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믿어지지 않는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봉서의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다. 한 시진 후에 소실봉 정상에서 기다리겠으니 혼자서 나오라는 것이다. 봉서의 밑에는 보낸 사람의 서명조차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해도 좋을 봉서였다. 그러나 소림사 깊숙이 들어와 이런 봉서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무시해도 좋을 존재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허영대사가 순순히 봉서가 시키는 대로 소실봉 정상에 나온 것은 순전히 번잡스러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을 크게 벌여 여러 사람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감히 소림사까지 와서 야료를 부리겠느냐는 일종의 자신감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소실봉 정상에 와서 기다린 지 벌써 반 시진이나 지났건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무 경솔하게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허영대사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어깨 위에 쌓여있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나 허영대사는 일어나기만 했을 뿐 움직이지는 못했다. 언제 나타났음인지 일 장쯤 떨어진 곳에 한 흑의인이 서 있었다. '기이한 일이로다.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건만…….' 허영대사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가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데도 이처럼 기척없이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대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만일 저런 자가 불측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야말로 가벼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 사람은 전신에 검은 야행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얼굴도 검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손 역시 검은 천으로 둘둘 감고 있어서 신체 밖으로 나와있는 것은 두 눈뿐이었다. 그 눈은 맑고 순수했으며 사심이 없어 보였다. 또한 침착하기 그지없어서 허영대사와 눈길이 마주쳐도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아미타불." 허영대사가 우렁차게 불호를 외우며 두 손을 모았다. 그의 불호소리가 어찌나 웅장한지 나무 위에 쌓여있던 눈이 놀라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자 흑의인도 따라서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시주는 뉘시오?" 허영대사는 은연중에 두 손에 공력을 모으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침착하기 그지없어서 마치 산길을 가다가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했다. "대사님을 기다리게 하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흑의인의 음성은 의외로 젊었다.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기운찬 소리였다. 허영대사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스쳤다. '이토록 젊은 사람이었단 말인가?' "노납에게 봉서를 보낸 게 시주시오?" "그렇습니다." 흑의인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괴이한 일이오. 용건이 있다면 정식으로 청을 넣을 것이지 밤손님처럼 몰래 숨어 들어와서 봉서를 남긴 것은 무슨 까닭이며, 또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서 노납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이오?" "소생이 한 일이 결례가 된다는 것은 알지만 대사님께 긴요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부득이 했습니다." "긴요한 일이라……." 하기는 긴요하지 않다면 이처럼 구차한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주는 누구요?" "소생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이처럼 복면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흑의인의 말은 직설적이었지만 건방지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허영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바위에 몸을 앉혔다. "그래, 그 긴요한 이야기라는 게 대체 뭐요?" "천하무림의 안위에 관계된 일입니다." "천하무림이라……." 허영대사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감돌았다. 젊은 사람들은 가끔 광망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천하무림을 논하기에는 시주의 나이가 너무 젊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오?" "소생이 나이가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천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과 상관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흑의인의 음성은 엄숙하였으며 태도는 당당했다. 그것은 허영대사로 하여금 감탄사가 나오게 할 만한 일이었다. 허영대사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말이 맞소. 노납이 경솔한 말을 하였소." 젊은 사람 앞에서 솔직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 또한 소림방장다운 모습이었다. "그래 시주가 말하고자 하는, 천하무림의 안위에 관계된 일이 과연 무엇이오?" "대사께서는 내일 하산하실 예정이시지요?" "그렇소." 허영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산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단심백결회의 십방대동에 참가하기 위해서입니까?" "시주는 아는 것도 많구려. 바로 맞았소." "사실 소생은 대사께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십방대동에 참석하시기 전에 이 편지를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흑의인이 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품속에서 한 장의 봉서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보시면 압니다." "보면 안다…… 하긴 그렇겠지." 허영대사가 손을 뻗어 봉서를 받았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는 오른손을 가슴 앞에 세워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영대사가 봉서를 받아들자 흑의인이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그의 태도는 지극히 신중했는데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 보였다. 흑의인이 일정한 거리로 물러서자 허영대사는 경계를 풀고 봉서를 뜯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편지였다. 밤이었지만 설광이 은은히 떠오르고 있었고 허영대사의 안력도 어둠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어서 편지를 읽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허영대사의 안색이 점차 변했다. "이것은……." 무의식중에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수양이 깊기로 소문난 허영대사였다. 옆에서 벼락이 친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안할 그였지만 지금은 격동의 빛을 숨기지 못하였다. 대체 편지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데 허영대사가 이처럼 놀라워하는 건지……. 이윽고 편지 읽기를 마친 허영대사가 전신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이 편지에 적힌 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흑의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아마도 편지에 적힌 내용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오…… 아니, 이것은 놀라움의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오. 어찌 그분이 살아 계실 수 있다는 말이오……." "대사께서는 그 어른의 필적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편지는 그 어른이 친필로 쓰신 것이며 대사께서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소…… 노납은 분명 그분의 친필을 기억하고 있소. 그리고 이것이 그 어른의 친필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오. 하지만 이 놀라운 내용을 노납보고 믿으라는 말이오?" "믿고 안 믿고는 대사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흑의인의 음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허영대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도리어 이 노승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천하무림의 대국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대사께서 하셔야 할 몫입니다. 소생은 그 편지를 전해드렸으니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럼……." 흑의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대로 산을 떠나려는 것이다. "잠깐만……." 뒤에서 허영대사가 그의 발을 잡았다. "무슨 일이신지……?" 의아해 하던 흑의인이 돌연 헛바람을 삼켰다. 허영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느닷없이 주먹을 밀어왔던 것이다. 우우웅 공기가 가벼운 파동을 일으켰다. 허영대사가 펼친 것은 소림사의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백보신권(百步神拳)으로 거기에 대승범천신공(大乘凡天神功)의 기운을 더한 것이었다. 그의 권세는 웅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며 서서히 흑의인을 덮쳐 갔는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으나 흑의인으로 하여금 어떤 자세로도 피할 수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 흑의인이 대경하여 쌍장을 들어 다급히 허영대사의 권세를 막아냈다. 그것은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쾅! 우르릉 소실봉 전체가 흔들렸다. 암경의 여파에 못 이겨 사방 일 장 범위의 나무에 맺혀있던 눈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꺾여질 듯 마구 흔들렸으며 작은 바위들이 벌렁벌렁 뒤집어져 배를 허옇게 드러냈다. "으음……." 흑의인이 무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앞에는 깊숙한 발자국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허영대사 역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허영대사는 갑작스런 공격으로 선수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으며 승포자락이 찢어져 마구 펄럭이고 있었다. 그의 인자하던 얼굴은 극히 창백했으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여 일순간에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하!" 허영대사가 탁한 숨을 내뱉었다. "과연 대단하시오. 아직 젊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 나이에 그토록 심후한 공력을 쌓았다니…… 노납은 방금 구성의 공력을 주입했소." "운이 좋았던 것뿐이지요." 흑의인이 처음의 놀람을 감추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오. 그것은 결코 운이 아니오." 허영대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시주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오. 그분은 과연 걸출한 후인을 두셨구려." "대사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군오." 그제야 방금 허영대사의 일격이 자신을 시험하려 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흑의인이 말했다. "소생은 그 어른의 제자가 아닙니다. 다만 우연한 기회에 그 어른을 만나 일을 돕고 있는 것뿐이지요. 그럼." 흑의인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몸을 날려 이내 허영대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흑의인의 이 한 수 역시 허영대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잠시 흑의인이 서 있던 자리를 망연하게 보고 있던 허영대사가 불호를 외우며 두 손을 모았다. "그분의 후인이 아닌 데도 저러한 능력을 지닌 후기지수가 있다니…… 우리 같은 늙은 것들은 이제 물러나야 할 때가 된 모양이구나." 허영대사는 흑의인의 능력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다지 불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저러나 바야흐로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지려 할 때에 그분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시다니 천하를 위해선 이보다 더 큰 홍복이 없구나. 하지만 매번 그분의 힘을 빌려야 하다니…… 우리들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허영대사는 그 자리에 목상이 되어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함박눈이 그의 어깨에 가득 쌓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허영대사의 발 아래 엎드린 소림사는 아직도 조용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흑의인은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그의 몸놀림이 너무 빨라 눈이 어깨에 흔적을 남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다음은 개방이다.' 흑의인은 산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개방의 용두방주는 이미 단심백결회로 출발했을지 모른다. 십방대동이 시작되기 전에 그를 만나는 일이 가능할지 모르나 어쨌든 노력은 해보아야 한다.' 흑의인이 문득 걸음을 멈추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거추장스런 복면을 벗었다. 복면 아래 나타난 얼굴은 복청양이었다. * * * 청명한 하늘이었다. 겨울답지 않게 하늘은 투명하고 맑기 그지없었다. 점점 하얀 구름이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그리며 한가롭게 떠 있었다. 공기는 청량했으며 추위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이라기보다는 한창 때의 봄 날씨 같은 따사로움이 사방에 넘치고 있었다. 둥둥둥! 둔중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통을 벗어부친 건장한 체격의 대한이 자기 몸만큼이나 거대한 북채를 들고 대고(大鼓)를 두드리고 있었다. 대한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번들했으며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져 있었다. 둥둥둥! 북소리는 쉼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마도 저 북소리는 오늘밤까지 계속될 것이다. 십방대동이 끝날 때까지. 넓은 연무장(鍊武場)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걸친 사람들이었다. 백의를 걸친 무사도 있었고 도복을 걸친 도사도 있었다. 승려도 있었으며 여인도 있었다. 나이 어린 사람과 나이 많은 노인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형형한 안광을 내뿜고 있다는 것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봄바람처럼 따뜻한 공기라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다. 간간이 매서운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간다. 그래도 그들은 아무런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듯 기대를 담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줄잡아 수백 명은 되는 듯하다. 단심백결회가 생긴 이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었으며 이처럼 긴장된 순간도 없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오늘이 바로 단심백결회의 제이대 회주가 결정되는 날이기에. 십방대동이 개최되고 있는 것이다. 제 26 장 청룡금룡(靑龍金龍) 넓은 정청이었다. 대낮인데도 굵은 황촛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촛불은 사방에 모두 여덟 개가 있었으며 환히 빛을 뿌렸다. 정청 가득히 초향 특유의 냄새가 퍼진다. 정청 안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청에는 모두 열세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의자들. 그 중 열 개는 각각 다섯 개씩 두 줄로 마주보게 놓여 있었고, 나머지 세 개는 그보다 조금 떨어져 나란히 놓여 있었다. 넓은 정청 안에는 촛불만이 흐린 빛살을 던지고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가고 있었다. 열 개의 의자 한가운데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세 개의 향이 꽂힌 청동향로가 놓여 있었는데 향연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은 이제 거의 타서 그 불꽃이 스러지기 직전이었다. 잠시 후, 마침내 향이 마지막 연기를 내며 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정청 안쪽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맨 앞에 선 것은 눈썹을 턱까지 드리운 인자하게 생긴 노승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화려한 궁장을 걸친 여인이 뒤따랐고 다시 그 뒤로 사람들이 줄지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아홉이었는데 그 중에는 남궁격의 얼굴도 보였다. 맨 앞에 선 노승이 열 개의 의자 중 가장 상석에 몸을 앉혔다. 이어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빈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며 뭔가를 고대하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이 아홉 사람. 이들이야말로 단심백결회를 지도하고 있는 십방좌가 아니던가! 상석에 앉은 늙은 노승은 허영대사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궁장여인은 화화궁주였다. 화화궁주 옆에는 화산파(華山派)의 장문인인 진천창로(震天蒼老) 육등손(陸登孫)이 앉아 있었다. 진천창로의 옆에는 선인풍의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일신에 검소한 베옷을 걸치고 어딘지 탈속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취우선인(翠羽仙人). 그는 십방좌의 하나인 현황산동(玄黃山洞)의 대표였다. 취우선인은 십방좌 내에서 조금 특이한 존재였다. 다른 십방좌가 모두 일파를 대표하는 수령들인데 반해 취우선인은 대표할 만한 문파가 없는 것이다. 취우선인이 십방좌에 오른 것은 현황산동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의 덕망 때문이었다. 취우선인은 현 무림의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고 있었으며 세인들의 존경을 받아 무림의 대소사의 은원에 중재자로 나서고 있는 인물이었다. 다섯 자리의 말석에는 남궁격이 환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맞은편의 상석에 앉아있는 노도장은 무당파를 대표하는 무당장문인 소진도장(逍眞道長)이었다. 그는 지난번 모용세가에서 참변을 당한 소허도장과 더불어 무당삼소(武當三逍)라 불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소진도장의 옆에는 중원검보를 대표하는 검제 금수근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걸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개방의 용두방주인 무숙신개(無宿神 )였다. 무숙신개의 곁에는 우람한 체격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십방좌의 하나인 용호뇌권각(龍虎雷拳閣)의 각주(閣主)로, 추혼수(追魂手) 노강(魯强)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자리는 공석으로 비어 있었다. "아미타불……." 아홉 사람이 모두 착석하자 허영대사가 우렁찬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그의 음성은 너무나 거대해서 정청이 온통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지만 그 불호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미타불…… 십 년 만에 십방대동이 개최되는데 가장 먼저 불행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이오. 그 소식이 무엇인지는 여러분도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소이다." 허영대사는 울적한 얼굴로 비어있는 마지막 의자를 바라보았다. "악씨세가가 참변을 당한 소식은 여러분 모두 들었을 것이외다. 그리고 악씨세가의 참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간 악홍진 악가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 역시 알고 계실 것이외다." 악홍진의 죽음. 그것은 오늘 십방대동에 드리워져 있는 검은 그림자 중의 하나였다. "악씨세가는 우리 십방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오늘날 무참하게 무너졌으며, 아직 그 빈자리를 메우지 못했기에 부득이 악씨세가는 오늘 모임에 빠지게 되었소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취우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씨세가의 불운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서둘러 다른 인물로 십방좌를 채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취우선인의 말은 다른 십방좌들의 심정을 대표하는 것과 같았다. "악씨세가의 일은 지금 조사가 진행중에 있으며 곧 흉수가 밝혀지는 대로 응분의 조처가 있을 것이외다. 아무튼 중요한 십방대동이 열리는 때에 이러한 불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은 유감이오." "그럼, 오늘 모임은 여기 있는 아홉 사람이 하는 것인가요?" 화화궁주가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 중에 유일한 여자였다. "그렇소이다." 허영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방좌가 구방좌가 된 것이오만 이건 부득이한 일이오. 그럼 지금부터 십방대동을 시작하겠소이다. 모두들 이의는 없으시겠지요?" "그럽시다." 소진도장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덟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허영대사에게 집중되었다. 모두 같은 십방좌이지만 오늘 모임의 주재자는 사실상 허영대사였던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 안건의 주제는 단 한 가지요. 하지만 그 한 가지는 우리 단심백결회가 창건된 이래 가장 중요한 안건이라고 할 수 있소이다. 바로 단심백결회의 차기 회주를 결정하는 일이오." 잔뜩 긴장한 허영대사의 수염이 떨렸으며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단심백결회의 차기 회주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단심백결회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소이다. 그 중에는 극히 뛰어난 사람도 많으며 회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도 다수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에서 세 사람을 선별하였으며 오늘 그 세 사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는 여러분 모두가 이견이 없으실 줄로 아오." "누가 이견을 내세우겠어요? 무림삼룡이 단심백결회의 차기 회주감이라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는 일인데." 이번에도 끼여든 사람은 화화궁주였다. 번번이 허영대사의 말허리를 자르는 그녀였기에 몇몇 고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허영대사는 담담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맞았소이다, 궁주. 바로 무림삼룡을 가리키는 것이오. 하지만 이 자리에서 한 가지를 확인하고 넘어가야만 하오. 무림삼룡 외에 우리 단심백결회의 회주감으로 적당한 인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추천해 주시오." 허영대사가 잠시 말을 끊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두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만 감돌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모두들 이의가 없으신 줄 알겠소이다." 잠시 기다리던 허영대사가 확인을 하자 그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허영대사가 손을 뻗더니 이미 꺼져버린 청동향로에 새로운 향을 피웠다. 파란 향연이 허공으로 말려 올라간다. 그게 신호였을까. 삐이걱 정청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일남일녀. 가히 인중용(人中龍)과 인중봉(人中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뛰어난 기상을 지닌 두 젊은이였다. 무당신검 장경신. 날수염적 군성초. 바로 그들인 것이다. 두 사람은 좌중의 인물들에게 돌아가며 포권을 해보이고는 비어있는 아래쪽의 의자에 몸을 앉혔다. "어서 오게나." 허영대사가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보았다. "자네들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 그러자 장경신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겸사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군성초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허영대사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모두들 알고 계실 것이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으로 소개를 하게 한다 해서 잘못 될 것은 없겠지요." 허영대사의 눈길이 장경신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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