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2 - 7편 (7/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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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2 - 7편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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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칠대공적 중에 셋이 한 자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급박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남궁격의 입이 함빡 벌어졌을 것이다.
그토록 고생을 해도 잡지 못하던 칠대공적이 셋씩이나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남궁격은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솔하게 손을 쓰지 않기를 잘했다.
이제는 무독옹을 죽여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데 저 고약한 자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가까워졌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칠대공적은 서로 원수지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깨동무를 할 만큼 친숙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어떠냐?" 무독옹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럼 이제 서로 인사를 나눠야지." 무독옹의 말이 신호였음인가, 묵묵히 바퀴의자에 앉아있던 천수벽뢰가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까만 물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피해라! 화탄이다!" 남궁격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기력이 없는 자들이 무슨 수로 천수벽뢰의 화탄을 피한단 말인가? 쾅쾅! 화탄은 겨우 메추리알만한 크기였으나 그 위력은 대단했다.
요란한 폭음을 일으키며 화탄이 폭발하자 그 주위에 있던 철궁위대 셋이 합창으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들은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허공에 피보라가 확 뿌려졌다.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천수벽뢰가 사람이 적은 곳에 화탄을 날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남궁격의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너희들…… 내게 뭘 원하느냐?" "흐흐…… 남궁가야,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너의 목이다!" 만대모가 소리쳤다.
그녀는 지난날 남궁격의 인질이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한이 특히 깊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아주머니가 특별히 인정을 베풀기로 하지.
거기 있는 천노살성과 적발수룡만 놔두고 어서 꺼져라!" "뭐라고?" 어떻게 잡은 두 사람인가.
그런데 그들을 두고 가라니! 남궁격은 노해서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다행히 그는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남궁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마.
하지만 우리는 모두 중독되었는데 이대로 가란 말이냐?" "흐흐…… 이건 별거 아니다." 무독옹이 수중의 나뭇잎을 흔들었다. "세 시진만 지나면 자연히 해독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물론 그 동안 원수를 만나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거야 너의 운수이니 날더러 어찌하라는 말이냐?" 남궁격이 무독옹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원한과 분노에 사무쳐 파란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홱 몸을 돌렸다. "가자." 짧은 한마디.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
그 뒤를 철궁위대들이 따랐다.
조금 전의 의기양양하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어깨가 축 처지고 발끝을 질질 끄는 초라한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저자는 그래도 대세를 아는 인물이다." 멀어져 가는 남궁격을 보며 무독옹이 중얼거렸다.
그는 남궁격이 순순히 물러나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흐흐…… 제까짓 것이 버티면 어쩔 거냐? 다른 수가 없는데……." 무흔색투가 음흉하게 웃더니 슬금슬금 적발수룡에게로 다가갔다. "나 원, 이 기회에 저자에게 꼭 본때를 보이고 싶었는데……." 투덜거리는 것은 만대모였다.
그녀는 남궁격을 그대로 보낸 게 못내 불만이었다. "서둘지 않아도 곧 그럴 때가 올 것이다." 모닥불을 밟아 끈 무독옹이 복청양에게로 갔다.
사실 복청양은 지난날 그를 크게 골탕먹인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어? 이거 봐라." 그가 복청양을 감싼 그물을 벗겨내다 탄성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그물은 토막이 나 있질 않은가? 이거야 말이 그물이지, 허깨비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소." 복청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어서 이거나 입에 넣어라." 무독옹이 작은 단약 하나를 복청양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게 뭐요?" "해독약이다.
그걸 먹으면 곧 공력이 회복될 것이다." "고맙군." 복청양은 주저하지 않고 단약을 입에 넣었다.
무독옹이 주는 거라 좀 꺼림칙하기는 해도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사이 무흔색투는 적발수룡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공연히 그녀의 알몸을 주물러 가며…….
여섯 사람은 자리를 옮겨 야트막한 동산 위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사방이 탁 트여 혹시 누가 나타난다면 즉각 눈에 뜨이겠지만 아래에서는 산에 있는 사람들이 쉽사리 눈에 뜨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죽은 철궁위대의 옷을 벗겨 걸친 적발수룡은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칠대공적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점에 다소 놀란 듯했고, 다른 칠대공적들에게 자신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에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그저 구석에 물러앉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반면에 무독옹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상당히 의기양양한 모습들이었다. "흐흐…… 그 교활한 녀석이 어깨가 축 처져서 물러나는 꼴을 다들 보았겠지?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어째서 그걸 혼자 보았다고 하느냐? 여럿이 다 함께 보았으면서……." "그래그래, 우리 다같이 보았다.
하지만 그 녀석을 그 꼴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어르신네란 말이다." "흥, 그놈이 적룡에게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우쭐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금한 게 있소." 복청양이 불쑥 물었다.
그는 이 괴인들 중 무독옹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다 파악하고 있었다.
칠대공적이라면 천하의 골칫거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여있다는 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설마 하니 칠대공적이 모여 무슨 단체라도 만들었다는 말인가? "네가 무얼 궁금해 하는지 안다." 무독옹이 복청양을 보며 말했다.
복청양은 그를 알지만 그는 복청양을 몰랐다.
만일 만독화원에서의 일을 알고 있었다면 이처럼 태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왜 너를 도왔느냐는 것이지?" "그렇소." 복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받은 건 감사하지만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소." "흐흐…… 그럴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너는 평생을 생각해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쳇, 내가 누구를 돕다니, 나는 여자가 관여하지 않은 일을 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색마야, 그럼 저 계집은 여자가 아니란 말이냐?" 만대모가 불쑥 쏘아붙였다.
적발수룡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무흔색투가 조금 난처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적발수룡은…… 음…… 분명 여자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어차피 한솥밥을 먹을 처지이니 손댈 수야 없는 일이 아니냐?" "누가 한솥밥을 먹는다고?" 적발수룡이 파랗게 빛나는 눈을 들어 무흔색투를 노려보았다.
그러잖아도 심사가 불편하던 참에 무흔색투의 말이 비위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흐…… 예가야, 너무 서둘 것 없다.
어차피 우리와 함께 가면 다 알게 될 일이니……." "누가 너희와 함께 간다고 했느냐? 난 너희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한 바 없으니 공연히 생색내려고 하지 마라.
보아하니 이번 일도 천노살성을 구하는 게 목적인 것 같으니 난 너희들에게 빚진 거 없다.
그러니 난 가겠다." 적발수룡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겉으로 보아선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 자리를 뜨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앉아라." 묵직한 음성이 발을 묶었다.
지금껏 잠자코 있던 천수벽뢰가 입을 연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단 말을 꺼내자 그의 음성에는 감히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실려 있었다.
적발수룡이 멈칫했다.
그녀도 천수벽뢰에게만은 뭔가 꺼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모두 한 주인을 섬기는데 네가 뭐라고 잘난 척하겠다는 거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잠자코 있어라." "너희가 모두 한 주인을 섬긴다고?" 적발수룡은 아연했다.
천수벽뢰의 말이 그만큼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다.
천하의 칠대공적이 한 주인을 섬기다니! 누가 그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놀란 것은 비단 적발수룡뿐만이 아니었다.
복청양도 큰 의문에 사로잡혀 그들을 보고 있었다. '누가 있어 칠대공적을 수하로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아무리 견문이 좁다고 하지만 그런 자가 있다는 소리는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게…… 대체 누구냐?"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경거망동하겠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먼저 죽이고 말겠다." 천수벽뢰가 입을 다물었다.
할말은 다하였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적발수룡이 마지못해 몸을 도로 앉히고 있었다.
천수벽뢰의 위엄에 눌리고 네 사람의 흉흉한 눈빛에 주눅이 든 것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녀보다 하수는 하나도 없었다.
천수벽뢰의 말처럼 함부로 성질을 앞세울 일은 아니었다.
적발수룡은 그제야 그걸 깨달았다.
이윽고 침묵을 깬 것은 복청양이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소." "흠, 우리가 왜 너를 도왔는지 그 이유를 밝히라는 말이지?" "그렇소." "그건 별로 길게 설명할 일도 아니지." 무독옹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점점이 떠 있었다.
그러나 간혹 검은 구름이 보이고 점차 그것들이 자리를 넓혀가는 것으로 보아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다만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았을 뿐이다." "그게 누구요?" "너도 아는 사람이다.
너보고 이리로 가라고 한 사람이니까." "그럼……?" 복청양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사실 만대모를 본 순간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만대모는 바로 손노인의 수하니까. "손노인이 이 모든 일을 시켰단 말이오?" "그렇다.
우리는 그의 부탁을 받았다." "그러면 당신들이 섬기고 있다는 주인이 바로 손노인이오?" "아니다." "아니라고?" "넌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우리는 손노인의 부탁으로 이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의 수하는 아니다.
흐흐…… 손노인도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우리의 주인이 될 자격은 없다." '손노인의 수하가 아니라니…… 그럼 또 다른 배후가 있다는 말인가?' 아주 단순해지던 일이 다시 뒤엉키는 것 같아 복청양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도대체 이 일에는 어떤 배후가 있으며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말인가? "너무 머리 쓸 것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너는 그분을 모를 테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네가 떠난 직후 손노인은 너의 행보가 이미 외부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연유로 그리된 것인지는 몰라도 정보가 샌 것이지.
그래서 너의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 짐작한 손노인이 우리에게 부탁하여 너를 도우라 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는데, 우리의 도움은 여기까지다.
여기서 제마옥은 멀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네 힘으로 해 나가야만 한다." "당신들 넷이면 제마옥을 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어째서 손노인은 그 일을 당신들에게 맡기지 않고 굳이 나를 시키려는 것이오?" "자세한 내막이야 나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부탁을 받았고 그 일을 끝냈으니 이만 가겠다." 무독옹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러자 만대모도 일어나 천수벽뢰가 탄 바퀴의자 뒤로 돌아갔다.
그녀는 워낙 힘이 좋아서 바퀴의자를 미는 데는 제격이었다. "그럼, 나는?" 적발수룡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들을 보았다. "흐흐…… 너는 우리와 같이 간다.
너를 만나고자 하는 어른이 있으니." 무흔색투가 적발수룡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고의적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몰라도 그의 손이 깊숙이 들어가 젖가슴 언저리를 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적발수룡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일어났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오." 복청양이 앉은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손노인의 집에서 혹시 백아아를 보지 못했소?" "그 요사스런 계집 말이냐?" 백아아의 이름이 거명되자 무독옹의 얼굴이 조금 요상하게 변했다. "그렇소." "흥, 그 계집의 일은 더 이상 거론하기도 싫다.
하지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무독옹이 앞장서고 만대모가 천수벽뢰를 대동하고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무흔색투가 적발수룡을 데리고 가는데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들 다섯 명은 빠르게 산 밑으로 내려갔다. * * * 바람이 분다.
삭막한 바람이었다.
바람 끝에는 메마른 기운이 묻어 있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오직 사기(死氣)만이 가득한 바람이다.
그 바람의 끝을 붙잡고 한 사나이가 있었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아래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달랑 걸친 사나이였다.
강철 같은 탄탄한 근육과 구릿빛 살결이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사나이는 무릎 위에 뭉툭한 철검을 놓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은 철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으며 눈은 무심하게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삭막한 바람과 바위, 그리고 황량한 벌판만이 존재하는 그 어둠 속에 무언가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바위를 닮아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사나이 스스로가 바위 그 자체였다.
바위 위에 앉은 사나이가 바위의 연장선이 되어 그대로 굳어가고 있었다.
무심한 모습이다.
인간의 오욕칠정, 감정이라 일컫는 것이 사나이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나이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바위나 바람 같은 무생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황량한 벌판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낯선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둠 속.
사나이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저게 누구인가?' 물론 그 눈의 주인은 사나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저자는 단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청부하여 죽음의 끝자리에 서서 도전을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
눈의 임자가 보기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만용의 주인공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나이에게는 분명 단황이라는 이름 이상이 주는 어떤 의미가 있었다. '저게 누구인가?' 눈의 임자는 사나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흡사 자석에 끌린 쇠붙이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눈의 임자는 암혼이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지금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단황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랬다.
바위 위에 무심하게 앉아 삭막한 바람과 교감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단황의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암혼은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흡사 태산을 본 것 같았다.
아니, 태산이라고 해도 이처럼 엄청난 느낌으로 숨막히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단황은 바다였고 하늘이었다.
혹은 그 이상이었다.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의 기도가 그의 전신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암혼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의 손에 죽은 생명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 숫자를 세었으나 일백이 넘어서는 순간부터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죽은 사람의 수효를 세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그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산 자들이었다.
산 자야말로 그에게 황금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보다 더한 살인의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살인의 미학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표적을 노릴 때의 그 팽팽한 긴장감이 좋았고 표적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을 때의 그 따뜻한 선혈의 감촉이 좋았다.
그리고 상대가 최후의 순간에 경악하여 바라보는 눈빛이야말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는 위대했다.
최소한 상대가 경악하여 그를 바라보는 순간만은.
그러나 지금의 그는 전혀 위대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이 황량한 벌판에서 단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때만 해도 그는 즐거웠다.
어떤 멍청한 자가 그에게 도전하였는지는 몰라도 그자의 심장에 검을 꽂고 붉은 피가 흐르는 광경을 상상하면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단황이 어둠을 밟으며 나타나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단황은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그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어와 약속한 바위에 몸을 앉혔을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저 전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이나 지났건만 단황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둠에 완전히 동화된 것 같았다.
아니 그런 표현은 적당치 않았다.
그는 스스로 어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둠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그가 바로 어둠의 지배자였다.
암혼은 벌써 다섯 번이나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나 존재했으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을 노리는 살수에게서 흔히 풍겨나오는 살기 같은 것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무형(無形)이었으며, 저 불어오는 바람에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틈 하나, 그렇다.
단지 바늘 끝만한 틈 하나만 있으면 그는 상대의 가슴에 검을 꽂을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대비를 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피하지 못할 필살의 일검을.
그리고 지금의 단황에게는 틈이 너무 많았다.
전신의 모든 곳이 허점투성이였다.
저자는 어이없게도 살수가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암혼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어쩌면 저자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군.' 문득 암혼은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미소를 짓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때문에 몹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다지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후후…… 하긴 죽는 것도 괜찮겠지.
사람은 어차피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까.' 암혼은 검을 움켜쥐었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움직일 기운이 생겼다. '하지만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나 암혼을 건드린 대가로!' 지금까지 그가 죽인 자들 중에는 비겁한 자도 있었고 용감한 자도 있었으며 치사한 자도 있었고 감탄이 나올 만큼 위엄있는 자도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의 죽음 하나하나는 모두 그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숨을 쉬는 공기처럼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이제 그 수많은 명단 속에 저 벌판처럼 황량한 자의 이름도 포함될 것이다.
설사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암혼은 움직였다.
암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에는 정확하게 다섯 군데의 검상이 나 있었다.
검상은 깊지 않아서 그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얕지도 않아서 그가 두 번을 움직이게 하지도 않았다.
하기야 두 번째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살수에게 기회는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의 기회를 원한다면 그는 이미 살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암혼은 지금 살수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분명히 단황의 뒷목에 검을 꽂아넣었는데 어째서 피를 흘리는 것은 그 자신이고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검이 두 동강이 났는지 이유를 몰라하고 있었다.
단황은 여전히 무심하게 앉아 있었다.
무릎에 놓인 철검도 여전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철검 끝에 약간의 피가 묻어있다는 것과 그가 몸을 돌려 암혼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목상처럼 굳어있던 암혼의 몸이 갑자기 격하게 흔들렸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소?" 차고 건조하지만 어딘지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너를 죽이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단황이 심유한 눈으로 암혼을 보며 말했다. "나의 목적은 너를 수하로 거두는 것이다.
너는 내가 거둬들여야 할 열세 개의 흑주 중의 하나니까." "나를 수하로 거두겠다고?" 암혼은 웃으려고 했다.
통렬하게 상대를 비웃은 뒤에 그 자리에서 검을 돌려 자결하려고 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다.
이 암혼을 수하로 거두겠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암혼은 자신이 비웃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나이의 앞에서는 절대로…….
제 14 장 제마옥(制魔獄) 제마옥(制魔獄).
제마옥은 태행산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뒤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였고 앞은 계곡 사이로 가늘게 난 외줄기 길이었다.
그야말로 한 명의 장수가 지키면 만 명의 병사가 넘보지 못한다는 천애의 험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제마옥은 단심백결회가 창건될 당시 천품신성 악자량이 통천삼십삼마를 가두기 위해 건설한 곳이었다.
천성이 인자한 천품신성은 통천삼십삼마의 하늘을 노엽게 하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투항만 한다면 이곳에 가두어 목숨을 부지하게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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