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핍박이 어떤 것인지 한 번 당해 보시겠소?" "지금 협박하는 건가요?" "협박이라고 해도 좋고, 다른 말을 사용해도 좋소. 다만……." 남궁격이 손가락을 곧게 펴 배를 가리켰다. "본 도주는 반드시 천노살성을 데려가야겠소. 아울러 그 배에 타고 있는 적발수룡도 내게 넘겨주시오." "뭐라고?" 적발수룡은 아직 남궁격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자가 어떻게 그 여자가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단 말인가? 하기야 다시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남궁격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배를 가로막지 않았던가. 이것만 보더라도 그자가 이미 군성초의 움직임을 환히 꿰뚫고 있다는 뜻이 된다. 군성초는 새삼 남궁격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만일 제가 그 일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남궁격이 오른손을 들었다. 쐐액 강전 하나가 요란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왔다. 강전은 정확하게 군성초의 왼쪽에 있는 여인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앗!" 여인이 기겁하여 급히 검을 들어 강전을 막았다. 그러나 강전의 기세는 너무 사나워서 일단 검에 저지당하자 약간 방향만 틀었을 뿐 그대로 여인의 어깨를 관통하고 말았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왈칵 치솟는다. "남궁격, 너 정말!" 군성초가 급히 움직여 쓰러지는 여인을 부축한 뒤, 점혈하여 출혈을 멈추게 하면서 남궁격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본 도주는 피를 보고 싶지 않소. 지금이라도 소궁주가 천노살성과 적발수룡을 넘겨만 준다면 당장 철궁위대를 거두고 돌아가겠소. 하지만 만일 끝까지 거절하겠다면 이후의 일은 책임지지 못하오." 다시 남궁격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철궁위대가 일제히 활을 들어 배를 겨냥했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삼십여 개의 강궁. 그것이 일제히 발사된다면 아마도 배 위의 인물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군성초의 안색은 이제 완전히 잿빛이었다. '분하지만 중과부적이로구나! 이곳이 배 위만 아니고 내 공력만 그전 같았어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따지고 보면 그녀는 자신의 유리한 점을 버리고 불리한 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군성초는 참담한 패배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와아!" 외마디 고함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 13 장 칠대공적(七大公敵)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쏠렸다. 검은옷을 걸친 여인 하나가 머리를 산발한 채로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게 보였다. "적발수룡이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몇 개의 강전이 허공을 갈랐다. "크윽!" 허망하게도 여인은 물로 들어가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풍덩 여인이 추락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남궁격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리석은…… 어설픈 눈속임인 줄 모르고……." 그의 눈길은 방금 배 반대편에서 하나의 기포를 피워올리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포는 금방 사라졌으며 작은 파문이 원을 키우고 있었다. 남궁격의 손이 움직였다. 가늘고 검은 빛줄기가 그쪽으로 폭사되었다. 빛줄기의 속도와 위력은 가공할 정도여서 그 누구라도 그것을 피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윽!" 신음소리와 함께 선연한 붉은 피가 물 위로 번져 나갔다. 피는 점점 원을 크게 그리더니 한 여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붉은 머리에 전라의 모습을 한 적발수룡이었다. 그녀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다시 배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하하…… 왜, 도망치기를 포기했느냐?" 남궁격이 득의의 웃음을 터뜨렸다. 적발수룡은 방금 혼란한 틈을 타서 한 여인을 사로잡아 자신의 옷을 입혀 물에 떨어뜨리고, 정작 자신은 반대편으로 달아나려고 한 것이지만 남궁격의 예리한 시선에 걸려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배 위에 올라선 적발수룡이 신형을 휘청하더니 원망스러운 눈으로 군성초를 바라보았다. "크으…… 군성초,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쫓지 않겠다고 했지, 너를 보호해 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군성초가 냉엄하게 대꾸하더니 적발수룡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남궁격을 보았다. "남궁격, 철궁도가 오늘 우리 화화궁과 원한을 맺기로 작정한 것이냐?" "본 도주는 그 누구와도 원한을 맺고 싶은 생각은 없소. 다만 소궁주가 천노살성을 양보하면 우리는 즉시 물러갈 것이오."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소. 소궁주가 과연 천노살성을 지킬 수 있는지 봐야겠군." 남궁격이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모든 신호를 수신호로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철궁위대가 본격적으로 강전을 날리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화살은 부교에서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강 언덕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모두 몸을 숨겨라! 엄폐물을 찾아라!" 날아오는 화살을 연달아 격추하며 군성초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는 그녀의 눈에 갑판에 있던 소녀 하나가 화살에 맞아 나뒹구는 게 보였다. "이런……." 군성초가 이를 악문 것은 소녀 때문이 아니었다. 호선을 그린 화살이 그물에 감겨있는 복청양에게로 날아오는 것을 본 것이다. 군성초가 자세를 낮게 하며 몸을 날렸다. 그녀는 바닥을 뒹굴며 염적을 휘둘러 복청양에게로 날아오는 화살을 격추시켰다. 이어 그녀는 복청양을 감은 그물을 끌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배 위에서는 연달아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여인들은 뱃전 뒤에 몸을 숨겼지만 무서운 위력의 강전이 뱃전을 뚫고 들어왔으므로 그것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무공이 약한 여인들이 먼저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무공이 강한 여인들도 벌써 몸에 여러 곳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적발수룡은 영리하게도 돛대 뒤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돛대를 싸안고 요리조리 방향을 틀면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냈다. 그러나 그러는 그녀의 모습도 낭패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미처 지혈할 여가가 없어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남궁격, 이자가 끝내……." 군성초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남궁격은 완벽한 준비를 끝내고 기다린 반면, 그녀는 준비가 너무 없었다. "왜 나를 살리려고 애를 쓰는 거요?" 군성초가 힘들게 두 개의 화살을 떨어뜨릴 때였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성초는 고개를 돌렸다. 복청양이 맑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정신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흥, 너는 살아 있어야만 쓸모가 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구차한 방법은 쓰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가치있는 몸인 줄 미처 몰랐군." 복청양의 음성에는 약간의 자조가 담겨 있었다. 그는 눈앞에서 무수한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하기야 지금과 같은 형편에서 두려워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몇 개의 화살이 더 날아왔다. 힘들게 화살을 막아내는 군성초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머리는 풀어져 산발이었고 옷도 여기저기가 찢겨져 우스운 몰골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조금 전까지 그렇게 당당하던 여장부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도 그녀의 불굴의 의지만은 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복청양을 향한 그녀의 눈이 기묘한 빛을 내는 걸 보면……. 군성초가 품속에 손을 넣더니 푸른빛을 내는 비수를 꺼냈다. "가만히 있거라." 군성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복청양의 몸을 감고 있는 그물을 끊고 있었다. 그토록 질기다는 천잠사도 그녀의 비수가 닿자 맥없이 토막났다. "무슨 짓을 하는 거요?" 복청양이 의아해서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빠른 손놀림으로 그물을 끊던 군성초가 이윽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겉모양만으로는 복청양은 여전히 그물에 말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회를 보아 도망치거라." "이거야, 원……." 복청양은 그제야 군성초의 속내를 알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저런 더러운 자의 손아귀에 들어가느니 천노살성의 이름이 조금 더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후 군성초는 숨은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멈춰라!" 남궁격이 우렁차게 소리치자 그토록 사납게 날아오던 화살들이 거짓말처럼 딱 멎었다. 군성초는 복청양을 힐끔 돌아보고는 무거운 걸음으로 선수로 나아갔다. "어떻소, 소궁주. 이제는 그자를 내게 양보할 마음이 생겼소?" 남궁격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남궁격, 너는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구나." 차갑게 내뱉는 군성초의 목소리에는 남궁격의 웃음을 거두게 하는 힘이 실려 있었다. "장차의 일이라면 아마 본 도주처럼 많이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오. 하지만 화화궁이 두려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흥, 너는 머지않아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군성초가 원한이 가득한 눈으로 남궁격을 보더니 몸을 돌렸다. 숨어있던 여인들이 하나씩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들 절반 이상이 부상을 입었고 죽은 여인도 서넛은 되었다.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들이었으며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군성초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궁격, 언젠가는 꼭 이 빚을 갚고야 말겠다.' "소선을 내려라." 그러자 여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에는 소선(小船)이 하나뿐이었는데 다섯 사람이 겨우 몸을 비집고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소선을 물에 내리자 군성초의 명에 의해 성한 여인들이 상처입은 동료를 태우고 출발했다. 소선이 십여 차례 왕복하자 배 위에는 군성초와 복청양, 그리고 적발수룡만이 남게 되었다. 철궁위대들은 여전히 강궁으로 여인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격에게서 아무런 명도 없었기에 그들은 여인들이 강변으로 옮겨가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소선이 다시 배로 돌아오자 군성초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군가 계집아, 나는 어쩌란 말이냐?" 그때까지도 돛대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적발수룡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군성초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자가 너를 원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이후의 일은 너의 운에 달렸다는 말밖에는." "뭐라고?" 적발수룡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격렬한 배신감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칫 경솔하게 행동했다가는 다시 화살의 소나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도 이번에는 오로지 그녀만을 목표로 한 화살의 비를. 그것은 모험이 아니라 무모한 자살행위였다. "으…… 명색이 정도 인사라는 것들이 이토록 쉽게 자신이 한 말을 뒤집다니……." "그걸 이제야 아셨소?" 바닥에 누운 채로 복청양이 비웃음을 던졌다. 적발수룡의 딱한 처지가 동정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은 자업자득이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믿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잘 가려야만 하는데 당신은 거기서 실수를 한 것이오." "네가 무얼 안다고 헛소리냐!" 격노한 적발수룡이 일장을 갈겼다. 그러나 그녀의 장세는 헛되이 바닥을 때렸을 뿐이었다. 복청양을 상하게 했다가는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그런 소란을 뒤로 하고 군성초는 소선에 옮겨 타고 있었다. 소선이 배를 떠나갔다. 군성초 일행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남궁격은 비로소 배를 올려다보았다. "그자를 안고 이리 건너오너라." "제기랄……." 이를 갈던 적발수룡이 복청양을 안아 들었다. 복청양은 눈치껏 그물의 갈라진 틈새를 거머쥐고 있었다. 그물이 못 쓰게 된 것이 혹시라도 적발수룡의 눈에 뜨인다면 낭패다. 적발수룡이 몸을 날려 부교로 내려앉고 있었다. "앞장서거라." 뒤에서 남궁격이 명령했다. 강변으로 올라온 적발수룡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철궁도의 궁수들뿐이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릴까 봐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가 물속이었어도…….' 물속에서는 천하무적이지만 물 밖으로 나와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적발수룡이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운명이 명하는 대로 맡기는 수밖에는……. 복청양의 몸이 바닥에 눕혀졌고 그의 곁으로 남궁격이 다가왔다. 남궁격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천노살성이냐?" "그대가 청룡이오?" "그렇다." 남궁격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마침내 천노살성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런데 이렇게 보니 너도 별거 아니구나." "내가 보기에는 그대도 별거 아니오." "후후…… 그런가?" 자극적인 말임에도 남궁격은 그다지 노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이 승리감을 오래오래 즐기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니 우선 자리를 옮겨야겠다. 그 뒤에 너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나는 별로 할말이 없소."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남궁격이 눈짓을 하자 두 명의 장한이 다가와 복청양을 안았다. 복청양은 내심 기회를 엿보았지만 지금은 경솔하게 움직일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기다리자.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복청양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잠시를 기다려도 장한들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의아해진 복청양은 다시 눈을 떴고 그들이 놀란 얼굴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금은 괴이쩍은 광경이었다. 몹시 왜소한 노인이 멀지 않은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앞에 가득한 사람들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한창 타오르는 불길 속에 커다란 나무잎사귀 같은 것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뭇잎이 들어가자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무독옹이다.' 노인을 보는 순간 복청양은 놀라움을 삼켰다. 왜소한 노인은 분명 지난날 만독화원에서 백아아를 핍박하던 무독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났으며,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것은 또 무슨 수작인가? "그자를 내려놓아라." 남궁격의 명이 떨어지자 장한들이 복청양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일자진 형태를 취하며 그 중앙에 복청양과 적발수룡을 가두고 있었다. 남궁격이 앞으로 나선다. "후배 남궁격이 무독옹 노선배를 뵙습니다." 그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며 포권했다. 그는 이미 이 노인이 간단치 않은 상대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기야 독을 다루는 사람치고 간단한 인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무독옹은 그 중에서도 수좌에 이름이 올라있는 인물이 아닌가? 좀처럼 외부 출입을 하지 않는 무독옹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궁격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태도가 더욱 겸손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사성은 바른 놈이로군." 무독옹이 여전히 나뭇잎을 불 속에 던져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가지 않고 내 앞에 얼찐거리고 있느냐?" "갈 수 있었다면 벌써 갔겠지요." 남궁격이 내심을 읽을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노선배께서 이처럼 길을 막고 계신 것을 보니 어떤 특별한 가르침이 있을 듯하여 경솔하게 움직일 수가 없군요." "가르친다? 내가 천하의 청룡을 가르친다는 말이냐?" 무독옹의 비웃음은 심기가 깊은 남궁격의 얼굴마저 변색하게 할 만큼 날카로운 것이었다. 남궁격이 이마에 주름을 그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청룡이라는 이름은 세인들이 공연히 입방아를 찧는 것이지, 이 남궁모는 그런 말에 연연하지 않소이다. 노선배께서 제게 볼일이 없으시다면 이 몸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그래라. 누가 가지 말라더냐?" 무독옹이 다시 나뭇잎을 집어넣었다. 연기가 풀썩 일어나며 몹시도 기이한 냄새가 코끝에 전해졌다. 남궁격은 크게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요?" "어, 이거 보게? 방금 노선배 어쩌고 하더니 금방 말이 달라지네 그려." "그건……." 하지만 남궁격은 말을 잇지 못했다. 쿵쿵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두 명의 철궁위대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것이다. 그들은 의식은 잃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두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는 게 이미 움직일 기력을 상실한 것 같았다. '저 늙은 것이 나뭇잎 속에 요사를 부렸구나!' 남궁격은 크게 놀라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들 호흡을 멈추어라!" 그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두 명의 수하가 쓰러졌다. 그들은 철궁위대 중에서도 무공이 가장 약한 자들로 독의 침범을 제일 빨리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남은 자들도 안색이 크게 변한 것으로 보아 무사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연기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 남궁격의 당황한 음성과 장한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후에야 사태를 깨달은 복청양은 급히 호흡을 멈추며 운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한 올의 공력도 끌어올려지지를 않았다. 전신에 맥이 하나도 없는 것이 나른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정신은 말짱하니 기이한 일이었다. '정말이로구나.' 복청양은 다시 한 번 낭패감에 젖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패하더라도 탈출을 감행해 볼 것을……. 이제 다시 저 늙은 독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사자인 남궁격의 심중은 더욱 처참한 것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내가 저런 얄팍한 수단에 당하다니…….' 군성초에 대한 승리감에 젖어서 방심하였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렇지만 않다면 그가 무독옹의 얄팍한 속임수에 당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남궁격은 이를 갈았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흐흐…… 왜 그러고 있느냐?" 무독옹이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그는 남궁격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걸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노선배, 대체 나에게 이런 독수를 쓰는 이유가 뭐요?" 남궁격이 성큼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놀라운 자제력이 아닐 수 없다. "독수라니? 이 늙은 것이 무슨 독수를 썼단 말인가?" 무독옹이 스물스물 웃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연기는 끊이지 않고 이편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중독된 것을 안 남궁격은 연기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금만 더 거리를 좁히면 된다. 공력의 뒷받침없이도 무궁시(無弓矢)는 발사할 수 있다. 거리만 확보된다면 저 늙은 것은 결코 내 무궁시를 피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남궁격은 내심 몹시 초조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독옹이 묘한 표정으로 남궁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이것아, 너 왜 자꾸 슬금슬금 다가오느냐?" "노선배, 아마도 노선배는 내게 긴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오. 그 용건이 무엇인지 듣고 싶소." "용건이라…… 하긴 그런 것이 있긴 있었지……." 무독옹이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서자 앉아있는 것보다 더 왜소해 보였다. '됐다.' 바로 그 순간, 남궁격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무궁시를 발사할 수 있는 거리가 확보된 것이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무독옹은 결코 그의 무궁시를 피할 수 없다. 더구나 저자는 득의하여 완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성공 가능성은 더 크다. 하지만 남궁격은 바로 손을 쓰지 않고 무독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교활한 그는 상대가 무슨 속셈인지 알아낸 후에 손을 써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용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그게 뭐요?" "그만 나오는 게 어때?" 무독옹이 뒤를 보며 소리쳤다. 남궁격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숲속에서 몇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앞장을 선 것은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무흔색투 유빈이었다. 그 뒤를 거대한 체구의 만대모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퀴달린 의자를 밀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 위에는 숯덩이처럼 시커먼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저들은…….' 남궁격이 무흔색투와 만대모를 몰라볼 리 없었다. 그들을 쫓아 몇 달을 헤맸고, 만대모는 한때 그의 수중에 들었던 일이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하지만 또 한 사람, 바퀴의자 위에 앉아있는 시커먼 중년인의 출현은 다소 의외였다. 그도 역시 칠대공적 중의 하나였다. 강호에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큰 두려움의 대상! "천수벽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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