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는 눈을 감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아까의 그 청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복청양이 눈을 뜨자 반갑다는 듯 환히 웃었다. "너로구나." 복청양도 따라서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를 보는 순간 복청양의 외롭다는 생각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마치 오래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 그가 입 속으로 말을 우물거리며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과일들과 누런 떡 같은 것이었다. 자연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머거." 그가 말했다. 복청양은 사양하지 않고 먼저 떡 같은 것을 한 입 베어물었다. 약간 쓴맛이 돌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송진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나무껍질을 이용하여 만든 것 같았다. "이거 네가 만들었니?" "마…… 들어……?" 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복청양을 빤히 보았다. "이거 네가 만들었냐고?" 복청양은 천천히 반복하여 말하고 손으로 만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내가 마들었어, 만들었어." "솜씨가 좋구나." 복청양은 그가 가져온 것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마지막으로 물을 마셨다. 두 사람은 물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십여 마리의 원숭이가 뛰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모양으로 무릎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긴 머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원숭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고 털을 헤집어 이를 잡아주기도 했다. 어떤 원숭이들은 복청양의 곁으로 와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복청양이 돌아보면 놀라 후닥닥 달아났다가 금방 다시 왔다. 복청양은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어 보고는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아주 어릴 때에 이 계곡으로 들어와 줄곧 원숭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배웠던 말들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원숭이들과 친구로 지내고 있었으며 어쩌면 원숭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 계곡의 왕이고 지배자였다. 복청양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이 계곡에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뿐이었으므로……. 그와 힘들게 의사소통을 한 끝에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복청양은 다소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밖에 다른 사람이 없다면 그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천상 내 힘으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다른 길이 없어.' 복청양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너 이제부터 이름을 후웅( 雄)이라고 하자." 그를 부를 호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복청양이 한참을 궁리한 끝에 말했다. "후웅?"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래 후웅, 그거야말로 너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복청양은 미소지으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복청양, 넌 후웅." "난 복청양, 넌 후웅?" "아니, 내 이름이 복청양이고 넌 후웅이다. 후웅!" "후웅." "그래, 후웅." 복청양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 끝에 후웅에게 자신의 이름을 납득시키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사실 몹시 피곤하고 번거로운 일이다. 너는 당장 새 이름이 하나 생겼지 않았느냐? 지금까지는 그런 것이 없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이 살았을 텐데…….' 자연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제약이 없어서 좋다. 하지만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 두 사람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하나의 사회가 아닌가. 사회의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점차 불어서 오늘날과 같은 번잡한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후웅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복청양은 어쩌면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후웅에게는 이름이라는 게 필요없었다. 그것은 복청양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자신의 편의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인간성인 것이다. 후웅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제약이 되는지도 모르고…….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 동안 복청양은 계곡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계곡에는 후웅과 삼십여 마리의 원숭이, 그리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무는 몇 가지의 수종이 있었는데 그 중 복청양이 이름을 아는 것은 한두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 물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복청양이 처음 물을 마신 시내였고, 다른 하나는 웅덩이였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뿌연 빛을 띠고 있었으며 맛도 시큼했다. 하지만 후웅과 원숭이들은 그 물을 즐겨 마셨다. 복청양도 그들을 따라 그 물을 마셨는데 처음에는 약간 이상했지만 차차 익숙해지자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오히려 맑은 물보다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힘이 있었고, 이상하게도 그 뿌연 물을 마시면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후웅은 절벽 끝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동굴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으며 위로 바위가 불쑥 돌출되어 있어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젖을 염려가 없었다. 바닥에는 마른풀이 깔려 있었으며, 흙은 언제나 말라 뽀송뽀송했다. 계곡에는 그런 동굴이 몇 개 더 있었다. 후웅은 자신의 거처말고도 한 군데 더 같은 곳을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그곳은 좀처럼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으슥한 곳에 있었으며 동굴의 안쪽은 무너져서 돌무더기로 막혀 있었다. 후웅이 복청양에게 권한 누런 떡 같은 것은 나무껍질을 벗겨 말린 후에 가루를 내어 만든 것이었다. 놀랍게도 후웅은 불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나무와 나무를 마찰시켜 불씨를 얻었다. 그것은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혼자 살면서 익힌 재주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계곡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까마득한 절벽뿐이었다. 절벽의 높이는 너무 높아서 인간의 힘으로 저 위를 기어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저 위에서 누군가가 밧줄을 내려주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긴 밧줄을……. '차라리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는 게 쉽겠다.' 복청양은 자신의 희망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그는 암당한 절망감을 느꼈다. "후웅, 너는 어떻게 여길 들어왔니?" 복청양은 후웅이 어디서인가 구해온 버섯을 같이 먹고 있었다. 버섯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맛이 아주 좋아서 하나씩 입에 넣으면 그대로 녹아서 없어지곤 했다. 후웅은 곧잘 이런 버섯을 따오곤 했는데 어디서 따오느냐고 물으면 고개만 저을 뿐 가르쳐 주지 않았다. "굴로." 후웅이 대답했다. 요 며칠 동안 그는 복청양과 붙어다니면서 어휘 구사력이 많이 늘었다. 이제는 복청양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굴로?" 복청양은 자신이 후웅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가, 아니면 후웅이 자신의 말뜻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던가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응, 굴로." "굴을 통해서 여기로 들어왔다는 말이냐?" "그래." "그럴 수가…… 여기에 외부로 통하는 굴이 있다는 말이지?" 복청양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후웅의 말이 사실이라면 희망이 있다. 후웅의 설명은 이랬다. 후웅은 세 살이나 네 살쯤 되었을 때에 어머니와 함께 태행산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심한 부상을 당하고 원수에게 쫓기던 몸이었는데 무작정 달아나다가 후웅을 안은 채로 어느 동굴로 몸을 피했다고 한다. 그 동굴은 한도 없이 길었으며 몹시 어두웠다. 그 동굴에 대해 얘기할 때 후웅은 상당한 두려움을 나타냈다. 아마도 어렸을 때의 경험이 그에게 그런 감정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끝없는 동굴을 통과한 어머니는 마침내 이곳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녀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이내 숨을 거두었고 혼자 남은 후웅이 여태껏 원숭이들과 어울려 살아온 것이었다. "후웅, 그 동굴이 어디 있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복청양이 급히 물었다. 들어올 수 있으면 당연히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여인은 어린아이를 동반하고 부상까지 입은 몸이었다. 그런 몸으로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그 길은 그다지 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암담하기만 하던 현실에 한 가닥의 빛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몰라, 없어." 후웅의 대답은 짧고 간명했다. 그러나 복청양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후웅이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저 내뱉은 말일 것이다. "없다니? 왜?" "없어졌어. 지금은 갈 수 없어." "후웅, 그 동굴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야, 아니면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거야?" 복청양은 자신이 너무 길게 말했다는 걸 알았다. 후웅이 제대로 알아들었을지 의문이었다. 후웅이 잠시 그를 빤히 보았다. "그 동굴 없어졌어." "거기가 어딘데? 나를 안내해 줄 수 있겠어?" 아마도 복청양의 어조가 간절했던 모양이었다. 후웅은 다시 그를 빤히 보았는데 이번에는 분명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후웅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앞장서서 가기 시작했다. 후웅이 안내한 곳은 복청양도 알고 있는 두 번째의 동굴이었다. 그 동굴은 바닥에서 약 일 장 높이에 있었다. 하지만 동굴 앞에 큰 나무가 서 있어서 나무를 타고 오르면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후웅이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복청양은 이미 동굴 안이 어떤지 환히 알고 있었다. 동굴은 좁아서 팔을 벌리면 양쪽 벽에 닿았고 허리도 제대로 펴기 어려웠다. 그리고 불과 다섯 걸음도 가기 전에 돌무더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동굴이었다. 그런데 후웅은 그리로 복청양을 안내한 것이다. "여기가 거기란 말이지?" 복청양이 물었다. 그러자 후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마자." '그렇다면…….' 복청양은 비로소 후웅이 동굴이 없어졌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후웅은 어휘를 잘못 구사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한 것이다. '여기가 바로 밖으로 나가는 통로인데 어떤 일로 인해 그 통로가 막혀버렸다는 말인가?' 지금으로써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동굴이 무너졌다면 지진이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것이리라. 후웅이 이 계곡에 들어온 지 이십 년이 가까울 테니까 그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복청양은 전신의 맥이 쭉 빠졌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하지만 그가 미처 어떤 말을 하기 전이었다. 후웅이 쭈르르 달려가더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무더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후웅……." 복청양은 후웅을 만류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후웅의 동작이 너무도 익숙해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본 것처럼. 과연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무더기가 없어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구멍 저쪽은 몹시 어두웠고 찬바람이 불었다. "후웅." 복청양은 감격해서 소리쳤다. "너 저리로 들어가 보았구나!" 하지만 후웅은 복청양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소리치는지 몰랐다. 그는 그저 열심히 돌무더기를 치워 마침내 사람 하나가 기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다. 후웅이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복청양도 뒤를 따랐다.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들어오는 흐린 빛 때문에 생각처럼 어둡지는 않았다. 동굴의 너비나 높이는 바깥의 것과 동일했다. 바닥에는 약간의 물이 고여 있었으며 퀴퀴한 냄새가 났다. 복청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쪽 벽을 따라 많은 버섯이 피어 있었다. 이곳은 버섯의 집단 서식지인 모양으로 버섯 특유의 향기가 진동을 했다. '후웅이 그 버섯을 여기서 가져 왔구나.' 복청양은 그제야 어느 정도 후웅의 심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동굴은 후웅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록 어릴 때의 일이지만 후웅은 이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동굴이 막힌 후에도 가끔 돌무더기를 치우고 이곳으로 들어왔고 여기서 그 향기로운 버섯을 딴 것이다. 후웅이 삼십여 장쯤 전진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후웅의 앞은 다시 돌무더기로 막혀 있었다. 돌무더기에는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까의 돌무더기는 복청양이 그 동안 주의해서 보지 않았기에 몰랐지 자세히만 살폈으면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리 주의깊게 보아도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후웅, 이 뒤로는 들어가 보지 않았어?" 그러자 후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못 가." "그렇군……." 복청양은 후웅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후웅은 여기에서 막혀 더 전진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돌이 너무 커서 후웅의 힘으로는 다루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후웅은 구태여 힘들여 밖으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복청양은 달랐다. 이곳이 외부로 통하는 통로임을 확인한 이상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일단 시도는 해보아야 한다.' "조금 물러서." 복청양이 손짓하자 후웅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탓!" 복청양의 입에서 짧은 기합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찔러 나가고 있었다. 펑!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나뒹굴었다. '됐다.' 복청양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돌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 어쩌면 잘게 부숴서 길을 뚫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쇳덩이처럼 단단하고 거대한 암석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바위라면 그의 힘으로 부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서진 돌을 치워 통로를 만드는 일이야 후웅도 여태껏 해온 일이 아닌가! '후웅도 한 일이다. 내가 못할 리 없다. 얼마나 많은 돌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는 모르나 나는 꼭 통로를 뚫을 것이다. 한 달이 걸리든 일 년이 걸리든 해내고야 만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희망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후웅의 말처럼 이곳이 외부와 연결만 되어있다면 한 달이나 혹은 그 이상 시간을 투자하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안에서는 달리 할 일도 없지 않은가! "후웅,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뒤를 돌아보며 말하던 복청양이 멈칫했다. 후웅이 입을 헤 벌린 채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후웅은 복청양과 눈이 마주치자 두려운 듯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으로 부서진 바위를 가리켰다. 복청양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바위를 부수는 걸 보고 놀란 모양이구나." 복청양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서 후웅의 앞으로 썩 다가섰다. "이건 아주 간단한 재주다. 원한다면 너도 배울 수 있다. 배워 보겠니?" 후웅이 눈을 멀뚱멀뚱 떴다. 아직 복청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모양이다. "어디 한 번 막아 봐라." 복청양이 갑작스럽게 주먹을 쭉 뻗었다. 그의 주먹은 멍청하게 서 있는 후웅의 가슴을 정확하게 격타했다. 물론 공력을 주입하지 않았으므로 그 충격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더구나 후웅은 돌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정작 맞은 후웅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때린 복청양의 주먹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후웅이 신기하다는 듯 헤벌쭉이 웃는다. "이번에는 좀 아플 거다." 복청양은 이성의 공력을 운기하여 주먹을 뻗었다. 그의 주먹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후웅의 가슴을 때렸고, 후웅은 다소의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는 참으로 단단하구나. 철포삼 같은 외문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도 너처럼 단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복청양은 후웅이 알아듣건 말건 혼자서 신이 나서 중얼거렸다. 이 계곡에 들어온 이후 이제껏 이처럼 유쾌해 본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저 맞지만 말고 어디 한 번 막아 보아라." 복청양은 후웅에게 자신의 주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여러 번 반복하여 동작을 보여주자 후웅이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웅 역시 이런 장난에 부쩍 흥미를 느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자, 간다." 복청양이 다시 주먹을 뻗었다. 이번에는 후웅도 그저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손을 들어 방금 복청양이 가르쳐준 대로 막았다. 그의 동작은 매우 정확하여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복청양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아주 잘했다, 후웅." 그러자 후웅도 기쁜지 환히 웃는다. '잘하면 후웅에게 간단한 초식 정도는 전수해 줄 수 있겠다. 그 동안 입은 신세에 보답하는 길도 될테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복청양은 이 한적한 계곡 안에서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아낸 셈이었다. "나도 해봐도 돼?" 후웅이 말했다. "하다니, 뭘?" "나도 너 때리고 싶어." "네가 나를?" 복청양은 후웅이 맞은 데 억울함을 느끼고 자신도 그 보답을 하려는 것이거니 생각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나를 때릴 수는 없을 걸." "아파도 난 몰라." 후웅이 주먹을 뻗었다. 그는 주먹을 가볍게 쥐고 손등으로 복청양을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후려치고 있었다.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동작이었다. 복청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뒤로 젖혀 피했다. 그런데 그때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후웅의 주먹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면서 여전히 복청양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지 않은가! "엇?" 복청양은 기겁하여 몸을 틀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후웅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한 뒤였다. 후웅은 힘을 조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면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럴 수가…….' 복청양은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잠시 멍청했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후웅이 그의 얼굴을 때리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파?" 후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후웅, 다시 한 번 해봐라." "좋아." 재미를 느낀 후웅이 다시 같은 동작으로 주먹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충분한 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복청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두 발을 땅에 붙인 채로 몸을 뒤로 젖혀 후웅의 주먹을 피했다. 그의 피하는 동작은 참으로 시기적절하여 이번만은 분명히 후웅의 주먹을 피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피했다고 자신한 그 순간 후웅의 주먹이 다시 기이한 각도로 꺾이면서 안면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앗!" 복청양의 입가에 피가 주르르 흘렀다. 이번에 맞은 것은 아까보다 더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가슴에 번져가는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파?" 복청양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며 후웅이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 후웅, 다시 한 번 해보자." 복청양이 앞으로 나서며 손짓하자 용기를 얻은 후웅이 다시 주먹을 뻗었다. 복청양은 여전히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손을 들어 후웅의 공격을 막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후웅의 주먹이 여전히 그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었다. 복청양은 믿어지지 않아 다섯 번이나 시험을 하였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후웅의 주먹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 후웅의 주먹에 그다지 큰 힘이 실려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바닥에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 것이다. "후웅, 이번엔 마지막이다. 어디 와봐라." 복청양이 오기가 솟아 소리질렀다. 그러자 후웅도 사양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복청양의 신형이 움직였다. 이제껏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마침내 신법을 전개해서 후웅의 공격을 피하려 한 것이다. 그가 움직이자 후웅도 따라서 움직였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복청양의 앞으로 접근하더니 여전히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윽!" 복청양이 신음소리를 내며 비틀했다. 얼굴을 맞은 충격보다도 신법을 전개하고도 후웅의 공격을 피해 내지 못한 충격이 더욱 컸다. "나 이제 안해. 싫어." 복청양이 괴로워하는 것 같자 후웅이 팔을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제까지는 그저 즐거운 장난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아픔을 느끼자 그 아픔이 후웅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 그만하자." 복청양은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후웅은 무공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공을 익힌 그를 이겨낸 것이었다. 그것도 언제나 똑같이 주먹을 뻗는 간단한 동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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