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 남궁격을 아프게 하는 건 그의 자존심에 입은 상처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까지 그는 지마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꼴이 되지 않았는가!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함정이 모두. "악가주는 어디 계십니까?" 당황한 남궁격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악홍진의 얼굴이었다. 그가 이런 급보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생각하나마나였다. "악가주는 지금 여기에 없소." 금수근이 고개를 저었다. "이 급보를 받고 악가주는 크게 노하였소. 그리고 이게 모두 도주의 실책이라고 하였소. 도주가 경솔하게 움직여 저들에게 허점을 보이고 만 것이오. 악가주는 장차 악씨세가의 환란이 수습되면 도주에게 이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소." 말을 전하는 금수근의 얼굴도 그다지 호의적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이 모든 일의 책임이 남궁격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복청양!" 남궁격이 문득 봉서를 와락 구기며 복청양을 노려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난…… 난 모르겠소." 복청양은 크게 당황했다. 그도 일이 이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번질지는 몰랐던 것이다. "모른다고? 흥, 그런 간사한 말로 이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남궁격이 복청양의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창백하던 그의 안색은 어느덧 붉어졌고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복청양! 이전부터 너의 행동이 수상쩍다고 생각했었다. 흥,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짓을 몽땅 부인하는 간교한 말에 내가 속아 넘어가다니…… 너는 지마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고 엉뚱하게 악씨세가를 공격하도록 한 게 아니냐? 이 모든 것이 너의 계략이 아니냐?" "그, 그렇지 않소. 그건 오해요!" "오해라고?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아느냐! 흥, 그렇지만 너는 잘못 생각했다. 네가 아무리 간교한 수작을 부렸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의 수중에 들어온 이상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내 너를 잡아 악가주에게 넘김으로써 오늘의 실수를 사죄하리라." "그건……." 변명을 하려던 복청양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남궁격의 의도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자는 일이 어렵게 되자 모든 책임을 내게 덮어씌워 곤란한 처지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간교한 자!' 남궁격이 이럴 줄은 몰랐다. 아니, 이자가 간교한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간과한 게 실수였다. 복청양은 금수근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단심백결회가 가장 미워하는 게 바로 천노살성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남궁격의 비호로 무사했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금수근이 그를 도와줄 리 만무했다. 오히려 금수근은 옆으로 이동하며 그의 퇴로를 봉쇄하고 있지 않은가! 금수근의 손이 등에 멘 장검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궁격도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매서운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좁은 방안은 두 사람의 절정고수가 흘리는 살기로 채워져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복청양은 가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피할 길이 없었다. '별수없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자.' 결심을 굳힌 복청양은 금수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우수를 흔들었다. 회현잠영권으로 금수근의 자세를 무너뜨리며 틈을 보아 빠져나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급한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어쩐 일인지 몸 안의 공력이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의 공력은 온데 간데가 없었고, 그의 주먹질은 그저 힘없는 손장난에 불과했다. 금수근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한 천노살성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일격이 이렇게 무기력하다니. '어떤 변수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금수근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철칙으로 지켜온 것 중에 하나였다. 아무리 허술해 보이는 일초라도 그 속에 무서운 노림수가 있는지 모른다. 금수근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며 두 손을 밀어올려 복청양의 일권에 마중해 나갔다. 퍽 "우욱!" 복청양이 신음을 지르며 주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는 어이없게도 벽까지 물러나 등을 호되게 부딪치고는 입에서 선혈을 뿜어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이 상당한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놀란 것은 오히려 금수근이었다. '이럴 수가…… 혹시나 해서 겨우 오성의 공력만을 주입했거늘.' 천하의 천노살성이 그의 오성 공력을 이기지 못해 내상을 입다니,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제 21 장 천산오조(天山五祖) 복청양은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공력을 다시 운용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 안에 공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복청양은 남궁격을 돌아보았고 그의 입가에 번지는 미묘한 웃음을 보았다. "하하하……." 남궁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복청양, 안됐지만 너의 몸 속에는 지금 공력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흥! 산공독(散功毒)을 복용하고도 공력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산공독이라고?" 복청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구나……." 복청양은 탁자에 얹혀있는 술을 돌아보았다. 아까 그는 혼자 술을 마셨고 남궁격은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그때는 별 생각없이 마셨던 것인데 설마 그 속에 남궁격이 술수를 부렸단 말인가! "남궁격, 비열하군." 창백하던 복청양의 얼굴이 빠르게 정상을 되찾았다. 그는 입가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으면서도 저처럼 웃을 수 있다는 건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제력일 것이다. "천노살성의 악명이 자자한데 그냥 보내줄 수야 없는 일이 아니냐." 남궁격이 서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이미 저항할 의지를 상실한 복청양의 혼혈을 짚었다. 비명도 없이 복청양이 쓰러졌다. "너무 쉽군." 복청양을 제압한 남궁격이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주, 그럼 도주는 이 모든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오?" 그제야 전후의 사정을 알게 된 금수근이 황당한 얼굴로 남궁격을 돌아보았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 몸은 천노살성을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데……." 남궁격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라도 이 모든 일을 미리 예측하고 암수를 썼다고 하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산공독이라면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꺼려 하는 물건이 아닌가! 철궁도 도주의 신분으로 산공독을 사용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떳떳하지가 못했다. "아무튼 이자를 잡았으니 다행입니다." 남궁격은 재빨리 어색한 처지를 흘려버렸다. "이자를 데려가지요. 물어봐야 할 게 많습니다." "알겠소." 수하를 부르러 나가는 금수근의 표정이 영 밝지 못했다. * * * 한기가 돈다. 뼈가 시릴 듯한 한기였다. 지독한 냉기가 뼛속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냉기는 몸 안으로 스며들어와 활개를 치며 자리를 잡는다. '춥다.' 복청양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면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어둠이 보인다. 빛살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분명히 빛이라고 불리는 것이 스며들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미약하여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습기가 느껴졌다. 그는 물 위에 누워 있었다. 아래에 물이 잘박하게 고여 그 위에 누워있는 것이다. 냉기는 그래서 더욱 몸을 저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 어디인가?' 복청양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다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남궁격의 암수에 걸려 사로잡힌 몸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고약하게 되었군.'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생명처럼 믿은 사람이 등을 돌렸다면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궁격은 그렇지 않았다. 그자는 언제든 배신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가 그 사실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특별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지독한 냉기에 몸이 얼어붙어 있을 뿐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고 어떤 제약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 지독한 냉기를 몰아내는 데는 그래도 진기를 운용하여 대항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암담한 한숨을 내쉬며 공력운용을 멈췄다. 사정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의 몸에는 여전히 한 올의 진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공력을 운용하려고 해도 텅 빈 독처럼 아무 것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언제나 장강대해처럼 몸 안을 돌고 있던 진기가 이 순간만은 그에게 반기를 들고 있었다. "틀렸군." 복청양은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뒤였고, 흐리긴 하지만 빛도 스며들고 있어서 사방의 경물을 살피는 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수옥(水獄)인 것 같았다. 그가 있는 곳은 둥근 수옥의 가장자리였다. 수옥의 중심부에는 깊은 물이 고여 있었고 물 위에는 시퍼런 이끼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고약하게 되었군."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전혀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태행산의 그 깊은 계곡만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복청양은 서서히 주위를 탐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응?' 문득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 깊은 수옥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허연 물체였다. '사람이다. 여기에 나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신기한 생각보다는 반가움이 먼저였다. 복청양은 물이 깊지 않은 곳을 골라 디뎌가며 그 허연 물체에게로 다가갔다. "이 보시오." 물체는 분명 사람이었으나 마치 죽은 것 같았다. 새우처럼 벽을 향해 웅크리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복청양의 부름에 꿈틀 반응하는 걸 보면……. "이 보십시오." 복청양이 다시 소리쳤다. "누군가……?" 귀를 기울여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사람의 음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는, 그래서 마치 시체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가는 목소리가 복청양에게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건……!' 복청양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아닌가! "아버님, 아버님이십니까?" "나보고 아버지라고? 넌 누구냐?" 허연 물체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허공을 보며 손을 휘젓고 있었다. "오오……." 복청양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물체는 분명히 복후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복후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던 아버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굽힐 줄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복후정은 쥐가 파먹은 것 같은 수염을 간신히 턱에 붙이고 있었으며 전신이 대나무처럼 말라 있었다. 하지만 복청양이 충격을 받은 건 그런 외모가 아니었다. 당연히 형형한 안광이 빛나고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복후정은 앞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복후정은 두 다리도 없었다.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자리를 누덕누덕한 옷자락이 가리고 있었다. 살아있으되 살아있다는 것이 결코 축복이 되지 못하는 짐승 같은 몰골. 그런 모습으로 복후정이 기운없이 팔로 허공을 휘젓고 있었던 것이다. "청양이냐? 정말 너냐?" "아버님!" 설사 복청양의 공력이 그대로라고 해도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복청양은 와락 달려들어 복후정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청양이구나. 정말로 청양이야……." 복후정의 앙상한 손가락이 곤충의 촉수처럼 복청양의 전신을 마구 더듬는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다시는 너를 못 볼 줄 알았는데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구나…… 청양아…… 청양아……." "아버님…… 아, 아버님……." 기구한 입장에서 만난 두 부자가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통곡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피보다도 진한 울음이었다. "그랬구나……." 복후정의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복후정은 오랜만에 만난 아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아들을 만난 직후부터 그에게서는 생기가 급격하게 빠져나가고 있었으며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복청양은 아버지의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고 있었다. 그전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복청양은 어쩐지 복후정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복후정의 보호자가 된 기분이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복후정은 복청양이 그 동안 겪은 일을 다 들은 후였다. 불과 삼 개월 전의 이야기였지만 그에게는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금사는 무사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버님." 복후정이 아들을 만나 가장 먼저 물은 것은 바로 딸의 안부였다. 그리고 딸이 무사하다는 얘기를 들은 직후부터 그는 말할 수 없이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리 된 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금사의 일이었다. 행여 그 아이가 나처럼 잘못 되었더라면 그 회한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그런데 금사가 무사하다니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축복이다." "아버님, 누가 아버님을 이리 만들었습니까?" 두 눈과 두 다리를 잃어 이제는 폐인이나 다름없게 된 복후정. 그의 모습에서는 지난날 그 영웅스런 풍모는 간데가 없었다. "누굴 것 같으냐?" "설마……." "그렇다." 복후정이 말했다. "모용천우, 그 사람이다. 그가 나의 다리를 자르고 눈을 파냈다. 생각하면 참으로 잔악한 짓이었지. 무인에게 공력을 파해한다는 것도 죽음보다 더한 것인데 거기에 더해 이렇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폐인으로 만들었으니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렇게 모질단 말이냐. 이 아비는 그 동안 모용천우를 많이 원망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구나." 복후정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천망회회라는 말을 아느냐? 하늘의 법이 어설픈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누구도 하늘이 정한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더냐. 이 아비는 그 동안 그 말의 뜻을 의심하였다. 하지만 모용천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천망회회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겠구나." "아버님……." "나는 더 이상 모용천우를 원망하지 않겠다. 생각해 보면 그도 불쌍한 피해자였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흉수는 따로 있습니다." "지마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래. 지마가 흉수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이미 다 끝난 일이 아니더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 누구도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사람을 죽일 줄 몰라서가 아니라 굳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마의 경우는 다르다. 복청양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를 잡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청양아." 복후정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예, 아버님." "너는 복수를 하고 싶으냐?" "그게……." "만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지금 이 순간부터 버려라. 복수는 부질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람이 사람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은 없다. 물론 지금은 지마가 원망스럽겠지만 그런 원망하는 마음마저 버려야만 한다. 그 사람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지 않았느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그 동안 지마 한 사람으로 인하여 흘린 피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 일을 어찌 지마 한 사람의 탓이라 하겠느냐?" 복후정이 아들을 타일렀다. "이 일은 삼십 년 전, 통천삼십삼마가 단심백결회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때 정말로 많은 피가 흘렀다. 사람들은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해야만 했는데 너무도 빨리 잊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 망각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삼십 년에 걸친 원한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복후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 아비도 단심백결회의 일원으로 통천삼십삼마를 잡는 일에 일조를 한 사람이다. 비록 그 역할은 미미했으나 그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일은 그때의 원한이 되살아난 것이다. 네가 이제 다시 복수의 칼을 든다면 너는 이 아비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원한은 원한을 낳는다. 비록 지금 잠시는 복수를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피의 대가를 또다시 치르게 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소자는 어리석어 아버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너는 알 것이다. 너는 착한 아이다. 이 아비는 그걸 알고 있다." 복후정이 손을 들었다. 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 손은 결국 기운없이 도로 내려오고 말았다. "너에게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금사를 찾아라. 그리고 그 아이를 지켜 주어라.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약속하겠습니다." "좋은 사람을 찾아 그 아이를 시집보내거라. 그리고 다른 평범한 여인들처럼 무림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어라." "그러겠습니다." "자고로 무를 익힌 사람이 무림에서 손을 떼는 것은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금사만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 아이가 더 이상 무림의 은원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안심하십시오, 아버님. 금사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키겠습니다." "너를 믿는다……." 복후정의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그의 숨결이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아버님……." 복청양은 아버지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질게 이어가던 목숨이 아들을 만난 순간 급격하게 생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너를 만나니 좋구나…… 너는 지금까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너를 믿는다……." "아, 아버님!" 복청양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복후정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숨을 거둔 것이다. 복청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행여라도 잘못 움직이면 아버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을 저어하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릎은 여전히 아버지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으며 그의 손은 여전히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죽은 사람 특유의 냉기가 흐르는 데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석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하루, 혹은 그 이상이 지났을지도 모르고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이 눅눅한 수옥 속에는 시간을 짐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복청양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옥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와 그를 끌어낼 때까지. * * * 남궁격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복청양을 보고 있었다. 복청양은 벽에 굵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그의 팔은 위로 향하여 있었으며 몸은 무겁게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런 두려움없이 남궁격을 응시하고 있었다. 깊고 깊은 눈이었다. 남궁격은 사람의 눈이 이토록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복청양의 눈은 깊은 동굴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동굴 속에는 아무런 빛도 없었다. 생을 향한 모든 의지가 꺾여버린 것 같았다. 아마도 복후정의 죽음 때문이리라. 남궁격은 수하에게서 이미 복후정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뒤였다. 그는 아들의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었는데 말할 수 없이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복후정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최후가 그토록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이 남궁격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지금은 산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남궁격은 복후정의 죽음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복후정은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것만 하더라도 그가 온정을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복청양!" 그래서 남궁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차가웠다.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켰다. 팔통창절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단 말이다. 이제는 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차례다." 그러자 복청양이 고개를 들어 남궁격을 보았다. 그의 눈에서 잠깐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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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의 우수는 여전히 삼절묵창으로 절기를 구사하며 허공에 뜬 은화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복청양은 하나는 허공에 띄운 채로 하나는 몸 가까이 붙여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