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도주가 적절하게 대처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천노살성이란 자가 우리 단심백결회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었을 것이오. 허영대사는 너무 노쇠해서 단심백결회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오. 아니, 산문에서만 있어온 허영대사가 이끌기에는 현재의 단심백결회가 너무 비대해졌다는 표현이 올바르겠지만." "칭찬을 듣고자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남궁격이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단심백결회가 무기력해졌다는 말은 저의 뜻과 부합됩니다. 보주님,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단심백결회를 머리없는 호랑이로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금수근이 남궁격을 빤히 보았다. 그 뜻에는 충분히 공감을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일대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남궁격이 잘라 말했다. "머리가 없으면 머리를 만들어야지요. 단심백결회에 회주가 존재하지 않은 게 벌써 이십오 년입니다. 보주님, 이십오 년은 몹시 긴 세월입니다. 아무리 의기로 뭉쳐진 단심백결회라지만 그 공백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머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머리를 만들자니? 그럼 단심백결회의 회주를 정하자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남궁격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대답이 나왔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회주를 정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합니다. 단심백결회는 이름만의 단심백결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로 뭉쳐서 작금의 위기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마의 집요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어쩌면 십마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와해될지도 모릅니다. 보주님, 지금 단심백결회가 무너진다면 천하의 질서는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이거야말로 십마에게 천하를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 불행한 사태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이건 단심백결회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느 한 사람의 사리사욕 때문만도 아닙니다. 천하인을 위해서, 오직 우리 단심백결회만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무림인들을 위해서 단심백결회는 제자리를 굳게 지켜야만 합니다." "도주의 말이 옳소." 남궁격의 열변에 감동되어서인가, 금수근의 얼굴도 점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뜻이 옳더라도 현실이 뒷받침이 되어주지 않으면 그 뜻을 펼칠 수가 없는 법이오. 단심백결회의 회주를 정하는 문제는 우리 단심백결회가 지난 이십오 년 동안 지니고 있던 숙제요. 그것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수가 있겠소?" "어렵더라도 만들어야지요. 안 되는 일이라면 되게 하면 됩니다." 남궁격이 금수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보주님, 만일 지금 회주를 뽑는다면 누가 회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금수근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 일은 지극히 민감한 문제였다. 어느 개인의 사견으로 거론될 일이 아니었다. "회주는 무공도 강해야 하겠지만 그 인품도 무시하지 못하오. 또한 일단 회주로 결정되면 모두가 수긍하고 따라야만 하는데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오. 아시다시피 강호인들은 은원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회주의 자리를 맡을 수 있는 인물을 지목하라면 허영대사가 적당하지 않겠소?" 허영대사(虛永大師)는 십방좌의 제일좌이며 소림방장의 막중한 지위에 있었다. 아마도 현재 무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꼽는다면 당연히 허영대사를 첫 손가락에 들 것이다. 그러니 금수근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남궁격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지요. 인품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허영대사야말로 회주가 되셔야 옳은 분이지요. 하지만 대사께서 단심백결회의 회주 자리에 오르실 요량이셨다면 이미 이십 년 전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 말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던지 금수근도 입을 다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제는 단심백결회도 달라져야만 합니다. 과거의 안이한 행태에서 벗어나 환골탈태하는 기분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십마의 도전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이 단심백결회 창립 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마의 도전은 과거 통천삼십삼마와 싸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통천삼십삼마는 세상에 노출되어 있었고 단심백결회는 그 힘이 감춰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십마는 차근차근 단심백결회를 압박해 들어오는데 반해 단심백결회 내에서는 아직도 십마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그들의 가공할 도전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보주님, 단심백결회는 새로운 회주를 맞이해야만 하며 그 회주는 이제까지 단심백결회를 이끌어 오던 사람과는 다른 젊고 강력한 인재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십마를 이길 수 있습니다." "동감이오." 단심백결회가 새로운 젊은 인재로 회주를 삼아야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묵인되어 온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남궁격의 주장을 금수근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회주는 이 몸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궁격이 섬전 같은 눈빛으로 금수근을 노려보았다. 그의 한마디는 마치 비수를 꽂는 것 같아서 금수근의 숨을 일순간이나마 멎게 만들었다. 사실 남궁격이 회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남궁격뿐만이 아니었다. 무림삼룡이 다 같이 회주 자리에 오르기를 기대하며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 역시 무림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과 직접 그 얘기를 듣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기에 금수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궁격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야망을 숨기기 마련이다. 영리한 사람은 그 경우가 더욱 심하여 남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도 자신은 부인하기 일쑤다. 그런데 남궁격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놓고 자신을 회주로 삼아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보주님께서는 이 몸이 회주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렇진 않소……." 금수근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어쩐지 남궁격 앞에서 자신이 자꾸만 축소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일 이 몸이 회주가 된다면 단심백결회는 그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구태의연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이 넘칠 것이며 씩씩한 기운이 감돌게 할 것입니다. 이 몸은 단심백결회를 그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힘으로 키워낼 자신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단심백결회는 지금 무림에서 가장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잠재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몸이 회주가 되면 그런 나태스러움은 말끔히 일소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십마의 도전을 일거에 물리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스럽지만 지금 십마와 맞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몸뿐입니다. 그건 보주님께서도 아마 인정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이오. 남궁 도주가 아니라면 누가 지마를 상대할 수 있겠소." 금수근은 점차 남궁격의 화술에 말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굵은 황촛불이 눈물을 흘리며 흔들렸다. 밖에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아마도 빗발이 거세지는 모양이었다. 폭우가 시작되는 징조다. 시간은 벌써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촛불은 여전히 그 밝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 몸을 도와주십시오, 보주님." 남궁격이 금수근을 똑바로 보았다. "도와달라니,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보주님이 힘이 없으면 누가 있겠습니까!" 남궁격이 가는 미소를 흘렸다. 금수근이 겸사의 말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의도를 아는 까닭이다. "곧 십방대동이 열릴 것입니다." "십방대동이?"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는지 입을 벌렸다. 그만큼 남궁격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십방대동(十方大同). 그것은 십방좌가 한 자리에 모이는 단심백결회 최고의 의결기관이었다. 무림에 중대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 십방대동이 개최된 것이 십 년 전이었다. "십방대동이 어떻게……?" "이번 십방대동의 목적은 단심백결회의 새로운 회주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남궁격이 금수근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마도 십방좌의 가장 많은 지지를 얻는 인물이 회주로 선출되겠지요. 보주님께서는 그런데 누가 회주감으로 지목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야……." 금수근은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도주를 포함한 무림삼룡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남궁격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십방좌는 차기 회주를 정하는 방법으로 무림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있는 칠대공적을 가장 많이 제거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회주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일종의 편법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십마가 모습을 나타낸 지금 그런 방법은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래서 십방좌의 지지를 가장 많이 얻는 인물로 결정하기로 내정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십방좌가 결정한 일이면 당연히 십방좌의 일인인 자신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막중한 일을 자신은 어째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 일은 극히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남궁격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 내포되어 있는 무서운 의미를 깨닫지 못할 만큼 금수근이 어리석지는 않았다. 은밀히 진행되었다는 이 일은 분명 남궁격 자신이 주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궁격의 세력은 이미 단심백결회 내에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남궁격은 그 사실을 금수근에게 은근히 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십방대동이 열리면 보주님께서도 당연히 십방좌로서 권리를 행사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보주님은 누구를 지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남궁격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대세는 이미 이 몸에게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보주님께서도 가급적이면 이 몸을 밀어주셨으면 합니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남궁격이 단호하게 말했다. "보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적룡 군성초는 비록 그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성품이 잔악하고 손속이 매워서 많은 인심을 얻고 있지 못합니다. 또한 적룡은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라는 것입니다." "하긴……." 아무리 일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나 어찌 멀쩡한 사내들이 여자의 수하로 들어가기를 원하겠는가. 군성초는 그 천성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십방대동이 열리면 군성초를 지지하는 곳은 화화궁 한 곳뿐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오." "그러면 남은 것은 이 몸과 금룡인 무당신검 장경신뿐입니다. 그럼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많은 지지를 얻어내리라고 생각되십니까?" "무당파는 당연히 금룡을 지지하겠지. 그리고 철궁도는 도주를 지지할 게 분명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무시하지 못할 게 소림사의 태도입니다. 소림과 무당은 예로부터 무림의 두 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소림과 무당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그 은원의 굴곡은 과거 무당파를 창건하신 장삼풍 조사 시절부터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그 이해관계는 일조일석에 해소될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이 단언하건대 소림사는 결코 무당파의 제자가 단심백결회의 회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허영대사께서는 실제로 이 몸에게 은밀히 지지의사를 표명해 오셨습니다." "허영대사가……?" 금수근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일 남궁격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화산파는 대대로 무당파와 사이가 좋았으니 아마도 금룡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씨세가는 이번 일로 이 몸에게 약간의 오해를 품고 있으니 장경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문파는 저를 지지할 것입니다. 다만 유동적인 게 개방인데……." 남궁격이 숨결을 가다듬었다. "개방은 아직 그 태도를 명확하게 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경신을 지지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 몸의 편도 아니지요. 눈치를 보고 있다고나 할까요. 대세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설사 개방이 장경신쪽으로 기운다고 하더라도 장경신을 지지하는 쪽은 십방좌 중 세 자리입니다. 그리고 네 자리는 저를 지지하지요. 물론 제가 노력하면 개방마저도 저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만약의 경우는 생각해야 하겠지요." "맞는 말이오." 만약의 경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낭패를 면키 어렵다. "이제 남은 것은 보주님뿐입니다." 남궁격이 금수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주님만 저를 지지해 주신다면 이 몸은 단심백결회의 회주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중원검보의 이익에도 크게 손해가 없는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남궁격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형세는 사대 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개방이 장경신에게로 기운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만일 개방이 남궁격을 지지해 준다면 중원검보의 힘은 필요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중원검보가 차기 회주를 결정하는 권한을 쥐게 되는 것이다. 금수근은 새삼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주님, 곧 결정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이 몸인지 금룡인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금룡의 힘으로는 절대로 십마를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금룡의 무공을 얕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금룡은 우리 무림삼룡 중에 가장 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힘만 가지고는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주님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알고 있소." "만일 보주님이 이 몸을 지지해 주신다면 장차 중원검보는 단심백결회 내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 될 것입니다. 약속드리지요. 이 남궁 모는 비록 나이는 적지만 한 번 입은 은혜를 저버리는 못난 위인은 아닙니다." "그건 말하나마나요. 내가 어찌 도주의 인품을 모르겠소." "그렇다면?" 남궁격의 눈이 빛을 내었다. "중원검보의 지지를 기대해도 좋습니까?" "그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아마도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궁격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긴 시간이었다. 이 한순간에 그의 야망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마침내 금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최종 결정은 십방대동의 흐름을 보아서 내릴 일이지만 일단은 우리 중원검보를 믿어도 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보주님." 격정에 비해서 남궁격은 음성은 작았다. 그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끝났다.' 얼마나 고대하던 단심백결회의 회주 자리인가! 그런데 그 자리가 마침내 그의 손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거의 확보했다고 믿었던 악씨세가의 지지가 한순간에 스러지자 남궁격이 느낀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동안 쌓아둔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설사 모든 일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십방좌 중 다섯 자리의 지지는 얻어낼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단심백결회,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남궁격은 눈시울이 와락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금수근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밖에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남궁격에게는 그 빗소리마저 축하의 갈채소리처럼 들렸다. "이제 보니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구려. 도주, 내게 술을 한 잔 따라주시오. 하하하……." 금수근의 웃음소리가 자꾸만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제 23 장 만독화원(萬毒花園) 이틀을 꼬박 내린 비는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점차 기세가 누그러지더니 급기야는 빗방울이 듬성듬성 떨어지는 정도가 되었다. 다각다각 비로 진창이 된 산길을 사두마차가 달려가고 있었다. 겨우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이었다. 사두마차가 지나가기에는 지나치게 좁아서 영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사두마차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 산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마도 마차를 모는 인물이 상당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마부석에는 권태로운 표정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청년은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도 그저 어린애 장난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산길을 통과하는 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침내 산길이 끝났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화려한 화원이었다. 온갖 종류의 이름모를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가을이고 비를 흠뻑 맞아서인지 꽃들은 더욱 더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청년은 화원 앞에서 마차를 세우더니 잠자코 앉아 있었다. 다 왔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내린 것은 백아아였다. 그녀는 눈이 부신 듯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리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듬성듬성 떨어지는 빗방울과 눈부신 햇살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산자락에 무지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지개는 아직은 흐렸고 그 색채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면 선명한 색채로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다. 무지개의 끝은 언제나 물에 닿아 있다고 하던가. "내리세요." 백아아가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어쩐지 초췌해 보였다. 청년은 말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복청양을 품에 안고 나왔다. 복청양은 전신에 하얀 천이 감겨져 있었으며 여전히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으로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무게가 상당히 나갈 것이나 청년은 별다른 어려움없이 복청양을 안고 있었다. "따라와요." 백아아는 화원가로 가서 몸을 세웠다. "무독옹 노선배님, 소녀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벌써 네가 온 줄 알고 있었다." 안에서 퉁명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난 너만 보면 재수가 없어진단 말이다. 그러잖아도 비가 와서 바빠 죽겠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 썩 꺼져라." 백아아의 얼굴에 가만히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지 무독옹만은 여전하다 여긴 것이었다. "노선배님! 소녀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사람이 자주 오는 곳이 아니다. 금년 들어 이 만독화원을 방문한 건 네가 유일하단 말이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찾아오면서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다?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소녀는 지마의 명을 받고 천노살성을 데리고 왔습니다." "뭐라고? 누가 누구의 명을 받았단 말이냐?" 백아아는 아차했다.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것이다. "소녀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지마의 부탁을 받고 천노살성을 데리고 왔습니다." "흠흠!" 안에서 만족스러운 코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지,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구나. 지마, 그 작자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이 넓은 천하에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분뿐이란 말이다." 무독옹이 목옥 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독옹은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으며 손에는 커다란 전지가위를 들고 있었다. 자신의 말마따나 꽃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만독화원을 사이에 두고 백아아를 건너다보았다. "그 녀석은 죽었느냐?" "아직 숨은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산송장 같구나." "아무리 위태로운 처지라고 해도 노선배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멀쩡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흠, 너는 제법 혓바닥이 매끄러워졌구나." 무독옹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입에 발린 칭찬이라는 걸 알지만 기분은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어디 한 번 보자. 그 녀석을 데리고 들어오너라." "저보고 이 만독화원을 통과하란 말씀이십니까?" "이것아, 괜히 내숭떨지 말거라. 네가 언제는 만독화원을 두려워 했더냐?" 무독옹은 지난번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때의 일을 생각한 백아아는 방긋 웃었다. 그때 복청양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무독옹의 며느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 늙은이가 그때의 일을 안다면 복공자를 돌봐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백아아는 뒤를 돌아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분을 내게 주어요." 청년이 즉각 복청양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백아아가 복청양을 업자 남자의 무게가 전신을 짓눌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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