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천우……." 복금사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극히 희미하긴 했지만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다. "모용천우…… 모용…… 이 천벌을 받을 놈! 뼈다귀를 갈아 개를 주고 골통을 빠개서 요강을 삼을 놈……." "아버지?" 지칠 대로 지친 복금사였다. 하나 그녀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맹세코 그녀의 평생 이처럼 빨리 달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재가 수북하고 그 위로 시커멓게 탄 서까래들이 얼키설키 엉켜 있었다. 소리는 바로 그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모용천우…… 모용……." "아버지? 아버지세요?" 그녀는 서까래를 잡아 힘껏 밀어냈다. 너무 서둔 탓에 못이 손바닥을 찔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서까래를 모두 치우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재를 마구 파냈다.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오직 몸통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신은 잘 그을린 통돼지구이처럼 까맣게 익어 있었으며 머리칼도 고슬고슬 타 들어가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얼굴은 뭉그러져 목 위에 떡반죽 하나를 얹어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고깃덩이가 분명히 살아있고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것이다. "모용…… 이놈……." "숙부님!" 복금사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고깃덩이가 꿈틀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반응을 보인 것이다. "누구……?" "숙부님, 저예요. 금사예요!" 복금사는 복후종을 안아 들고 마구 흔들었다. 복후종의 머리가 힘없이 덜렁거린다. "금사…… 너로구나……." 복후종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흘러나왔다. "후후, 하늘도 무심치는 않구나. 네가 화를 면하다니…… 넌 괜찮은 거냐? 정말 괜찮은 거지?" "네. 저는 괜찮아요, 숙부님." 복금사는 철철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울음은 나중에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어도 된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할 때다. "금사야, 잘 들어라……." 복후종이 중얼거렸다. "이것은 음모다. 너무나 무서운 음모…… 너는 반드시 이 음모를 파헤쳐 우리 복가장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약속해요. 그럴게요, 숙부님." "너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울 거다……." 복후종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그토록 모진 악형을 당하고 재 속에 묻혀서도 용케 목숨을 이어오던 그가 어린 조카의 음성을 듣는 순간 급격하게 생의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청양이를 찾아가거라. 이 짐은 너와 청양이 나눠가져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모용천우에게서 이 혈채를 받아내라. 알겠느냐?" "네, 숙부님." "그리고…… 부탁이 있다." 복후종은 잠시 숨을 멈추더니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 남은 기력을 모았다. "날…… 죽여다오." "숙부님!" "제발…… 날 죽여다오. 네 손으로 날 죽게 해다오. 부탁이다……." "안 돼요! 전 그럴 수 없어요." "못난 것!"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복후종의 목소리가 커졌다. 미미하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 복금사의 팔 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만한 일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복수를 하겠다는 거냐? 어서 날 죽여라. 하지만 잊지는 말아라. 나와 우리 복가장의 식구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모용천우와 이 음모를 꾸민 배후자라는 것을……." 끄덕끄덕! 복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복후종이 지금 그녀의 동작을 볼 수 없는 처지라는 것도 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잊지 않을게요, 숙부님.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그날 저녁. 복금사는 복가장의 폐허를 떠났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복후종과 일백여 복가장 가솔들의 시신을 뒤로하고……. 하지만 끝내 아버지 복후정의 시신만은 찾지 못했다. 노을이 짙다. 어제와 똑같은 노을이다. 제 2 장 흑주쟁투(黑珠爭鬪) "됐다." 복청양(卜靑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만 더…….' 그는 잔디밭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한 팔은 뻗고 한 팔은 무심하게 이마를 덮어 햇빛을 가리고 있다. 여자의 것처럼 긴 속눈썹이 지그시 감겨있는 것이 영락없이 잠이 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입에 물려 한들거리고 있는 풀잎이 그가 잠든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사실 복청양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작은 호흡 때문이다. 어린 사슴이었다. 사슴은 이제 겨우 자신의 몸을 지탱할 만한 가는 발을 조금씩 움직여 가며 복청양의 손바닥에 코를 들이대고 있었다. 사슴의 코와 손바닥 사이에는 불과 한 치 남짓한 틈이 있었고 그리로 아주 가는 호흡이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잔뜩 참았던 소변을 보기 직전에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전율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보름 만이다. 후훗, 이 녀석은 보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게 마음을 열려고 한다.' 지난 보름 동안 그가 이 어린 사슴에게 기울인 정성은 각별한 것이었다. 처음 사슴을 발견하고 그 투명한 눈망울에 매료되면서부터 그는 사슴의 환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사슴을 노리는 맹수를 쫓아주기도 하고, 한 시진이나 꼼짝 않고 앉아 사슴을 지켜보기도 하고 먹을 것을 손에 들고 줘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사슴은 언제나 그를 경계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달아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후에야 겨우 잠깐씩 그에게 투명한 눈망울을 맞춰줄 정도로 인색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인색한 녀석이 그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어쩌면 그가 잠든 줄 알고 마음을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그래 조금만.' 복청양의 얼굴에 더욱 짙은 미소가 그려질 때였다. 사슴이 막 혀를 내밀어 그의 손바닥을 핥으려고 할 때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사슴의 발치에 떨어졌다. 핑 돌멩이에 실린 진력은 상당한 것으로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더니 한 번 튕기지도 않고 그대로 박혀 버렸다. 사슴이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무엇이 자신을 노리는가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 다시 돌멩이 하나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드득! 놀란 사슴은 네 굽을 놓으며 달려가더니 숲속으로 들어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 "무슨 짓입니까!" 벌떡 몸을 일으키며 복청양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노여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클클…… 이 녀석아! 우리에게 감사하게 생각해라." "아무렴, 암암…… 우리가 네 녀석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저 녀석은 벌써 껍질이 벗겨져 노부의 입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긴 그것이 저 어린 녀석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일는지 모르겠지만……." "훌륭한 적선이겠지. 세상은 고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느니 일찌감치 우리의 배나 채워주는 것이 저 사슴을 위해서도 행복한 일이었는지 몰라." "클클…… 그러면 우리가 실수를 한 건가? 모처럼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말야."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너도나도 서로의 말꼬리를 붙잡고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정작 당사자인 복청양이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목소리는 바로 그의 사부인 천산오조(天山五祖)가 내는 것이었고, 그들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이든 분들이 하는 짓이라곤……." 복청양은 툴툴거리며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사슴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놀란 사슴이 다시 그에게 접근하려면 보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짐승들은 한 번 놀란 일은 쉽게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복청양이다. "클클…… 왜 불만이냐?" "불만이면 제깟 녀석이 어쩔 거야. 그렇다고 설마 우리한테 화풀이를 할까?" "그럴지도 모르지. 난 저 녀석이 무서워. 자는 데 와서 이마에 불침을 놓을지도 모르거든." "큭큭! 너는 저 녀석에게 한 번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지." "그게 어디 나뿐이냐? 너희들도 한 번씩은 다 당한 일이잖아." '사부님들은 어린애들 같으시다. 아니, 저분들의 정신연령은 정말로 아주 어릴지도 모른다.' 복청양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사부들이 저 어린 사슴을 죽이지 않고 그냥 달아나게 놔둔 것이 단순한 자비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여 사슴을 죽였다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를……. 언제였던가? 아마 칠 년쯤 되었을 것이다. 복청양이 아주 어렸을 때니까. 그가 기르던 새를 사부들이 수련에 방해가 된다고 잡아죽인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사흘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초막 안에 틀어박혀 울며 지냈다. 사부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달래고 사납게 윽박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날마다 빼놓지 않고 해오던 수련도 제쳐 놓았음은 물론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사부들은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강제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부들이 사슴을 죽이지 않은 것도 그때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 이 녀석아! 언제까지 거기에 멍하니 있을 참이냐?" "그런다고 한 번 달아난 녀석이 올 것 같으냐? 일찌감치 꿈 깨라, 꿈 깨!" "하긴 저 녀석이 그렇게 쉽게 정신을 차릴 놈 같았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의 속을 썩이지는 않았겠지." "클클…… 우리 천산오조가 평생에 가장 잘못한 일이 있다면 저런 덜된 녀석을 제자로 거둔 것이다." "동감이다. 네 녀석이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럼 내가 언젠 그른 소리를 하더냐?" "암, 네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구린내나는 개 방귀였지." "뭐라고?" "쉿! 누가 온다." 목소리 하나가 급히 말했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목소리들이 일제히 잠잠해졌다. 처음부터 그곳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심한 새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왔다. 산 아래쪽에 까만 점이 나타났다. 점은 점차 커져서 사람의 모양으로 확대되었다. 여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듯 빠르게 산을 올라오다가 간혹 신형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꾸준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금사야!" 보고 있던 복청양의 눈이 커졌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신형을 날려 산 아래로 여인을 마중 나갔다. 놀랄 만한 빠르기였다. "오빠!" "금사야!" 두 사람이 하나로 엉켰다. 복청양의 손바닥에 작은 돌 하나가 얹혀 있었다. 복청양은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려 돌을 쥐었다. 돌은 그의 손에 가득 찼으며 점차 으스러지더니 가루로 변해 손가락 사이로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바람이 불어와 돌가루를 가져가 버렸다. "그럼, 숙부님은……?" "내가 잠들게 해드렸어요." 복금사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담담했다. 그녀는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대신 내면의 성숙도는 더해진 듯 어린 소녀다운 치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십 년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복가장의 참변을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속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깊은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복청양이 어리석지는 않았다. "잘했다……." 지금 그녀에게 다른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버님은 모용세가로 끌려 가셨겠구나?" "틀림없어요. 어쩌면……." 복금사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복후정이 이미 모용천우에게 죽음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모용세가로 갈 거죠, 오빠?" "가야지." 복청양은 초막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한 점 티없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눈썹은 다소 가는 편이었으며 콧날이 선명하다. 입술만 붉다면 여자로도 오해할 만큼 고운 외모였다. 몸매도 여자의 것처럼 호리호리했다. 키는 상당히 큰 편이어서 복금사가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만 했다. "가서 모용가주를 만나겠다." "만나서 어쩌게요?" 복금사는 기대에 찬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라면 복수를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산오조라는 기인들에게 십 년이 넘도록 무예를 연마한 그가 아닌가? 그에게는 충분히 모용세가의 악행을 응징할 힘이 있을 것이다. "우선 모용가주가 품고 있는 오해를 푸는 게 급선무겠지. 그도 사리를 아는 사람이니 지금쯤은 우리 복가장이 모용일란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니 좋은 말로 설득하면 아버님을 풀어 줄지도 모른다." "오빠, 그걸 말이라고 해요!" 복금사가 빽 소리를 지르자 복청양이 쓸쓸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럼 날보고 어쩌란 말이냐! 지금으로썬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오빠는 지금 그 짐승 같은 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 참이에요?" "필요하다면 무릎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해야지.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버님을 구해야 한다. 지금은 그것밖에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빠라는 사람은 대체……." 복금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샘이 모두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하늘처럼 믿었던 오빠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금사야, 피는 또 피를 부르는 법이다. 이 일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잘못이 있다면 이런 음모를 꾸민 흉수에게 있을 뿐이지, 모용세가를 원망할 수는 없다. 너는 내가 모용세가로 가서 우리 복가장이 당한 만큼 똑같이 해주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내게는 그럴 힘도 의사도 없다. 물론 분하기는 하지만 사람은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일도 참아야 하는 법이다." "흥! 그런 말로 오빠의 나약함을 감추려고 하지 말아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세요. 오빠는 지금 겁이 난다고." "그래, 난 겁이 난다." 복청양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죽는 건 겁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게 될까봐 두렵다. 인명은 그 어떤 것이든 똑같은 가치가 있다. 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건 어떠한 명분으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잘못했군요. 오빠는 차라리 불문(佛門)에 들어갈 걸 그랬어요." "너는 내 말을 오해하고 있구나." 복청양은 사랑하는 동생이 자신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물론 우리 가문의 한을 풀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라면 피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피로써 피 위에 덧칠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면 끝이 없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서서 그 원한에 종지부를 찍어 주어야만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오빠라는 말이로군요. 그래서 복수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꼬리부터 내리는 게 올바른 일이란 말인가요?" "너와 이런 식으로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 복청양이 몸을 바로 세웠다. 복금사는 지쳐 있었다. 심신이 극도로 피로한 아이를 데리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자체가 아무런 의미없는 일이다. "좀 쉬어라. 나는 사부님들을 만나고 오겠다. 사부님들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후,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산을 내려가자." "멍청한 놈!" 노성에 가까운 질타에 초막이 쩌렁쩌렁 울렸다. "가문의 혈채를 안고 있는 놈이 한가하게 여기서 하루를 보내겠다는 말이냐? 그러고도 네 녀석이 사내냐!" "클클…… 저 녀석은 애초부터 사내가 아니었어. 계집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녀석이 어쩌다 사내로 태어나서 온갖 망신을 다 시키는지 몰라." "이놈아! 그건 처음부터 네가 잘못 가르친 탓이다. 예로부터 엄모(嚴母)에 견자(犬子)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느냐?" "엄모라니? 방금 그 말, 내가 치마두른 여편네란 말이냐?" "어? 느려 터진 놈이 그때는 말귀를 빨리 알아듣네." 복금사는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혹은 가깝고 혹은 멀다. 왼쪽에서 들리기도 하고 오른쪽에서 들리기도 한다.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외에 아무리 둘러봐도 종잡을 길이 없다. '이 괴상한 목소리의 임자들이 바로 오빠의 사부인 천산오조란 말인가? 아버지가 천산오조는 세상에 보기드문 기인들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구나!' "야, 이 녀석아.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어서 산을 내려가지 않고 뭘 하느냐? 아직 해가 저물려면 멀었다. 설혹 가다가 해가 저물면 또 어떠냐. 밤을 지새면서라도 발이 부르트게 달려가서 복수를 해야 할 것 아니냐!" "네 녀석의 얼굴을 보아하니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만 안심해라. 모용천우라는 놈은 절대로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암, 못 되고말고. 모용천우뿐 아니라 천하를 통틀어 봐도 너를 이길 자는 아마 열 손가락 안에도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얼씨구…… 네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었다만 실제로 장을 지지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거야 내 말이 한 번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맞는 말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느냐?" "클클…… 너처럼 낯두꺼운 놈은 처음이다. 뭐? 한 번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구?" "와하하, 와하…… 아이고…… 배가 아파 죽겠구나!" 복금사의 손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복청양이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다. "가자." 그가 말했다. "사부님들이 이미 승낙하셨으니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서두르자." "오빠……." 만나자마자 반가움보다는 실망이 먼저 앞섰는데도 여전히 손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복금사는 다시 한 번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는 걸 애써 참아야 했다. 복청양이 허공에 대고 포권하여 다섯 번 인사하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다섯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초막 앞에 모여 서서 멀리 점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클클…… 난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을 알 수가 없다." "네가 모르는 게 어디 저 녀석뿐이냐?" "그럼 너는 안단 말이냐?" "알지. 암 알고말고. 그러니까……." "이것아, 공연히 나쁜 머리 쥐어짜려고 하지 마라." "저 녀석은 무공을 익히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 지난 십 년 동안 난 저 녀석에게 백 번도 넘게 놀랐다." "그거야, 네 이마에 저 녀석이 불침을 놓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구슬이 아무리 많아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꿰지를 못하는데…… 겨우 새 한 마리가 죽었다고 질질 짜고 어린 사슴하고나 놀려는 녀석을 어떻게 믿겠느냐?" "큭큭! 저 녀석은 제 가솔을 몽땅 죽인 자에게 무릎을 꿇고 빌겠다고 했다." "난 결심했다!" "뭘 말이냐?" "가서 저 녀석이 모용천우라는 자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광경을 구경해야겠다. 그건 내 평생 가장 근사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아! 그런 좋은 구경거리를 너 혼자만 보겠다는 거냐?" "나도 가겠다. 그런 좋은 걸 놓쳐서는 안 되지. 클클……" "큭큭큭!" "세상은 모를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괴물을 키워냈는지를." "그래, 모를 것이다. 저 녀석이야말로 괴물이다." "우리 내기 할까?" "무슨 내기?" "앞으로 반 년 이내에 저 녀석이 죽지 않으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저 녀석의 실력이 이미 우리를 곱절이나 능가하고 있는 데도? 누가 감히 저 녀석을 죽인단 말이냐?" "아이구! 그래서 너는 석두다. 세상이 어디 실력만으로 된다더냐? 장담하지만 저 녀석은 반 년 안에 반드시 죽는다. 아니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아니, 네가 직접 내 손에 장을 지져라." "그만두겠다." "왜냐?" "이번 내기는 아무래도 네가 이길 것 같다. 반 년은 고사하고 저 녀석은 석 달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클클클……." "큭큭!" 우수수 심술궂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푸른 잎사귀 하나를 떨어뜨렸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나뭇잎이 바닥에 닿았을 때 천산오조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 * * 홍기찰(洪基札). 황궁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다 잠시 관직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와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홍기찰의 저택을 어둠이 에워싸고 있었다. 푸스스 어둠의 일각이 무너져 내렸다. 담 밑에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는 관상수들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일어서고 있었다. 사람이다. 검은 야행의를 입고 얼굴에도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유일하게 바깥으로 드러난 것은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두 개의 눈뿐이었다. "매복은 없군." 어둠 속에 몸을 묻고 잠시 서서 청력(聽力)을 돋우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복면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의 입가에는 만족한 미소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하긴 무림인의 집도 아닌데 매복이 있을 리 없지." 스슥 어둠이 마지못해 밀려나간다. 야행인은 마치 자기 집을 활보하듯이 대담하게 홍기찰의 집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무척이나 날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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