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4편 (4/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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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1 - 4편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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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낮은 담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야행인은 어둠에 묻혀있는 이층 누각을 보고 있었다.
모든 창문은 닫혀 있었고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축시(丑時)에 가까운 시간이니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후후…… 조금만 기다려라." 야행인이 도약했다.
그는 이층 추녀 끝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발끝을 추녀에 걸치고 머리는 아래로 하여 창문 안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굳게 닫힌 창문은 바늘 끝만한 틈도 없어서 안의 동정을 살피기란 불가능했다.
그의 손이 창문에 닿았다.
굳게 잠겨 있었다.
억지로 열려면 천상 창문을 부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야행인의 손바닥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일어나더니 안에서 창문을 잠그고 있던 고리가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어린애 장난 같군.' 야행인은 훌쩍 몸을 날려 목적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의 규방인 듯싶었다.
은은한 향기가 배어있는 방의 중앙에는 붉은 휘장이 쳐져 있었고 그 뒤로 침상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분명치는 않지만 침상에는 사람이 누워있는 것 같았다. "후후……." 야행인은 성큼 앞으로 나서며 거침없이 휘장을 걷었다.
마치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 같은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침상에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불 밖으로 긴 머리칼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인이 분명하다.
야행인은 아랫도리가 뿌듯하게 차 올랐다. '홍기찰의 딸이 절색이라고 했지.
어디 얼굴부터 볼까?' 침상으로 손을 뻗어가던 야행인이 멈칫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건 계집이 아니다.
사내의 냄새가 나.' 팟! 손바닥이 뒤집어지며 강력한 장세가 침상을 후려친 것은 순간이었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침상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비조처럼 빠져나갔다. "감히 나를 놀리다니!" 야행인이 다시 신속하게 손을 뻗었다.
침상에서 빠져나온 인물이 미처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장세가 그를 덮쳤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한광(寒光)이 번뜩인 것은 다음이었다.
검기가 방안에 가득 차며 그대로 야행인의 손을 베어갔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무서운 장세는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은 대담한 공세였다. "헉!" 이대로 간다면 상대의 가슴에 일장을 적중시킬 수 있을 것이나 그랬다간 자신의 손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손해볼 줄 뻔히 알면서 고집을 피우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야행인은 빠른 출수만큼이나 거둬들이는 동작도 빨랐다.
퍽! 우르르 방바닥이 터져나가며 검이 불쑥 솟아올라 야행인의 다리 사이를 찔렀고, 동시에 머리 위에서는 천장이 우수수 무너지고 있었다.
침상에서 빠져나온 자의 검도 어느새 야행인의 심장 가까이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세 방향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야행인을 덮친 것이다.
그러나 야행인의 반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
그는 발끝으로 바닥을 걷어차며 신형을 비스듬히 하여 창문쪽으로 몸을 날렸다.
단 한 동작으로 세 방향에서 덮쳐오는 기습을 피하며 도주를 감행한 것이다.
하나 야행인은 창 밖으로 달아나지 못하고 낭패한 모습으로 급급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은 이미 옷이 찢겨져 약간의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상처는 하나가 아니었다. "대관절 어떤 놈들이!" 야행인은 극도로 노하여 앞을 노려보았다.
좁은 방안이 어느새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얀 옷을 걸치고 하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가슴 앞에는 검을 가로세우고 있었는데 그 검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각기 달랐다.
모두 일곱이었다.
야행인이 달아나려던 바로 그 창문으로 넷이 더 들어와 숫자를 불려놓은 것이다. "은형칠성!" 야행인이 부르짖었다. "너희가 어떻게……." "무흔색투(無痕色偸) 유빈(劉濱), 너의 악행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백의인 중 중앙에 선 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가 검을 후리자 방안에 검기가 충만했다.
단순히 검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야행인은 벌써 열 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행인은 처음의 놀람과는 달리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흐흐…… 은형칠성, 너희들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는 모르나 나 유빈이 너희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야행인은 한 손은 가슴에 대고 다른 손은 앞으로 뻗는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엉성한 모습이었으나 그것은 그가 자랑하는 오음살장(五陰殺掌)의 발초식(發招式)이었다.
그러나 삼엄한 검기 속에서 오연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 그의 가슴속은 실상 지나친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은형칠성, 이들은 절대로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은형칠성(隱形七星).
하루 세 끼 자신의 힘으로 번 밥을 먹으며 사는 평범한 민초들은 이들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조그만 재간을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흑도의 무리들에게는 은형칠성의 이름은 죽음의 대명사나 같았다.
그들은 바로 단심백결회가 자랑하는 살수대(殺手隊)이기 때문이다.
은형칠성은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살수집단이었다.
다만 이들이 다른 살수집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청부를 받고 살행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단심백결회를 다스리는 십방좌(十方座)의 내밀한 명령을 받아 무림의 해악이 되는 흑도의 무리들을 척살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지금까지 그들의 손에 죽어간 흑도의 고수들은 오십도 넘었다.
하지만 그처럼 무서운 존재인 은형칠성의 진정한 신분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복면으로 감추고 다녔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실상 은형칠성은 일곱 명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명문정파들이 자랑하는 뛰어난 후기지수들로 그 구성원이 수시로 바뀐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일곱이 함께 행동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무흔색투 유빈은 상대가 아무리 공포의 대명사라는 은형칠성이라도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그 역시 십 년이 넘게 천하제일의 색마로 악명을 떨쳐온 인물이 아닌가! "비켜라." 유빈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하얀 기운이 형상화되어 정면의 백의인을 덮쳐가고 있었다.
오음살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동시에 은형칠성도 움직였다.
촘촘한 검막이 그물처럼 무흔색투를 덮어 누르고 있었다.
검막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워서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을 것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좁은 방안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의 여유가 너무 부족해서 검진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가 없었고, 그 틈을 오음살장의 음유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기묘한 신법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며 간간이 오음살장을 뿌리던 무흔색투는 돌연 발로 힘껏 바닥을 굴렀다.
우루루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빈 공간으로 무흔색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하…… 다음에 보자." 무흔색투는 아래층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신형을 폭사하여 벽을 뚫고 나갔다.
누각 전체가 진동하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흔들렸다.
별이 보인다.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온 무흔색투는 조롱을 탈출한 새처럼 마냥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압력이 몸을 덮쳐 오기까지는……. "헉!" 무흔색투는 신형을 뒤집으며 급히 천근추의 수법으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도 몸의 중심을 바로잡지 못해 연신 뒤로 물러났다. "도, 도대체 누가……." 경악에 찬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 한 번의 조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초절한 무공을 지닌 고수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적어도 은형칠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흔색투는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등에 식은땀부터 흘렀다.
멀지 않은 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홍의를 걸친 여인이었다.
홍의는 몸에 찰싹 달라붙어 전신의 굴곡을 그대로 내보였다.
젊고 포동포동했으며 군침이 도는 몸매였다. '계집이란 말인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무흔색투인지라 그 와중에도 침을 꿀꺽 삼켰다. "무흔색투!" 그러나 홍의여인의 입에서 나온 얼음장 같은 목소리는 그의 공연한 야욕을 억누르기에 충분했다. "너를 뒤쫓은 지 석 달 만에야 겨우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 "도대체 어떤 계집이……." 무흔색투 앞에서는 적어도 치마 두른 여자라면 그의 밑에 깔려 살려달라고 버둥댈 때 외에는 큰소리칠 일은 없었다.
무흔색투는 자신감에 먹칠을 한 것 같아 열을 올리며 눈을 부릅떴다.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이나 되었을까? 뛰어난 미색이었다.
지나치게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것만 빼면 말이다.
여인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 같았고, 그런 차가운 외모와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홍의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것이어서 이 여인의 미적 감각을 의심케 했다.
그러나 다시 보면 홍의처럼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옷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홍의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홍의가 보여줄 수 있는 강렬함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다. "어린 것이 감히……." 노해 육두문자를 쏟아내려던 무흔색투는 그러나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불꽃 모양의 음각(陰刻)이 새겨진 붉은 피리를 본 것이다. "염적……." 무흔색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림삼룡이구나!" * * * 무림삼룡(武林三龍).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무림삼룡은 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적룡(赤龍), 금룡(金龍), 청룡(靑龍).
그들은 현 무림의 질서를 바로잡고 있는 단심백결회가 심혈을 기울여 키우는 차대 회주(次代會主)의 재목들이었다.
삼십 년 전.
통천삼십삼마라는 가공할 능력을 지닌 마인(魔人)들이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을 때 홀연 나타난 구원의 등불이 하나 있었다.
천품신성(天品神聖) 악자량(岳子亮).
그의 사문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
다만 알려진 것은 그가 처음 모습을 나타내었을 때 이미 육십이 넘은 노인이라는 것뿐.
천품신성 악자량은 무림에 출도하자마자 경인(驚人)의 솜씨를 발휘하여 뿔뿔이 흩어져 있던 백도를 하나로 모아 거대한 단체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단심백결회.
일찍이 무림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백도맹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후 단심백결회는 천품신성을 회주로 받들며 통천삼십삼마와 경천동지의 대혈전을 치뤘다.
그 싸움에서 천품신성은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통천삼십삼마를 모래알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각개격파해 나갔다.
이쪽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적들의 피해는 최대한으로 늘리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결과는 단심백결회의 완벽한 승리였다.
통천삼십삼마를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든 단심백결회는 무림의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잡았으며 천품신성은 그 후 오 년 동안 단심백결회의 회주로 군림했다.
그 오 년은 무림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아무도 천품신성의 권위에 거역하지 않았고 최대한의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대했다.
그는 바로 살아있는 신이며 만인이 인정한 절대자였다.
하나 천품신성은 오 년이 지나자 홀연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는 사라졌으나 그가 만든 단심백결회는 건재했다.
이후 단심백결회는 세력이 가장 큰 열 개 단체의 수좌들로 구성된 십방좌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
아무도 천품신성만큼 위대할 수 없었기에 감히 차대 회주를 내지 못하고 공동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단심백결회의 숭고한 뜻도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다.
무릇 힘이 있는 곳에는 부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탐욕이 뿌리를 내리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지금의 단심백결회는 여전히 무림 최강의 단체였으나, 과거에 멸종한 공룡처럼 무한정 비대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머리가 없는 공룡인 것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만인의 존경을 받던 단심백결회는 도리어 만인의 지탄을 받으며 초라하게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십방좌가 어렵게 내린 결론이 새로운 회주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십방좌 내에는 명망있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았지만, 그러나 십방좌는 그런 노회한 인물보다는 새로운 인물, 패기에 찬 젊은 인재를 차대 회주로 앉히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타성에 젖을 대로 젖은 단심백결회를 되살리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무림삼룡.
그들은 단심백결회의 차대 회주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세 명의 젊은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단심백결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상 전 회가 이 삼 인을 중심으로 삼분(三分)되어 있는 처지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들은 단심백결회 내에서 아무런 직책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직책을 주어서 그들을 구속하기보다는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그들의 참된 능력을 검증하자는 게 십방좌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직책이 있건 없건 이들 무림삼룡은 현재 단심백결회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 * * 날수염적(辣手炎笛) 군성초(君盛蕉).
무림삼룡의 하나로 적룡이라 불리는 여인.
그녀는 십방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화궁(華花宮)의 소궁주(小宮主)이기도 했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기녀(奇女)로 화화궁의 모든 절기를 습득하였으며 다시 몇 차례의 기연을 얻어 이제는 화화궁 최고의 고수를 넘어서 감히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의 자리를 넘보는 여인.
그런 군성초를 앞에 두고 무흔색투가 떨떠름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흔색투 유빈, 그 잘난 얼굴을 복면으로 감추고 있는 이유가 뭐지?" 군성초가 냉랭하게 물었다. "새삼스럽게 수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건가?" "빌어먹을……." 무흔색투는 벌레씹은 심정이 되어 훌렁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의외로 늙은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는 이제 칠십이나 되었을까? 온통 주름살투성이에 크고 작은 사마귀가 가득한 추악한 얼굴이었다.
만일 여자들이 보았다면 질겁을 하고 십 리는 달아났을 것이다.
색마로 알려진 그가 언제나 복면을 하고 다니는 것은 바로 이 추악함 때문이었다. "한결 보아줄 만하군." 고개를 끄덕이며 군성초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저자는 칠대무림공적(七大武林公敵) 중 일인이다.
십방좌는 무림삼룡의 능력을 누가 먼저 칠대공적을 잡느냐는 것으로 평가하기로 암암리에 내정하였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마침내 내 손에 걸려 들었구나.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하기야 이 일을 어찌 단순한 운이라고 하겠는가! 무흔색투 유빈이 모습을 나타냈다는 소문을 들은 순간 그가 노릴 만한 여인을 면밀히 검토하여 이곳 홍기찰의 집에 매복한 지 벌써 이레.
그 동안 그녀가 쏟아부은 정성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고생이 무흔색투를 잡는 순간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건방진 계집, 아무리 날수염적이라도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더냐." 무흔색투가 몸을 날렸다.
그는 이미 자신이 헤어나기 어려운 함정에 걸려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없지만 최대한 빨리 군성초를 제거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흥!" 오음살장의 음유한 기운이 몸 가까이 닥쳐오는 데도 군성초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손에 들려있던 붉은 피리가 한 줄기 혈선을 그렸다.
순간 상상할 수도 없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은 거대한 열기.
그것은 이내 붉은 기운으로 형상화되어서 오음살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무흔색투는 자신의 오음살장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
염천(炎天)에 작은 얼음덩이 하나가 녹아내리는 듯이 그것은 너무도 무력했다.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편 화조(火鳥) 한 마리가 무흔색투의 면전으로 와락 다가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끼이룩! 가슴 저릿한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무흔색투는 대경하여 뒤로 급히 물러서며 우수를 들어 화조를 막으려고 했으나,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아무런 위력도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끄으억!"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무흔색투 유빈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화조가 몸의 일부분을 관통하고 지나갔다고 느낀 것은 정말로 착각이었을까? "벌레보다 못한 늙은이." 날수염적 군성초는 바닥에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무흔색투를 경멸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어느새 일곱 명이 더 불어나 있었다.
은형칠성이 그녀를 에워싼 것이다. "소행을 생각하면 천 번을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이나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서 데려가는 것이 내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군성초가 눈짓을 했다.
그러자 은형칠성 중 일인이 앞으로 나와 무흔색투를 안아 들려고 했다. "크윽!"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흔색투의 몸 위로 엎어진 것은 다음이었다. "누구냐?" 군성초의 신형이 팽그르르 돌면서 염적(炎笛)이 허공을 찔러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허공, 그 한 지점을 찔러가는 것이다.
퍽 계란 깨지는 것 같은 가벼운 음향이 들렸다. "으음……." 놀랍게도 그토록 무서운 위력을 선보이던 군성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단번에 오른팔이 저려오며 하마터면 들고 있던 염적을 놓칠 뻔했다. "도대체 누가……." 그녀는 아까 무흔색투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놀라움을 느끼며 전면을 노려보았다.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은형칠성의 시신을 치우고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무흔색투의 몸뚱이를 안아 들고 있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은 건강한 구릿빛 근육으로 짜여 있었고 아래에도 짧은 바지 하나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허리춤에는 검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뭉툭한 쇠붙이를 매달고 있었고, 얼굴은 고슴도치처럼 뻣뻣한 수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른다.
은형칠성이라면 천하가 알아주는 일급고수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 중 하나를 암습하여 쓰러지게 만들고 군성초의 일격을 받아냈으며 다시 유유히 들어와 무흔색투를 안아 들었으니…… 경악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차앗, 웬놈이냐?" "죽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섯 개의 검이 허공을 여섯 조각으로 갈랐다. "물러서라!" 하지만 검초가 채 펼쳐지기도 전에 군성초의 차가운 음성이 그들의 손을 얼어붙게 했다.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단심백결회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고 있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녀의 명 한마디는 십방좌의 명만큼이나 위력이 있었다.
은형칠성은 순순히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군성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누구요?" 천하에 자신밖에 모른다는 소문이 날 만큼 거만하기 짝이 없는 군성초였다.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중년인을 대하는 그녀의 음성은 은은히 떨리기까지 했다. "그대가 적룡인가?" 중년인이 심유한 눈으로 군성초를 바라보았다. "수고가 아깝기는 하겠지만 무흔색투는 내가 데려가겠다." "뭐라고?" "비켜라." 나직한 한마디.
무흔색투를 안은 중년인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런…….' 군성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예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말투가 아닌가? 평생 이러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어디 그럴 능력이 있으면 해보시지!" 앙칼진 고함과 함께 수중의 염적이 혈선을 그렸다.
끼이룩! 다시 화조 한 마리가 형상화되어 중년인을 덮쳤다.
그녀가 자랑하는 혼염공(混炎功)을 극도로 끌어올린 화조열사(火鳥熱射)의 일초식이다.
천하제일의 색마인 무흔색투를 단번에 쓰러뜨린 절초인 것이다.
중년인의 눈이 빛을 내었다.
그의 손에서 무흔색투가 떨어져내린 것과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뭉툭한 쇠뭉치가 뽑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중년인은 철검으로 화조의 부리께를 찌르고 있었다.
끼룩! 화조가 몸을 뒤틀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화조의 영상이 급격하게 사라지면서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린 순간, 군성초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져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가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풍산(風散)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염적의 끝에 철검이 닿아 있었다.
철검의 끝과 염적의 끝이 정확하게 맞닿은 것이다.
철검은 중년인의 눈빛만큼이나 무심했는데 염적은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윽!" 군성초의 입에서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이 울컥 솟아나오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중년인이 철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는 심유한 눈으로 무릎 꿇고 있는 군성초를 한 번 보더니 무흔색투를 안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군성초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왼쪽의 어둠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았나요?" "보았다." 어둠이 갈라지며 화려한 궁장 차림의 중년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누구이기에 이토록 가공한……."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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