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그어졌다. 화화궁주와 노파는 각각 하나씩의 적을 더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약간의 여유가 있었으며 쉽게 패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쪽의 상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극히 나빴다. 교군 셋이 쓰러져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남은 소녀들도 전신이 상처투성이여서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 그녀들은 거의 괴멸 직전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연장해 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들이 쓰러지는 것은 경각이리라. "저것들이!" 군성초가 몸을 빼어 복면인들을 덮쳤다. 그녀는 염적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유성처럼 십여 장을 날아갔다. 끼이룩! 어디선가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염적이 돌연 커다란 새의 형상이 되어 복면인들을 덮쳐가고 있었다. 화조열사의 절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크윽!" "악!" 연달아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신처럼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서 있는 군성초의 곁에는 어느새 세 구의 시체가 더 늘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반신이 새카맣게 구워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그녀의 앞에는 다시 교군의 시체가 하나 더 불어나 있었다. "이놈들!" 군성초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으리라!" 군성초가 염적을 높이 들어 하늘을 찔렀다. 우웅 염적이 낮은 울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 주위로 붉은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류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싸고돌면서 점차 그 형태가 뚜렷해졌다. 아래에서부터 뭉게뭉게 일어나기 시작한 붉은 기류는 마침내 그녀의 전신을 감싸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가공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복면인들이 그녀의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복면에 가려진 표정은 읽을 길이 없지만 아마도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우우웅 염적이 더욱 짙은 울음을 흘린다. "차앗!" 그와 동시에 군성초의 입에서 매서운 기합이 터져나왔다. 파파파파팟 거대한 기운이 장내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정 뜨거운 열기였다. 군성초의 주위 반경 오 장 내외가 온통 붉은 열기로 휩싸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지독한지 마치 용광로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앗, 위험하다!" "피해라!"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복면인들이 다투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신형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붉은 기류에 휩싸여 휘청거렸다. "늦었다." 붉은 기류 속에서 군성초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붉은 기류가 가공할 기세로 사방으로 폭사되기 시작했다. "앗!" "으윽!" 여기저기서 다투어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윽고 붉은 기류가 사라지고 군성초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녀의 주위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아예 불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전신이 새카맣게 타 있었으며 그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진정 무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의 수단이 단 일초로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내다니……. 군성초의 얼굴이 극히 창백했다. 그녀는 신형을 휘청이고 있었는데 조금 피로해 보였다. 이 일초에 상당한 진력을 허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효과는 있었다. 용케 살아남은 복면인들도 감히 그녀에게 다시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던 것이다. "휴우!" 군성초가 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염적을 고쳐 잡았다. 그녀는 차가운 한광을 뿌리며 두려움에 질려있는 복면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누가 죽고 싶으냐?" 차가운 음성. 그러나 이제 그 음성이 주는 의미는 지대한 것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토록 사납게 달려들던 복면인들이 군성초가 보여준 무위에 질려버린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귀에 익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악!" 놀라 고개를 돌린 군성초는 노파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노파는 신형을 휘청이다가 서서히 옆으로 넘어졌는데 그 위로 다시 몇 개의 검이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미처 어떻게 손을 쓸 시간도 없었다. "할머니!" 군성초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그녀는 곧장 노파를 에워싼 복면인들을 뚫고 들어갔는데 복면인들은 그녀가 오는 것을 막지 않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무위에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군성초는 주위에 복면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데도 별다른 두려움없이 무릎을 꿇고 노파를 안아 들었다. "할머니!" 조금 전까지도 그토록 우세하던 노파가 아닌가! 설마 노파가 패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외침은 더욱 처절한 것이었다. "소궁주님……." 노파가 힘겹게 눈을 뜨며 초점없는 눈으로 군성초를 보았다. "어서 피하십시오. 암습자가 있습니다. 너무도 무서운……." 노파의 목이 뒤로 힘없이 꺾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숨을 거둔 것이다. "할머니!" 그토록 차갑기만 한 군성초의 눈에 한 방울 이슬 같은 것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노여움에 불타오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누구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이냐?" 그녀의 시선이 오른쪽 숲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파의 말이 아니라도 복면인들의 능력으로는 노파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아악!" 짤막한 비명, 그것은 바로 화화궁주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어머니!" 군성초가 노파를 버리고 몸을 날려 화화궁주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두 명의 복면인이 장검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비켜라!" 군성초가 앞으로 나가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쌍수를 좌우로 갈랐다. "억!" 군성초의 염적이 우측에 있는 자의 목젖을 꿰뚫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우수가 좌측에 있는 자의 배를 후려쳤다. 퍽 그자는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전혀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군성초가 재차 있을 암습에 대비하여 몸을 빙그르르 돌리는 순간 남은 복면인들이 일제히 숲속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그들은 나올 때도 빨랐지만 달아날 때는 더욱 빨랐다. 순식간에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교군과 소녀마저도 시체로 변해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군성초 하나뿐이었다. 휘이잉 삭막한 바람이 분다. 사방에 널려있는 것은 오직 시체, 시체의 산이다. 화화궁의 사람들은 화화궁주를 비롯하여 다 죽었고 복면인들도 이십여 구의 시체를 남기고 있었다. 군성초는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화화궁주에게로 다가갔다. 화화궁주는 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몸 아래로 흥건한 피가 고여 있었다. 한때 크나큰 명성을 누리던 화화궁주가 이토록 허망하게 숨을 거둔 것이다. "어머니……." 군성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까처럼 무릎을 꿇고 앉지도 않았다. 다만 천천히 몸을 돌려 우측의 숲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거기에 있느냐?" 나직한 한마디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록 나직하긴 했지만 그것은 지극한 분노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듣기만 해도 절로 공포에 몸을 떨게 할 힘이 실려 있었다. "하하하!" 숲속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에 실린 진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숲의 나뭇잎들이 마구 흔들렸다. "하하하, 화화궁은 허명만 높았지, 실상은 별게 없구나. 이 어르신네는 정말로 실망했다." 목소리는 늙은 사람의 것 같기도 하고 젊은 사람의 것 같기도 했다. 숲의 정면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전후좌우를 분별할 수 없게 웅웅거리며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도 했다. 아마도 상대는 육합전성의 절기를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냐, 그래." 군성초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오늘 너를 죽여 심장을 꺼내먹지 않는다면 다시는 해를 보지 않으리라!" 군성초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녀는 곧장 숲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 걸음은 느리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츰 빨라지더니 이윽고 숲 앞에 이르자 유성처럼 숲을 향해 덮쳐 들었다. 쐐액!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두 개의 암기가 덮쳐왔다. "흥!" 그러나 미리 대비가 되어있던 군성초는 염적을 휘둘러 암기를 격추해내며 여전히 숲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허공에 뜬 채로 암기를 격추해내는 솜씨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속도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쐐애액 다시 몇 개의 암기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군성초의 코웃음을 더욱 진하게 할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였단 말인가!" 군성초는 암기를 남김없이 격추시키며 숲속으로 날아들었다. 노파와 화화궁주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암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토록 무서운 암기가 어쩐 일인지 그녀의 앞에서는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다시 십여 개의 암기가 날아든다. "장난이 너무 심하구나." 군성초가 소리를 지르며 암기를 격추해낼 때였다. 그녀는 문득 그 암기 속에 뭔가 강렬한 기세가 숨어있는 것을 느꼈다. "앗!" 군성초는 앞으로 달려나가던 신형을 세우며 다급히 염적을 휘둘렀다. 그녀의 반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는 기세가 너무 빨랐고 몇 차례 날아온 암기의 힘을 과소평가 한 것이 잘못이었다. 암기는 소리없이 그녀의 엄밀한 수비벽을 뚫고 들어왔다. "저건?" 그녀가 본 것은 검은빛이었다. 가늘고 검은 죽음의 상징. 그것이 그녀를 향해 거침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무궁시!" 그녀의 염적과 검은빛이 부딪쳤다. 그녀는 진기가 갑자기 흐트러지면서 전신이 부르르 떨릴 만큼 강한 충격을 느꼈다. 무궁시에 실린 진력이 어찌나 엄청난지 하마터면 염적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다시 두 줄기의 검은빛이 그녀의 좌우로 날아들고 있었다. "아악!" 외마디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녀의 몸 두 곳에서 화려한 혈화(血花)가 피어나고 있었다. 혈화의 빛깔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 세상의 색채 같지 않았다. "으음!" 군성초가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가 쓰러진 곳은 바로 숲 앞이었다. 거의 숲에 이르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피를 뿌린 것이다. "흐흐흐!" 숲속에서 선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몇 개의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청의에 다소 창백한 인상의 청년과 복면을 한 사람들이었다. 무궁수사 남궁격, 그였다. "후후!" 남궁격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군성초를 바라보았다. "너는 자신을 너무 믿은 것이 실수였다. 겨우 그 정도의 얄팍한 재간을 제일인 줄 생각하다니……." 그는 숲속에서 몇 개의 암기를 날려보내 상대에게 얕보는 마음을 심어준 뒤, 마지막 순간에 무궁시를 날려 천하의 적룡을 쓰러뜨린 자신이 너무나 대견해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마라. 너는 죽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내 첩이 될 운명이기에.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화화궁도들의 죽음은 무당파의 짓인 것처럼 포장되어 장차 장경신을 잡는 덫으로 변할 것이다." 남궁격이 가볍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좌우에 있는 수하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서둘러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고 이 모든 일이 무당파의 소행인 것처럼 만든 뒤에 군성초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문득 남궁격은 뭔가 알 수 없는 팽팽한 기운이 자신을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 기운은 너무나 대단한 것이어서 마치 질긴 실로 그의 몸을 친친 동여매는 것 같았다. "대체 누가?" 경악하여 남궁격이 고개를 돌릴 때였다. 우웅 공기가 파동치기 시작했다. 공기뿐만이 아니었다. 숲이 흔들리고 하늘과 땅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압력이 남궁격을 항해 덮쳐왔다. 그것은 힘이었다. 이런 힘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고 땅이 일제히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천지가 일제히 순리를 거역하여 반역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대기의 모든 기운이 하나로 형상화되어 남궁격을 덮쳐왔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며 거기에 저항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으읏!" 남궁격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빼었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동작을 하기 위해 남궁격은 전 공력을 주입해야만 했다. 슈팟 거대한 힘 속에서 한 줄기 차가운 기운이 남궁격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느 틈엔가 하늘은 맑고 푸르른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땅은 여전히 단단했으며 대기는 싱그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남궁격이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그의 옷은 이미 걸레가 되어 있었으며 여러 곳에 검상을 입고 있었다. 다행히 검상은 그다지 깊지 않아서 생명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몸에 입은 검상보다도 남궁격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처절한 패배감이었다. 아니, 패배감을 넘어선 두려움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군성초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웃통을 벗어부친 구릿빛 체격의 중년인이었다. 아래에도 짧은 바지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검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뭉툭한 쇠붙이를 들고 있었다. 조금 특이한 모습의 중년인. 그러나 남궁격은 그를 보는 순간 태산보다도 더한 압박감을 느꼈다. "누…… 누구냐?" 간신히 한마디의 질문을 하면서 그는 혼신의 기운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의 전신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그것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일검을 피하다니 놀랍군." 중년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진정으로 감탄하는 것 같았다. "역시 청룡이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군. 하지만 네가 오늘 살아난 것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결코 너를 죽일 수 없어서는 아니다." 중년인이 잠시 말을 끊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군성초를 내려다보았다. "이 여인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나직이 말한 중년인이 등을 돌렸다. 상대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중년인은 서슴없이 그렇게 했다. 남궁격은 중년인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저자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무궁시. 지금까지 그에게 한 번도 실망을 안겨준 일이 없는 절대의 병기. 그걸 사용하면 저 거만한 자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더구나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피하지 못한다. 그런 확신이 드는 데도 남궁격은 웬일인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질긴 실로 온몸을 친친 동여맨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중년인이 몸을 숙여 군성초를 안아 들었다. 그는 축 늘어진 군성초를 안고 천천히 숲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그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궁격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태도를 보일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마침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아!" 중년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남궁격은 크게 신형을 휘청였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아예 백지장으로 변해 있었고 콩알만한 땀을 흘렸다. 그래도 그는 땀조차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게 누구인가? 정말로 무섭구나.' 남궁격은 단지 기도만으로 사람을 꼼짝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설사 누가 그 같은 말을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바로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이기에. '어쩌면 저자가 바로 십마를 뒤에서 조종하는 신비인일지도 모른다.' 남궁격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장경신이 목격했다는 사람, 저자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 만일 저자가 그라면, 저자가 그의 적이 틀림없다면 앞으로 전개될 싸움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한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신을 저미는 한기가 점차 사라지면서 남궁격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저자가 누구이든간에 나를 막지는 못한다. 천하의 그 누구라도 나의 앞길을 가로막게 두지는 않겠다. 절대로!' 남궁격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서야 그의 수하들도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궁격은 수하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모든 계획은 변함없이 진행될 것이다.' * * * 추혼수 노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무당파의 사람으로 보이는 중년도인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잖아도 심기가 불편하여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깊은 밤에 그를 찾아오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회주께서 찾으십니다." "회주가 나를?" 회주라면 새로 회주 자리에 오른 장경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경신은 아직 취임식은 거행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회주로서의 모든 직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중년도인이 허리를 숙였다. "회주가 이처럼 깊은 밤에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다더냐?" "그거야 빈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지금 즉시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괴이한 일이로군.' 노강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장경신은 단심백결회 내에서 아무런 지위도 맡고 있지 않았고 그는 십방좌의 일인이었다. 용건이 있으면 장경신이 그를 찾아올 일이지 오라 가라할 신분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아무리 십방좌라고 하나 회주의 명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알겠다. 앞장서거라." 노강이 방을 나서자 중년도인이 앞장섰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안내하고 있었는데 회주의 거처로 내정된 전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노강도 잘 모르는 후미진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여긴 회주의 거처가 아닌데!" 중년도인을 따라가며 노강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중년도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경비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십방대동의 뒤끝이라지만 천하의 단심백결회가 이처럼 경비가 허술하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회주를 만나면 이 일을 따져 봐야겠구나.' 노강은 내심 불만을 삭이며 중년도인의 뒤를 따랐다. "여깁니다." 마침내 후미진 곳에 있는 작은 별채 앞에서 중년도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별채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 지키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저 안에 회주가 계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중년도인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리라. '모를 일이로구나.' 노강은 가슴속에 가득 의문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방에는 굵은 촛불이 타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있다 가버린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있었던 흔적조차 없다. "아무도 없지 않느냐? 진정 이곳이 맞느냐?" 노강이 노성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문을 열려던 그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이 밖으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이건…….' 노강이 멈칫할 때였다. 쾅! 우르르르 쩌억 쩍! 콰쾅!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방바닥이 둘로 갈라졌다. 벽이 터져나가면서 하얀 검이 불쑥 쳐들어오고 있었다. 천장에서도 검을 든 검수가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서도 하얀 검끝이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엇?" 노강의 몸이 순간적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패도적인 권세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팔방낙뢰(八方落雷)의 절기를 펼친 것이다. 파밧 퍽! "음!" 묵직한 신음소리에 이어 별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얀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그리고 그 먼지를 뚫고 한 사람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전신에 피를 흘리고 있는 노강이었다. "으…… 이럴 수가……." 노강은 허공에 몸을 띄운 채로 폭삭 무너져내린 별채를 보고 있었다. 그를 암습했던 살수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 한둘은 분명히 그의 권세에 맞았다. 노강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믿지 못할 일이다. 회주가 나를 죽이려 하다니!' 노강은 문득 장경신의 온화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제 피가 저리도록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이 일은 반드시 규명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회주가 나를 암습한 것이 사실이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노강이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부상입은 몸을 돌보지도 않고 쏜살같이 안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 제3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