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장차 그들이 그늘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날 천하는 고통으로 몸을 떨며 신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해 본들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천품신성이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지금까지 인자하기만 하던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훨훨 타오르는 정열의 불길이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일랑 잊어라. 그리고 가능하면 용서하거라. 용서는 너그러움이고 관용이다. 용서하는 일은 말과는 달리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해냄으로써 너는 한 단계 성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악을 용서하지는 말거라. 악은 선함이 약해지는 데서 파생한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악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악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복청양은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악에 대한 천품신성의 강한 증오심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과연 악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앞으로 너는 여기에 있으면서 내 일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십마의 준동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하는 일을 단심백결회에 맡겨둘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힘은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쓰는 방법을 모른다. 내가 너를 이리로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너는 비록 타의에 의해 십마에게 이용당하고는 있지만 본성이 착한 아이이다. 또한 너는 네가 생각하는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천품신성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십마와 단황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너뿐인지도 모른다." "제가 어찌……." 천품신성의 말에 복청양은 크게 당황했다. 이것은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아직은 모든 것을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때가 된다면 너는 천하를 위해서 극히 어려운 일을 해주어야만 한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 천품신성이 이번에는 만리추종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지금 내게는 많은 힘이 필요하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특히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지. 기왕에 여기에 왔으니 그대도 나를 위해 일을 해주지 않겠나?" "부려만 주신다면 당연히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 늙은 목숨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떼어 드릴 수 있습니다!" 만리추종이 감읍하여 소리쳤다. 사실 천품신성은 그의 젊은 시절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우상이 부탁을 해오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고맙군." 천품신성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천노살성이 내 일을 돕게 된다면 저들은 크게 당황하게 될 것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저들은 너를 이용하여 뭔가를 획책하고 있거든. 그런데 네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저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테지. 그리고 그 차질은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천품신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륜거에 몸을 기댔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많은 말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만리추종이 복청양에게 눈짓을 했다. 그만 물러가자는 뜻일 게다. 만리추종은 천품신성의 건강에 대해 많이 우려하고 있었다. 그 눈치를 챈 복청양이 몸을 일으키다가 잠시 주춤했다. "한 가지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천품신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복청양을 보았다. 복청양은 품속에 손을 넣어 한 권의 책을 꺼냈다. 그것은 그가 금노야에게서 받아 이제껏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전에 우연히 이 비급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차례 살펴보았지만 저의 자질이 부족하여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더군요.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쉽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십마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어디 보자." 천품신성이 손을 내밀어 책을 받아들었다. 그의 눈이 표지에 적혀있는 제목을 더듬었다. "천공검환록이라……."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맑고 깨끗한 것이었다. "흠…… 이거 오랜만에 보는군." "그 비급을 아십니까?" 복청양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이제껏 그 책이 중요한 비급인지 알고 간직해 왔었다. 그런데 천품신성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듯하지 않은가! "전에 본 적이 있지. 하지만 이 책에 관한 얘기라면 나보다도 만리추종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만리추종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역시 꽤나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천공검환록을 보자 두 고인이 이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는지 모를 일이었다. "천공검환록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요. 하지만 그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에 그대도 하나이고?" 만리추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자네는 이 책을 어디서 구했나?" 마지막의 질문은 복청양에게 한 것이었다. "우연히 어떤 사람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복청양은 이충개에게 쫓기다가 공동묘지에서 금노야를 만나 그를 도와주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동정화상과의 악전도 빼놓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동정화상이 칠대공적의 하나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좋은 일을 하였구나." 천품신성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리추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복청양을 보았다. 복청양의 이야기는 그가 복청양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는 천품신성이 복청양을 받아들인 후에도 그가 천노살성이라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청양의 심성이 그렇게 자상하다는 걸 알자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어디 그 책에 대한 설명을 해보게." 천품신성이 만리추종에게 말했다. "예…… 흠." 만리추종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자고로 무림인이라면 비급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지. 전대의 비급이라면 죽음을 불사하고 차지하려 드는 게 무림인의 속성이야.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공이 강해지기를 바라기 마련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 천공검환록은 다르다. 천공검환록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비급이나 이것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그것이 가짜란 말씀입니까?" 복청양이 가벼운 실망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렇지는 않다." 만리추종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천공검환록의 가치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이것은 무림에 유통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비급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공검환록이 무림인에게 가볍게 취급당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천공검환록은 삼백 년 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 명의 고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비급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대의 기인들이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천공검환록은 그 분량이 극히 적어 겨우 여섯 장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자에 불과했다. 처음 천공검환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백 년 전이었다. 천공검환록이 세상에 알려지자 무림인들은 예외없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목숨을 걸고 다투었다. 그 결과 귀중한 생명을 잃은 무림인들도 수백에 달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천공검환록을 손에 넣은 무림인은 크게 실망하고 그것을 휴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그 후 천공검환록은 무수한 필사본이 만들어져서 세상에 크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불과 여섯 장밖에 안 되는 소책자였으며 아무도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필사본을 만드는 일이 아주 쉬웠던 것이다. 결국 천공검환록은 웬만한 무가(武家)의 서고(書庫)에는 하나씩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책이 되었으며 시중의 서점에서도 별 어려움없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을 복청양이 몰랐던 것은 복가장에 천공검환록이 없어서이지, 그게 귀중한 비급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만리추종의 설명을 들은 복청양은 잠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설마 하니 금노야가 그처럼 가치없는 책을 생명을 구해준 보답이라며 줄지는 몰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금노야의 잘못은 아니었다. 무림의 사정에 어두운 금노야로서는 그것을 정말로 귀한 비급으로 생각하였을 것이 아닌가! "천공검환록이 그처럼 가치없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복청양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천공검환록이 전대의 고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게 사실이라면 그 가치는 남달라야만 한다. 그런데도 길가의 돌멩이처럼 취급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얘야, 그것은 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리추종의 말을 받은 것은 천품신성이었다. "보아 하니 이 책은 천공검환록의 진본인 것 같구나. 삼백 년 전, 세 분의 고인은 이 책을 세 권 만들어서 세상에 유통시켰다. 그 후 수많은 필사본이 나왔지만 진본은 사라지고 없었지. 그런데 네가 구한 것이 그 진본이란 말이다. 이 책은 이미 삼백 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 가치만으로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다른 필사본과 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다른 필사본들과 같다." 천품신성은 천공검환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천공검환록은 세 분의 고인이 저술한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술한 그분들도 이 책에 담겨있는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다. 그들은 다만 십 년간 깊은 산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단지 그 동안의 경험과 이론만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책에 담겨져 있는 무공은 한 번도 세상에 나온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이 천공검환록이 가치있는 이유이며 또 천공검환록이 가치를 상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겠습니다." "얘야, 이 이치는 까다로운 것 같아도 사실은 지극히 단순하다. 천공검환록은 원래 하나의 절초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파천일해(破天一解)라는 것으로 그 위력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파천일해가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그 위력은 아마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세 분 고인이 이 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파천일해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파천일해가 하나의 절초라기보다는 일종의 절진(絶陣)에 가깝다는 것이다." "절진이라고요?" "그렇다." 이번에는 만리추종이 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파천일해를 시전하려면 내공이 삼갑자에 이르는 초절정고수 셋이 필요하다. 그들이 힘을 합해야만 비로소 파천일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아라. 삼갑자에 이르는 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때는 그러한 초절정고수가 하나도 없었던 시절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설사 그런 고수가 존재한다고 해도 무공이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이미 천하제일고수라고 불릴 터인데 새삼스럽게 파천일해를 익힐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하지만 천공검환록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보다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초절정고수가 하나가 아니라 셋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자고로 무림이라는 곳은 이해관계가 크게 얽혀있는 곳이다. 그런데 세 명이나 되는 초절정고수를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한 시대에 세 명이나 되는 초절정고수가 태어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들이 마음을 합하여 하나의 절초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오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초절정고수라면 천하에 이미 적이 없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셋이 힘을 합하여 파천일해를 익히겠느냐." "아……." 그제야 복청양은 만리추종의 설명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만리추종의 말은 이 천공검환록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천공검환록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것이 다만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그림의 떡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 속의 떡이 아무리 맛이 있어 보여도 먹을 수 없는 이상 그것은 다만 감상의 의미밖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니냐. 그러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이 천공검환록을 버리게 되었고 수많은 필사본이 나도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천공검환록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천공검환록을 매만지며 천품신성이 말을 받았다. "여기에는 세 분 고인의 평생에 걸친 정화가 담겨져 있다. 그분들이 이 한 권의 책을 저술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세 분 고인 중의 한 분은 이 책이 완성되는 순간 너무 기뻐서 웃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세 분 고인의 정화가 담겨있는 책. 지극히 귀하면서도 그 진가를 알아주는 이가 없는 책. 그것이 천공검환록이었던 것이다. "비급이란 그 효용가치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천공검환록은 효용가치가 전혀 없다. 그래서 버려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이 책에 대한 미련은 버리도록 해라." 마지막으로 천공검환록을 품안에 갈무리하며 천품신성이 조용히 타일렀다. "알겠습니다." 복청양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결국은 천공검환록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만리추종은 유운애를 떠났다. 그는 천품신성과 밤을 새워 밀담을 나누었는데, 그것은 앞으로의 무림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러나 복청양은 유운애를 떠나지 못했다. 천품신성이 그가 가는 것을 만류한 것이다. * * * 숭산(崇山). 숭산은 무림인들에게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숭산에는 소실봉이 있기 때문이며 소실봉에는 소림사가 있는 까닭이다. 소림사. 천 년의 유구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또한 무림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 곳. 소림사의 역사가 곧 무림의 역사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아무튼 소림사에는 지금 작은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그러나 첫눈치고는 그 눈송이가 제법 탐스러웠다. 첫눈이 풍성하면 이듬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했던가. 그래서 농부들은 첫눈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며 미래를 점치지만, 농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림인들에게는 첫눈이란 그저 눈의 의미말고 다른 의미는 없다. 소림사도 그랬다. 어둠이 산자락에 가득 깔리고 있었다. 어둠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짙음을 더해간다. 산 아래서부터 시작된 어둠은 서서히 그 범위를 넓혀가며 바야흐로 숭산 전체를 온통 삼키는 중이었다. 그러나 산에 어둠이 내리건 말건 소림사는 그저 소림사였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거대한 도량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준비에 한 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사미승을 이끌고 바쁜 걸음을 치는 중년승려의 이마에는 겨울답지 않게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내일은 방장 스님께서 삼 년 만에 외부에 나가시는 날이다. 그러니 우리 소림사가 외부인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중년승려의 음성에는 일종의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소림사야말로 무림의 총본산이며 그 명성에 걸맞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자부심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현 소림방장인 허영대사는 단심백결회를 이끌고 있는 십방좌의 제일좌가 아닌가. 십방좌의 제일좌는 지극히 명예로운 자리였다. 아직 단심백결회의 회주 자리가 공석으로 있으니 십방좌의 제일좌야말로 사실상 무림맹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림사가 무림의 총본산으로 자리잡은 지 천여 년에 가깝지만 무림맹주의 지위에 오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소림사는 사실 그 찬란한 명성과는 달리 수많은 오욕과 고난을 겪어온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이야말로 소림사의 명성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중년승려의 민대머리가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작 소란의 중심이 되어야 할 방장실은 너무도 조용했다. 방장실 앞뜰에는 어린 동자승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었다. 동자승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런 복장으로도 그다지 춥지 않은 모양이었다. "얘야." 부르는 소리에 동자승은 눈을 떴다. 동자승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초라한 신발이었다. 그리고 그 신발의 끝에는 다소 험상궂게 보이는 승려의 얼굴이 있었다. 동자승이 놀라 급히 몸을 일으킨다. "오셨습니까?" "그래."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나한당의 수좌인 허수대사였다. 그는 손에 어린애 팔뚝 굵기의 선장을 들고 있었다. "방장 스님은 안에 계시느냐?" "그게……." 동자승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는 동자승의 태도가 수상쩍었던지 허수대사가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러느냐? 안에 계시지 않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동자승은 허영대사가 방장실에 있지 않은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것이, 소림의 승려라면 누구나 이 허수대사를 조금은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 이 시간에 안에 계시지를 않다니…… 그럼 대체 어디를 가셨단 말이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요." "모른다?" 허수대사의 굵은 눈썹이 다시 한 번 춤을 추었다. 그는 불쾌함을 감추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방장 스님이 가신 곳을 사미승인 네가 모른다면 대체 누가 안단 말이냐? 그러지 말고 바른 대로 고하여라!" "정말 저는 모릅니다요." 동자승의 얼굴은 이제 울상이 되었다. 허수대사의 질책에 약간은 겁을 먹은 듯이 보이기도 했다. "방장 스님은 일 각쯤 전에 혼자서 나가셨습니다. 제가 따라가려고 했지만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고,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방장 스님께서 말씀을 해주시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오지 말라는데 부득부득 따라갈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만 되었다. 말이 많구나." 동자승의 말이 길어질 듯하자 허수대사는 손을 홰홰 젓더니 몸을 돌렸다. 하얀 눈 위에 그의 선장이 깊은 자국을 남겼다. '모를 일이구나. 내일 하산을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은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대체 행방을 알리지도 않고 어디를 가셨단 말인가.' 허수대사가 알기로는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허영대사는 십방좌의 수좌라고는 하지만 내내 소림사에만 있으면서 단심백결회의 일에는 거의 관여를 하지 않았다. 어쩌다 중요한 안건이 있어 단심백결회에서 사람을 보내오면 그때그때 적절한 결정을 내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허영대사가 이번에 하산하기로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은 순전히 단심백결회에서 십 년 만에 십방대동을 개최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번 십방대동에서는 차기 회주를 선출한다고 하지 않는가. 도저히 십방좌의 수좌인 허영대사가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하산을 앞두고 정작 장본인은 사미승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은 점차 그 굵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말로 흠뻑진 눈이었다. 산 전체가 하얗게 물드는 것은 잠깐이었으며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두께를 더해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은백의 눈이 덮여있는 설원에서는 그 짙은 어둠도 전혀 맥을 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실봉(小實峯) 정상. 발 아래로 험준한 산악과 숲이 가로놓여 있고 그 밑으로는 소림사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소림사의 번잡스러움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한 침묵에 싸여 있었다.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 위에 한 노승이 걸터앉아 있었다. 수염이 하얗게 센 노승이었다. 눈썹마저도 온통 하얀데 그 하얀 눈썹이 거의 턱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두 눈은 조는 듯이 감고 있었다. 그러나 간혹 눈을 뜨면 주름 사이로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것만은 감출 길이 없다. 허영대사. 이 노승이야말로 당금 소림사를 짊어지고 있는 소림방장인 것이다. 허영대사는 눈을 반개한 채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는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약속된 시간이 다되어 가건만 왜 오지 않는 것인지……." 문득 허영대사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누가 장난을 친 것이란 말인가." 한 시진 전이었다. 허영대사는 한 장의 서찰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에 방장실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천여 명의 무승(武僧)이 기거하는 소림사가 아닌가. 나는 새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면 다소 과장이겠으나 아무튼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방장실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능력은 가히 초절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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