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정작 백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달랐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이오?" "그분이 있는 곳을 모른다는 얘기예요. 일이 있다면 그분이 저를 부르실 거예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어요." "그럼,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오?" 다소 실망하여 복청양이 물었다. "글쎄요…… 복공자가 어떤 일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만일 나보고 우리 일의 내막을 밝히라고 하면 아무리 복공자라 해도 그건 들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원한다면 손노인을 만나게 해줄 수는 있어요." "손노인을?" 복청양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아아가 그렇게 말한다면 지금은 그게 최선일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이 머오?" "그다지 멀지는 않아요." "그럼…… 손노인이 있는 곳에 금사도 있는 거요?" "그렇지는 않아요." 백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우리는 당신과 금사를 만나게 해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금사를 당신의 거처와 가까운 곳에 데려다 놓았어요. 영화루(榮華樓)라는 곳이죠. 거기에 가면 지금이라도 금사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영화루라면 나도 아오." "어쩌시겠어요? 영화루에 가서 동생을 만나겠어요, 아니면 저와 함께 손노인을 만나러 가겠어요?" "영화루에 금사가 있다면 언제 가든 늦지는 않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손노인을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군." 복청양이 몸을 일으켰다. "갑시다." "일으켜 주세요." 백아아가 손을 뻗었다. 복청양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참 이상한 일이에요." 기력이 없는지 복청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백아아가 방긋 웃는다. "뭐가 말이오?" "제가 왜 이렇게 당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지 말이에요. 어쩌면 이 일로 저는 중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예요." "그건……." 복청양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로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안다. 그가 백아아를 의지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만은……. 이러한 미묘한 마음의 교감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은 묵묵히 밤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다지 서둘지도 않았다. * * * 무흔색투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무흔색투가 경공술에 능하다는 건 그다지 놀랄 일이 못 되었다. 원래 무흔색투처럼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걸음이 빠르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성초는 그를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겨우 팔성의 공력만 끌어올리고도 어렵지 않게 뒤따라 갈 수 있었다. 오히려 힘겨워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경공이 뒤쳐지는 만대모나 적발수룡은 벌써 저만치에 떨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빠져나갈 수 있다.'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암혼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위태로운 지경에서 빠져 나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그녀를 다시 아까와 같은 포위망에 가두지 못한다. 하지만 군성초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그를 만나 그가 누구이며 무슨 목적이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아니, 그런 건 다 차후의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를 만난다는 것이다. 군성초에게는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작은 동산 위였다. 동산 위에는 천년노송(千年老松)이 한 그루 자리잡고 있었다. 세월의 풍상에 못 이겨 노송의 껍질은 툭툭 갈라져 있었고 가지 끝에는 탐스러운 어둠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노송은 밤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년노송 아래는 넓은 잔디밭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술상 위에는 상당히 진귀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는데 그 중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것도 있었다. 이 산 위에 누가 언제 술상을 갖다 놓았는지는 모르나 신기한 일이다. 사나이는 잔디 위에 그대로 편안히 앉아 자작으로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그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술잔을 앞에 놓고 잠시 바라보다가 그걸 들어 땅에 부었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채웠다. 같은 동작이 반복되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만일 누가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미쳤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단황, 천하마주였기 때문이다. "마주!" 무흔색투가 앞으로 다가서며 허리를 굽혔다. 이미 동정화상도 뒤로 쳐져 산 위에는 그들 셋뿐이었다. 아니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군성초는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철립을 덮어쓴 사내 하나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심히 동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누가 오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데려왔습니다." 그러자 단황이 군성초를 힐끔 보더니 무흔색투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고 있는 중입니다." "내려가 그들보고 이리로 올라오지 말라고 해라." "예." "외인의 출입도 금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무흔색투가 다시 허리를 굽히더니 돌아서 급히 동산을 내려갔다. 힘들게 데려온 군성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군성초는 무흔색투가 이 사나이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저런 모습은 단순한 두려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진심으로 상대에게 복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혼자서 천하를 주유하며 이 세상 모든 여인은 자신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무흔색투가 아닌가. 그가 이처럼 누구에게 공경하는 빛을 보인다는 것은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할 일이다. "앉으시오." 사나이가 그저 서 있는 군성초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군성초는 철립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왠지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신경에 걸린다. "섬전도는 마음쓰지 마시오." "섬전도!" 군성초가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이 바로 섬전도란 말인가요?" "그렇소." "저 사람이……." 칠대공적을 잡기 위해 수많은 밤을 새운 그녀였다. 그녀가 섬전도를 모를 리 없었다. 섬전도. 칠대공적 중 가장 신비로운 사나이. 그의 손에 당한 고수는 일백도 넘는다. 그 중에 이류는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당대를 주름잡는 일류고수들만 상대하여 그처럼 찬란한 전과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의 무공이 극히 고강하다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섬전도와 실력을 겨룬 일백 고수가 하나같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세인들은 그저 막연히 그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뿐 실제로 그의 손에 죽은 고수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 사람을 죽이되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나이. 그게 섬전도였다. 그래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살아있는 전설. 그런데 그 전설의 주인공이 한 사나이의 수하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군성초는 새삼 경이로운 눈으로 사나이를 보았다. 왠지 이 사나이의 앞에만 서면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다.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지금 또 그랬다. 평소의 군성초라면 그런 느낌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나이 앞에서는 거부감마저 일지를 않는다. 그저 모든 게 당연히 여겨질 뿐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요?" "아……."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군성초가 황급히 사나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로서는 드문 일이다. "미안해요……." "괜찮소." 사나이가 술병을 들었다. "그저 위를 올려다보며 얘기하기가 불편해서 그랬을 뿐이오." "이리 주세요. 내가 따라드리죠." 군성초가 손을 뻗었다. 이런 일도 그녀로서는 꿈도 꾸지 않던 일이다. 사실 그녀 자신도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무심결에 말이 흘러나왔고 손이 나갔을 뿐이었다. '내가 미친 걸까?'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신경 쓰지 마시오. 어차피 마실 술도 아니니까." 사나이는 여전히 자기 손으로 술을 따랐고 군성초는 내민 손이 무색하여 급히 거둬들였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노기가 떠오른다. "마시지도 않을 술이라면 왜 그러고 있죠?" "그냥…… 미인과 함께 있으면서 술도 없다면 좀 어색해질 것 같아서……." 사나이는 웃지도 않고 그런 말을 했다. "당신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소. 난 일 년에 딱 하루만 술을 마시오. 그런데 오늘은 그 날이 아니오." "좋아요." 군성초가 대담하게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불쑥 내밀었다. "마시지 않겠다면 나라도 한 잔 주세요." 사나이가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잠시였고 그는 묵묵히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군성초는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는 불그레한 얼굴로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군요." "당신은 술을 잘하는군." "바라만 보고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편이죠." "바라만 보는 것도 운치요. 원하는 것이 있다 해서 그저 취하기만 한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소? 때로는 아무리 갖고 싶은 것이라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오. 어떤 것은 소유할 때보다 그저 보고만 있을 때 더 가치를 느끼는 법이니까." "궤변이로군요." "그저 내 생각이오." "당신 이름이 뭐죠?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군요." "단황이라 하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당신도 그렇게 부르도록 하시오." '단황…….' 군성초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단씨 성을 쓰는 무가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가문도 이 사람을 키워낼 만한 능력은 없다. 아니, 아무리 명망이 대단한 가문이라도 이런 사람을 키워낼 만큼 그릇이 크지는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돌연변이였다. 하늘 아래 오직 혼자만 우뚝한 유아독존. "저기 저 사람이 당신의 수하인가요?" 군성초가 손가락을 뻗어 등을 돌리고 있는 섬전도를 가리켰다. "그렇소." "칠대공적이 모두 당신의 수하란 말인가요?" "그렇소." "일전에 쇠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혹시 쇠마도 당신의 수하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소." 단황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 거침없는 대답이 주는 의미는 너무나 크다. 칠대공적과 쇠마. 아니, 어쩌면 십마 전부를 수하로 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나이. 군성초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대단하군요!" "그렇소?" "아마도 무림 역사상 당신처럼 거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게 누구요?" "천품신성 악자량." "하긴……." 단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그자가 내 앞에 있었다면 나는 그자마저도 내 수하로 부렸을 것이오." 광망한 말이었다. 감히 천품신성을 수하로 부리겠다니……. 하지만 어쩐 일인지 군성초에게는 그 말이 광망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당신이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꼭 이유가 있어야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거요?" "그야 당연하죠. 우리는 이유도 없이 만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요." "별다른 이유는 없소. 그저 언제든 한 번 이렇게 만나서 술을 같이 마시고 싶었소. 당신은 강한 여자니까. 나는 강한 여자가 좋소." "하긴…… 나도 나약한 남자는 질색이에요." 군성초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죠?" "나는 얼마 전부터 남궁격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소. 그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니까. 그런데 며칠 전부터 당신이 그 주위를 서성거리는 걸 알게 된 것이오.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 거요." "그 몇 안 되는 주목할 만한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이 되나요?" "무림삼룡은 전부 포함되오." "영광이군요." 군성초가 말했다. "별다른 용건이 없다니 그럼 나는 이대로 가도 되겠네요?" "마음대로 하시오." "좋아요." 군성초가 이번에는 직접 술잔을 들더니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남자처럼 활달한 모습이었다. "언제든지 갈 수 있다면 서둘러 갈 필요는 없겠죠. 적어도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야겠어요." "특별한 정체 같은 건 없소. 나는 그저 나니까." "바로 그 나라는 것을 알고 싶은 거예요." 술병은 세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세 병 다 최고급의 여아홍으로 아주 독했다. 하지만 군성초는 혼자서 그 중 두 병을 비우고도 그다지 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주량이었다. 한동안 술 마시는 데만 열중하던 군성초가 이윽고 세 병의 술이 다 비자 단황을 똑바로 보았다. "자, 이제는 당신이 말할 차례예요." "무얼 말이오?" "날 바보로 취급하지 말아요. 이래봬도 화화궁의 소궁주이고 천하가 알아주는 적룡이에요." "당신이 유명하다는 건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알고 있소." "칠대공적이 스스로 원해서 당신의 수하가 되었을 리는 없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칠대공적을 수하로 부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했을 거예요. 십마는 더 말할 나위도 없죠." "그건 사실이오." "그런 노력을 해가면서 이만한 세력을 키운 이유가 뭐죠? 당신의 진정한 목적이 뭐냔 말이에요?" "목적이라……." 단황이 빈 술잔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오?" "물론이에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당신은 단심백결회를 노리고 있나요? 아니면 다른 수많은 광인들처럼 천하를 손에 넣기를 원하나요?" "내가 원한다면 천하가 내 손아귀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오?" "그건……." 군성초는 잠시 멈칫했다. 지금까지 자신만만하게 몰아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힘들군요. 천하란 처음부터 주인이 없는 것이니……." "누가 천하의 주인이 없다 했소?" 버럭 단황의 음성이 높아졌다. "천하란 무엇이오?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오? 그러면 사람이란 무엇이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당장 당신도 수많은 수하를 부리고 있는 입장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우열이 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소. 그게 작은 가문이건 작은 나라이건 아니면 방금 당신이 말한 천하이건간에 반드시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존재하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한 가장 우뚝한 지배자, 즉 절대자는 존재하기 마련이오. 그리고 절대자의 지위에 오르면 그것이 바로 천하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소. 천하에는 주인이 없지 않소. 다만 아직 그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오." 단황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무심하고 다소는 권태스럽기까지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기운은 너무나 가공한 것이어서 군성초는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 기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거기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바로 그 절대자의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말인가요?" 한마디를 하는 데도 이마에 땀이 흐른다. "아니오." 단황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나는 절대자의 지위에 오를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이미 올라 있으니까. 내가 바로 절대자요. 나는 다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당신은……." 군성초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를 보았다. 목이 꺽꺽거려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제정신인가요?" "날 미쳤다고 하고 싶은 거요?" 일순 그 가공할 기운이 사라졌다. 단황이 심유한 눈으로 군성초를 보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거야 각자의 자유니까. 나도 한때는 천하정복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던 때가 있었소. 나에게 있어 천하란 내가 살고 있는 작은 고장이 고작이었소. 나의 소원은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잠자고 병들지 않고 남에게 발길질을 당하지 않는 게 전부였소.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생활을 나도 했었소. 나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오. 그런 괴물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소.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의 삶은 변했소. 나는 천하를 내 발 밑에 있는 작은 돌처럼 여기도록 교육받았소. 알겠소? 천하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대한 것이 아니오. 그것은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는 작은 것이란 말이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여기도록 교육받았고 어느샌가 그것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소. 그 교육의 성과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천하라는 것이 바로 나의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소. 천하에 주인이 없다면 내가 그 주인이 되면 되는 것이오. 어제까지 주인이 없다 해서 오늘도 주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소? 천하의 주인은 바로 나요. 그것은 이미 정해졌으며 어떠한 힘으로도 변경할 수 없소." 단황의 말은 허황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천하제일의 지위에 오르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천하제일이라는 말이니 어찌 허황되게 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군성초는 그게 허황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단황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게 바로 현실이고 진실이었다. 이 사나이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 이 사나이가 아니라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는가! "전에도 그런 꿈을 키우던 사람은 많았어요." 한참만에야 군성초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런 허황된 꿈에 젖어있는 한 당신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거예요." "파멸? 후후…… 누가 나를 파멸시킨단 말이오. 감히 누가?" 단황이 술잔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술잔은 이미 비어 있었고 술잔을 채울 술도 떨어진 뒤였다. 단황은 술잔을 손끝에 두고 장난하듯 빙글빙글 돌렸다. "보시오. 이게 바로 천하요. 그리고 천하는 바로 내 손에 있소." "당신이……." 군성초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나를 불러 놓고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내가 당신을 막을 게 두렵지도 않은가요?" "당신이 나를 막을 수 있다면 애당초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요." 단황이 말했다. "당신은 날 막을 수 없소. 당신뿐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는 없소. 설사 하늘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오. 왜냐하면 나는 천하의 주인인 동시에 저 하늘의 주인이기도 하니까." 단황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머리에 하늘을 이고 있었는데 정말로 하늘의 지배자처럼 거대해 보였다. "충고하겠소. 앞으로 단심백결회의 회주가 되려는 생각은 버리시오." "왜죠?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나요?" 따라서 몸을 일으키며 군성초가 야무지게 말했다. 그녀는 한바탕 진한 마약에 취한 듯한 기분이었지만 한시바삐 이런 기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심백결회의 회주는 내 손에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 그러니 단심백결회를 차지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럴 수는 없어요." 군성초가 말했다. "당신한테 꿈이 있다면 내게도 꿈이 있어요. 당신이 천하의 주인이 되도록 교육을 받았다면 나도 교육을 받았어요. 바로 단심백결회의 회주가 되라는 교육을요. 나는 우리 화화궁의 희망이고 미래예요. 나를 바라보는 그 많은 눈들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당신은 죽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내 손에 반드시 죽소." "누가 죽을지는 지나봐야 알겠죠." 힘으로 따진다면 그녀는 결코 단황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번에 분명하게 경험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힘으로 결정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군성초는 믿고 있었다. 이 남자가 단심백결회를 노린다면 그녀가 막을 것이다. 단심백결회는 그녀의 것이므로……. "갑시다." 단황이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충고를 가벼이 여기지 마시오.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었소. 내가 만일 당신이라면 즉시 화화궁의 문을 닫아걸고 얌전히 들어앉아 있겠소." "불행히도 나는 당신이 아니죠." 군성초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나는 당신을 막을 거예요. 천하의 남자라는 족속 중에 나보다 뛰어난 인물은 없어요. 나는 반드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그러기를 바라겠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일단 살아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오. 명심하시오." 어디선가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더니 그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산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대공적이었다. 군성초는 걸음을 멈추었다. 더는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정말일까? 저 사람은 나를 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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