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녀는 여전히 단심백결회의 회주에 오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저 사람이 단심백결회를 노린다면 그와 맞서 싸울 것이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내면의 소리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간에. 섬전도가 고개를 돌려 천년노송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극히 순간적인 일별이었다. 그리고 그는 단황을 따라 사라졌다. 텅 빈 동산 위에는 빈 술상만 외롭게 남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수수 천년노송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그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풍성한 흑의를 걸친 여인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두꺼운 면사로 가리고 있었으며 손에도 장갑을 끼고 있어서 옷 밖으로 노출된 신체는 하나도 없었다. "단황……." 문득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가 마침내 직접 전면에 나타났구나. 모든 게 예측한 대로다. 결국은 때가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조금 전 천년노송을 바라보던 섬전도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의 입가에 미소 같은 것이 번져갔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가 나의 존재를 알아챘을까?" 단황과 워낙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기척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썼어도 완벽하게 숨어 있었다고 자신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단황, 그도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나를 치지 않았다. 그러면 족하지 않은가." 흑의여인이 몸을 날려 동산 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법은 빛의 흐름을 능가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이제 동산은 완전히 비었다. 빈 술상을 봐줄 사람도 없다. * * * 쿵쿵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백아아의 대문 두드리는 방법은 조금 특이했다. 세 번 두드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세 번 두드리고 그러기를 세 번 반복했다. 이윽고 아홉 번의 울림이 끝나자 백아아는 손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대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등롱을 든 소년이었다. 소년은 백아아를 보자 말없이 허리를 굽히며 옆으로 물러섰다. "오세요." 복청양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던 백아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돌아보았다. "쇠마 어른은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습니다." 소년이 대답한다. "계시지 않는다고?" 백아아가 잠시 소년을 본다. 그녀로서는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럼 안에는 누가 계시느냐?" "지마 어른이십니다." "알았다." 백아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 집 안의 지리에 밝은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자 중문이 나타났다. 백아아는 가볍게 문을 밀었는데 중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앞장섰다. "잠깐만." 복청양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왜 그러시죠?" "방금 쇠마라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옳게 들은 거요?" "그래요." "그럼 손노인이 바로 쇠마란 말이오?" "복공자도 쇠마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물론 알고 있소." 쇠마, 그는 과거에 천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통천삼십삼마 중 제일인자였다. '그자가 쇠마라니…… 어쩐지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복청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조여오는 걸 느꼈다. 아마도 쇠마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일 것이다. '그자가 쇠마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인물이 아닌가.' "가시죠." 백아아가 재촉했다. "이 집 안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거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복청양이 물었다. 그는 이미 어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들로 자신의 종적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백아아가 말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세요. 그들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거예요." 백아아가 다시 앞장섰고 이번에는 복청양도 토를 달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두 개의 문을 더 통과하고서야 그들은 지마의 거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굵은 황촛불이 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방이었다. 작은 서탁(書卓)이 있었고 그 앞에 문사 차림의 노인이 앉아 세필(細筆)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방안으로 사람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았다. 백아아가 조용히 앉았다. 그러나 복청양은 앉지 않고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노인이 바로 지마란 말인가.' 지마. 흉중에 제갈양을 능가하는 깊은 모계(謀計)를 간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전설적인 인물, 그가 마침내 복청양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윽고 쓰기를 다 마쳤는지 지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우뚝 서 있는 복청양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앉게." "괜찮소." 복청양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앉아. 늙은 사람을 쳐다보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 그제야 복청양은 몸을 앉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길이 이는 눈으로 지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을 자네가 데려왔나?" 지마가 백아아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백아아가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그녀도 지마 앞에서는 약간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경솔한 짓을 했구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어쩔 수 없는 사연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복청양을 향하고 있었다. "자네 날 보러온 건가?" "그렇지는 않소. 나는 손노인을 보러 이곳에 왔소." "쇠마 말인가? 그는 이곳에 없네." "알고 있소." 복청양이 말했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도 좋소. 내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소." "대답이라…… 그건 질문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지." "내 질문은 아주 간단한 것이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당신은 알 것이오." "젊은 사람은 늙은 사람을 무불통지쯤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지." 지마가 가볍게 웃었다. "하나 나는 자네가 무엇을 물으려는지 정말 모르겠네." "내가 묻는다면 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의는 있소?" "그거야 무얼 묻느냐에 따라 다르지. 대답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숨길 필요야 없겠지만 대답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아무리 강요를 한다 해도 말해줄 수 없네." "그렇다면 물을 필요도 없지 않소?" 그러자 지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복청양의 말투가 그의 비위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단순히 말장난을 하러온 것이라면 자네는 상대를 잘못 골랐네. 하지만 잊지 말게. 진실을 알 수 있는 기회란 자주 오는 것이 아닐세. 저 여인이 자네를 내게 데려온 것은 자네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일세.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백아아가 수긍했다. 지마가 정곡을 찌른 것이다. "가능하면 복공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지. 그거야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 지마가 복청양을 똑바로 보았다. 물을 것이 있으면 어서 물으라는 투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조금의 긴장감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롭다. 복청양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당신은 모용일란을 아시오?" "모용천우의 딸 말인가? 알지." 의외로 대답이 쉽게 나온다. "그럼 모용일란을 죽인 게 바로 당신이오?" "그렇지는 않네. 내가 직접 죽인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죽이라고 명했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복청양은 자신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심하게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는 침착해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알기 전까지는. "모용일란의 죽음을 이용해서 우리 복가장에 누명을 씌운 것도 당신이겠구려?" "그렇네. 그 모든 계획을 내가 꾸몄지." "그럼 모용세가를 멸문시킨 것도 당신이오?" "내가 한 것은 아닐세. 우리 십마 중 세 사람이 그 일에 관여했지." "저기 있는 백소저를 산서지부로 납치한 건 그럼 누구요?" "그 일은 전마가 했지. 전마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그처럼 빠른 경공술을 발휘할 수 있겠나?" "그럼 제마옥을 친 것도 당신들이겠구려?" "그렇네. 그 일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지. 좌우쌍마를 수중에 넣는 게 그 하나고, 단심백결회의 예기를 꺾는 게 그 둘이었네. 자네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정말 잘 움직여 주었네. 그 덕분에 우리의 일이 한결 수월해졌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한 거요?" 복청양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걸 모르겠나?" 지마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삼십 년 전, 우리 통천삼십삼마는 천품신성의 계략에 말려들어 처참하게 당했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었지. 우리는 그때의 빚을 갚으려는 걸세. 단심백결회는 무너져야만 하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지난날 우리 통천삼십삼마가 당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자면 누군가 대리인이 필요했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기까지 우리 십마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도 단심백결회의 일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리인이. 그래서 나는 천노살성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내기로 한 것일세. 아니, 완전히 가공의 인물은 아니지. 천노살성은 실제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세. 문제는 그가 한 일이지. 천노살성은 천하를 지배하는 단심백결회에 감히 도전장을 던졌네. 칠십이순찰당을 무너뜨리고 육대지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며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제마옥을 깨뜨렸네. 이처럼 천노살성의 명성이 높아지자 내가 예상한 대로 단심백결회는 크게 흔들렸네. 그들은 천노살성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전력을 노출시키고야 말았네. 여태껏 과장되기만 했던 그 엉성한 전력을 말일세. 이제 천하인들은 단심백결회의 실체를 알게 되었네. 그것만으로도 자네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지. 어떤가? 절묘한 계략이 아니었나?" "그건 절묘한 계략도 아무 것도 아니오. 당신은 살인마요." 복청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두 눈이 분노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난 당신을 죽일 거요." "그러고 싶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걸세." 지마가 여전히 앉은 채로 복청양을 올려다보며 여유있게 웃었다. "왜냐하면 자네는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거든. 살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세. 남이 하는 건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지. 만일 자네가 손을 써서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내 손에 죽을 걸세. 그게 바로 승부의 세계니까.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이고, 지금의 나는 자네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으니 염려말게. 자네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자네는 우리를 위해서 몇 가지 일을 더 해주어야만 하네. 우선 자네는 중원검보로 가야만 하네. 거기에 복후정이 있으니 안 갈 수가 없겠지. 자네가 그리로 가면 우리는 다시 천노살성의 이름을 빌려 중원검보를 칠 걸세. 마침내 십방좌의 하나가 무너지는 거야.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드디어 단심백결회로 가게 되네. 그게 자네가 가야 할 마지막 길이고 내 계획의 종착점이지." "미쳤군." 복청양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미쳤어. 내가 그 일을 할 것 같소?" "물론이지.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만한 자신도 없었다면 자네에게 이 모든 얘기를 해주지도 않았을 것일세."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하지만 당신은 그 자신감 때문에 죽을 것이오." 복청양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장심이 붉게 변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강한 살심을 느끼고 있었다. '죽이리라. 이자만은 반드시 죽이리라. 이자는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내 복가장의 영령들을 대신하여 이자를 벌하리라.' 혼신의 공력을 주입한 일장이었다. 이 일장이 펼쳐지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마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는 비로소 일의 심각함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복공자……." 백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복청양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복청양이 발산하고 있는 살기를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생전 처음으로 발산하는 짙고 짙은 죽음의 냄새를……. 일촉즉발.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방안의 긴장감이 팽창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숨 한 번만 잘못 쉬면 폭발할 기세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 함성은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방문 밖이 환해졌다. 바깥에 불길이 솟고 있었다. 십마의 본거지가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제2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