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옥은 단단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시퍼런 녹이 가득 슬어 있었다. 그러나 철문에 달려있는 어린애 주먹만한 자물통은 그다지 녹이 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새로 개비한 모양이었다. "잠겨 있는데?" 하나가 자물통을 비틀어 보더니 말했다. "그럼 잠겨 있지, 너 들어가기 좋으라고 활짝 열어 놓았겠느냐?" "비켜라. 이까짓 것쯤이야 이 어르신네의 철사장으로 박살을 내주마." "어? 이건 내가 먼저 맡았는데 왜 네가 손을 대느냐?" "먼저 손대는 사람이 제일이지, 그럼 이런 것에도 임자가 있단 말이냐?" "암암, 임자가 있고말고. 이건 내가 열 테니 너는 누가 오는지 망이나 잘 보거라." "싫다. 망은 네가 보고 문은 내가 연다." "아니, 이건 내 몫이다." 실랑이를 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썼다. 그러자 날카로운 장력이 쇳소리를 내며 일어났지만 그것은 자물통에 닿기도 전에 서로의 장력이 맞닿으면서 소멸되고 말았다. "이크!" "억!"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움츠렸다. 서로의 장력이 맞닿으면서 충격을 느낀 것이다. "이것아, 왜 방해를 하느냐?" "방해는 네가 했지, 내가 했느냐! 어서 비켜라." "잘한다. 그러다 문 하나 여는 데 하루 종일 걸리겠다." 또 하나가 불쑥 나서더니 일장을 갈겼다. 그러자 쩌르릉 쇳소리가 나면서 자물통이 맥없이 부서져 나갔다. 다른 넷은 그저 멍청히 보고만 있었다. "문이 열렸다." "그럼 들어가자." "누가 들어가느냐? 너냐, 나냐?" "그야 물론 나지." "아니다. 내가 간다. 너는 여기서 망을 봐라." "웃기지 마라. 망을 볼 위인은 내가 아니라 너다." "허, 같이 들어가면 될 것을 웬 시비냐?" 철거덩! 문이 열렸다. 곰팡이 냄새가 와락 밀려들었다. 수옥 안은 극히 어두웠으며 습기가 차고 심한 악취가 풍겼다. 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대번에 코를 움켜쥐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심한 어둠 속에서도 그들은 별달리 어려움을 겪는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망을 보았다. 그들은 연신 서로 다투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의깊게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기 있다!" 하나가 소리쳤다. "그런데 저 녀석 살아있는 거냐? 꼭 죽은 사람 같지 않느냐?" "그거야 가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냐? 네가 가봐라." "싫다. 왜 내가 가느냐! 네가 가라." "어? 언제는 먼저 못 가서 야단이더니 이제는 왜 꽁무니를 빼느냐?" "그거야 좋은 일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싶은 형님의 깊은 뜻이 아니겠느냐.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네가 언제부터 내 형님이 되었느냐? 이것이 밥을 굶더니 헛소리를 하는구나." "밥은 왜 굶느냐? 이래봬도 이 어르신네는 하루 다섯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그래서 이렇게 살이 뒤룩뒤룩 쪘구나?" "내가 살찌는 데 네가 뭐 보태준 거 있느냐. 부러우면 고이 부럽다고 해라. 그러면 내 살을 조금 떼서 나눠줄 용의도 있다." "세상에 부러운 게 다 얼어 죽었겠다. 그러나저러나 저 녀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서 확인하고 가자. 여긴 너무 냄새가 지독해서 이러다간 숨막혀 죽겠다." "그래, 서두르자." 두 사람이 어둠을 헤치며 조심조심 다가갔다. 복청양은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그 몰골이 영락없이 죽은 사람이었다. 전신은 피로 범벅이 되어서 시커먼 딱지가 앉아 있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누더기가 되었다. 이런 모습으로 아직도 살아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복청양의 가슴에 귀를 대본 천산일로가 환성을 터뜨렸다. "살아있다! 심장이 뛰어." "내가 뭐랬느냐? 이 녀석은 쉽게 죽을 명운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 네가 언제 그랬냐? 너는 이 녀석이 석 달 안에 죽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석 달도 못 넘길 거라고 한 건 누군데 그러느냐." "그래, 그래. 너 잘났다. 그러니 어서 이 녀석을 살리고 보자." 천산일로가 복청양을 일으켜 앉혔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복청양의 명문혈에 손을 대더니 한 가닥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의 진기는 뜨거운 양강지기를 담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복청양을 구하기 위해 우선 급한 대로 양강지기를 투입하는 것이다. "끄응!" 복청양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손과 발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았다, 살았어!" 환성이 터져나왔다. "그럼, 내가 뭐라더냐? 이 녀석은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이 녀석이 진기를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 이 말이다. 뭔가 단단히 고장이 난 것 같다." "그럼 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고장이 나야 정상이지,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어디 정상이냐? 잔말 말고 어서 이 녀석을 들쳐업기나 해라." "싫다! 왜 내가 업느냐? 네가 업어라." "잔소리 마라. 애당초 네가 시작한 일이 아니냐? 지금 그 녀석의 등에 손을 대고 있는 게 너냐, 나냐?" "나다." "그럼 네가 업는 게 옳지, 내가 업는 게 옳으냐?" "원, 제기랄! 그럴 때는 말을 반듯하게 하네." 천산일로가 마지못해 복청양을 들쳐업었다. 천산일로의 등에 업히자 복청양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천산일로는 건장한 청년 하나를 업고도 조금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서 가자. 여기에 조금만 더 있다간 숨막혀 죽겠다." "그건 네 사정이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 이 녀석을 업고 있는 게 네가 아니란 말이지? 빌어먹을 놈…… 어서 앞장이나 서라." "내가 빌어먹을 지경이 된다면 넌 굶어죽을 것이다." 두 노인이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고 실랑이를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외마디 고함소리가 나더니 펑,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이어 어이쿠, 하는 비명도 들려왔다. 욕지거리가 요란했다. "어이쿠! 밖에 누가 온 모양이다." "누가 오다니, 우리가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누가 온단 말이냐?" "잔말 말고 어서 가자. 이러다간 우리까지 이 녀석 신세가 되겠다." 두 노인이 나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번에 물을 훌쩍 건너뛰어 밖으로 나갔다. 흐린 달빛이 빛살을 뿌리고 있었다. 그 달빛을 받으며 세 노인이 삼재진(三才陣)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검수들이 빙 둘러서 있었는데 그 수효가 거의 삼십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아이구, 어디서 이렇게 많은 녀석들이 기어 나왔느냐?" 복청양을 업고 있는 천산일로가 소리쳤다. "이게 다 네녀석이 꾸물거린 덕분이다. 이제는 어찌하겠느냐. 힘으로 뚫고 나갈 작정이냐?" "나갈 수 있으면 나가야지. 그럼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참이냐?"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갈 수 있다면 여기가 중원검보가 아니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제 금수근이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한 표정으로 다섯 노인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창백한 얼굴의 남궁격이 버티고 있었다. "천노살성이 쓸모가 있다면 반드시 구하러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십마가 안 오고 웬 미치광이 같은 늙은이들이 오다니, 다소 의외로군." "어? 방금 우릴 보고 미치광이라고 했느냐?" "저 녀석 버르장머리가 없군. 위아래를 몰라보다니. 입을 꿰매 줘야겠다." "저 녀석 버릇 고치는 일은 네가 해라. 이 어르신네는 바빠서 먼저 가야겠다." "같이 가자, 같이 가!" 다섯 노인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옷자락 퍼득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이내 수많은 검수들에 의하여 가로막히고 말았다. "비켜라!" "흐흐, 우리를 막지 마라. 아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휙휙! 장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뻗어나갔다. 천산오조의 장력은 위맹하기 그지없어서 앞을 가로막던 검수들이 급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전열을 재정비하여 천산오조를 압박해 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그지없어서 천산오조의 위맹한 장력으로도 쉽사리 혈로를 뚫지 못했다. 난전이 벌어졌다. 천산오조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선불 맞은 호랑이처럼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이 살수를 펼쳤는데 그들의 손이 닿는 곳마다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검수들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계속 숫자가 불어나고 있었다. 중원검보의 고수들뿐만 아니라 여기에 와있던 철궁도의 고수들까지 합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법이군." 그들의 악전을 보고 있던 금수근이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뒷짐을 지고 있지 않았는데 천산오조의 위세에 어지간히 놀란 것 같았다. "저들이 바로 천산오조입니다. 천노살성의 사부이지요." 남궁격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수하들이 고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천산오조라고? 어디서 놀던 괴물들인지는 몰라도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소." "신비로운 인물들이지요. 하지만 저들의 능력을 보니 천노살성이 그토록 악명을 떨치는 것도 이상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다시 두 명의 검수가 쓰러졌다. 그러나 천산오조도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모두가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그 중 하나는 철궁위대의 강전에 어깨를 맞았다. 상처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위세를 떨치던 천산오조도 차츰 지쳐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이제는 보주님께서 나서실 차례인 듯싶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격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금수근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남궁격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검을 뽑아들며 앞으로 나섰다. "비켜라!" 그러자 검수 둘이 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자리를 내주었다. 금수근은 그 틈으로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어이구, 이제는 우두머리가 나섰군." "어쩌겠느냐? 여기서 마냥 싸울 참이냐?" "그럴 수야 없지. 이러다간 날이 새겠다. 어서 가거라." "그럼 여긴?" "내가 맡겠다!" 천산사로가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금수근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신법은 비조처럼 날렵한 것이었다. "대단하구나!" 금수근이 감탄을 터뜨리더니 팔을 힘차게 툭 꺾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막강한 검기가 뻗어나왔다. "어? 이 녀석 제법일세!" 천산사로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는 허공으로 솟구쳐 검기가 발 밑으로 흐르도록 한 뒤 연속으로 삼권을 쳐냈다. 그러자 흐릿한 권영이 하늘을 가리고 덮쳐왔다. 회현잠영권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천산사로가 전개하는 회현잠영권은 복청양의 것보다 더욱 위력이 있어 보였다. 검제와 천산사로는 순식간에 이십여 초를 교환하며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동안 세 노인이 혈로를 뚫었고 복청양을 업은 천산일로가 그 틈으로 달아났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달아나는 데만 신경을 써서 이내 포위망을 돌파할 것 같았다. "그렇게 쉽지는 않지." 남궁격이 중얼거리더니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소매 속에서 검은 빛줄기가 일어나 천산일로의 등판을 소리없이 엄습해 갔다. "비켜라, 위험하다!" 천산삼로가 다급히 소리지르며 검은 빛줄기를 막아섰다. 그는 급급히 두 손을 흔들며 막강한 장세를 펼쳤다. 아마도 이 수법으로 검은 빛줄기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검은 빛줄기는 그의 암경을 뚫고 그대로 날아와 박혔다. "으윽!" 비명이 터져나왔다. "셋째야!" 천산이로가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암전에 맞은 천산삼로는 그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가거라…… 지체하면 안 된다." "셋째야……." 달려들던 천산이로가 멈칫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물기가 반짝 빛을 낸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후후! 대단하구나, 남궁격." 화살에 맞은 천산삼로가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남궁격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사람처럼 강력한 장세를 뿌리고 있었다. "흥!" 그러나 달려드는 천산삼로를 보는 남궁격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의 소매에서 다시 한 줄기의 흑선이 흘러나왔다. 쐐액 흑선은 곧장 천산삼로가 펼치는 암경을 뚫고 들어가 그의 가슴에 박혔다. "크윽!" 천산삼로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남궁격을 주시하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우와아!"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금수근과 싸우고 있는 천산사로는 갖은 절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수근 역시 검제라고 불리는 검의 대가였다. 그의 일검일검은 천산사로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쉽게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천산사로가 유리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 사이 세 명의 노인은 포위망을 뚫고 있었다. "어서 가라! 여기는 내가 맡으마." 간신히 혈로가 열리자 천산오로가 소리쳤다. 그는 굳게 두 다리를 디디고 서서 연속으로 칠장을 갈겼는데 그 모습이 전신(戰神)처럼 위맹했다. 그러나 그의 옷은 이미 피범벅이었고 전신은 상처투성이라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오냐, 너만 믿는다." 복청양을 업은 천산일로와 천산이로가 훌쩍 담을 넘었다. 그들은 곧장 중원검보의 심장부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탈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비록 금수근과 남궁격은 안쪽에 묶여 있었지만 중원검보는 이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어디에나 고수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은 천산오조의 행로를 알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데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야…… 이거 끝이 없구나." 달려드는 중원검보의 검수들을 연속으로 쓰러뜨리며 천산이로가 비명을 질렀다. "그럼 중원검보가 뭐 어린애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았더냐?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혈로가 열릴 것이다." 과연 그 말처럼 앞에 높은 담이 보였다. 저것이 중원검보의 마지막 저지선이었다. 저 담만 넘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담을 넘자면 아무런 엄폐물도 없이 허공으로 몸을 노출시켜야만 했다. 그것은 수많은 검수들이 깔려있는 중원검보에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방향을 돌려 정문으로 돌파할 형편도 되지 못한다. "어떻게 하지?" 천산일로가 머뭇거렸다. "어떻게 하긴. 네가 먼저 담을 넘어라." "좋다." 천산일로가 결심을 하고 훌쩍 신형을 뽑아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수한 강전이 날아왔다. 사방에 매복해 있던 철궁위대가 강전을 쏘아보낸 것이다. "욱!" 천산일로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의 능력으로 담을 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강전을 막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복청양을 등에 업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자칫 잘못했다가는 등에 업은 복청양이 고슴도치가 될 판이었다. "하앗!" 그때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천산이로가 보조를 맞추어 같이 뛰어오르며 쌍장을 휘둘러댄 것이다. 그의 쌍장은 지극히 위력적이어서 그토록 강맹하게 날아오던 강전들이 맥없이 추락했다. 그러나 복청양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강전을 막아내느라 전력을 다한 것이 문제였다. 천산일로는 다행히 담 위에 올라설 수 있었지만 천산이로는 진기를 다 소비하고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둘째야!" 위에서 천산일로가 소리쳤다. "후후, 어서 가라. 그 녀석을 살리지 못하면 내 저승에 가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천산이로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무더기의 강전이 담 아래로 쏟아졌다. 그리고 강전의 결과를 살펴보지도 않고 일단의 검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천산이로는 이내 검수들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둘째야……." 천산일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복청양을 등에 업은 채 담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아래에는 매복이 없었다. "아우들아……." 천산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밤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것은 복청양을 구하는 일이었다. 다른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 안에서 죽어가고 있을 아우들도……. 제 22 장 회주(會主) 바람이 불어온다. 스산한 바람이었다. 바람 끝에 매달린 나뭇잎들이 마구 흔들리며 어수선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밝은 달이 걸려있던 하늘은 어느새 검은 구름으로 한 겹 덮여 있었다. 구름 사이로 아직은 달이 희미한 빛살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 빛살은 이내 사라지고 어두운 먹구름이 자리잡을 것이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어수선한 바람과 바람 끝에 실려오는 눅눅한 습기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차가운 가을비가 대지를 촉촉하게 적실 것이다. 그러면 가을은 더욱 깊어지고 머지않아 닥쳐올 겨울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겨울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작은 호수였다. 호수 위를 비추던 조각달이 사라진 지도 오래였다. 달빛이 드리워져 있을 때의 호수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달을 가려버린 지금은 황량하고 쓸쓸한 기운만이 감돌 뿐이다. 호숫가에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수수한 사두마차였다. 사두마차라면 의당 화려해야 할 것이다. 요란한 장식을 달고 뻑적지근한 위세를 떨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두마차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그 모양새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사두마차가 지나치게 평범하면 오히려 사람의 눈에 띄기 쉽다. 지금의 이 마차가 그랬다. 마부석에는 이십여 세쯤 되어보이는 청년이 앉아서 한가롭게 채찍을 흔들고 있었다. 청년은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이나 호숫가의 쓸쓸한 정경 따위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저 어서 이 무료한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아……." 가는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숨은 마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백아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호숫가에 서서 투명하게 떠오르고 있는 맑은 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가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 그녀의 가슴속을 들여다본다면 저 잔잔한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쉬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달도 없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을 뿐. 우수수 뒤에서 마른풀이 흔들렸다. 인기척이었다. 뒤에 나타난 사람은 기척을 굳이 숨기지 않으려는 듯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백아아가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이 수풀을 헤치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보기흉한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버석버석 마른풀을 밟으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가 그처럼 큰 발걸음 소리를 내는 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신이 피범벅이었으며 상당한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등에는 한 사람을 업고 있었다.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 지경인데 사람을 하나 업고 있으니 그가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르신네!" 백아아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녀가 앞에 이르기도 전에 등에 업은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아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땅에 눕혀진 것은 복청양이었다. 그는 죽은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었으며 안색은 지극히 창백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노인에 못지 않게 피투성이였으며 갈기갈기 찢어진 틈으로 보기에도 끔찍한 상처가 엿보였다. "어르신네……." 복청양과 노인을 번갈아 보는 백아아의 얼굴에는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죽은 것은 아닐세." 노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살아 있어. 보기보다는 명이 긴 놈이지.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닐세." 노인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부근에 있는 바위 위에 몸을 앉혔다. 몹시 지친 기색이었으며 그런 모습을 구태여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백아아는 말없이 복청양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의 하얀 손이 그의 맥문을 쥐었다. 노인의 말처럼 복청양의 맥은 가늘긴 했지만 분명히 뛰고 있었다. 의술에 깊은 조예가 없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복청양이 그다지 위태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심한 외상을 입었을 뿐이었으며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몸을 일으킨 백아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애쓰셨습니다, 어르신네." "후후…… 자네의 칭찬을 듣고자 한 일이 아닐세." 노인이 짧게 웃었다. 그는 앉아 있으면서도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기력이 쇠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른 어르신들은……?" 백아아는 다섯 노인이 복청양을 구하려고 중원검보로 들어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노인들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노인들이 복청양을 구해 오면 그를 인계 받으라는 지마의 명을 받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오지 못했네."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고 있는 백아아가 낮은 탄성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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