바라보았다. "도주께서 방금 말씀하신 쥐새끼란 누굴 지칭하는 것인가요?" "그걸 몰라서 물으시오?" "난 짐작도 못하겠어요." 군성초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도무지 웃음이라는 걸 모를 것 같던 그녀였다.
그런데 일단 웃음을 피우자 그것은 만개한 장미꽃처럼 더없이 아름다웠다. '고약한 계집이군.' 남궁격은 내심 이마를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도 군성초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녀가 극도로 지쳐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와 불그레 홍조를 띠고 있었다.
거기에 밝은 웃음까지 보태지니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본 도주는 천노살성이란 고약한 자를 잡기 위하여 철궁도의 고수들을 동원하여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자가 이미 소궁주의 수중에 들어간 것 같구려." "바로 보았어요." 군성초가 말했다. "천노살성은 이미 내가 잡았어요.
그러니 도주의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되겠군요." "소궁주의 지혜는 아마 하늘을 덮고도 남을 것이오.
경하드리오." 남궁격이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그의 태도는 지극히 진지하여 조금도 비웃는 것 같지 않았다. "근래 들어 천노살성은 우리 단심백결회의 우환거리였소.
그자가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바람에 단심백결회의 명성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천하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소.
그런데 이제 소궁주가 그자를 잡았으니 아마도 단심백결회 내에서 소궁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오." "과찬의 말씀이에요." "아니오, 아니오.
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리요.
그런데 소궁주는 앞으로 그자를 어찌할 생각이오?" "당연히 단심백결회로 압송해야죠." 그러자 남궁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 할 것이오.
하지만 소궁주가 이미 그자를 잡느라고 애를 썼는데 그런 사소한 일마저 직접 할 필요가 있겠소? 괜찮다면 그자를 단심백결회로 압송하는 일은 우리 철궁도가 대신했으면 좋겠는데…… 어떻소?" 순간 군성초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남궁격이 좋지 않은 의도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주의 호의는 고맙지만 이 일은 처음부터 제가 시작한 것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요.
그게 도리 아닌가요?" "하하…… 사양할 필요는 없소." 남궁격이 호인다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옆을 돌아보았다. "가서 천노살성을 데리고 오너라." "예." 철궁위대 하나가 굽신 허리를 숙였다.
그는 배와 자신의 거리를 잠시 가늠해 보더니 훌쩍 몸을 날렸다.
십여 장의 거리를 단 한 번의 몸놀림으로 좁혀오는 것이었다.
순간 군성초가 질책했다. "도주, 이건 너무 경우없는 짓이 아닌가요?" 그녀의 우수가 들리더니 붉은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붉은 기류는 배를 향해 날아오는 철궁위대의 몸을 그대로 휘감았다.
대경한 그가 양손을 모아 대항하려고 했지만 이미 공중에 뜬 상태라 그의 반응은 당연히 한 호흡 늦을 수밖에 없었다. "으악!" 한마디 비명과 함께 철궁위대가 붉은 기류에 휩싸인 채 아래로 추락한다.
첨벙 요란한 물소리를 내며 아래로 가라앉은 그는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남궁격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소궁주, 이게 무슨 짓이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도주가 이처럼 저를 핍박하는 이유가 뭔가요?" "방금 핍박이라고 했소?" "그래요." "하하하하……." 남궁격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있던 물결이 놀라 춤을 추었다.
군성초의 고운 아미에 주름이 한 줄 패이며 신형이 눈에 보일 듯 말 듯 휘청했다. '저자가 감히 공력을 과시하다니!' 그녀는 애써 신형을 바로잡았지만 그 미미한 움직임은 이미 남궁격에게 포착된 뒤였다. '역시 네년에게 문제가 있구나!' 남궁격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소궁주, 그대는 아마도 핍박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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