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2 - 9편 (9/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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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2 - 9편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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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좋으냐?" "그럼, 좋고말고.
최소한 손바닥에 장을 지질 일은 없어지지 않았느냐?" "큭큭! 우리가 잘못한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나서서 도와주었어야만 했다." "어? 그러다가 우리 밑천이 드러나면 어쩌냐?" "그럼, 너는 우리가 저 녀석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은 게 옳은 일이라는 것이냐?" "그건 다 저 녀석이 모질지 못한 탓이다.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은 최소한 세 번은 그 밥맛 떨어지는 중놈들을 죽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죽은 것이다.
스스로 원해서 당한 화니 누굴 원망할 것 없다." "저 녀석이 모질지 못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단 말이냐? 우리가 나서기만 했어도 저 녀석이 저처럼 허망하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게 다 제 녀석이 못난 탓이니 이제 와서 왈가왈부 할 거 없다.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저 녀석이 조금 더 살아있어 봐야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넌 참으로 태평하구나." "그래 태평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거냐?" "그런데 네 녀석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까닭은 무엇이냐?" "어? 이건 눈물이 아니다.
그래, 땀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얼굴에 흐르는 것도 땀이고 내 얼굴에 흐르는 것도 땀이다.
큭큭!" "클클클……." "빌어먹을! 오늘 따라 왜 이리 덥단 말이냐? 푹푹 찌는구나." "정말 빌어먹을 더위다.
난 더운 게 싫다. "그렇다고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냐?" "내가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건 말건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래, 그래.
우리 실컷 주먹질이나 하자.
저 노린내나는 중놈들이 갈 때까지." "클클클……." "큭큭!" * * * 복청양은 눈을 떴다.
멀리 하얀 구름띠가 보였다.
구름은 단애의 허리를 친친 동여매고 있었다.
하얀 구름띠를 두른 단애는 흡사 거대한 석인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었다.
정말로 더운 날씨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온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구나.' 복청양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고 사지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으며 전신의 혈관에는 따뜻한 피가 돈다.
그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으로…….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깨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소림십팔나한과 싸울 때 받은 충격 때문이지, 벼랑에서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저 아득한 절벽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몸이 멀쩡했다.
기적이랄까? 하지만 기적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저처럼 높은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하다니! 적어도 복청양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복청양은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아래가 출렁하고 흔들렸다.
그 출렁임은 너무 심해서 복청양은 한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서 흔들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한참을 기다리자 흔들림이 멎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자 다시 흔들림이 덮쳐왔다.
그는 마치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흔들림이 이토록 심할 리가 없다.
그제야 복청양은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건…….' 그것은 등나무 넝쿨로 엉성하게 엮은 것으로 그물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등나무 그물이 절벽에 삐쭉이 솟아나온 나무와 나무 사이에 교묘하게 얽혀져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복청양은 바로 그 그물 위에 떨어진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그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물은 각각 일 장의 간격을 두고 세 개가 엮어져 있었다.
그런데 복청양이 위에서 떨어지는 충격으로 그 중 두 개를 그대로 뚫고 내려와 세 번째 그물에 얹힌 것이다.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그가 떨어진 지점이 이 그물 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콩가루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저 절벽 위에서 떨어져서 무사할 리는 없으므로…….
그리고 그물이 석 장이 아니고 한 장이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가 아래로 떨어지는 기세가 너무 강하여 세 번째 그물마저 통과하였어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 이 모든 게 맞아떨어져 복청양은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연이든 어쨌든……. '대체 누가 이런 것을…….' 자연적으로 이런 그물이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건 상식 이전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물은 분명히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그물을 만들어 여기에 걸어두었다는 말인가?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복청양은 더 이상 힘들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알 수 없는 일에 매달려 무한정 머리를 쥐어짜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모를 일은 모르는 대로 그냥 두는 것이 옳다.
그러면 언젠가는 해답이 나올 것이다.
복청양은 그물의 흔들림을 최대한 억제하며 그물코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은 아직도 멀고 멀었다.
그러나 최소한 저 아래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만은 보였다.
무언가 시커먼 것, 나무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내려가고 볼일이다." 품속을 더듬어 삼절묵창이 아직도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 복청양은 조심조심 기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물을 벗어난 그는 거미처럼 벼랑에 매달렸다.
벼랑은 위에서 볼 때와는 달리 의외로 의지할 곳이 많았다.
그는 벼랑에 솟아나온 작은 나무들을 움켜쥐고 주의하여 아래를 보면서 한 걸음씩 밑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많은 주의를 요하는 매우 더딘 작업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은 복청양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힘든 줄도 몰랐다.
꼬박 반 시진.
마침내 바닥이 환히 보일 때 복청양은 훌쩍 몸을 날렸다.
대지(大地).
그 단단하고 푸근한 품에 발을 디뎠다.
복청양은 갑자기 자신이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전신에 활력이 샘솟는 것 같았다.
소림십팔나한과의 싸움에서 입은 약간의 내상도 이제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곳도 있구나!"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곳은 커다란 항아리 모양을 한 분지였다.
사방에 끝도 모를 절벽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항아리의 밑바닥에 와있는 셈이었다.
아래에는 넓은 숲이었다.
나무들은 그가 생전 처음 보는 종류로 키가 몹시 크고 잎사귀가 넙적했다.
잎사귀 사이에는 히끗히끗한 것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아마도 열매인 것 같았다.
바닥에는 풀들이 허리께까지 자라 있었고 흙은 검은색이었다.
흙이 메마르지 않고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물은 부족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방에 워낙 거대한 절벽이 버티고 있어서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면 사정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밖으로 나갈 일이 난감했다.
하지만 복청양은 일단 그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난 살아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들어가며 주의깊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간간이 새가 울부짖고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인간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깊은 절벽 아래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사람의 인적이 닿지 않은 태초의 원시림에 와있는 것이다.
아직 아무의 발길도 닿지 않은 처녀림에 처음으로 족적을 남기는 것이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복청양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조금 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말로 물이었다.
어느 한순간 숲이 끊어지며 작은 공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지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수량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바닥이 환히 보였다.
바닥에는 둥글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돌들이 무수히 깔려 있었고 그 돌 사이로 작은 물벌레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복청양은 물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지독한 냉기가 전신으로 퍼져왔다.
물은 전신이 짜르르 하도록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어깨를 통해 발바닥까지 미치는 것 같았다.
복청양은 호기심에 이끌려 바닥에 반짝이고 있는 돌을 하나 집어 보았다. "보석이로군."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은 물살에 휩쓸려 반들반들하게 닳은 평범한 돌이었다.
그러나 돌 틈새에 반짝반짝 빛을 내는 금빛 알갱이가 섞여 있어서 정말로 보석처럼 보였다.
이런 분지에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한 번쯤은 욕심을 낼 만한 돌이었다.
그러나 복청양은 설사 그게 정말로 보석이라고 하더라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 산속에 금은보화가 잔뜩 쌓여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허리를 숙여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 한 모금을 마실 때는 뱃속이 다 얼얼한 게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모금 세 모금을 마시면서 그런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청량함만이 가득했다.
물맛이 너무 좋아서 그는 한동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에 물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무수한 물방울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이 순간 그는 보석으로 만든 사람 같았다.
아무런 가식이 없는 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리라. "밖으로 나갈 걱정만 없다면 이곳이 바로 별천지로군." 그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말했는데 그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산에서 생활해 온 복청양이었다.
사부인 천산오조는 목소리만으로 지도해 주는 게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대자연의 품은 넉넉하고 풍요로왔다.
그러나 뼛속 깊숙이 스며드는 외로움마저 감싸줄 수는 없었다.
외로움이 절실할 때는 복청양은 마치 앞에 누가 있는 것처럼 혼자말을 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외로움이 한결 덜해지는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그런 습관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다.
사람들의 틈에 묻혀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산에서의 일은 모두 잊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깊은 숲속에 완전하게 혼자가 되면서 그러한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되살아난 것이었다.
복청양은 마치 오래 떠나있던 고향에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풍덩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물이 그의 옷을 흠뻑 적셨다.
차갑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복청양은 고개를 돌렸다.
끼익끽! 멀지 않은 나무 위에 회색빛 털을 가진 원숭이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원숭이는 조금 큰 다람쥐만한 크기였는데 유난히 긴 꼬리로 나무 둥치를 감고 작은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움켜쥔 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복청양을 보고 있었다. "너로구나." 복청양의 얼굴에 반가움이 피어올랐다.
물속에는 누렇고 딱딱한 껍질을 지닌 열매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원숭이가 그걸 던졌고 그게 물을 튀긴 모양이었다. "나하고 장난을 하자는 거냐?" 동심이 발동한 복청양은 그 열매를 집어 원숭이를 향해 던졌다.
딱! 열매가 나뭇가지에 맞고 튕겨 나갔다.
그의 겨냥은 정확하여 원숭이의 손이 있는 바로 그 곁에 맞았다.
끼익! 원숭이가 놀라 나무 뒤로 몸을 감췄다.
그러나 그 녀석은 곧 빨간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먼저였다.
원숭이가 날렵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그 녀석의 손에는 어느새 다시 두 개의 열매가 들려 있었다.
그 녀석은 그걸 복청양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곁에도 미치지 못하고 떨어졌다. "솜씨가 형편없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복청양은 다시 그걸 주워 원숭이를 향해 던졌다.
하나는 일부러 빗나가게 던졌고, 다른 하나는 충분히 피할 수 있게 속도를 늦추어 원숭이를 겨냥했다.
그러나 원숭이는 피하지 않고 날아오는 열매를 빤히 보더니 긴 손을 뻗어 날렵하게 움켜쥐었다. "제법이다." 복청양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원숭이가 다시 그 열매를 던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 녀석도 겨냥이 정확했다.
그걸 받아든 복청양이 다시 던져 주었다.
사람과 짐승의 열매 던지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녀석은 할수록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열매를 던지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겨냥도 정확해서 이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도 쉽게 받아들 수 있었다.
어느 틈엔가 원숭이가 한 마리 더 불었다.
그 녀석은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더니 자기도 그 틈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날아오는 열매의 수가 두 배로 많아졌다. "이제야 좀 할 맛이 나는구나." 복청양은 쉬지 않고 열매를 받아 던져 주었다.
원숭이는 금방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로 불어났으므로 그 녀석들을 상대하자면 그의 손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그런 무의미한 장난이 계속되면서 복청양은 점차 마음이 유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머리를 억누르고 있던 수많은 걱정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가 미처 받아내지 못한 열매 하나가 돌에 부딪쳐 깨어졌다.
열매 안에는 노란 과육이 들어 있었으며 많은 물이 아래로 흘렀다. "조금 있다 하자." 그걸 본 복청양이 원숭이들에게 손을 저어 보이고는 그 열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원숭이들도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이 행동을 멈추고 복청양이 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매의 과육은 달고 향기로웠다.
하나의 맛을 본 복청양은 더 참지 못하고 사방에 가득 널려있는 열매를 집어 깨뜨린 후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순식간에 그의 주위에는 십여 개의 열매가 빈 껍질만으로 널려 있었으며 그는 포만감에 젖어 편안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에 있으면 최소한 굶어죽을 염려는 없겠구나.
설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십여 마리의 원숭이들이 나무 위에서 내려와 멀찌감치서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녀석들은 귀여운 빨간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는데 적의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와 한바탕 열매 던지는 장난을 하면서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그 중 한 마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에 복청양을 놀려준 놈인 것 같다. "이리 와라." 복청양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원숭이가 조금 더 다가왔다.
그러나 그 녀석의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듯 손이 닿는 거리까지는 오지 않고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거 먹을래?" 복청양이 껍질을 깬 열매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그의 손에서 열매를 널름 채갔다.
원숭이는 저만치 물러나더니 두 손으로 열매를 잡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원숭이들도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너희들이 나를 따르게 할 수 있겠다." 복청양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저것들은 사람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리라.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걸 안다면 저처럼 마음놓고 재롱을 부릴 리가 없었다.
부스럭!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여태 맛있게 과일을 먹고 있던 원숭이가 화들짝 놀라더니 몸을 돌려 쪼르르 달아나 버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원숭이들도 일제히 나무 위로 올라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였다.
복청양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키만큼 자란 풀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걸어나왔다.
두 발로 걷고 있는 하얀 물체.
그것은 사람이었다.
제 15 장 후웅권( 雄拳) 복청양은 잠시 멍했다. '이 산속에 사람이라니?' 인적이 전혀 닿지 않은 원시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그는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피부는 햇빛에 타 건강한 구릿빛이었고 머리는 길어서 배꼽께까지 늘어져 있었지만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 안팎인 것 같았다.
팔이 유난히 길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발은 나무껍질처럼 툭툭 갈라진 게 튼튼한 신발을 하나 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으로 그는 조금은 두려운 듯, 조금은 신기한 듯 복청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는 아무런 사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다만 짙은 호기심만이 먹물처럼 고여있을 뿐이었다. "너는 누구냐?" 품에 손을 넣어 삼절묵창을 움켜쥐며 복청양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원칙적으로는 이 깊은 계곡 밑에서 사람을 만난다면 의당 반가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가움에 앞서 꺼림칙한 생각이 먼저 드니 모를 일이었다. "누구……."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발음이 분명하지 않아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끽끽!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펄쩍 뛰어내리더니 그의 어깨 위에 널름 올라앉았다.
그러자 숲속으로 달아났던 다른 원숭이들도 다투어 몰려나와 그의 발 밑에 모여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 원숭이들과 몹시 친밀한 모양이었다.
복청양은 품속에서 손을 꺼냈다.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짐승은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언제나 정확하다.
저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저것들이 저처럼 친밀하게 굴 리 없다.' 그것이 복청양의 마음을 놓이게 만들었다.
그가 다가왔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하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복청양을 가리켰다. "너 누구……." 여전히 발음이 불분명한, 입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사람의 말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누구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어쩌면……?' 복청양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난 복청양이다." "보청……" "복, 청, 양." 복청양은 한마디 한마디를 떼어 천천히 발음했다. "보…… 처…… 양……." 그가 복청양의 말을 흉내냈다.
상당히 어려운 일을 하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복…… 청양." 이번에는 좀더 발음이 분명했다.
그는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상대와 똑같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환하게 웃었다.
한 점 티가 없는 웃음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복청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말할 줄 몰랐다.
그러나 처음부터 말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대화를 해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말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던 것이 복청양과 몇 마디를 나누면서 과거의 기능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넌 누구냐?" 복청양은 일부러 말을 단순하게 하고 천천히 발음하여 물었다. "너……?" "아니, 나말고 너." "나……." "그래." "나…… 는…… 몰라." "몰라?" "몰라." 그가 조금 더 다가오더니 손끝으로 복청양의 옷을 만졌다.
손가락에 옷이 닿는 순간 그는 급히 손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두려움이 깃든 얼굴이었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같았다.
복청양은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놀림이 점차 대담해지고 있었다.
그는 복청양의 전신을 만져 보았는데 그 손길이 조금은 거칠었다.
자신이 함부로 만지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복청양은 그 정도로 불쾌감을 느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한참을 어루만지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만져 보았다.
옷을 입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느낀 모양이었다.
문득 그가 뒤로 껑충 뛰어 물러나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열매를 주워 복청양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으라고?" "머거……." "고맙다." 복청양은 미소지으며 열매를 깨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일부러 천천히 먹었으며 아주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매우 만족스러운지 껑충껑충 뛰더니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봐, 가지마!" 복청양이 큰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듣지 않고 사라졌다.
그 움직임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것으로 경공의 대가라고 불리는 무림의 고수라도 저처럼 빠를 것 같지는 않다. "갔군." 복청양은 갑자기 허전함을 느꼈다.
아까는 그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세상이 텅 비고 혼자만 덩그라니 남아있는 것 같았다.
원숭이들의 끽끽거림도 이제는 즐겁게 들려오지 않았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두렵다는 것일까?" 복청양은 전신에 맥이 빠지며 꼼짝도 하기 싫어 냇가에 반듯하게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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