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1 - 6편 (6/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본문 바로가기

[야설록]천객 - 1 - 6편 (6/17)

💬 0 👁 5
☰ 목록
책갈피와 음성 읽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연환퇴는 놀랄 만큼 빠르고 위협적인 것이어서 경험 많은 소허도장도 별수없이 세 걸음을 물러서고 나서야 겨우 공격 범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대단하구나!" 소허도장의 얼굴에서 노여움이 사라졌다.
감정이 격하면 그만큼 손길이 거칠어지기 마련이며 그것은 고수를 상대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소허도장은 적어도 강적 앞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가 그만큼 복청양을 어렵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허도장은 스스로 다시 세 걸음을 물러서더니 불진을 버렸다.
동시에 등에 메고 있던 송문보검이 스르릉 뽑혀 나왔다.
검광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복청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도장님, 소생은 정말로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자네가 모용세가를 도륙한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닐세." 소허도장이 무겁게 말했다.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모용천우가 복가장에 행한 일은 확실히 지나친 감이 있네.
무릇 아무리 큰 원한이라도 그 당사자한테만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인데 가솔들까지 몰살한 것은 어떠한 말로도 변명할 길이 없네.
만일 모용천우가 살아있다면 빈도는 반드시 그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의 죄업이 감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닐세.
자네는 복수를 빙자해서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네." "아! 도장님, 어떻게 하면 소생이 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복청양이 탄식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소허도장은 잠시 주춤하는 기색이었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 "순순히 손을 묶이고 빈도를 따라 산서지부로 가세.
잘못이 있다면 그곳에서 진실을 가릴 것이네.
공정하게 조사할 것을 빈도가 약속할 수 있네." "도장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상 핍박하시면 소생으로 하여금 무례를 저지르게 강요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복청양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검은빛이 나는 짧은 창을 꺼내 들었다.
삼절묵창(三節墨槍).
그것은 대대로 복가장의 가주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독문병기였다.
길이는 불과 두 자 남짓으로 옷 속에 감추어 두었을 때는 밖으로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복청양이 손을 한차례 흔들자 두 자 길이의 창이 여섯 자로 늘어났다.
그는 소허도장의 송문보검을 맨손으로 상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삼절묵창을 꺼내든 것이다. "복가장은 창의 일절이지." 소허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오늘 한 번 이 늙은 것의 안목을 넓혀 주시게나." 소허도장이 검을 휘둘렀다.
그는 삼 장의 거리를 단번에 좁히며 어느새 복청양의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죄를 짓습니다." 삼절묵창이 검은빛을 뿌렸다.
창끝이 둘로 늘어나 소허도장의 검을 봉쇄하더니 어느덧 네 개로 늘어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소허도장의 안색이 굳어지며 그의 검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마치 검으로 한자 한자 글씨를 그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초식과 초식이 끊기지 않고 면면히 이어진다.
무당파의 유운검법(流雲劍法)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창영(槍影)이 여덟 개에서 다시 열여섯 개로 늘어나고 있었다.
복청양의 앞은 온통 창영으로 가득하여 마치 검은 창으로 벽을 친 것 같았다.
수세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간간이 하나의 창끝이 튀어나와 공격도 겸했다.
창영이 열여섯 개로 늘어나는 것은 쇄금십팔창법의 최고 단계였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창영을 열여덟 개까지 늘릴 수 있으며 그때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복가장의 가주로서 열여덟 개의 창영을 만들어낸 인물은 없었다.
복청양의 아버지인 복후정도 겨우 열두 개의 창영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복청양은 어렵지 않게 열여섯 개의 창영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그의 무공수위는 이미 복후정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물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게 펼쳐지는 유운검법도 끝내 쇄금십팔창법의 엄밀한 수비벽을 뚫지는 못했다.
유운검법은 부드럽긴 했지만 강맹한 맛이 부족했다.
그래서 묵벽에 부딪치자 물이 암벽을 때린 것처럼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飛散)하며 뚫고 들어가지를 못했다. '이 정도였다는 말인가?' 소허도장은 쇄금십팔창법의 명성을 듣기는 했지만 얕보는 마음이 십분이었다.
감히 무당파의 절기를 앞서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당해 보니 그게 아니다.
복청양의 수비세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소허도장의 검세가 변했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검세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며 도끼질을 하듯이 아래로 내리치는 검세로 변하였다.
자연 위력이 가중되었다.
유운검법을 태청검법(太淸劍法)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순식간에 삼십여 초가 교환되었다.
소허도장은 여전히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태청검법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삼절묵창의 수비벽을 끝내 뚫지 못했다.
소허도장은 복청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반면에 무수한 창영도 소허도장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못했지만, 소허도장은 그것이 상대가 사정을 봐주기 때문이지 결코 능력이 모자라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허도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검세가 다시 변화했다.
그는 극히 신중한 얼굴로 구궁(九宮)의 방위를 밟으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신속하기보다는 느리기 짝이 없다.
그는 어린아이가 힘에 겨운 물건을 들어올리듯이 천천히 검을 들어 한 번 후려치고는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구궁의 방위를 밟았다.
구궁영검(九宮影劍).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무당파의 비전의 절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소허도장의 일검 일검이 뿌려질 때마다 복청양은 팔이 은은하게 저려옴을 느꼈다.
이제는 쇄금십팔창법의 엄밀한 수비벽도 제대로 행사하기가 어려웠다.
복가장의 창법은 변화를 주로 하는데 소허도장이 움직이는 구궁의 방위가 그 변화의 길목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두 사람의 거리가 바싹 좁혀졌다.
이제 조금만 더 가까이 온다면 복청양은 그의 검세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없군.' 복청양의 얼굴에 어떤 결심의 빛이 스쳤다.
무수히 난무하던 창영이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섯 자 길이의 삼절묵창이 넉 자 길이로 줄어들면서 그 묵창을 가슴에 안듯이 하여 복청양은 곧장 소허도장의 무서운 검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앗!"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파팟! 창! 충만하던 검기가 어느 틈에 사라지고 한광이 하늘로 치솟더니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송문보검이 소허도장의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송문보검은 거꾸로 하여 땅에 박히더니 힘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경악한 소허도장의 코앞에는 어느새 복청양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창끝은 소허도장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고, 그리고 한 줄기 가는 피가 흘렀다.
복청양의 안색은 침중했다.
하지만 소허도장의 낯빛은 그보다 더욱 침중했다.
만일 복청양이 손에 인정을 두지 않고 조금만 더 힘을 주었더라면 그는 그대로 산적이 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복청양이 삼절묵창을 거두어 들였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 그건 복가장의 창법이 아닌데……." 소허도장의 음성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복가장의 창법이 일정한 격식에만 얽매여 있다면 어찌 발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武)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니 어제의 방법이 오늘도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복청양은 삼절묵창을 두 자 길이로 접어 품속에 갈무리하고 두 손을 모아 예를 차렸다. "동생을 만난 후에 반드시 산서지부로 찾아가 오늘의 오해를 풀겠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후드득!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복청양이 사라졌다.
절정의 경신술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소허도장은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구궁영검마저 파해되다니…….' 무당파가 십방좌의 한자리를 차지한 이후로 누구도 그 권위에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감히 무당파에 대항하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 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무당파는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다.
비록 그게 소허도장 일인에 국한된 것일지라도.
소허도장은 전신의 맥이 풀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삼절묵창이 구궁영검을 파해하고 들어오는 순간 전신의 진기가 모조리 탈진되고 만 것이다.
소허도장은 멍하니 선 채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저 하늘의 밝은 태양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 흐리게 보이는 것인지……. '내가 잘못 생각하였기를 바란다.
저자가 이 참혹한 살육의 흉수가 아니기를…… 만일 저 같은 능력을 지닌 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 후환은 무궁무진하리라.' "큭큭큭!" "클클……." 어디선가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말코 도사가 넋이 빠진 것 같군." "왜 안 그렇겠어? 저 괴물을 키운 우리도 놀랄 만큼 굉장한데." "잘못 건드렸지.
자고로 늙은 것이 함부로 나섰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이라니까." "그러나저러나 저 말코 도사를 그냥 둘 텐가?" "그럴 수야 없지.
무엇보다도 이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단말야." "클클…… 너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했다." "이놈아! 그럼 내가 언제는 틀린 소리를 하더냐?" "누구냐?" 소허도장이 노성을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방에 가득한 건 시신뿐이고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대낮에 귀신이 나올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소허도장이지만 자연 머리끝이 쭈뼛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큭큭, 죽어라." "감히 우리 천산오조의 제자를 건드린 벌이다.
클클……." 갑자기 다섯 구의 시체가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다섯 줄기의 강렬한 장세가 소허도장을 덮쳐왔다.
도저히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가공할 장세였다. "크으악!" 소허도장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맑은 하늘에 메아리쳤다. * * *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던 복청양은 소허도장이 쫓아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점점 속도를 늦추었다.
생애 처음으로 험악한 격전을 치룬 후였다.
운좋게 이기기는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처럼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모를 일이다.
복가장에 이어 모용세가마저 그런 일을 당하다니! 복가장이야 모용세가에게 당한 것이지만 모용세가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흉수가 노린 게 우리 복가장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게 느껴졌다. '금사라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금사는 나보다 영리하니까.' 복청양은 이제 달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멀리 가묘가 보였다. '금사가 나를 보면 펄펄 뛰겠지.' 아직 두 시진이 되지 않았으니 혈도는 풀리지 않았겠지만 정신은 돌아왔을 것이다.
복청양은 동생에게 당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돌았다.
그는 애써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묘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없었다.
어디에도 복금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혈도를 제압당해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제 4 장 백아아(白雅雅) 복청양은 행여 장소를 잘못 안 것이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방 어디를 보아도 복금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복금사를 눕혀 놓았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복청양은 바닥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는 허리를 펴고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금사가 제 발로 걸어갔을 리 없다.' 그는 복금사가 스스로 혈도를 풀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군가 금사를 데리고 간 것이다.
그것도 불과 일 각 전에.
그 이상은 되지 않았다.' 복청양이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을 전개하여 풀 위를 스치듯이 질주하였다. '서두르면 쫓아갈 수 있다.
아직 이 부근에 있을 것이다.' 복금사.
그녀는 생사불명인 아버지를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 * * 다그닥다그닥 나직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사두마차(四頭馬車)가 햇살 가득한 황토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사두마차라면 일반적으로 지체높은 사람이 타는 화려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마차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검박(儉朴)한 것이었다.
마부석에는 두 명의 황의소녀가 타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마차를 모는 것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다른 소녀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둘 다 등에 장검을 메고 있었으며 조금은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복청양은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아래를 지나가는 사두마차를 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금사를 데려가려면 마차보다 적당한 운반 수단은 없겠지.' 그는 마차를 발견한 순간부터 의혹에 싸여 벌써 일 각 가까이 뒤쫓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단지 짐작만으로 섣불리 손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의 하나, 저 안에 금사가 타고 있지 않다면 낭패다.' 어쩔까 망설이던 복청양이 이윽고 소리없이 움직였다.
그는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마차의 뒤로 바싹 다가들었다.
황의소녀들이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으나 그의 다가섬이 워낙 신속해서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로 가까워졌다.
다음 순간, 복청양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놀랍게도 지면과 겨우 한 치 정도의 틈을 두고 마차 밑으로 스며든 것이다.
다그닥다그닥 마차의 움직임은 일정했고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복청양은 마차 밑에 매달린 채로 눈을 감고 청력을 극도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다.' 마침내 마차 안의 정경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 중 하나는 깊고 규칙적이며 다른 하나는 얕고 호흡을 하는 시간이 길다.
호흡이 이렇게 길다는 것은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다.
반면에 깊고 규칙적인 숨소리는…….' 그의 눈이 빛을 내었다. '잠이 들었거나 아니면 그 밖의 어떤 형편으로 몸이 부자유스러울 때 내는 소리다.
즉 혈도를 제압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에 타고 있는 것은 복금사가 틀림없다.
그녀가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다. '어쩔까?' 망설이던 복청양이 마차 밑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가 마차와 이반(離反)하는 모습은 아까 스며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마차는 여전히 한가롭게 달렸다.
복청양은 숲속에 몸을 숨기고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고 있었다. '금사가 저 안에 있는 걸 확인한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숨소리로 보아 복금사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이 복청양을 안심시켰다. '지금 나서면 금사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나 좀더 두고 보는 게 좋겠다.
어떤 자들이, 무슨 목적으로 금사를 데려가는지 알아야 한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흉수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흉수, 그것은 모용세가의 참변을 목격한 직후부터, 아니 복가장이 어이없게 멸문당한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복청양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바윗덩이였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다그닥다그닥 사두마차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산을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빙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멀었느냐?" 문득 안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맑은 여자의 음성이다. "다 와 갑니다, 아가씨." 말고삐를 쥔 황의소녀가 대답했다. "그래……." 목소리의 끝에 가는 한숨이 묻어나는 것은 웬일인지…….
마차 안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없었고 황의소녀도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는 대신 이제는 곧게 전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두마차가 다시 한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눈앞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졌다.
이제껏 황량한 산길이던 것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넓은 공지가 나타난 것이다.
공지에는 꽃이 가득했다.
붉고 희고, 혹은 푸른 꽃들이 넓은 공지를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꽃은 저마다 농염한 자태를 뽐내며 활짝 피어 있었다.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꽃밭의 중앙에는 두 사람이 겨우 어깨를 맞대고 걸어갈 수 있는 넓이의 소로(小路)가 나 있었다.
소로는 어쩐 연유에선지 곧게 뻗어있지 않고 구불구불했고, 길의 끝에는 작은 목옥(木屋)이 한 채 있었다.
목옥의 문은 열려 있었고, 문 옆에 나무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왜소한 체구에 대머리였으며 수염이 한 오라기도 없어 조금 괴기한 느낌을 주었고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화분에 심은 꽃을 전지가위로 손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사두마차가 다가와도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 고개도 들지 않았다.
마차는 화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섰다.
두 소녀가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다 왔습니다, 아가씨." 마차 문이 열렸다.
초혜를 신은 작은 발에 이어 전신이 밖으로 나왔다.
젊은 여인이었다.
가녀린 몸매는 풍성한 백의로 감싸고 머리는 틀어올려 위로 묶고 있었다.
소매 밖으로 나온 손이 희고 깨끗했다.
평생 거친 일이라곤 모르고 산 그런 손이었다.
이마는 넓고 시원했으며 그 밑에 가는 눈썹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 눈은 별처럼 초롱초롱했고 그 아래로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뛰어난 미모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어려있는 듯했다.
백의여인이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가더니 화원의 언저리에 섰다.
그러자 황의소녀들이 장검을 뽑아들며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녀들은 마차로 누가 접근하는 걸 꺼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의여인이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녀 백아아(白雅雅)가 무독옹(無毒翁) 노선배님을 뵙고자 합니다." 백의여인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진력이 실려 있어서 먼 거리까지도 아무런 가감없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독두노인(禿頭老人)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녀, 노선배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백아아가 다시 소리 높여 외쳤다. "온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 소리지를 것 없다." 독두노인 무독옹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전지가위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분의 꽃은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어 보이는 데도 손을 멈추지 않는다.
백아아의 입가에 약간 서글픈 미소가 감돌았다. "노선배께서 소녀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요?" "불러? 내가 너를? 난 그런 적 없다." 무독옹의 음성은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한 가지 변화는 있었다.
손을 멈추고 똑바로 백아아를 본 것이다.
날카로운 눈이었다.
마치 독수리가 어린 새를 노려보는 듯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아아는 그 살기를 감지하지 못했는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노선배께서 직접 부르신 건 아니지요.
그러나 이리로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으니 그건 부른 것이나 한 가지가 아닙니까?" "그래, 내가 너를 불렀다 하자." 무독옹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소녀는 다만 하명을 받고자 할 뿐입니다." 백아아가 공손함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노선배께서 소녀를 부르신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흐흐…… 시간 끌지 말고 용건을 말하라는 것이로구나." 무독옹이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일 내가 너보고 이 자리에서 자결하라고 한다면 어쩔 셈이냐?" "그건……?" 백아아의 가녀린 교구가 잠시 흔들렸다.
그녀도 무독옹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꼭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요.
그러나 노선배께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런 명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너는 제법 혀를 잘 놀리는구나." 무독옹의 눈이 돌연 강한 빛을 폭사했다. "저 마차 안에는 누가 타고 있느냐?" "이미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흐흐…… 그렇다.
저 마차 안에는 아마 네 어미가 타고 있겠지.
그리고 그 계집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일 테고 말이다." '뭐라고?' 무독옹의 말에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지금껏 흔적없이 사두마차의 뒤를 따라온 복청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복청양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백아아의 낭랑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소녀는 노선배께서 어머니께 그토록 지독한 독물을 행사하신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은하수정원(銀河水晶院)과 무독옹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이제껏 잘 지내왔는데 어째서 독수를 사용하신 것입니까?"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HTML/스크립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은 최대 120자이며 페이지를 이동하지 않고 바로 등록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Copyright © webstoryboard.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