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1편 (1/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본문 바로가기

[야설록]천객 - 1 - 1편 (1/17)

💬 0 👁 8
☰ 목록
책갈피와 음성 읽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서 문 (序章) 제 1 장 참사(慘事) 제 2 장 흑주쟁투(黑珠爭鬪) 제 3 장 실종(失踪) 제 4 장 백아아(白雅雅) 제 5 장 혼(混) 제 6 장 산서지부(山西支府) 제 7 장 애광(愛狂) 제 8 장 손노인(孫老人) 제 9 장 관(棺) 서 문 꿈이 있으면 한다.
그 꿈은 터무니없이 작은 꿈이다.
무슨 꿈인고 하니 마음에 드는 무협소설 한 질 앞에 놓고 군고구마나 사과 같은 입질거리들을 그 옆에 쌓아놓고는 눈내리는 밤을 새워가며 무협 속에 빠져보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다.
책은커녕 시 한 줄 읽을 시간도 없으며 때로는 호흡하는 시간까지 절약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될 때도 있다.
아무리 각박해도 무협소설 한 권 정도는 마음놓고 읽을 수 있어야 사람 사는 기분이 들지 않나 싶을 때면 절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한 해가 다 지나갔다.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많이 있으셨겠지만 이 한 권의 책이 그런 독자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책을 내는 데는 본래 추리작가 출신인 강종필씨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지면을 통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1997, 12 夜 雪 綠 서장(序章) "시작하시오." 사나이가 말했다.
그의 음성은 젖은 모래 밑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낮고 음울했으며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인생의 희로애락, 그 모든 감정을 달관하기라도 했는지 마치 텅 빈 술동이가 공명을 일으키는 것처럼 짧은 파장을 일으키며 의미를 전달했을 뿐이다.
사나이는 웃통을 벗어부치고, 아래에도 겨우 중요한 부분만 가린 짧은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따가운 햇빛 아래 구릿빛 탄탄한 근육이 땀으로 번들거린다.
잘 발달된 근육이었다.
군더더기 살은 하나도 없었으며 팽팽하게 당겨진 강철 현(弦)처럼 강인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이는 사십이나 되었을까? 굵은 눈썹 아래로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심유한 눈이 자리잡고 있었다.
코는 우뚝했고 입술은 두터웠다.
철사처럼 뻣뻣한 수염이 턱을 온통 가리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나이는 오른손에 철검(鐵劍)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검(劍)이라고 보기에는 좀 이상했다.
검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체가 검은색이었으며 날도 세워져 있지 않아 그저 뭉툭한 쇠붙이 모양이었다.
검이라기보다는 대장간에 흔히 굴러다니는 못 쓰는 고철이라고 해야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나이의 손에 들려있는 철검은 그의 외모와 너무 잘 어울렸다.
무심하게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검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신체의 일부분이 검의 길이만큼 더 길어진 것 같았다.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나이는 그저 조금 권태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오후가, 철검을 휘둘러야 하는 일이, 그리고 끊임없이 땀을 요구하는 저 뜨거운 태양이…….
모든 게 권태스럽고 따분한 것 같았다.
사나이의 앞에는 죽립인(竹笠人)이 서 있었다.
어깨까지 덮는 죽립이 지나치게 커서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헐렁한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소매가 지나치게 짧다는 것이었다.
그의 옷소매는 겨우 팔꿈치까지밖에 이르지 않았으며, 소매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여자의 것처럼 희고 부드러웠다.
허리춤에는 장검을 한 자루 매달고 있었다.
잠깐 죽립이 들렸다.
순간적인 일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에 죽립인의 눈이 번쩍 빛을 낸 것 같았다. "간다." 죽립인의 입에서 짧고 간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죽립인이 움직였다.
사나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됐고, 그리고 끝이 났다.
아마도 이처럼 짧은 시간에 결판이 난 싸움은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겨우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을 반으로 쪼갠 듯한,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누구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이 흘러갔을 뿐이므로…….
하지만 분명 싸움은 하였고 끝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죽립인의 검은 이미 뽑혀서 사나이의 목 한 치 어름에 머물러 있었다.
검끝이 부르르 떨린다.
단 한 치만 앞으로 내밀면 사나이의 목에 구멍이 뚫리고 그리로 뜨거운 피가 용솟음칠 것이다.
하나 검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언제 들렸는지 사나이의 철검이 죽립인의 심장에 닿아 있었으므로…….
백지장 하나의 간격도 없이 정확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죽립인의 검이 한 치를 더 전진하였다면 사나이의 철검은 틀림없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죽립인의 장포가 갈라지면서 그리로 핏방울 하나가 맺혀 또르르 굴러 내렸다.
이처럼 뭉툭한 철검이 어떻게 이런 작은 상처를 낼 수 있는지 기이한 일이었다. "후후……." 죽립인이 토막진 웃음을 한숨처럼 토해냈다.
하지만 사나이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돌연 들고 있던 철검을 버리며 사납게 몸을 날린 것이다. "하압!" 사나이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나왔다.
그는 우측으로 삼 장을 이동하여 바닥에 발자국을 내고 있었다.
발자국의 깊이는 정확하게 한 치였다.
하나 사나이의 돌연한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좌측으로 이동하여 발자국을 남겼고 뒤로 물러서며 발자국을 남겼다.
파파파파 무수한 족적이 찍히면서 하얀 흙먼지가 일어 시야를 가렸다.
그렇지만 사나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흙먼지 때문이 아니라 그가 거의 빛살 같은 빠르기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처럼 근육질의 몸뚱이가 그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사나이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호흡도 가빠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정확하게 예순일곱 개의 족적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스스슷 사나이의 앞에서 땅이 갈라지더니 하나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백발을 어깨까지 드리운 노인.
그 노인은 전신이 대나무처럼 꼬치꼬치 말라서 뼈와 가죽 외에 다른 물질은 일체 존재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욱!" 백발괴인은 사나이의 앞에 서자마자 신형을 크게 휘청하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검은 핏물이 그의 앞자락을 적셨다.
하지만 백발괴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나, 환마가 움직일 수 있는 예순일곱 개의 방위를 모두 차단하다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사나이가 여전히 낮고 음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이미 환마(幻魔)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몸이 오른쪽 발뒤꿈치를 축으로 하여 빙그르르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랏!" 거대한 압력의 회오리가 사나이의 등판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이미 돌아서서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며 그 가공할 기세에 정면으로 마주쳐 갔다.
꽝! 과르르르 거대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기둥이 되어 허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사나이의 앞에는 어느새 큼직한 구덩이 하나가 파여 있었다.
하지만 사나이는 구덩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심유한 눈으로 구덩이 저쪽,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대한 체격을 지닌 괴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입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으…… 나, 패마의 대력신왕권(大力神王拳)을 육장으로 막아내다니……." 거인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사나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씩 웃었다.
그러자 사나이도 웃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떠오른 웃음이었다.
넓은 대청.
열 개의 의자가 좌우로 다섯 개씩 놓여 있고, 중앙에는 그보다 조금 큰 태사의가 하나 자리하고 있지만 의자는 전부 비어 있었다.
대청 가운데에 두 사람이 있었다.
사나이와 체격이 극히 왜소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입을 반쯤 벌리고 헐떡숨을 쉬고 있었다.
노인이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떨어졌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쇠잔한 모습이었지만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반면에 사나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청 중앙에 서서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는 서로간의 진신내공을 겨루는 자세였다.
바람 한 점 들어올 곳이 없는 대청 안인데도 노인의 옷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노인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은 마치 머리 위에서 물을 동이로 퍼붓기라도 하는 듯 쏟아졌다. "새액새액."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도 대장간의 풀무질처럼 급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인의 머리 위로 하얀 김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하나의 구름으로 형상화되어 머리 위에 머물고 있었고, 시간이 좀더 흐르자 그 형상화된 하얀 기운이 급격하게 흐트러졌다.
거친 숨소리도 사라졌으며 그토록 무섭게 흐르던 땀도 깨끗하게 가셔 버렸다.
노인의 몸이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헝!" 사나이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온 것은 노인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 한 자나 위로 들려 올라간 시점이었다.
노인의 몸이 워낙 왜소했기 때문에 한 자나 위로 올라갔어도 머리가 겨우 사나이의 어깨에 닿았다.
사나이는 외마디 고함을 지르며 두 손을 앞으로 쭉 밀었다.
그러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두 사람의 장심이 흔들리더니 뚝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사나이가 비틀거리며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창백하게 변색되었으며 입가로 가는 피가 흘러내렸다. "휴우!" 바닥에 내려선 노인이 탄식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네가 조금만 더 늦게 손을 뗐더라도 나는 아마 구천의 고혼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노인이 의자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우측에 자리한 다섯 개의 의자 중 가장 윗자리에 몸을 앉혔다.
언제 나타났음인가? 노인이 몸을 앉히는 바로 그 순간, 나머지 의자들도 사람이 채워졌다.
열 개의 의자에 모두 한 사람씩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모두가 조금씩 특색이 있는 괴인들이었다.
그 중에는 사나이에게 패한 환마도 있었고, 비대한 패마(覇魔)도 있었으며 죽립을 쓴 쾌마(快魔)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비어있는 태사의가 사나이를 부르고 있었다.
사나이는 터벅터벅 걸어 태사의에 몸을 앉혔다. "이십 년 만이지?" 왜소한 노인 쇠마(衰魔)가 사나이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후후…… 이십 년은 긴 세월이다.
하지만 보람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십 년 만에야 너는 비로소 우리 십마(十魔)를 모두 이겼구나." 사나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눈초리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그도 상당한 격동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제 너는 천하마주가 되었다.
비록 지금은 우리 십 인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때는 천하를 떨어울리게 하였던 통천삼십삼마(通天三十三魔)의 공동전인이 된 것이다.
이제 너는 천하마주로서 천하에 너의 이름을 알리고 저 하늘에 마의 하늘, 마천성(魔天城)을 지어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라면 해낼 것이다." 쇠마가 자신있게 말했다. "왜냐하면 당금 천하에 너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의 부족한 점은 우리 십마가 보충해 줄 것이므로 그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미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저 간악한 백도인들은 우리 통천삼십삼마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길고 긴 세월이 뭉쳐져 이루어낸 한(恨).
그 한의 응어리가 쇠마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삼십 년 전, 간악한 백도인들은 우리 통천삼십삼마를 강호공적으로 선포하고 힘을 합쳐 우리를 죽이려 했다.
그 당시 우리 통천삼십삼마는 하나같이 경천동지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각기 자만심이 너무 강하여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다.
모두가 서로 자신이 제일이라고 내세우며 패권을 잡으려고 기를 썼지.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통천삼십삼마 중 이십삼 인이 죽었고 겨우 우리 십 인만이 남아 이처럼 그늘에 숨어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 삼십 년 전의 패배는 결코 힘이 모자라 진 것은 아니었다." 좌측의 다섯 개의 의자 중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혈마(血魔)가 으르렁거렸다. "간악한 백도인 중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들은 다만 우리가 모래알처럼 흩어진 틈을 이용해서 인해전술로 우리 통천삼십삼마 하나하나를 각개격파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그날의 패배에 승복할 수 있겠느냐?" "이제 암울한 날은 끝나고 우리는 다시 태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입을 연 것은 십 인 중에 유일하게 유삼(儒衫)을 걸친 지마(智魔)였다.
그는 오른손에 한 자루 붓을 들고 있었는데 그걸로 손바닥에 연신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를 쓰고 있었다. "천하는 이제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십마가 키워낸 천하마주의 위대함을…… 그리고 천하는 알게 될 것이다.
오직 마의 이름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진정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쇠마가 몸을 일으켰다.
혈마가 몸을 일으켰고 지마가 그 뒤를 따랐다.
검마(劍魔), 쾌마(快魔), 환마(幻魔), 패마(覇魔), 흑마(黑魔), 백마(白魔), 전마(電魔).
십마가 일제히 일어나 사나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극고의 존경심이 어린 눈으로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쇠마의 입에서 감격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 단황! 이제까지는 우리가 너의 사부였지만 이 순간부터 우리는 너의 수하가 된다.
너는 이제 진정한 마의 주인, 천하마주가 된 것이다!" 단황(段荒).
천하마주(天下魔主).
그의 탄생이었다.
제 1 장 참사(慘事) 핏빛 노을이 짙다.
복가장(卜家莊).
산서성(山西省) 안읍(安邑)에서 북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무가(武家)였다.
복가장은 사천당문이나 악씨세가처럼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명문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내실이 있었고 산서성 일대에서는 어느 정도 명망을 얻고 있는 가문이었다.
또한 당금 천하무림의 질서를 바로잡고 있는 백도맹(白道盟), 단심백결회(丹心白結會)의 칠십이순찰당(七十二巡察堂) 중의 한 곳이기도 했다.
다각다각 하늘을 온통 물들이고도 남아 대지로 철철 흘러내리는 천혈(天血)을 받으며 한 필의 말이 복가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끼이익 대문이 열렸다.
나온 것은 작은 바구니를 든 노복이었다.
그는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나오자마자 급히 걸음을 옮겨 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도 떼어놓지 못했다. "저, 저건?" 다각다각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는 한 필의 말.
그걸 보는 순간 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진 것이다.
말 위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여자였다.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니,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말 등에 가로 걸쳐져 있었다.
말에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실려 있었고,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가 노을을 받아 붉은 나삼을 걸친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노복이 놀란 것은 여인의 알몸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을보다 더 진한 붉은 선혈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 말 등을 적시며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각다각 무심하게 다가오는 말발굽 아래로 피웅덩이가 하나씩 고이고 있었다. "으악!" 어느덧 노을이 사라지고 회색빛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나 둘 횃불이 켜졌다.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은 일곱 명의 청년이었고, 일곱 개의 횃불이 좁은 안마당을 밝히고 있었기에 그곳은 어둠의 침범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횃불을 들고 있는 청년들의 얼굴은 그 불빛처럼 밝지는 않았다.
너무도 처참한 한 여인의 시신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기에…….
여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이나 되었을까? 그 이하로 보이기도 했다.
청초한 얼굴에 매우 뛰어난 미색이었으나 그 얼굴에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백옥같이 뽀얀 살결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봉긋한 젖가슴이 있어야 할 자리는 예리한 칼로 도려내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더구나 더욱 처참한 것은 방초처럼 무성해야 할 여인의 신비지처가 엉망으로 짓뭉개지고 검은 피가 응고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간살(姦殺).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간살의 흔적이 뚜렷했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그토록 엄중한 상처를 입고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가는 손톱자국 하나 없었다.
다만 죽어가면서 입술을 깨물었는지 가는 피 한 가닥이 입끝에 말라붙어 있었고, 지그시 감은 긴 속눈썹 위로 눈물 같은 것이 한 방울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으음……." 신음소리가 났다.
횃불의 불빛에 의지해 세 사람이 여자의 시신을 보고 있었다.
그 중 가운데에 위치한 인물은 바로 복가장의 가주인 팔통창절(八通槍絶) 복후정(卜後正)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복후정의 동생인 복후종(卜後從)과 복가장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는 총관 왕파립(王破立)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들이었다. "끔찍하군." 이윽고 복후정이 여자의 시신에서 눈을 떼며 무겁게 말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없다.
하긴 아직 달이 뜰 시간도 아니었다. "자넨 저 여자가 누군지 알겠나?" "압니다." 왕파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인은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인 모용일란입니다." "역시 그렇군." 복후정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용일란이라고요? 저 여자가?" 정작 놀란 건 복후종이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여인의 시신을 다시 보았다.
모용일란(慕容一蘭).
명망높은 모용세가(慕容世家)의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산서성 제일의 미인이라 불리던 그녀.
저 처참한 시신이 정말로 모용일란이란 말인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히 한 여인이 간살을 당했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 아닌가! "어떤 호랑이 간을 삶아 먹은 자가 감히 모용일란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 여자를 우리 복가장으로 보낸 의도는 뭐지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복후정이 느릿느릿 안채로 향했다.
복후종이 급히 그 뒤를 쫓았고 왕파립이 가장 늦게 따라가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청년들이 모용일란의 시신에 거적을 덮었다.
이제 그녀의 알몸은 더 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나?" 복후정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수하와 동생을 돌아보았다.
모용일란의 시신이 복가장으로 들어온 이후 그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게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체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가벼이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왕파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지부에 알리는 것이 어떨까요?" 지부(支府)라는 것은 단심백결회의 지부를 말함이다.
당금 무림은 육등분하여 단심백결회의 육대지부가 다스리고 있었고 그 밑에 다시 칠십이순찰당이 있었다.
그러니 이처럼 중대한 일은 산서지부(山西支府)에 알려서 지시를 기다리자는 것이 왕파립의 의견이었다. "저 시신을 그대로 두고 말인가?" 복후정이 마땅치 않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수는 없네.
물론 지부에 알리고 하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나 그 전에 먼저 모용일란의 시신을 모용세가로 보내줘야 하네.
여기서 모용세가까지는 불과 한 시진 거리인데 가까운 모용세가를 놔두고 먼 곳에 있는 지부에 알린다는 것은 온당치 않네.
더욱이 지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내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릴 터인데 그 동안 모용일란의 시신을 감추어 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복후종이 얼른 동조했다. "모용일란이 우리 복가장에 오기까지 이미 많은 사람들의 눈에 뜨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모용세가에 소문이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내일이라도 당장 달려올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어째서 모용일란의 시신을 감춰두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나……." 왕파립이 여전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자칫 모용세가가 오해라도 한다면 난처한 일이 생깁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를 한단 말인가!" 복후정의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모용일란을 저렇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야.
물론 약간의 오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좋은 말로 해결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설사 최악의 결과가 온다고 하여도 모용일란의 시신을 감춰두었다가 그들의 눈에 뜨이는 것보다는 낫네." 모용세가는 복가장과 같이 칠십이순찰당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 성세는 복가장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사실상 산서성의 맹주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느닷없이 굴러 들어온 모용일란의 시신을 두고 이들이 전전긍긍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HTML/스크립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은 최대 120자이며 페이지를 이동하지 않고 바로 등록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Copyright © webstoryboard.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