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역(逆) 제 20 장 중원검보(中原劍堡) 제 21 장 천산오조(天山五祖) 제 22 장 회주(會主) 제 23 장 만독화원(萬毒花園) 제 24 장 고인(古人) 제 25 장 십방대동(十方大同) 제 26 장 청룡금룡(靑龍金龍) 제 27 장 암습(暗襲) 제 19 장 역(逆) "오항!” 지마가 허공을 보며 소리쳤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천장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벽 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냐?" 지마가 물었다. "철궁도의 철궁위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철궁도가?" 지마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깔렸다. 남궁격의 철궁도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막을 수 있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밖에서는 계속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한 것으로 보아 침입자들이 상당히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일 각만 버텨라! 일 각 뒤에 철수한다!" "예!" 오항(吳恒)이라는 자가 가버린 듯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자네……." 지마가 야릇한 표정으로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게 얘기할 입장이 아닌 것 같군. 그만 가보아야겠네." "아직 우리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복청양이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은 여전히 들려있고 장심의 붉은 기운도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난 당신의 심장이 어떤 색인지 꼭 보아야 하겠소.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듯하니까." 복청양이 손을 홱 뿌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붉은 기류가 유형화되면서 사나운 기세로 지마를 덮쳐갔다. 지마의 안색이 돌변했다. "어리석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르다니!" 지마가 쌍장을 들어 복청양의 장세를 받아쳤다. 그의 소매가 펄럭이며 무서운 암경이 쏟아져 나왔다. 펑! 폭음이 요란하다. 백아아가 암경에 밀려 급급히 일어서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좁은 방안이었다. 물러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으로 보아 암중에 받은 타격이 만만치 않은 듯했다. "복공자……." 연이어 손을 쓰려던 복청양이 멈칫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계속 무리하게 손질을 한다면 피해가 백아아에게까지 미칠까 우려한 것이다. "대단하군." 지마가 탁한 숨을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복청양의 장세는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방금 그는 구성의 진력을 사용했건만 겨우 그의 장세를 막아내는 데 그친 것이다. 그가 알기로 천노살성에게는 이만한 능력은 없었다. 절대로! '설마 하니 그 동안 무슨 기연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그러나 상황이 지마를 깊이 생각하게 놔두지를 않았다. 밖에서 들리는 함성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수하들의 힘만으로 철궁위대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난 이만 가야겠군. 미안하네." 지마가 발로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순간 거친 진동음이 일어나며 방안이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벽이 쩍쩍 갈라졌다. "엇?" 예측하지 못한 변화에 복청양은 당황했다. 그런 중에도 방은 계속 빙빙 돌더니 마침내 회전이 멎었다. 방바닥이 쩍 갈라지고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아래에는 어둠이 고여 있었고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먼저 가지." 지마가 백아아를 돌아본다. "복공자……." 백아아가 복청양을 힐끗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계단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쉽지는 않을 걸." 복청양이 잽싸게 신형을 움직였다. 그는 백아아가 빠져나가는 걸 가로막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마가 달아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통로를 확보해야만 했다. "어딜!" 지마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오면서 날카로운 암경이 복청양의 앞길을 차단했다. "비켜라." 복청양이 빙그르르 돌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흐릿한 권영이 일어나며 지마의 어깨를 때렸다. "회현잠영권이로군." 지마가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평소 같으면 그는 회현잠영권을 그대로 맞받아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복청양의 심후한 공력에 한바탕 혼이 난 뒤인지라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와중에도 지하 통로의 입구를 싸고돌며 비켜주지 않았다. "하앗!" 복청양의 손이 회현잠영권에서 흑오조로 변하더니 지마의 곁으로 밀착해 들어가며 그의 팔을 움켜쥐려고 했다. 지마가 손목을 뒤집으며 고무줄처럼 탄력있는 암경을 발출했다. 흑오조와 그 암경이 부딪치는 순간 복청양은 자신의 손이 위로 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그는 다시 공력을 주입하여 지마의 손목을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차앗!" 복청양의 손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주먹을 반쯤 움켜쥐면서 손등으로 지마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엇?"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주먹질이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한 수에 코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마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경하여 신형을 뒤로 뽑아냈는데 그 신법이 기쾌하기 그지없었다. 거의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를 두고 복청양의 후웅권이 지마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마가 워낙 재빨리 대응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복청양의 주먹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마는 얼굴에 은은한 통증을 느꼈다. "그, 그걸 어떻게 네가……?" 지마의 얼굴이 노랗게 질렸다. 그가 이처럼 큰 놀라움을 나타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복청양은 지마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놀라는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원한다면 한 번 더 보여주겠소." 복청양이 다시 후웅권을 전개했다. 이번에는 더욱 신속한 동작이었다. 좁디좁은 방안이 아닌가. 더구나 지마는 통로를 지켜야 하는 처지였다. 그가 아무리 빠르게 반응한다고 해도 절묘하기 그지없는 후웅권을 완벽하게 피해낼 수는 없었다. "윽!" 지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으며 입가에 짙은 선혈이 흘렀다. "으…… 복청양, 다시 보자." 부러진 이를 뱉어낸 지마가 몸을 돌리더니 지하 통로로 뛰어내렸다. 그것은 전혀 의외의 동작이었다. 상대를 앞에 둔 상황에서 저렇게 무방비로 등을 돌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신의 힘을 다한 복청양의 일권이 지마의 등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이런…….' 복청양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주먹이 지마의 등에 작렬하려는 참이었다. 지마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가 설사 호신강기를 일으켜 뒤를 보호한다고 하더라도 막강한 권세에 얻어맞으면 등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 '아, 안 돼…….' 순간 복청양은 다급히 공력을 거두어 들였다. 자신의 손에 의해 한 생명이 죽는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전신에 기운이 빠지면서 초식을 전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펑! 형편없이 약해진 그의 주먹이 지마의 등을 강타했다. "으윽!"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난 것은 도리어 복청양이었다. 공력을 감소시킨 주먹으로 지마의 등을 후려치는 순간 호신강기에 의한 반탄력이 그를 물러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오른손이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프고 전신의 기혈이 끓어올랐다. "하하, 내가 뭐라던가. 사람을 죽이는 건 자네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지 않았나." 지마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복청양의 일권에 맞는 순간 그 힘에 떠밀리듯이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내 그의 몸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랬던가……?" 복청양의 입에 허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방금 지마가 일대 모험을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그대로 등을 무방비 상태로 내보이면서 지하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산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지마는 복청양의 허점을 찌르며 달아날 수 있었다. 말로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내걸고 도박을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지독하게 빠른 머리회전과 두둑한 배짱없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히 지마다운 행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복청양은 난감한 얼굴로 지마를 삼켜버린 지하의 구멍을 보고 있었다. 아래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이미 사라진 지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다. 복청양이 지마의 뒤를 쫓아야 할지를 아직 결정하기도 전이었다. 와장창! 문이 부서지며 두 명의 철궁위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마의 본거지를 기습한 철궁도는 이미 완강한 저지선을 돌파한 뒤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미처 안의 정경을 살펴보기도 전에 괴이한 권영이 어깨를 덮쳐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앗?" 비명은 덧없고 짧았다. 철궁위대 하나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권영에 어깨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강적이 안에 있음을 직감한 남은 하나가 다급히 몸을 뒤로 빼어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자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답답한 암경이 전신을 휘어감았다. "헛!" 그자는 다급히 쌍장을 뿌려 암경을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뒤로 훌훌 날아가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바닥에 쓰러진 철궁위대를 보며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린 복청양이 지하 통로 속으로 몸을 날렸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별수없이 혼자서 철궁위대를 다 상대해야 할 판이니 결국 지마를 쫓아가기로 한 것이다. 우르릉 복청양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암도가 닫히고 있었다. 잠시 뒤, 옷자락 퍼득이는 소리가 나더니 남궁격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하들을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가 분명한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남궁격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의 한 곳을 건드렸다. 우웅 방이 울었다. 방은 거센 진동을 일으키며 금방이라도 암도를 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암도는 열리지 않고 진동만 계속되었다. 남궁격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면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교활한 것! 암도를 폐쇄했구나." 분하다는 듯 바닥을 탕 구른 남궁격이 훌쩍 몸을 날렸다. 다른 통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텅 빈 방안에서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두 명의 철궁위대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둠이 짙기는 하지만 앞을 전혀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복청양은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백아아와 지마를 삼켜버린 암도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암도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세 갈래 길의 모양새는 똑같았고 세 방향에서 다 같이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모르겠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기관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나 다를 게 없는 복청양이다. 그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내는 걸 포기하고 무작정 가운데 통로로 몸을 날렸다. 얼마나 갔을까. 다시 세 갈래의 암도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아무런 특색이 없는 똑같은 것이었다. 복청양은 다시 가운데 길로 들어섰다. 그러기를 세 번. 복청양은 지하의 깊숙한 통로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어디로 가나 똑같은 세 갈래의 암로가 나타났으며 도무지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혹시 내가 갇힌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복청양은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관을 상대로는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그는 미로 속에 갇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었다. "흐흐흐……." 어디선가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마다!' 웃음소리가 귀에 익어 복청양은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흐흐, 자네는 길을 잃었네.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그 미로 속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을 걸세." "어디 있느냐?" 복청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음성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왼쪽, 혹은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해 도무지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마가 육합전성(六合轉聲)의 절기를 발휘하는 게 아니라 이 미로가 기묘한 공명을 일으키며 소리를 사방에서 울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흐흐…… 성질을 부린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그러니 잠자코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우선 왼쪽으로 가게." '미친놈.' 복청양은 극심한 분노로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복가장을 그 지경으로 만들고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덮어씌운 흉수를 눈앞에 두고 놓친 것도 분한데 이제는 오히려 흉수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지 않았는가. "지마, 어디에 있느냐. 나오너라!" 복청양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벽을 힘껏 후려쳤다. 그러자 벽에 세 치나 되는 장인(掌印)이 움푹 새겨지며 위에서 흙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그뿐, 그에게 돌아온 건 손목에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뿐이었다. "흐흐, 성질을 부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까." 어디선가 이쪽의 움직임을 환히 보고 있는 듯 지마의 자 신만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서 평생을 지내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게. 왼쪽으로 가게." '어쩔 수 없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손목의 통증이 복청양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이곳이 극히 불리한 장소임을 깨달았다. 만일 지마가 암습이라도 감행한다면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우선은 여기서 나가는 게 급선무다.' 마음을 가다듬은 복청양은 지마가 시키는 대로 왼쪽 길로 들어섰다. "그래야지.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군." 지마가 흡족한 듯 중얼거렸다. "다음엔 오른쪽이다. 실수없이 해라." 오른쪽, 가운데, 다시 왼쪽, 가운데, 왼쪽. 지마의 명령은 쉴새없이 들려왔고 복청양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찬바람이 점점 심해졌다. 얼마를 더 가자 암도는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지마의 안내가 필요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보였던 것이다. 미명의 찬란한 빛살이 산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복청양이 서 있는 곳은 작은 산의 중턱에 뚫린 동굴 앞이었다. 암도의 끝이 동굴로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을 펴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맑은 새벽 공기가 가슴속 깊이 들어오면서 그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산 특유의 수선스러움은 느껴지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닌 산짐승들이 내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복청양은 지마가 어딘가에 숨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의 도움은 감사하오." 복청양이 맑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오늘처럼 간단하게 내 손을 벗어날 수는 없을 거요."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날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쾌한 신법이었다. 복청양이 사라지고 잠시 뒤, 두 사람이 방금 그가 있었던 자리에 나타났다. 지마와 백아아였다. "복청양……." 지마가 복청양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중얼거렸다. "흐흐, 너는 하기 싫어도 우리를 도와야만 한다. 그것이 네가 가야 할 운명이다. 자고로 운명이란 의지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법."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나요?" 백아아가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지마의 입으로, 복가장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지마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백아아는 공연히 자기가 복청양을 속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지 않아도 마주님의 능력으로 단심백결회를 무너뜨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방법을 쓰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일세." 지마가 무거운 음성으로 백아아의 부족함을 지적했다. "지난날 우리 통천삼십삼마가 천하를 정복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를 아는가? 그 당시 우리 통천삼십삼마의 능력은 천하를 지배하고도 남았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우리가 단합하지 못하고 천품신성의 농간에 넘어간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세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게 가장 큰 실수였네. 그때 천하인들은 통천삼십삼마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질려 달아나기에 바빴으니까."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연관이 있나요?"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쉽지만 마음을 정복하는 건 어려운 일이네. 마주께서는 힘으로 천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민심을 얻을 것일세. 흐흐…… 천노살성이 그 일을 도와주게 되겠지." "저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일을 억지로 알려고 할 것 없네. 언젠가는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지마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백아아를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느릿느릿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가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네." 백아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지마의 뒤를 따랐다. 지금은 설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가 나설 시기가 아니었다. 지마의 말이 맞았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 * * 영화루. 졸린 눈을 비비며 영화루 앞을 비질하던 점소이는 느닷없이 나타난 흑의청년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시간에 이런 차림을 하고 나타나는 인물치고 좋은 사람은 없었다. 분명 뭔가 골치아픈 사단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흑의청년을 보는 점소이의 눈길이 영 곱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에게 물어볼 말이 있네." 흑의청년의 음성은 약간 뻣뻣한 감은 있었지만 정중했으며 조금은 피곤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 복금사라는 사람이 묵고 있지 않나? 이십 세쯤 되는 여자 손님인데?" "글쎄요……." 잠시 기억을 더듬던 점소이가 불필요하게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손님 말씀이시군요. 묵고 있었지요. 하지만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나갔다고?" 흑의청년의 신형이 휘청했다. 아마도 상당한 심적 타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점소이는 창백하게 변하는 흑의청년의 안색을 보며 갑자기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운 여자 손님과 이 청년이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중요한 용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언제 나갔는가?" "조금 전입니다. 그 손님은 저희 집에서 이틀을 묵으셨는데 일 각쯤 전에 어떤 노인이 와서 함께 나갔습니다. 숙박비를 다 계산하고 나가셨으니까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흑의청년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그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하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그거야 저같이 하찮은 것이 어찌 알겠습니까?" "하긴……." 흑의청년이 발길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이 술 취한 사람처럼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느낀 것은 점소이의 착각이었을까! '금사야…….' 복청양은 가슴 한구석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리로 냉기가 스며 들어옴을 느꼈다. 여기에 오면 동생을 만날 수 있다고 백아아가 그러지 않았던가. 복금사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고.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없다. 불과 일 각 차이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빠른 자들이군.' 복금사를 데리고 간 게 누구인지는 물어 보나마나였다. 아마도 지마와 한패거리일 테니까. 지하의 암로에서 빠져나온 지마는 그가 이리로 올 줄 짐작하고 서둘러 그녀를 빼돌린 것이다. '일 각이라면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서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 이 넓은 천지에 동서남북 어디를 헤매야 동생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어떻게 한다…….' 복청양은 별다른 생각없이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소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그것이 퉁퉁 불어터질 때까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버님을 구하려면 중원검보로 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마가 마련한 함정이다. 그들은 나를 이용해서 이번에는 중원검보를 치려는 것이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제 발로 어정어정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위험에 처한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퇴양난(進退兩難).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지마는 영리한 자다. 그자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차단했다. 그리고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자신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복청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떤 결심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는 너희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지마, 네가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 절대로!' 복청양은 시켜놓은 소면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음식점을 나왔다. 가을바람이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운 가을바람은 더위를 식혀줄 대상을 잃은 채 그대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음식점 앞에 서 있어야 할 복청양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 * * 남궁격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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