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3 - 3편 (3/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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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3 - 3편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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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패배감이 뼛속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되었나 보다…….' 모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건만 아까 보던 하늘이 아니었다.
저 하늘은 변함이 없건만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자는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멀리서 한 줄기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음……." 나직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신음을 흘린 사람은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의 곁에는 역시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두 명 더 있었는데 그들의 생김새가 신통하게도 닮아 있었다.
마치 쌍둥이를 보는 것 같다.
중원삼검(中原三劍).
이들이야말로 중원검보를 지탱하는 대들보가 아닌가! 그러나 명성이 자자한 중원삼검의 얼굴은 지금 지극히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모악이 당했군." 중원일검이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 일이군.
천노살성이 그렇게 강한가?" "아무래도 이제는 우리들 차례인가 보오.
천노살성을 맞을 준비를 합시다." 중원이검이 몸을 일으키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다소 긴장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중원삼검이라면 상대가 천노살성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미 두려워할 단계는 넘어선 것이다.
그때였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중원이검이 앞으로 쓰러졌다. "헉!" "아니!" 놀라 급히 뒤를 돌아본 중원일검의 시야에 한 무더기의 은침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은침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늘었으며 무서운 빠르기를 지니고 있었다.
암기의 명문이라는 사천당문도 이처럼 빠른 속도로 은침을 발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냐?" 다급히 소리지르며 중원일검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앞에 촘촘한 검막이 형성되었다.
그토록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던 은침들도 검막을 통과하지는 못하고 중간에서 격추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펑펑펑! 연달아 폭음이 들리며 화탄이 폭발했다.
화탄은 중원이검이 있었던 자리를 일시에 초토화시켜 버렸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낭패한 모습의 두 노인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중원일검과 중원삼검이었다.
그들은 가까스로 화탄을 피했지만 이미 은침에 맞은 중원이검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 이놈들……." 중원이검의 처참한 최후를 본 두 노인이 치를 떨 때였다. "핫!" 날카로운 기합소리를 내며 두 명의 흑의복면인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각기 한 자루씩의 도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중원삼검의 허리를 베어가고 있었다. "흥!" 중원삼검이 비교적 여유있게 두 명의 흑의복면인을 막아섰다.
그들의 기습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흑의복면인이 십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손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병장기를 쥐고 한 손에는 원통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끊임없이 암기를 발출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그다지 두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원통에서 발사되는 암기는 중원삼검의 힘으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신에 무수한 암기를 맞은 중원일검과 중원삼검이 차례로 쓰러졌고 그 앞에 흑의복면인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그들도 이번 싸움에서 두 사람의 희생자를 내었지만 중원삼검을 꺾은 대가로는 너무도 가벼운 것이었다. "가자." 무심한 눈길로 중원삼검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흑의복면인 하나가 말했다.
그러자 일단의 흑의복면인들이 빠르게 중원검보를 향해 질주했다.
그들의 수효는 어느새 이십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중원검보.
십방좌의 하나로 현 무림을 다스리고 있는 막강한 세력.
그 거대한 중원검보는 닥쳐오는 암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에는 두 명의 동자가 비로 길을 쓸고 있었다.
너무나 여유롭고 한가한 모습이었다.
닥쳐오는 혈풍이 이들만은 스치고 지나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돌연 한 가닥 수상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두 명의 동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들의 칠공에서 검은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살아나기는 틀린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일단의 흑의복면인들이 나타나더니 중원검보 안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흐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를 환영하는 모양이다." "어리석은 것들, 여기도 모용세가처럼 만들어 주마." 흑의복면인들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중원검보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아마도 중원검보가 생긴 이래 이처럼 많은 침입자들을 맞이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흑의복면인들의 수효는 어느새 삼십으로 불어나 있었으므로……. "와아!" 함성이 일어났다.
흑의복면인들이 짓쳐 들어오자 중원검보 안에서도 바쁜 움직임이 일어났다.
검을 든 백의인들이 안에서 몰려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서도 흑의복면인들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흐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군." 흑의복면인들은 여유있게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백의검수들을 주살하기 시작했다.
사실 흑의복면인들이 펼치고 있는 절기는 그다지 위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원통은 가히 공포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손을 흔들 때마다 원통에서 암기의 소나기가 쏟아졌고 그런 기습을 예상치 못한 중원검보의 검수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시체가 십여 구로 불어났다.
이어 중원검보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흑의복면인들이 불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원검보, 그 찬란한 이름이 바야흐로 무너져가는 순간이었다. "이놈들!"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려오더니 이어 전신에 화려한 금포를 입은 중년인이 훌훌 날아왔다.
거의 발이 땅에 닿는 것 같지 않은 신법.
웬만한 경공의 대가라도 쉽게 펼칠 수 없는 절묘한 신법이 아닌가! "금수근이다!" 흑의복면인 하나가 소리쳤다. "금수근, 너를 기다렸다." 두 명의 흑의복면인이 검을 들고 중년인을 덮쳐갔다.
그러나 검제 금수근은 그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흥, 가소로운 것들!" 번쩍 한 가닥 검광이 일었다.
그것이 사람이 펼치는 검초라면 너무도 화려하고 가공한 것이었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두 명의 흑의복면인이 멋도 모르고 금수근을 덮쳐가다가 피곤죽이 되어 거꾸러졌다. "흥, 겨우 이 정도의 실력으로 우리 중원검보를 넘봤단 말이냐?" 일검에 두 명의 흑의복면인을 쓰러뜨린 금수근은 의기양양하여 다른 자들을 베어갔다.
금수근의 뒤로 다시 검을 든 십여 명의 노인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은 중원삼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하얀 파도가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파도 앞에 기세당당하던 흑의복면인들은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무인지경을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드는 낫으로 풀을 베는 것 같기도 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안 되겠다.
암기를 발사해라!" 그 중 수좌로 보이는 흑의복면인이 소리치자 그때까지 두서없이 싸우던 흑의복면인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손에 든 원통을 일제히 금수근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흐흐…… 마지막이다." 흑의복면인이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그는 수십 개의 원통이 불을 뿜는 순간 천하의 금수근도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라도 이 원통의 집중포화를 견뎌내지는 못할 것이다. "큭!" "으윽!" 과연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정작 놀라 어깨를 심하게 떤 것은 흑의복면인이었다.
당연히 피를 토하고 쓰러졌어야 할 금수근은 멀쩡하고 자신의 수하들이 앞다투어 바닥에 뒹굴고 있지 않은가! "이, 이게……." 쓰러진 수하들의 등에는 시커먼 강전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철궁도다!" 그 놀란 외침이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어디선가 한 무더기의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윽!" "으악!" 흑의복면인들이 앞다투어 거꾸러졌다.
그들은 원래 기세좋게 중원검보로 쳐들어왔다.
약간의 저항은 예상했지만 이토록 조직적인 기습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놓고 광장 한복판에 몰려 있었다.
엄폐물이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화살의 밥이 되어 고혼이 되고 말았다. "와아!" 우렁찬 고함이 터져나왔다.
전각과 전각의 틈새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뛰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았던 곳에서 끊임없이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수효는 실로 엄청나서 순식간에 흑의복면인들을 십 배 능가했다. "앗! 함정이다.
물러서라!" 흑의복면인이 다급히 손을 흔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검수들의 포위망에 걸려 들었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것은 거대한 살육이었다.
사냥감을 포위망에 가두고 무자비하게 학살을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흑의복면인들은 가진 바 재간을 발휘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것은 무력한 손놀림에 지나지 않았다.
노한 검수들의 손속에 그들은 하나씩 유명을 달리했다.
불과 일 각도 지나지 않아 남은 것은 수좌로 보이는 흑의복면인 하나였다. "으…… 이런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니!" 연달아 세 명의 검수를 베어 넘긴 흑의복면인이 치를 떨었다.
그는 이제야 중원검보의 무서움을 깨달은 모양으로 상체를 끊임없이 흔들고 있었다. "비켜라!" 묵직한 음성과 함께 금수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검을 옆으로 비껴든 그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장처럼 위풍 당당했다. "감히 중원검보를 너희들의 놀이터쯤으로 생각하다니, 그 대가를 톡톡이 치르게 해주겠다." 금수근이 검을 곧게 세우고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도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되어야 할 흑의복면인은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 "금수근, 오늘은 비록 네가 이겼지만 다음에 보자." 흑의복면인이 훌쩍 몸을 날렸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그냥 보낼 금수근이 아니었다. "올 때는 네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외침과 함께 금수근이 몸을 날렸다.
그는 하얀 빛무리를 끌며 그대로 흑의복면인을 덮치고 있었다.
이기어검.
검에 몸을 실어 덮치는 이 수법이야말로 금수근이 평생을 기울여 이룩한 절기가 아닌가! "큭!" 답답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흑의복면인이 가슴을 움켜쥐고 신형을 흔들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뭉클뭉클 배어나왔다. "흐흐, 금수근……." 그러나 그자는 용케 쓰러지지 않고 금수근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걸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우리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흑의복면인의 말 속에 뭔가 숨은 뜻이 있음을 직감한 금수근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흑의복면인은 스르르 쓰러지고 있었다.
흑의복면인, 그는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원검보로 쳐들어온 난입자 중 마지막 하나가 죽은 것이었다. "흠……." 금수근이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참혹한 광경은 그가 보기에도 너무도 끔찍한 것이어서 고개가 절로 흔들어질 지경이었다. "대체 어느 놈들이……." "보주, 이들은 십마의 수하들입니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무궁수사 남궁격이 걸어나왔다.
그는 오늘의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다지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남궁격의 옆에는 또 한 사람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태양빛이었고 양쪽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 상당한 외가고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악홍진(岳弘震).
그야말로 십방좌의 하나인 악씨세가(岳氏世家)의 가주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악홍진과 금수근, 그리고 남궁격.
놀랍게도 십방좌 중 세 사람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이다. "십마라고? 이들이 정말로 십마의 수하란 말인가? 금수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큼 십마의 이름은 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습니다." 남궁격이 발끝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흑의복면인의 시체를 제끼며 말했다. "하지만 십마의 수하치고는 지나치게 약하군요.
적어도 십마 본인들이 올 줄 알았는데 이런 나약한 수하들만 보내다니, 지마가 설마 이들만으로 중원검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인지?" "그야 십마는 워낙 광망한 자들이니까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지." 악홍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어쨌든 준비해둔 힘의 삼분지 일도 쓰지 않고 이들을 막아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이것으로 끝이면 좋겠지만……." 남궁격은 말끝을 흐렸다.
악홍진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위인이 있는가 하면 그처럼 복잡하게 생각하는 인물도 있다.
그는 어쩐지 이 모든 일이 찜찜했다.
적어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악전을 각오했는데 일이 너무도 쉽게 끝나지 않았는가! 그게 마음에 걸렸다.
남궁격은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중원검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흑의청년의 모습이 잡혔다.
복청양이었다. * * * 술이 맑다.
술이 내뿜고 있는 향기는 언제나 좋았다.
그것은 사나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술에 취하여 세상 근심을 잊으려고, 그리고 다음에는 술의 마력에 이끌려서 자신도 모르게 취하도록 마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격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복청양의 마음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는 중원검보에 무수히 널려있던 시신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것은 모용세가나 제마옥에서 보았던 광경과 너무도 흡사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신음소리, 그리고 역겨운 피냄새.
오늘 싸움으로 죽어간 자들이 오십이 넘는다고 하던가!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한 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
과연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야만 그것이 살인인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살인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살인자인지도 모른다.' 복청양은 자신의 손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싫다.
평생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런 상황을 연출한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싫다.
그가 지금 술을 마시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대 덕분에 오늘 십마의 야욕은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을 거요." 쉴새없이 술을 마시고 있는 복청양을 보면서 남궁격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앞에 술잔을 받아두고 있었지만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은 지나치리만큼 창백했다. "그랬으면 좋겠소." 천노살성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살겁이 인다.
그것은 지마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오늘의 일은 그 계획을 역으로 찌른 것이었다.
천노살성을 미끼로 하여 십마를 끌어들이고 그들을 쳤으니.
그렇게 해서 멋진 승리를 거두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역시 너무도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할 거요?" 남궁격이 물었다. "일단은 아버님을 만나뵈야 하지 않겠소.
아버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잘 모셔 놓았소.
곧 안내해 주겠소." "고맙소." 복청양은 남궁격과 손을 잡을 때 약간은 그의 의도를 의심했다.
워낙 잔꾀가 많은 사람이라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까 저어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믿는 마음이 십분이었다. "팔통창절을 만난 다음에는 어찌할 거요?" "동생을 찾겠소." "그러고는?" "가능하면 아버님과 동생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갈 거요.
역시 내 체질에는 산이 알맞소.
이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서 싫소." 복청양은 후웅을 생각하고 있었다.
태행산으로 가 후웅과 같이 한평생을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한 가지 삶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천노살성의 이름을 들을 수 없겠군." "아마 그렇게 될 것이오." "지마를 찾아가 복수하지는 않을 생각이오?" "관심없소." 복청양의 대답은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관심이 없다니? 그럼 정말로 복수는 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렇소." "복가장을 그 지경으로 만든 지마인데? 당신의 가족들을 죽인 사람이란 말이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르는 법이오.
내가 복수를 한다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되겠소? 피는 이미 흘린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더 이상의 피는 필요치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오." "의외로군." "나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남궁격의 얼굴에 떠오른 비난의 표정을 재빨리 읽은 복청양이 물었다. "그렇소." "후후후…… 남자답지 않아도 좋소.
남자답다는 것이 사람을 죽이고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남자답기를 포기할 것이오.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소.
어떠한 명분으로도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없소.
그게 내 생각이오."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소?" "그건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복청양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소." "그게……?" 정말이냐고 물으려다 남궁격은 입을 다물었다.
복청양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여 도저히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난 모르겠소." 이윽고 남궁격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세상은 힘이 지배하오.
힘이 곧 정의란 말이오.
아무리 뜻이 올바르다 하여도 힘이 없다면 그것이 곧 불의요.
정의도 힘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오.
이번의 경우를 보시오.
십마가 아무리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더라도 힘이 없다면 그들을 응징할 방법이 없지 않소? 힘이 있었기에 그들의 야욕을 꺾을 수 있었던 거요." "힘은 물론 필요하오.
하지만 그 힘이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힘을 과시할 수 있소? 죽어야 할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오.
계집애 같은 인정에 이끌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주저한다면 언젠가는 그 사람의 손에 의하여 그대가 죽을 거요." "설사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오." 복청양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남궁격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했다. "아버님은 어디에 계시오? 난 아버님을 만나러 가겠소." "그게……." 남궁격도 따라 일어나며 말끝을 흐릴 때였다. "도주!" 밖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로 보아 금수근인 것 같았다. "보주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지요." 남궁격이 서둘러 옆으로 물러섰다.
아무리 그가 청룡이고 십방좌의 하나인 철궁도의 도주라도 금수근은 그보다 한참 선배이고 역시 십방좌였다.
지켜야 할 예의는 지켜야 한다.
문이 열리고 금수근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금수근을 보는 순간 남궁격은 일이 잘못 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넓은 이마에는 진땀까지 흘리고 있다.
그는 손에 한 장의 봉서를 쥐고 있었는데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주! 우리가 속았소!" 금수근이 다짜고짜 한 말이었다. "속다니요? 무슨……." 금수근의 얼굴을 보던 남궁격이 손을 뻗어 그가 쥐고 있던 봉서를 빼앗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나무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이런……." 봉서를 펼쳐 거기에 적힌 글을 읽은 남궁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전서구로 보내온 것이오." 남궁격이 질리는 것과 반비례해서 침착을 되찾은 금수근이 말했다. "악씨세가가 당했소.
유감스럽게도 악씨세가가 일단의 신비인들의 기습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소." "악씨세가가 당하다니…… 으…… 악씨세가가 당하다니……." 전신을 떨던 남궁격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우리가 당한 것이오.
그들은 우리가 중원검보에 힘을 모으고 있는 틈을 타서 엉뚱하게도 악씨세가를 공격했소.
이 중원검보에 쳐들어온 자들은 그저 눈속임이었을 뿐이오.
어쩐지 그들이 너무 약하다고 했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악씨세가가 무엇인가.
바로 십방좌의 하나가 아닌가.
그 십방좌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껏 천노살성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악행.
거기에 타격을 입으면서도 단심백결회가 흔들리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천노살성이 친 것은 외곽이고 십방좌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십방좌가 건재하는 한 단심백결회는 여전했다.
그 누구도 단심백결회의 위세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악씨세가가 무너졌다면 십방좌의 일각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 단심백결회는 천하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천하인들은 단심백결회를 손가락질하며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단심백결회의 위세에 눌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던 흑도의 거마들도 차츰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 움직일 환경이 조성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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