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2편 (2/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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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1 - 2편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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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이 일을 잘못 해결했다가는 모용세가와 풀 수 없는 원한을 맺을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열렸다.
말을 탄 왕파립이 앞장서서 나왔고 그 뒤를 모용일란의 시신을 실은 수레가 뒤따랐다.
그녀를 모용세가로 보내주는 것이다.
수레 뒤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십여 명의 검수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일이 잘 되야 할 텐데…….' 모용세가로 가는 왕파립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아버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일렁이는 촛불을 보고 있던 복후정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청의를 걸친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이는 이제 겨우 십육칠 세나 되었을까? 칠흑처럼 검은 머리는 어깨를 덮고 있었고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오똑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이 오목조목 자리를 잡은 것이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복금사(卜金沙).
복후정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하지만 복금사를 보는 복후정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언제나 딸을 보면 습관처럼 떠올리던 미소도 오늘은 간곳 없다. "네가 이 밤중에 웬일이냐?" "얘기 들었어요." 복금사도 평소의 어리광 가득한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이었다. "모용 언니가 화를 당했다죠?" "그건 너 같은 어린아이가 알 일이 아니다!" 복후정의 목소리는 엄했다.
일반적인 변사(變死)라도 사랑하는 딸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심정일 텐데, 더구나 모용일란의 죽음은 입에도 담기 싫은 간살이 아닌가! '누가 그런 말을 저애의 귀에 흘려 넣었는지 모르겠군.' 복후정은 날이 밝는 대로 조사하여 혼쭐을 내줄 작정을 했다.
하지만 복금사는 아버지의 엄한 기색에는 아랑곳 않고 옆으로 와 앉았다. "아버지께서 모용 언니의 시신을 모용세가로 보낸 것은 대단히 잘못하신 처사예요." "너 지금 뭐라 했느냐?" 여태껏 누구에게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복후정이었다.
아무리 그런 말을 한 게 딸이라도 자연 그의 음성이 곱지 않다.
복금사는 총명한 눈을 들어 복후정을 똑바로 보았다. "모용 언니가 우리 복가장에 온 것은 우연일까요? 누군가 일부러 이쪽으로 보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어요?" "그쯤은 나도 안다." "그렇다면 그 흉수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산서성 일대에서 감히 모용세가의 권위를 거스를 자는 없어요.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런데도 흉수는 감히 모용 언니를 살해했을 뿐 아니라 대담하게 그 시신을 우리 복가장으로 보냈어요.
만일 모용세가를 두려워하는 자가 이런 짓을 했다면 당연히 모용 언니의 얼굴을 훼손하여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자는 그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신엔 손을 대면서도 얼굴만은 손대지 않았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이건 흉수가 우리가 그 시신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하자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음……" 복후정은 무거운 신음을 뱉어냈다.
그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를 나무라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더구나 모용 언니의 시신을 모용세가가 아닌 우리 복가장으로 보냈다는 것은 우리가 그걸 모용세가로 보내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 흉수가 원하는 대로 하고 있다는 말이죠."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복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가, 왜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냐?"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있어요." 복금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흉수의 목적은 우리 복가장과 모용세가를 이간질시키려는 것이에요.
모용 언니의 죽음을 우리의 짓으로 덮어씌우려는 거죠." "얘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역시 젊은 것들은 일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복후정은 딸의 총명함에 흡족해 하면서도 약간의 불만을 느꼈다.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천우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소견이 좁은 위인이 아니다.
물론 딸의 죽음에 충격이야 받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우리의 소행이라 생각할 만큼 단순하지는 않단 말이다.
더구나 우리 복가장은 모용세가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겠느냐? 또한 모용일란의 시신이 우리 복가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니 그들이 증인을 선다면 이 일은 아무런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
이 아비는 이미 저간의 사정을 적은 친서를 왕총관에게 주어 보냈다.
그 친서를 읽는다면 절대로 오해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복금사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복후정이라면 절대로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왕파립이 출발한 이상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지부에 사람을 보내세요.
모용세가와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요." "지부에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다." 복후정이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해결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계신다.' 복후정의 방을 나오는 복금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어쩐지 상상하기도 싫은 무서운 일이 곧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라면 모용 언니의 시신을 감추고 지부로 먼저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지부가 개입한다면 모용세가도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경비무사가 복금사를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모용 언니를 죽였을까? 모용 언니의 아름다움은 나도 부러워할 정도였는데 그렇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다니! 아니, 그보다 흉수는 대관절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오빠만 집에 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복금사는 문득 집에 없는 오빠 복청양(卜靑陽)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복후정은 눈을 떴다.
처음엔 그저 잘못 들은 소리이겠거니 여겼다.
잠결에 헛소리를 들은 것일 게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다급하게…….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횃불을 등에 지고 우뚝 서 있는 인물은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천우(慕容泉雨)였다.
그는 어둠보다도 깊은 눈으로 이제 막 옷을 차려입고 허둥지둥 잠자리에서 나오는 복후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때마침 복후종도 달려왔다. "아니, 모용형이 이 밤중에 웬일이시오?" 급급히 마당에 내려서서 포권을 하며 복후정이 물었다.
그러잖아도 모용일란의 일로 불안해 하던 참이라 그의 음성이 자연 떨려 나왔다. "복후정, 진정 내가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른단 말이냐?" 모용천우의 우렁찬 음성이 어둠을 저만치로 밀어냈다.
개들이 놀라 컹컹 짖기 시작했다. '이건…….' 복후정은 은근히 눈살을 찌푸리며 모용천우의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뒤에는 모용칠검(慕容七劍)이라 불리는 정예무사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다시 두 명의 노인이 더 있었다.
모두 모용세가의 원로들로 가문의 존망이 걸린 막중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전대고수들이었다.
횃불을 들고 있는 자들 또한 모용세가의 고수들로 줄잡아 오십 명은 되었다.
모용세가의 인원이 절반 가까이 출동한 셈으로, 지방의 작은 무가인 복가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전력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모용세가는 이미 오늘 한바탕 악전을 치를 것을 각오하고 있는 듯했다. '이자는 너무 광망하구나.
수하들의 위세를 빌려 나를 억누르려 하다니! 설마 하니 내가 제까짓 놈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복후정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한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굽혔다. "모용형, 아마 영애의 일로 이러시는 모양인데 그 일이라면 이미……." "닥쳐라!" 모용천우의 분노에 찬 음성이 그의 말을 막았다. "복후정, 이 금수만도 못한 놈! 이미 증인과 증거가 확실한데 발뺌을 할 셈이냐!" "증인이라니……." 복후정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정말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자를 끌어내라!" 모용천우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두 명의 장한이 한 사람을 개 끌듯 질질 끌며 걸어 나왔다. "자네……." 끌려나온 사람을 보는 순간 복후정은 정말로 멍청하게 되어 할말을 잃었다.
그는 해 저물 녘에 모용일란의 시신을 가지고 모용세가로 떠났던 왕파립이 아닌가? 왕파립은 전신이 피투성이였으며 한쪽 팔이 달아나고 없었다.
그뿐 아니라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전신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이미 반죽음 상태였다.
그런 모습으로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주……." 왕파립이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들어 복후정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가주……." '죄송하다니, 뭐가 죄송하다는 말인가?' 복후정은 머릿속이 온통 하얀 백지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화들짝 놀라면서 정신을 차렸다.
죄송하다는 말.
그것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미처 어떠한 말을 하기도 전에 모용천우의 명이 떨어졌다. "그자의 목을 베라!" 한광이 번뜩였다.
비명도 없이 왕파립의 목이 바닥에 굴렀다.
목을 자른 자의 수법이 너무도 깨끗하여 순간적으로 왕파립의 목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거센 핏줄기가 솟구치며 왕파립의 몸뚱이가 옆으로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복후종이 노성을 지르며 모용천우를 덮쳐갔다.
복후정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다.
하기야 이미 넋이 달아난 복후정은 말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냉랭한 외침과 함께 두 명의 노인이 좌우에서 복후종을 막아섰다.
하나는 검을 사용했고, 하나는 죽장을 사용했는데 발초(發招)가 신속하고 날렵한 것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절대로 복후종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왕파립의 죽음에 이성을 잃은 복후종은 물불 가리지 않고 쌍창(雙槍)을 뽑아들며 두 노인에게 대들고 있었다.
복후종이 펼치는 것은 복가장의 절기인 쇄금십팔창법(鎖金十八槍法)으로 그가 쌍창을 휘두르자 대번에 주위가 창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두 노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서로간에 호흡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접근하여 불과 십여 초도 지나기 전에 복후종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모용형! 이, 이게……." 복후정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가솔들을 풀어 저들을 주살하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도 아니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깨지는 것은 복가장일 뿐, 저들에게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복후정, 내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느냐?" 모용천우가 싸우고 있는 세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물었다. "그, 그렇소.
나는 모용형에게 이런 핍박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소.
만일 이 일을 지부에서 안다면……." "네가 지부의 힘을 빌려 나를 겁주려고 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하지만……." "아아악!" 모용천우가 말끝을 흐리며 성큼 한 걸음 다가서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을 휘두른 노인에게 복후종의 한 팔이 잘린 것이다. "후종아!" "그자를 죽이지는 마시오." 두 노인에게 덮쳐가려던 복후정이 멈칫했다.
시기적절하게 내린 모용천우의 명이 그의 발을 묶은 것이다.
죽장에 혈도를 짚힌 복후종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모용천우, 너……." 복후정은 피가 거꾸로 솟구쳐 기절할 것 같았다.
이제는 피할 길이 없다.
뻔히 승산이 없는지 알지만 모용세가와 죽기로 싸워 결판을 내는 수밖에…….
그런 복후정의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용천우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모용천우가 이른 곳은 엉뚱하게도 복가장의 후원이었다.
그곳은 몇 그루의 나무만 서 있을 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 "저 나무 밑을 파라!" 모용천우가 나무들 중 연륜이 가장 오래된 노송을 가리키자 장한 서넛이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노송 밑이 대번에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오냐,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너는 결코 이곳을 살아서 나가지 못하리라.' 복후정은 암암리에 두 손에 공력을 잔뜩 모으며 모용천우를 노려보았다.
그와 모용천우의 거리는 약 오 장.
기습적으로 덮친다면 단번에 살수(殺手)를 펼칠 수 있는 거리였지만, 모용칠검이 그 사이에 버티고 있으니 그도 쉽지 않다.
하지만 복가장도 결코 잠자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일백 명의 가솔이 전부 나와 각기 병장기를 거머쥐고 집 안으로 들어온 모용세가의 고수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격하라는 가주(家主)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실력은 그들에게 뒤질지 모르나 수효로는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리고 약간의 실력차이는 수효의 많음으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모용천우,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노송 밑을 파던 자들이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이어 그리로 달려간 모용천우가 돌연 윽! 소리를 내면서 신형을 휘청거렸다.
복후정은 영문을 모른 채 노송 밑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모용천우의 핏발선 눈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한 여인이 흙에 덮인 채 상반신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긴 머리, 핏기 하나 없는 얼굴, 입가에는 가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가슴은 예리한 칼로 도려내어 허연 뼈가 드러났다.
모용일란.
바로 그녀가 아닌가! "복후정, 네 이노옴!" 모용천우의 눈에서 불길이 훨훨 일었다.
아니, 그의 전신이 이미 불덩어리였다. "내 왕파립의 자백을 듣고도 설마 설마 했거늘, 이런 금수 같은 짓을…… 네가 사람이냐!" "모, 모용형…… 이, 이건……." "복후정, 내 오늘 너와 생사결판을 내겠다!" 모용천우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것은 격렬한 분노 때문이리라. '음모다.
이건 음모야.
너무도 무서운…….' 복후정은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뻗었다.
그는 창을 뽑아 상대의 거센 기세에 대항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당연히 모용세가에 가 있어야 할 모용일란의 시신이 복가장의 후원에서 발견되는 순간 모든 사고 능력이 일시에 기능을 멈춘 것이다.
펑 장세와 장세가 격돌했다. "크윽!" 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복후정이 비틀비틀 물러섰다.
기선을 빼앗기고, 거기에다 싸울 의지마저 상실한 마당에 엉겁결에 받아낸 장세였으니 손해를 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모용천우의 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등에 메고 있던 보검을 뽑아들어 연속으로 십삼 검을 쳐내고 있었다.
거센 검기(劍氣)가 파도처럼 일어나며 주변의 공기를 난도질했다.
수세에 몰린 복후정은 창을 들 시간도 벌지 못하고 그저 무작정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그의 옷이 금방 너덜너덜해지며 신체 여기저기에 핏물이 배어 나왔다.
원래 복후정과 모용천우는 그렇게 실력차가 많이 나는 상대는 아니었다.
복후정은 서로간에 진정한 실력을 겨룬다면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도 적어도 삼백초(招) 이내로는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용천우는 극도로 분노해서 평소보다 두 곱절은 기운을 뽑아내고 있었고, 복후정은 얼이 빠져 수비에만도 급급해 하는 판이라 자연 승부가 쉽게 갈렸다. "모두 죽여라!" 두 가문의 가주가 혈투(血鬪)를 벌이자, 누군가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대살육(大殺戮)의 시작이었다. "와아아!"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복가장의 담을 넘어 들어오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모두들 병장기를 손에 쥐고 있었으며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담을 넘어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복가장의 사람들을 주살하기 시작했다. "앗! 어느새 매복이 있었다니……." "뒤를 막아라!"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라 복가장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하나씩 죽어 넘어졌다.
그것은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복후정은 사력을 다해 삼장을 쳐내 모용천우를 뒤로 물러서게 한 뒤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 냄새가 역겨웠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은 복가장의 가솔들이었다.
복가장으로 난입한 모용세가의 고수들은 처음부터 손에 인정을 두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무공(武功)을 모르는 여자들과 어린아이까지도 무참하게 주살하고 있었다. "모용천우, 이 천벌을 받을 놈!" 눈이 뒤집힌 복후정은 등에서 창을 뽑아들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모용천우에게 몸을 날렸다.
복가장의 비전절기인 쇄금십팔창법(碎金十八槍法)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가슴에 얼음을 댄 것 같은 차가운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복후정은 동작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옷자락이 길게 갈라지며 그리로 핏물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옷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핏물이 발등을 적시는 것을 보았다.
어째서 따뜻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복후정, 네가 저지른 죄값이다." 모용천우의 좌수가 활짝 펴지며 복후정의 어깨를 강타했다. "으악!" 복후정은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가 풀썩 떨어졌다. "아버지!" 그늘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복금사가 빽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생각이었을 뿐 그녀는 허리에 뜨끔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스르르 쓰러지고 말았다. '누가…….' 그것이 그녀가 점차 흐려지는 의식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이어 간 생각이었다.
두 명의 장한이 혈도를 짚인 복후종을 질질 끌며 모용천우에게로 왔다. "가주!" "그자는 살려 두어라." 모용천우가 차갑게 말했다.
그의 주변에서는 여전히 처절한 비명들이 쉴새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단지 모용세가의 고수들이 복가장을 이 잡듯이 뒤지면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을 확인하여 죽이는 과정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대신 두 팔과 두 다리를 자른 뒤에 여기 남아서 죽을 때까지 외치도록 만들어라.
복가장이 무슨 짓을 하였으며 나 모용천우가 하늘을 대신하여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을!" "알겠습니다." "이, 이 악독한……." 복후종은 피눈물이 흐르는 눈을 부릅뜨며 모용천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격렬한 고통과 함께 의식을 잃어야만 했다. "복후정의 딸년은 아직 찾지 못했느냐?" 모용천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계집을 산 채로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오너라! 복후정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일란이와 같은 꼴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불길이 솟았다.
발원지도 모른 채 시작된 불길은 이내 복가장을 휘감았다.
불길은 수많은 시신을 연료로 삼아 밤새 타오르다가 날이 밝을 즈음에서야 비로소 저절로 사그라졌다.
복가장에서는 더 이상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 * 태양이 떴다.
그러나 태양은 얼굴을 내밀자마자 이내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저 아래 펼쳐진 처참한 광경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겠던지…….
악몽 같은 하룻밤을 보낸 복가장 주변의 사람들은 날이 밝자 우중우중 걸어나와 잠을 설쳐 벌개진 눈으로 폐허가 된 복가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리로 다가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는 복가장을 미친 듯이 뒤지고 다니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발이 데어 물집이 생기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고 여기저기 삐죽 솟아있는 잔해에 옷이 걸려 찢어지고 하얀 속살이 그대로 내보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머리는 산발하였고 전신에 숯검정을 뒤집어썼으며 두 손은 시체들을 뒤적이느라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복금사.
그녀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불과 한 시진 전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상처 하나 없이 복가장의 폐허 곁에 얌전하게 눕혀져 있었다.
안전했다.
하나 자신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기 이전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혼절해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처럼 폐허 속을 뒤지고 다니는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 그녀의 목은 쉬어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목이 터져 피가 흐르더라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만은 꺾을 수가 없었다.
벌써 얼마나 많은 시신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그 중에는 얼굴이 불길에 시달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신도 많았다.
어쩌면 그 시신 중에 아버지 복후정의 시신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복금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거의 가망이 없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곳에 있다면 찾을 수 있어, 반드시! 아버지를 내가 몰라볼 리 없어.' 어쩌면 부질없는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희망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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