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3 - 5편 (5/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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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3 - 5편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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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불길은 나타날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너는 내게 십마를 잡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 그 약속을 지켜라." "네가 내게서 무엇을 알아내려고 하는지는 모르나 내 대답은 한 가지뿐이다.
난 아무 것도 모른다."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많은 게 생각나게 될 것이다." 남궁격이 냉랭하게 말했다. "묻겠다.
십마의 진정한 본거지는 어디냐? 그리고 십마를 뒤에서 조종하는 자는 누구냐? 그의 내력은 무엇이냐? 그리고 십마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이냐?" "모른다.
십마의 일을 왜 내게 묻느냐?" "그건 네가 십마의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십마의 명을 받아 교활한 속임수로 우리를 분산시켰고 그 틈을 이용하여 악씨세가를 쳤다.
너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 남궁격이 있는 한은 그렇게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후후, 남궁격.
너는 가장 영리한 척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어리석은 자다." "그래?" 남궁격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전신에 야차상(夜叉像)을 문신으로 새긴 장한이 앞으로 썩 나섰다.
그는 웃통을 벗어부치고 있었는데, 구릿빛 건장한 체격에 가슴에는 털이 숭숭 나 있어서 원숭이를 연상시켰으며 손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채찍을 들고 있었다. "모른다면 생각이 나게 해주지.
혹시라도 생각이 나거든 말해라." 남궁격이 뒤로 물러나더니 의자에 앉았다.
야차한(夜叉漢)이 성큼 복청양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얼굴에 온통 잔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몹시도 즐기는 것 같았다.
쐐액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채찍이 복청양의 몸에 감겼다. "으음……." 복청양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야차한의 채찍질은 너무도 매서운 것이었다.
단 한 번의 채찍질에 그의 옷이 갈라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휙휙 채찍은 계속하여 허공을 가르며 복청양의 살점을 뜯어냈다.
야차한의 채찍을 휘두르는 솜씨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그는 한 번 내리친 곳은 절대로 두 번 치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곳만 노리고 채찍을 휘둘렀으며 그때마다 복청양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왔다. "아아악!" 마침내 복청양이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은 어느새 혈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소용이 없었다.
산공독만 복용하지 않았더라도 공력을 운용하여 대항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못한 상태였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무공을 잃는 순간 그 즉시 폐인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촤악! 다시 한 번 채찍이 몸에 감겼다. "어억!" 복청양이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아무리 굳은 의지로 버틴다 해도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끝내는 의식을 잃은 것이다. "잠깐!" 남궁격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눈을 빛내며 복청양에게로 다가갔다.
복청양은 전신이 채찍에 뜯기고 피에 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깃덩이로 변해 있었다.
걸치고 있는 옷도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그 틈새로 비쭉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피에 젖은 한 권의 책자였다.
남궁격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복청양의 품에서 책자를 꺼내들었다. <천공검환록> 책자의 표지에는 선명한 글씨로 그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불과 여섯 장밖에 안 되는 작은 책자를 뒤적이는 남궁격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흥, 쓰레기로군." 남궁격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책을 다시 복청양의 품속에 쑤셔 넣고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물을 끼얹어라." "예." 야차한이 미리 준비해 둔 물을 들어 복청양의 몸에 끼얹었다. "으음……." 과연 물의 효과가 나타나는지 복청양이 신음소리를 흘리며 깨어났다.
그는 초점이 없는 눈을 들어 남궁격을 보았다.
그러나 사물의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이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어떠냐? 이제는 말할 기분이 들었느냐?" "난…… 난 모른다." "그래?" 남궁격이 다시 눈짓을 했다.
그러자 야차한이 손에 침을 뱉으며 다가섰다.
다시 한 번 그 무지막지한 채찍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폐허였다.
이곳이 그 찬란하던 악씨세가가 있었던 자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만큼 악씨세가는 철저하게 폐허로 변해 있었다.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는 폐허 사이로 무수한 시신이 보였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시신들이었다. "으음……." 악홍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뒤에는 그가 악씨세가를 나올 때 데리고 나왔던 이십여 명의 정예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가문의 참변 소식을 듣고 밤길을 도와 달린 지 사흘.
마침내 그들은 자신의 정든 본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폐허뿐이었다.
어떠한 수단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폐허. "누가, 누가 대체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악홍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차라리 절규였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는데 얼굴에 붉은 혈선이 흘렀다.
피눈물이었다. "으…… 누군지 이런 짓을 저지른 자를 만나기만 한다면 내 맹세코 그냥 두지 않겠다." "그냥 두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너무도 냉랭한 목소리.
도저히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악홍진은 흠칫 몸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가.
세 명의 괴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지극히 왜소한 노인이었는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는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하나는 태산처럼 거대한 거한으로 얼굴에 수염이 무성했다. "너, 너희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악홍진은 조금 전까지의 분노는 간데 없고 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날 알아보겠느냐?" 왜소한 노인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면서 말했다. "쇠마……." 악홍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오랜만이군, 악홍진.
너의 명이 너무 길었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쇠마…… 쾌마…… 게다가 패마까지……." 악홍진은 전신이 굵은 밧줄로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이 세 사람에게서 그가 받은 위압감은 지대한 것이었다. '으…… 이들이 설마 가지 않고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악홍진, 너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쇠마가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실수는 악씨세가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리로 달려온 것이다.
흐흐, 단순히 망한 꼴을 구경하러 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혼자 허겁지겁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하긴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계산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긴 하다만……." "쇠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한 짓이오?" "그렇다면 어쩔 테냐?" 쇠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연기도 나지 않는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고 있는 그의 모습은 봄날 양지녘에서 졸고 있는 촌노 같기도 하고 권태감에 찌든 노회한 너구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권태스러움이 악홍진에게 주는 무형의 압력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쇠마, 당신이 우리 악씨세가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짓을 한 거요?" 진땀을 흘리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어 악홍진이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쇠마의 대답도 자연 심드렁했다. "우리 십마가 단심백결회에 원한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악홍진, 너는 어떻게 죽고 싶으냐? 마지막으로 네게 자살할 기회를 주마.
시체라도 온전히 보존하고 싶거든 이 자리에서 네 손으로 천령개를 깨라." "휴!" 악홍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에 한 자루의 장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내가 무능한 가주였던 것은 인정하오.
그리고 나 혼자서는 당신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하나 난 무능한 인간인지는 모르지만 비겁한 인간은 아니오.
그리고 오늘 나의 원한은 단심백결회가 꼭 갚아주리라고 믿소." 악홍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십방좌의 한 사람으로서 천하의 주도권을 다투던 인물다운 당당함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흠, 너의 그 한마디는 처음으로 사내답다." 쇠마가 입에서 곰방대를 떼었다.
그도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권태로움도 간데 없었다.
쇠마의 전신에서 무서운 기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왜소한 몸은 더 이상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쇠마의 움직임에 따라 쾌마와 패마가 옆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그 한 동작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악홍진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에게 미안하구나.
너희는 기회를 봐서 달아나거라.
부디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주!" 뒤에 있던 악씨세가의 정예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우리는 가주와 함께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모자라면 같이 죽을 것이고, 다행히 우리의 힘이 닿는다면 저들을 베어 가솔들의 영전에 바칠 것입니다." "어리석은! 그래 봐야 희생자만 는다는 걸 모르느냐?" "가주, 악씨세가 사람들은 한 번도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주의 명령이라 하나 그 말만은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장한이 검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십여 명의 검수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눈에 진한 살기를 흘리며 앞에 있는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씨알은 있는 놈들이로군." "차앗!" 두 명의 검수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열여덟 명의 검수들이 일제히 발동하기 시작했다.
악씨세가가 자랑하는 절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흥!" 가벼운 코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한 가닥 백선이 움직였다.
백선은 무섭게 덮쳐오는 두 명의 검수 사이를 파고들었다. "억!" "윽!" 두 가닥의 비명이 앞다투어 들려왔다.
중인들이 놀라 눈을 부릅떴을 때 이미 움직임은 끝나 있었다.
쾌마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였는데 전혀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서 있는 위치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쾌마에게 대들었던 두 명의 검수는 이미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살기는 틀린 모습이었다.
단 일초로 두 명의 고수를 쓰러뜨린 쾌마의 솜씨는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이 한 동작은 전혀 힘을 들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쾌마의 검초는 언제나 단 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한 동작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의 검초가 먹혀 들어갈 때는 상대를 벨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가 외려 당하고 만다.
그러니까 간단해 보이는 이 한 동작에 쾌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 주춤했던 악씨세가의 검수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쾌마에게 덮쳐 들었다. "오옷!" 우렁찬 고함에 이어 무시무시한 권풍이 덮쳐왔다.
패마가 먼 거리에서 대력신왕권을 날려보낸 것이었다.
그의 권풍은 지극히 위력적이어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검수들을 덮쳐갔다.
일제히 발동하려던 검진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쾌마가 날렵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억!" "으윽!"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미처 진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패마의 패도적인 권풍에 휘말렸고 다시 쾌마의 매서운 검초가 번뜩이자 검수들은 너무도 무력하게 허물어졌다.
패마와 쾌마의 연수합격은 오랫동안 손을 맞춰온 것으로 너무도 적절하게 맞아떨어져 어떠한 저항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악씨세가의 검수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기만으로 십마 중 두 사람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아……." 악홍진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팔을 툭 꺾어 검을 한차례 후리더니 성큼성큼 쇠마에게로 다가갔다. "쇠마, 아마도 이제는 우리 차례인가 보오." "그렇군." 쇠마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기이한 푸른색을 띠더니 돌연 손가락을 뻗어 악홍진의 가슴을 찔러갔다.
쇠마의 신분이면 악홍진보다 일배분이 높은 것이었다.
당연히 무림의 선배로서 상대에게 삼초를 양보해야 할 것이나 쇠마는 처음부터 그런 번거로운 예의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천강지로군." 악홍진이 중얼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돌연 한 자나 더 길어진 것 같았다.
하얀 검기가 무지개처럼 일어나며 가슴을 찔러오는 쇠마의 손가락을 베어버리려고 했다. "검강!" 쇠마가 다급한 소리를 흘렸지만 손가락을 거두지는 않았다.
척 기이한 소리가 일어난다.
악홍진의 검과 쇠마의 손가락이 마치 아교를 칠해 놓은 것처럼 달라붙더니 이내 떨어졌다.
놀랍게도 검과 손가락이 마주 닿았는데도 쇠마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오히려 악홍진이 상체를 흔들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흠…… 너의 검강이 이성만 더 연성되었더라도 나의 손가락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쇠마가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던지면서 악홍진에게 덮쳐갔다.
그의 손이 회색으로 물들더니 급기야는 팔목까지 회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넓은 소매가 경기에 못 이겨 퍼득이다가 찢겨져 나갔다.
회회마라강.
쇠마가 자랑하는 절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악홍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긴 수염을 끌며 쇠마의 회회마라강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그의 검에서 하얀 기운이 둥근 고리가 되어 일어났다.
퍼펑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크윽!" 악홍진이 신음을 흘리며 연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했으며 전신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쇠마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한 듯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연속으로 삼 장을 쳐냈는데 그 일장 일장에는 한결같이 태산도 허물어뜨릴 듯한 사나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펑! 펑! 펑! 요란한 폭음이 폭죽 터지듯이 울려퍼지며 악홍진이 연속하여 후퇴했다.
그의 위맹한 외모는 간곳 없고 낭패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악홍진이 이를 악물었다. "으…… 쇠마, 어째서 너는 점점 강해진단 말이냐." 악홍진이 돌연 검을 버리며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태산 같고 바다 같은 강기가 일어나 쇠마를 덮쳐갔다.
그의 수염과 머리칼은 허공으로 뻣뻣하게 곤두서 마치 야차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쇠마는 조금도 꺼려 하는 기색이 없이 십이성의 회회마라강을 쏟아내고 있었다.
꽈르릉!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흙먼지가 일 장이나 허공으로 치솟아 잠시 모든 것을 가려 버렸다.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곳에 남은 것은 피범벅이 되어 있는 악홍진의 시체였다. "휴우!" 쇠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쾌마와 패마였다.
그들은 이미 악씨세가의 모든 고수들을 주살한 뒤였다.
단 둘이서 이십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주살하고도 조금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괜찮으십니까?" 쾌마가 쇠마의 창백한 안색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말게.
이자는 오히려 금룡보다도 못했어." 쇠마가 바닥에 쓰러진 악홍진의 시체를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로써 십방좌의 한자리가 무너진 셈이군." "그렇습니다." "단심백결회도 멀지 않았네.
십방좌가 무너지면 단심백결회도 끝이야.
그런데 천노살성은 어찌 되었나?" "듣자 하니 남궁격의 암수에 걸려 들어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남궁격이? 하긴……." 쇠마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천노살성을 죽게 해서는 안 되네.
그자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어." "염려 마십시오.
지마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지마라면 실수하지 않겠지." 쇠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새로운 사체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 * * 습기차고 음침한 수옥의 한구석에 하나의 물체가 놓여 있었다.
아니, 놓여 있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그는 분명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으되 사람 같지 않은 물체.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옷 밖으로 나온 신체는 잘 다져진 고깃덩이 같았으며 갈기갈기 찢어진 옷은 살갗에 착 달라붙어 피부와 구분이 되질 않는다.
그의 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얼굴뿐이었다.
다행히도 얼굴만은 악형을 모면한 것이다.
복청양이었다.
그는 남궁격의 모진 악형을 견뎌내고 이렇게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다.
죽은 것일까? 그러나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그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고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끄응!" 그의 입에서 사람의 소리 같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그처럼 처참한 몰골을 하고도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손이 움직이고 다리가 움직인다.
그리고는 마침내 전신이 움직여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불과 두 자 거리에 있는 물을 향해 힘들게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야 한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만 한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살아야 한다.
나 하나가 죽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금사를 찾아야만 한다.
금사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아버님과 약속했다.' 아버지 복후정의 얼굴이 떠오른다.
복후정은 그의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었다.
복후정의 마지막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아들이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믿고 있었으므로.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살아야만 했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동생을 만나야만 했다.
마침내 물에 닿았다.
복청양은 물속에 얼굴을 묻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물은 지극히 더러웠고 푸른 이끼가 덮여 있었다.
악취까지 진동했다.
그러나 복청양에게는 이제까지 마셨던 그 어떤 물보다도 달고 달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복청양의 물 마심이 끝났다.
그는 힘들게 얼굴을 들었는데 그 얼굴에는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았다.' 복청양은 몸을 돌려 벌렁 드러누웠다.
허공을 보는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져갔다. "나는 살았다.
후후, 아직 살아있다." 비록 수옥이고 전신은 엉망이었지만 그는 분명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다.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수옥 밖을 두 명의 흑의인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지극히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체나 다름없는 자를 지키자면 누구나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아직 멀었나?" 하나가 문득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아직도 한 시진이나 남았는 걸." 다른 자가 말을 받았다.
그도 역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제기랄! 시간이 지겹게도 안 가는군." "참아.
그래도 이 일은 편한 거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되잖아." "젠장, 나는 모르겠어.
여기를 지킬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어차피 시체나 다름없는 녀석인데." "윗사람들이 하는 일이야.
괜히 불평하다간 경을 칠 테니 조심하는 게 좋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이런 짓이나 하려고 중원검보에 들어온 것은 아니잖아!" "쉿!" 하나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경솔한 말은 삼가라는 뜻이다.
그러자 그자도 찔끔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두 장한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그때였다. "클클클, 지겹단 말이지?" "그럼 우리가 지겹지 않도록 해주지.
암, 지겨워하는 일을 해서야 되나?" "큭큭큭……." "누구냐?" 두 장한이 기대고 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들의 심장은 이미 멎어 있었으므로. "큭큭, 이건 숫제 허수아비로군." "아니지, 아냐.
이 녀석들의 재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이 어르신네의 실력이 워낙 고강해서야." "이것아, 네가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면 나는 그럼 뭐냐?" "너야 물론 내 하수지.
그러니 앞으로는 이 어르신네의 보따리나 열심히 들고 다니거라.
그럼 한 수 쓸 만한 재간을 배우게 될지 누가 또 아느냐." "클클, 네 녀석의 그 보잘것없는 재간을 배우느니 차라리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겠다." "어? 접시물에 빠져도 사람이 죽냐?" "이를 테면 그렇다 이 말이다." 수옥 앞에 어느새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고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슬금슬금 수옥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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