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2 - 13편 (13/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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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2 - 13편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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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의 신록이 푸르르다.
그가 계곡으로 들어올 때는 더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계곡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가을이 되어 있었다.
온갖 색채로 무장한 나무들이 산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제마옥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아마도 제마옥과는 동떨어진 곳인가 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복청양은 깊이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한소리 우렁찬 함성을 뱉어 냈다. "우와아아아!" 사방의 산이 진동을 한다.
산은 그의 함성에 응답하여 수많은 메아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우와아아아!" 복청양, 그가 마침내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이다. * * * 폐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집의 외양새는 그대로였다.
대문을 두드리면 금방이라도 사람이 나올 것 같고 잡초가 무성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집은 비어 있었다.
집 안 어디를 둘러봐도 먼지가 가득하고 거미줄이 하얗게 엉켜 있었다.
문은 열려진 채 삐걱거렸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된 쥐들이 제멋대로 설치다가 조금은 수상한 눈으로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복청양은 손노인의 방에 와 있었다.
병풍으로 가려졌던 작은 문은 환히 열려 있었고 문 저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백아아도, 복금사도, 그들이 있었던 자취마저도 간곳이 없었다.
이 당당한 저택의 주인이던 손노인도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큰 저택이 텅 비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지난 석 달.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손노인의 집을 나오면서 복청양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고 있던 끈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 * 은하수정원의 밤은 변함없이 흥청흥청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삐이걱 대문이 조용히 열렸다.
손에 등롱을 든 노복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진물이 흐르는 눈을 껌벅거리며 방금 대문을 두드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뉘신지……." "백소저를 만나러 온 사람일세." 청년이 말했다. "아가씨 말입쇼?" 노복은 등롱을 들어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은하수정원에 오는 손님이라면 당연히 대문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렇게 후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아니, 이곳에 후문이 있다는 것조차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잠시 청년의 얼굴을 뜯어보던 노복이 이윽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고, 공자님이셨군요!" "날 알아보겠는가?" 복청양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계곡에서 오래 생활을 한 덕분에 지금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거의 거지나 마찬가지인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노복은 용케도 그를 알아본 것이다. "그러믄요.
제가 어찌 공자님을 몰라뵙겠습니까." "다행이로군.
백소저는 안에 있는가?" "아가씨는 지금 계시지 않습니다." 노복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주인 어른을 뵙고자 하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요." "부탁하네." "들어오시죠." 노복이 등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등롱을 한껏 아래로 내리는 것이 복청양의 발 밑을 비추어 주려는 모양이다.
복청양은 노복의 마음씀이 고마워 그저 웃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전신을 담궈 몸을 씻은 복청양은 시비들이 준비해 준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시비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이 은하수정원 내에서 그는 귀빈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자 음식상이 나왔다.
급히 차려 나온 것인데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의 성찬이었다.
복청양은 배가 고픈 김에 사양하지 않고 배불리 먹었다.
그가 왕부인의 처소로 안내된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왕부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복청양을 보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담긴 얼굴이었지만 애써 그런 내색을 감추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개의 찻잔이 맑은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넓은 방안에 차향이 가득하다. "복소협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윽고 왕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은 지난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수척한 기운도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마른 것 같기도 했다. "어째서입니까?" 복청양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차맛이 혀끝을 부드럽게 적셨다.
계곡 속에 있으면서 이런 것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한 잔의 차, 입에 맞는 음식, 그리고 감정이 오가는 대화.
그러나 막상 그러한 것들을 다시 대하게 되자 그렇게까지 그리워할 가치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복소협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죠." "제가 죽어요?" 복청양은 입가에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왕부인과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역시 여전하다. "소문에 의하면 복소협은 태행산에 있는 제마옥에 갔다가 소림십팔나한에게 당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걸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완전히 헛소문은 아닙니다.
그때 제가 소림십팔나한을 만나 곤욕을 치른 건 사실이니까요." 복청양은 어떻게 해서 계곡으로 떨어졌으며 간신히 빠져나오게 됐는지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후웅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구태여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굳이 얘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군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왕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고생을 하셨군요." "뭐 고생이랄 것까진 없습니다.
좋은 경험을 한 셈이죠." "하긴 나도 복소협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말은 믿지 않았어요.
나는 이래봬도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복소협은 절대로 요절할 상이 아니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복청양이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아의 일을 묻고 싶은 거지요?" 왕부인이 앞질러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의 일이라면 달리 말씀드릴 게 없군요.
그 아이는 그때 복소협과 나간 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럼……?" 복청양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역시 손노인이 백아아를 인질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의외로 왕부인은 별달리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집에는 오지 않지만 가끔 연락을 보내오죠.
이틀 전에도 그 아이의 서신을 받았어요." "다행이군요.
그러니까 백소저가 어떤 구속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로군요?" "구속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게……." 복청양은 석 달 전에 손노인의 집에서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왕부인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매만졌다.
그녀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몹시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복청양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니까 복소협이 그 고생을 한 것은 바로 우리 아아를 위해서였군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 일에는 누이동생도 연관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군요.
그러고 보니 우리 모녀는 복소협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군요." "그런 말씀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닙니다."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왕부인은 잠시 고개를 돌려 벽으로 시선을 주더니 이윽고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복청양을 보았다. "하지만 복소협이 걱정하는 것처럼 우리 아아가 부자유스런 처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요.
아아는 스스로 원해서 어디엔가 머물고 있으며, 오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내가 한 번 연락을 해보기로 하죠." "가능하겠습니까?" "복소협도 그 아이에게 할말이 많을 테고 그 아이도 분명 복소협을 만나고 싶어할 거예요.
그러니 내가 연락을 하면 금방 달려올 거예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며칠 기다려야만 할 텐데요.
그때까지 여기에 머무시겠어요?" "글쎄요……." 복청양은 조금 머뭇거렸다.
백아아를 만나자면 은하수정원에 있는 게 마땅하나 지나친 환대가 마음에 걸린다.
더구나 여기는 기녀원이 아닌가. "가능하다면 이곳보다는 가까운 객잔에 머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가 가진 노자가 없군요." "그 일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왕부인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복청양이 돈 얘기를 꺼낸 게 그녀를 즐겁게 한 모양이다. "내가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죠.
그리고 약간의 은자도 준비할 테니까 부디 사양하지 마세요." "염치없습니다." 복청양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돈 문제를 거론한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자유롭게 활동하자면 역시 금전적인 문제가 우선 해결되어야 한다는 걸 복청양은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여러 가지 고초로 알고 있었다.
왕부인의 처소를 나온 복청양은 잠시 마당에 서서 달도 없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구름이 끼어있는 게 아무래도 내일은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았다.
이윽고 깊은 탄식을 토해낸 복청양은 몸을 돌려 후원의 거처로 돌아갔다.
스슷! 복청양이 사라진 잠시 후, 하나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떠올랐다.
그림자는 어둠의 일부분이 되어 나무에 바싹 붙어서서 방금 복청양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노살성……."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역시 살아 있었구나.
흐흐, 그럴 줄 알았다.
이 어르신네는 네가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네가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단 말이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
그는 만리추종 섭등이었다. "이 어르신네가 일단 점찍은 이상 그 누구라도 나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말로 죽기 전에는.
네 녀석이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지난 석 달 동안 모습을 감춘 것은 분명히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을 것이다만 그게 무엇이든간에 이 어르신네의 손으로 꼭 밝혀내고야 말겠다." 스스슷! 만리추종이 사라졌다.
후드득!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는 마당에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 17 장 허실(虛實) 소나기로 그칠 줄 알았던 비는 꼬박 이틀을 퍼부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져 배수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은 성내는 금방 물바다를 이루었고 낮은 지대, 빈민들이 사는 지역은 침수가 된 곳도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복청양이 머물고 있는 객잔까지는 물이 차 오르지 않았다.
그는 왕부인의 배려로 최상의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객잔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흡사 왕족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들었는데 그 환대가 지나쳐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었지만 백아아를 만나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
또한 왕부인은 날마다 자신이 손수 만든 음식을 보내주었고, 마련해 주겠다는 은자도 복청양이 놀랄 만큼 거액을 보내왔다.
복청양은 그 중 절반을 간곡한 거절의 뜻과 함께 돌려보냈지만 남은 돈도 그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은 활짝 개었다.
하늘은 언제 비를 내렸냐는 듯이 청명하였으며 푸르른 가을기운이 완연하다.
참으로 얄궂은 하늘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철퍽철퍽! 깊은 밤, 한 대의 마차가 아직도 물이 빠지지 않은 대로를 달려오고 있었다.
화려한 사두마차였다.
그러나 마차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고 말들도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먼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
마부석에 앉은 것은 소벽과 소옥이었다.
평소에는 쉬지 않고 재잘거리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지친 것은 말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윽고 마차가 복청양이 머물고 있는 객잔 앞에 멎었다.
소옥이 훌쩍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작은 주먹으로 굳게 닫힌 객잔의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컹컹컹컹! 기다렸다는 듯이 동네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넓은 대로가 개들이 짖는 소리로 가득하다.
이윽고 안에서 문이 열렸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나온 점원은 소옥을 보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은하수정원에 기대어 장사를 하는 처지로 소옥을 몰라볼 리 없는 것이다. "손님은 어디에 있느냐?" 소옥이 다짜고짜 물었다.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복청양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건 다 알 것이다. "이, 이층에 계십니다." 점원이 다급히 대답한다. "혼자 계시느냐?" "그, 그러믄요."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소옥이 쪼르르 마차로 달려갔다. "아가씨."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내린 것은 백아아였다.
백아아의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쓰러질 듯 휘청이다가 간신히 문설주를 붙들고 몸의 중심을 바로잡았다.
안색이 극도로 창백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요?" 복청양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문으로 들어서는 백아아를 보는 순간 그도 가슴 한구석에 뜨거운 불 한 송이를 지펴 놓은 것 같았다.
불길은 훨훨 타올라 순식간에 그의 몸을 뜨겁게 덥혔다.
그러나 그는 달려가 그녀를 부둥켜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살아 계셨군요." 백아아의 입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한 방울 눈물이 이슬이 되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 어머니가 말합디다.
난 쉽게 죽을 상이 아니라고." "그래요." 백아아가 무작정 고개를 주억거렸다. "복공자는 쉽게 죽을 상이 아니죠.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어요." "거기서 밤을 새울 작정이 아니면 들어오시오.
남의 이목도 있으니까." 그제야 백아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반가움에 휩싸여 자신의 실태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아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객잔에서는 최고급에 속하는 특실이라 방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
커다란 침상이 한편에 있었고 향목으로 만든 의자와 탁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의자에 몸을 앉혔다. "건강해 보이는구려." 백아아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복청양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실상 많이 말라 있었다.
그 동안 마음 고초가 심했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복청양은 가슴이 아파왔다. "복공자도요." "나야 그 동안 잘 놀고 지냈으니 건강할 수밖에.
그보다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많소." "그럴 거예요." 백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노인이 당신을 순순히 풀어준 건 다소 의외요.
손노인은 금사와 함께 당신을 인질로 잡고 있지 않았소?" "그건 복공자가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백아아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는 처음부터 손노인의 인질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과 저는 서로 대등한 입장이었죠.
같은 주인을 섬기는……." "방금 뭐라고 했소?" "같은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했어요." 복청양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백아아를 보았다.
그만큼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당신한테 주인이 생겼단 말이오? 그것도 손노인과 같은?" "그래요." "그게 누구요?" "말할 수 없어요." "그럼 당신은 처음부터 인질이 아니었단 말이오? 나오려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었단 말이오? 손노인이 당신을 구금한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해서 거기에 있었단 말이오?"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복청양은 자신이 무엇을 묻고 있는 지도 몰랐다.
혼란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런 복청양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백아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구구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간단한 동작이 지금까지 그녀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복공자." 백아아가 주저하더니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복청양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 순간 그녀는 잠시 움찔했지만 그대로 하얗고 작은 손으로 복청양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요.
저는 손노인의 집에서 한 사람을 만났고 그의 수하가 되었어요.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원해서 된 일이에요.
그리고 그 결정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복공자도 언젠가는 그 사람을 만날 날이 있겠지만 그는 위대해요.
그야말로 거인이죠." 백아아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복청양의 안색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손노인이 어째서 내가 인질인 것처럼 이야기했는지는 아마 복공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때 저는 물론 원하기만 했다면 복공자의 앞에 나타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밝힐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복공자의 심기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함이었어요.
제 마음 아시겠죠?" "모르겠소." 복청양이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소.
당신이 주인으로 섬기는 그자가 바로 칠대공적이 주인으로 섬기는 자와 동일인이오?" "그래요." "그러면……." 복청양은 숨을 헐떡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자꾸 비명이 나오려고 했다. "그자가 바로 우리 복가장에 누명을 씌운 자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혹시나 해서 그 일을 확인해 봤어요.
하지만 그분은 그 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요." "그게 정말이오?" "저를 믿으세요." "물론 당신을 믿어야겠지.
과거 같았으면 나는 당신이 뭐라고 해도 아무런 의심없이 믿었을 것이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복공자가 지금 혼란에 빠져있다는 걸 알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그 일은 제가 다시 조사해 보겠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그분이 그 일과 관련이 있다면 반드시 복공자에게 알려줄 것을 약속드리죠.
하지만 그때까지는 경솔한 행동을 삼가하세요.
약속할 수 있죠?" "나는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소." 복청양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말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것도 말할 수 없어요."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온 거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면 그저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거요?" 복청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인내는 거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를 제마옥으로 보내고 다시 다른 사람들을 동원하여 제마옥을 치게 한 건 분명히 손노인의 짓이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손노인도 누군가의 명을 받고 움직이고 있다면 흉수는 그자가 틀림없다.
그런데도 백아아는 그 명백한 사실을 지금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물론 복공자가 무사하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백아아가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복공자에게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이기도 하고요." "그게 뭐요?" "복공자의 아버님, 팔통창절 복후정 어른의 소식을 알아냈어요." 복청양의 눈이 커졌다.
그는 손을 뒤집어 백아아의 손을 잡았는데 그만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갔나 보다.
백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파요." "이런, 미안하오." 복청양이 급히 손을 풀었다. "아버님의 소식을 알아냈다는 게 정말이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팔통창절 어른은 지금 중원검보에 계세요." "중원검보?" "그래요." 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공자도 중원검보가 어디인지는 아시죠? 중원검보는 바로 십방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검제 금수근의 본거지예요." 검제(劍帝) 금수근(金秀勤).
그는 한 자루 검으로 천하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천성이 곧고 강직한 사람으로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천하를 풍미하는 동안 그의 검에 쓰러진 흑도 인사는 수도 없이 많다.
나이가 들면서 검제는 한 곳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원검보(中原劍堡)였다.
그리고 중원검보는 지금 십방좌의 하나로 당당히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백아아는 지금 바로 그 중원검보에 복후정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님이 중원검보에 계시다니, 그게 어떻게 된 일이오?" "복공자의 명성은 복공자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널리 알려졌어요." 백아아가 설명했다. "천노살성은 이미 전 무림에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고 있어요.
단신으로 단심백결회에 대항하는 영웅으로요.
그래서 단심백결회는 복공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죠.
중원검보가 팔통창절 어른을 데려간 것도 그 때문이에요.
팔통창절 어른을 이용하여 천노살성을 잡아볼 생각이었죠.
그렇게 함으로써 검제는 아마도 단심백결회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일은 천노살성이 이미 죽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고 말았죠.
팔통창절 어른의 이용가치는 이미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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