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검제는 금명간 팔통창절 어른을 처형할 거라는 소문이에요." "처형이라고?" 복청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에 대한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님께 무슨 죄가 있어서 처형을 한단 말이오?" "죄란 만들면 있는 거지요. 흑도라 해서 죽어간 그 수많은 사람들이 꼭 무슨 죄가 있어서 죽었나요? 사실 흑도니 백도니 하는 구분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에요. 한 사람의 수단이 좀 잔혹하다든가 그 출신문파가 바르지 못하면 곧바로 흑도라는 멍에를 씌우고선 가차없이 적으로 몰아붙이는 거죠. 하지만 그러는 백도는 뭐 공명정대한가요? 지금 백도라고 불리는 인사들, 특히 단심백결회가 보여주고 있는 오만방자함은 과거의 그 어떤 흑도방파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아요." 백아아의 안색이 잔뜩 붉어졌다.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많이 흥분하고 있었다. "중원검보가 팔통창절 어른을 처형하려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에요. 다만 그러는 것이 부담을 없애고 자신들의 위상을 좀더 높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거야 어쨌든 팔통창절 어른이 위험에 처한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복공자는 서두르셔야만 돼요." "나보고 서두르라고?" "그래요. 설마 아버님이 처형을 당하시는데 구경만 하고 있겠다는 건 아니겠죠?" "지금 당신은 나보고 중원검보로 가서 아버님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오? 흥, 나는 가지 않겠소." 복청양이 벌떡 일어나더니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촛불이 마구 흔들린다. "가지 않겠다니요? 그럼 팔통창절 어른이 처형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겠다는 말인가요?" 복청양의 반응이 너무나 뜻밖이라 백아아는 잠시 멍청해졌다. 복청양은 이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면 당장 달려가겠다고 나서서 말리는 데 애를 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정반대가 아닌가! "그렇소. 나는 가지 않겠소." 복청양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바보인 줄 아시오? 물론 그럴지도 모르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허수아비처럼 이용만 당한 것이오. 하지만 이제는 다르오. 나는 더 이상 꼭두각시가 될 수는 없소." "그게 무슨 말이죠? 복공자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간단하오. 당신이 내게 어째서 갑자기 아버님의 소식을 전해주는지는 모르나 내가 그 말을 믿고 경솔하게 움직인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소. 이런 일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었소. 내가 모용세가로 갔을 때 모용세가는 이미 피바다였소. 산서지부로 갔을 때도 마찬가지고 제마옥으로 갔을 때도 그랬소. 내가 만일 이 길로 중원검보로 간다면 아마도 그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오. 내가 중원검보로 들어서기도 전에 그곳은 이미 생지옥으로 변해 있겠지. 그곳에 아버님이 있다는 당신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오. 아버님이 곧 처형을 당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나를 중원검보로 향하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 꾸민 함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 "복공자, 당신은 혹시……?" 백아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고 전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나까지 의심하는 건 아닌가요?"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건 사실이오." 복청양의 음성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가 이처럼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어서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지독하군요……." 백아아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복공자가 그런 사람인지는 몰랐어요. 나를 의심하고 아버님이 처형당한다는 데도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을 줄은……." "물론 아버님이 처형당하게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아버님을 구해낼 것이오. 그것만은 믿어도 좋소. 하지만 그 방법이 당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오." "좋아요. 복공자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겠군요." 백아아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심적 타격이 심한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복공자." 방문을 열려던 백아아가 등을 돌린 채로 그를 불렀다. "동생을 만나 보고 싶지 않으세요?" "금사가 이곳에 있소?" 복청양이 다급히 물었다. "나와 같이 왔어요. 멀지 않은 곳에 있지요. 원한다면 동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수도 있어요. 이건 순수한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손노인은 복공자가 제마옥에서 한 일을 높이 평가하고 약속을 지키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복공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동생을 만날 수 있고 같이 갈 수도 있어요." 복금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리움이 밀물처럼 덮쳐왔다. 지금까지 못 볼 일을 보아가며 숱한 고생을 해온 동생이 아닌가. 그녀가 있는 곳을 알기만 한다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복청양은 이를 악물었다. "가지 않겠소." "그래요?" 이번에는 백아아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에요. 어쩌면 다시는 동생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가지 않을 건가요?" "가지 않겠소." "복공자, 당신은 사람이 많이 달라졌군요.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군요." 문이 열리고 닫혔다. 백아아가 나간 방안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녀가 나가자 방안이 갑자기 텅 빈 것 같다. "난 달라지지 않았소." 백아아가 나간 방문을 보며 복청양이 중얼거렸다. "다만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음모의 정체를 밝혀 보려는 것뿐이오. 언제까지나 이끄는 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까." 복청양은 손가락을 튕겨 촛불을 모두 껐다. 그리고 소리없이 방안을 빠져나왔다. 백아아가 휘청했다. 소벽이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난 괜찮다." 가볍게 소벽의 부축을 뿌리친 백아아가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소벽과 소옥도 날렵하게 마차에 뛰어올랐다. "가자."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즉각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빗물이 흥건하게 고인 거리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차가 떠남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청양이었다. 그가 백아아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까지 허수아비처럼 움직이지는 않는다. 백아아, 너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 복청양은 마차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밤이라 인적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짙은 어둠을 밀어내며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성내를 벗어난 마차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옛 내내 소벽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묻지 않았고 백아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차는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소벽의 곁에서 소옥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다소 피곤한 기색이다. 어린 소녀의 몸으로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었다. 당연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들의 다각거림과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다. 마차가 막 산길로 접어든 때였다. 쐐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아와 선두에 선 말의 목에 박혔다. 말이 네 굽을 놓으며 껑충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히히힝! "아앗!" 소벽의 뾰족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놀란 말들이 일제히 네 굽을 놓으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두두두 말들은 사납게 산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소벽이 아무리 고삐를 잡아채며 다그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이미 숨이 끊어진 말이 질질 끌려오니 마차는 금방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덜컹! 퍽 우당탕! 마차가 튕겨져 오르더니 허공에서 한바퀴 회전하여 떨어졌다. 마차는 산길의 나무를 들이받고 옆으로 뒹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마차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바닥에 내려선 것은 소벽과 소옥, 그리고 백아아였다. 백아아는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며 소벽과 소옥은 그런 그녀를 양쪽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두 시비의 손에는 어느새 두 자루씩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누구냐?" 소옥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거기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몇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아직도 버르적거리고 있는 세 마리의 말 목을 차례로 관통했다. 말들이 금방 조용해진다. 괴괴한 침묵이 도는 산길에 말에서 흐르는 역한 피비린내만 가득했다. "웬 놈이냐? 어서 정체를 밝혀라!" 소옥이 앙칼지게 소리치며 단검으로 허공을 후렸다. 그러자 싸늘한 한광이 사방을 덮었다. 단검이 그려내는 한광은 어린 소녀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벌한 것이었다. 쐐액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곧장 소옥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대비가 되어있던 소옥은 단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 냈다. "안 돼! 비켜라!" 놀란 백아아가 다급히 소리질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소옥의 단검에 맞은 화살은 방향이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그녀의 팔을 관통해 버렸다. "악!" 소옥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디선가 몇 개의 화살이 비틀거리는 소옥을 노리고 날아왔던 것이다. "안 돼!" 백아아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어느덧 그녀의 손에는 채색요대(彩色腰帶)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이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토록 무섭게 날아오던 화살들이 그녀의 채색요대에 걸리자 맥을 추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백아아는 순식간에 네 개의 화살을 떨어뜨렸고 소벽 역시 안간힘을 다하여 한 개의 화살을 격추시켰다. 하지만 그러느라 소옥의 곁에서 조금 떨어진 게 실수였다. 다시 십여 개의 화살이 빗발처럼 소옥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고슴도치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소옥아!" "어떤 놈들이!" 소옥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소벽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왼편의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화살이 날아온 곳이 그쪽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소벽아, 안 돼!" 다급히 소벽을 말리려던 백아아는 그러나 걸음을 멈췄다. 언제 나타났음인지 그녀의 앞에 손에 철궁을 든 다섯 명의 장한이 우뚝 버티고 있었다. "철궁도……." 백아아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악!" 숲속에서 가슴을 저미는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소벽이 이승에서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이리라. '소벽아…….' 언제나 분신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소녀들이 아닌가.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오직 그녀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던 소녀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하들이 죽어가는데도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를 못했다. 그저 한 방울의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는 것 외에는. 숲속에서 다시 다섯 명의 철궁위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강궁에는 각기 화살이 메워져 있었는데 그 화살의 끝이 그녀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열 명의 철궁위대가 멀리서 백아아를 에워쌌다. "백아아." 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와 같이 가야겠다. 도주께서 너를 부르신다." "도주가……." 남궁격, 그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쩔 테냐. 우리와 함께 가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뼈를 묻겠느냐?" 열 명의 철궁위대가 일제히 활을 들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열 개의 화살이 날아온다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피할 재간이 없을 것이다. 백아아는 서글픈 미소를 머금으며 채색요대를 품속에 거둬들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요." "잘 생각했다." 철궁위대 하나가 다가와 손을 뻗어 그녀의 혈도를 짚었다. "아……." 백아아는 저항하지 않고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몸이 땅에 닿기 전에 굳건한 팔이 그녀를 안았다. 백아아를 받아 안은 철궁위대는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가자." 철궁위대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나타날 때처럼 신속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숲속에서 다시 다섯 명의 철궁위대가 나와 뒤따랐다. 철궁위대는 도합 열다섯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역한 피비린내만이 남아 있었다. 소옥의 시체 곁에 한 그림자가 날아내렸다. 복청양이다. 그는 무수한 화살이 박힌 채 쓰러져 있는 소옥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걸음이 늦어 이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구나.' 그는 백아아가 잡혀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철궁도의 철궁위대들이었다. 그러면 무궁수사 남궁격이 이 일에 개입했단 말인가.' 모르겠다.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백아아를 놓치지 않고 뒤따라가는 것뿐이었다. * * * 화려하게 꾸며진 넓은 방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둥글고 커다란 침상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분홍빛 휘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 휘장은 지금 활짝 열려 있었다. 침상 위에 한 여인이 이불도 덥지 않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쌕쌕 숨을 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백아아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수많은 작은 새가 무늬로 그려진 천장이었다. 그리고 벽, 이어 분홍빛 휘장, 휘장 바깥에는 의자가 있었고 그 의자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궁격이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남궁격이 조용히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도주……." 백아아는 상체를 일으켜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다. 혈도를 짚이지도 않았고 다른 제약을 당하지도 않았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욕을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단정한 게 그대로였다. '이자는 음흉하긴 하지만 비열하지는 않다.' 백아아는 내심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이구나." 남궁격이 차갑게 말을 뱉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뭐가 죄송하다는 말이냐? 그 동안 소식을 끊어서 죄송하다는 거냐,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거냐?" 남궁격의 힐문이 비수처럼 백아아를 찔러왔다. "그게……." 백아아는 말끝을 흐렸다. 막상 힐문을 당하고 보니 그녀 자신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녀가 생각을 가다듬을 여유도 주지 않고 남궁격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교활한 계집, 너는 나를 배신했다. 그것은 인정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도주." "부인하겠다는 거냐?" 너무도 차가운 눈빛. 지금까지 남궁격이 그녀에게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긴 했으나 그래도 그녀에게는 비교적 잘 대해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사정이 다르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에게서 등을 돌릴 리가 없다." "도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족속이 누군지 아느냐? 그것은 적이 아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배신을 밥먹듯 하는 자들이다. 나는 그런 자들을 가장 경멸한다. 그런데 네가 그런 족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정말로 몰랐구나." "저는 도주를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없다?" 남궁격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것은 그가 가장 불쾌할 때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금 감히 그런 말이 나오느냐? 그러고 보니 너는 낯도 두꺼워졌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변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도주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도주의 수하였던 적이 없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명으로 도주의 일에 잠시 협력했던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수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배신이라는 말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렇다. 너는 정식으로 내 수하가 된 적이 없다. 그러니 네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남궁격이 의외로 순순히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그럼 너는 지금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느냐? 나를 배신한 수하로 대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인질로 잡힌 적의 일당으로 생각하기를 원하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 대접해 주마.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아두거라. 나는 적에게는 상당히 냉혹한 사람이다." "그건……" "묻겠다." 남궁격이 백아아의 말허리를 잘랐다. "나를 속일 생각일랑 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라. 너는 지금 쇠마와 함께 일하고 있지 않느냐?" 순간 백아아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이자가 쇠마의 존재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난날 금룡인 무당신검 장경신이 쇠마를 만나 일전을 겨룬 일이 있지 않은가! 금룡이 쇠마의 존재를 안다면 청룡이 모를 리가 없다. 남궁격은 무서운 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남궁격의 정보망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단심백결회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알고 있었으며 금룡이나 적룡의 동향도 손바닥처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쇠마의 존재를 알아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구나." 남궁격이 냉소를 흘렸다. "좋다. 네가 누구와 같이 일하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것은 너의 자유 의사니까.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하였건 거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알고 있습니다." "너는 쇠마를 위하여 일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쇠마가 나타난 것을 보니 실종되었던 십마가 모두 모습을 나타냈겠구나. 그러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데 있느냐?" "그렇습니다." 백아아는 고개를 살포시 숙인 채 남궁격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조금도 주저하는 빛이 없었다. 그것이 남궁격을 다소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 계집은 마치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그럼 천노살성의 배후가 바로 십마냐?" "그건……." 처음으로 백아아가 머뭇거렸다. "잘 모릅니다." "십마가 천노살성의 배후가 아니라면 그럼 천노살성이 십마를 부리고 있다는 말이냐? 흥,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알았느냐. 내가 알기로는 복청양이라는 자는 그만한 재간이 없다." "저는 그 일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럼 무흔색투를 비롯한 칠대공적과 무독옹이라는 노인도 십마와 한패거리냐?" "모릅니다." "백아아!" 남궁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날 가벼이 보지 마라! 누가 바본 줄 아느냐?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 일련의 사태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저번에 너는 복청양이 모용세가를 멸문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아주 무서운, 그리고 거대한 음모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천하에 내가 아니면 그런 일을 꾸밀 자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룡이 쇠마를 만났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나는 그런 자신감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쇠마가 아직 살아있다면 당연히 지마도 살아있을 것이 아니냐. 그리고 지마라면 나와 필적할 만하다. 그자라면 이런 음모를 꾸미고도 남는다 이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건 아주 간단한 놀이다." 남궁격이 말했다. "누군가 있어 의도적으로 허수아비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바로 천노살성이라는 허울만 근사한 허수아비를 말이다. 그리고 그자로 하여금 단심백결회의 외곽에 접근하게 한 뒤에 순차적으로 단심백결회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외곽에서부터 천천히…… 모용세가가 그 첫 희생자였고 그 다음은 산서지부였다. 그리고 제마옥이 다음 목표였지. 이 모든 일은 철저한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 세인들은 그 모든 일이 천노살성이 저지른 줄 알고 십마의 존재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십마는 어둠 속에 숨어서 목적한 바를 이루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모습은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은연중에 세력을 키우고 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칠대공적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 그 증거다. 내 말이 틀리느냐?" "지나친 생각이십니다, 도주!" "그래?" 남궁격이 일어나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백아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만 말해라. 쇠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전…… 모릅니다." "백아아, 넌 정말로 죽기를 원하느냐?" "도주, 도주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저를 죽이기는 여반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건 모르는 것입니다. 전 한마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계집이로구나." 남궁격이 다시 한 걸음을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그시 눌렀다. 그의 파란 안광이 뱀의 혀처럼 그녀의 전신을 핥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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